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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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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몬은 기원전 510년경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이자 투키디데스의 친척이었다. 그는 델로스 동맹의 주 지휘관으로서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며, 타소스 반란 진압, 키프로스 원정 등을 수행했다.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어 도편 추방되기도 했으나, 이후 아테네로 돌아와 스파르타와의 휴전을 성사시키고 키프로스 원정을 지휘하다 사망했다. 키몬은 군사적 재능과 외교적 수완을 통해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귀족적 성향과 반민주적인 국내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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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르나카, 키프로스에 있는 키몬 흉상
라르나카, 키프로스에 있는 키몬 흉상
사망기원전 450년 (약 59–60세)
출생지아테네
사망지키티온, 키프로스
아버지밀티아데스
어머니트라키아의 헤게시필레
자녀라케다이모니우스
올리우스
테살루스
키몬
밀티아데스
페이시아낙스
군사 정보
소속아테네
계급스트라테고스(장군)
참전 전투페르시아 전쟁
델로스 동맹 전쟁:
살라미스 해전
에우리메돈 전투
에이온 공성전
타소스 반란
키티온 공성전

2. 생애

키몬은 기원전 510년 아테네의 귀족 필라이다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키몬 콜레모스는 사두마차 경주로 고대 올림픽에서 세 번 우승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2] 아버지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였고, 어머니는 트라키아 왕 올로루스의 딸이자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친척인 헤게시필레였다.[3]

젊은 시절,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 원정 실패로 50 탈렌트의 벌금을 물게 되었으나, 이를 갚지 못하고 기원전 489년에 옥사했다. 키몬은 이 빚을 상속받았고, 부유한 칼리아스가 엘피니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빚을 갚아주면서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2][3][4]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5][6] 이후 알크메오니드 가문 출신 이소디케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의 외국 취향 이름은 페리클레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15][17]

살라미스 해전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은 키몬은,[7] 델로스 동맹의 주 지휘관이 되어 비잔티움에서 스파르타군을 몰아냈다. 스트리몬 강가의 아이온을 점령하고,[7] 스키로스의 해적들을 소탕했다.[2][8] 기원전 466년경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크게 격파하고, 암피폴리스라는 아테네 식민지를 건설했다.[7]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 원정과 타소스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463년 마케도니아 왕알렉산드로스 1세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페리클레스에게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얻었다.[1] 기원전 462년 스파르타에서 헬로트의 반란이 일어나자 스파르타 지원을 주장하여 중장보병 4,000명을 이끌고 갔으나, 냉대를 받고 추방당해 기원전 461년 도편 추방되었다.[9][10][11][12]

기원전 451년경 아테네로 돌아와 스파르타와 5년간 휴전 협정을 맺고,[27] 페르시아와 전쟁을 재개하여 키프로스 원정을 떠났다. 델로스 동맹의 삼단노선 200척을 이끌고 이집트 반란을 지원하고, 키프로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봉기를 지원했다.[18] 군사적 업적과 델로스 동맹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주변 성벽 확장, 공공도로, 공공정원, 그리고 많은 정치적 건물들을 건설하여 아테네 재건에 힘썼다.[13] 기원전 450년, 키프로스에서 키티온을 포위하던 중 사망했다.[14]

2. 1. 초기 생애와 가문

키몬은 기원전 510년 아테네의 귀족 가문인 필라이다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키몬 콜레모스는 사두마차 경주로 고대 올림픽에서 세 번 우승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2] 그의 아버지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였고, 어머니는 트라키아 왕 올로루스의 딸이자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친척인 헤게시필레였다.[3]

키몬이 젊었을 때,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 원정 실패로 아테네 국가에 배신죄로 고소되어 50 탈렌트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밀티아데스는 이 벌금을 낼 수 없어 감옥에 갇혔고, 기원전 489년에 옥사했다. 키몬은 이 빚을 상속받았고, 아버지의 시신을 장례 지내기 위해 형기를 일부 대신했다는 기록도 있다.[4] 그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복 누이 엘피니케를 돌봐야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부유한 칼리아스가 엘피니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키몬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제안했고, 키몬은 이를 수락했다.[2][3][4]

키몬은 젊은 시절 방탕하고 술을 즐기며 무뚝뚝하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아테네인보다는 스파르타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5][6] 엘피니케와 결혼했거나 모종의 관계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칼리아스와의 결혼 전 일이었거나 단순한 정치적 비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5]

이후 키몬은 알크메오니드 가문 출신 이소디케와 결혼하여 쌍둥이 아들 라케다이모니오스와 엘레우스, 그리고 아들 테살로스를 낳았다. 라케다이모니오스는 아테네의 지휘관이 되었고, 테살로스는 정치인이 되었다.[15] 키몬의 이러한 외국 취향의 자녀 이름들은 페리클레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17]

키몬, 칼리아스, 알크메온 가문은 모두 아테네의 대귀족 가문이었으며, 키몬이 관여한 두 번의 결혼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활약하여 아테네의 유력자가 된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항하기 위한 귀족 연합의 성격을 띠었다. 키몬은 귀족파 아리스테이데스의 도움을 받아 귀족 연합의 중심에 섰다.[16]

2. 2. 군사적 업적과 델로스 동맹

살라미스 해전에서 키몬은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7] 기원전 478년에서 476년 사이, 에게 해 주변의 많은 그리스 해상 도시들은 델로스에서 아리스티데스를 통해 아테네에 충성을 맹세하고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다. 키몬은 델로스 동맹의 주 지휘관이 되었으며,[7] 스트라테고스(strategos)로서 기원전 463년까지 동맹 작전의 대부분을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리스티데스와 함께 파우사니아스 휘하의 스파르타군을 비잔티움에서 몰아냈다.

키몬이 그리스 함대를 지휘하다.


키몬은 페르시아 장군 보게스로부터 스트리몬 강가의 아이온을 점령했다.[7] 아이온 포위전 이후 이 지역의 다른 해안 도시들은 도리스쿠스를 제외하고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또한 스키로스를 정복하고 그곳에 기반을 둔 해적들을 몰아냈다.[2][8]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신화적인 테세우스의 "뼈"를 아테네로 가져왔다. 이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 개의 헤르마 조각상이 아테네 주변에 세워졌다.[2]

기원전 466년경, 키몬은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키몬의 육상 및 해상 부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인들이 조종하는 200척의 페르시아 삼단노선 전체를 파괴하거나 포획했다. 그리고 그는 10,000명의 정착민과 함께 인근에 암피폴리스라는 아테네 식민지를 건설했다.[7] 리키아-팜필리아 국경에 있는 무역 도시 파셀리스를 포함하여 아테네의 많은 새로운 동맹국들이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키몬이 소아시아에서 에우리메돈 전투에서의 승리 후 동맹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를 협상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기원전 450년 그의 매형이 협상한 칼리아스 평화 조약이 때때로 키몬의 평화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키몬은 "전쟁이 요구하는 모든 자질에서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와 자신의 아버지 밀티아데스와 완전히 동등했다."[2][7]

2. 3.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 원정과 타소스 반란 진압

소아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후, 키몬은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로 원정을 떠나 그곳의 부족들을 제압하고 기원전 465년에서 기원전 463년 사이에 타소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타소스는 트라키아 내륙 지방과의 무역 경쟁, 특히 금광 소유권을 두고 델로스 동맹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함대는 타소스 함대를 격파하고 타소스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1] 이 과정에서 키몬은 타소스의 스테심브로토스의 적대감을 사게 되었다.

타소스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진으로 인해 무산되었다.[1]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63년에 키몬은 페리클레스 등에게 마케도니아 왕알렉산드로스 1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고소당했다.[1] 그러나 엘피니케의 주선 덕분인지 키몬은 무죄를 얻었다.[1]

2. 4. 뇌물 수수 혐의와 재판

타소스 반란 진압 후, 키몬은 마케도니아 왕알렉산드로스 1세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페리클레스에게 기소되었다.[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재판에서 페리클레스는 키몬에게 매우 온화한 태도를 보였고, 고발을 위해 한 번만 연설했다.[1] 키몬은 자신의 변론에서 이오니아테살리아의 부유한 왕국에 파견된 적이 없고, 오히려 검소함을 사랑했던 스파르타에 파견되었으며,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적에게서 얻은 전리품으로 아테네를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1] 결국 키몬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1]

2. 5. 스파르타 지원과 도편 추방

기원전 462년, 스파르타에서 헬로트의 반란이 일어나자, 키몬은 스파르타를 지원해야 한다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했다. 에피알테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경쟁자이므로 돕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키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9][10] 키몬은 중장보병 4,000명을 이끌고 이토메 산으로 가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그러나 아테네 군은 스파르타로부터 냉대와 의심을 받고 추방당했다.[11] 이 일로 키몬의 명성은 크게 떨어졌고, 기원전 461년 아테네에서 도편 추방되었다.[12]

도편 추방에 사용된 깨진 도자기 조각(도편) 투표 토큰. 지명된 인물은 페리클레스, 키몬, 아리스티데스이며, 각자 부칭이 적혀 있다(위에서 아래로).


키몬이 추방된 후, 에피알테스는 페리클레스의 지원을 받아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500인 평의회, 민회, 민중 법원으로 권력을 이양했다. 키몬의 친스파르타 정책과 페르시아와의 평화 시도는 뒤집혔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많은 도편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그리고 엘피니케도''"라는 악의적인 문구가 새겨진 것도 있다.

기원전 458년, 키몬은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싸우는 아테네를 돕기 위해 돌아가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25]

2. 6. 아테네 귀환과 페르시아 전쟁 재개

기원전 451년경, 키몬은 아테네로 돌아와 스파르타와 5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다.[27] 이후 페르시아 함대가 키프로스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키몬은 페르시아와 전쟁을 재개할 것을 주장하며 페리클레스의 지지를 얻었다. 키몬은 델로스 동맹의 삼단노선 200척을 이끌고 키프로스로 원정하여, 카리티미데스 제독 휘하의 함선 60척을 이집트 나일 삼각주에 있는 이나로스의 반란을 돕도록 파견했다. 그리고 남은 함선으로 키프로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봉기를 지원했다.[18]

2. 7. 아테네 재건 사업

키몬은 수많은 군사적 업적과 델로스 동맹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아테네 전역에 걸쳐 많은 건설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이 프로젝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아테네가 파괴된 후 재건하는 데 매우 필요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주변의 성벽 확장을 명령했으며, 공공도로, 공공정원, 그리고 많은 정치적 건물들을 건설했다.[13]

2. 8. 키프로스 원정과 죽음

기원전 450년, 키몬은 키프로스 남서부 해안에서 페니키아페르시아 제국의 요새인 키티온을 포위하던 중 사망했다.[14] 그의 죽음은 아테네 군에게 비밀로 유지되었고, 아테네 군은 키몬의 '지휘' 하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승리했다.[14] 키몬은 아테네에 묻혔고,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14]

3. 평가

키몬의 국내 정책은 일관되게 반민주적이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의 성공과 지속적인 영향력은 군사적 업적과 외교 정책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의 외교 정책은 두 가지 원칙에 기초했다. 즉,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아테네가 그리스의 지배적인 해상 강국이 되어야 하며, 스파르타가 지배적인 육상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첫 번째 원칙은 페르시아의 그리스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공격이 본질적으로 종식되도록 도왔고, 후자는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을 상당히 지연시켰을 것이다.[6]

4. 키몬과 관련된 인물

키몬은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와 트라키아 왕 오로로스의 딸 헤게시필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역사가 투키디데스와 친척 관계이다.[2][3][4]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 공략 실패로 50 타란톤의 벌금을 물게 되었으나, 이를 갚지 못하고 기원전 489년 옥사했다. 이 빚은 아들 키몬에게 넘어갔지만, 키몬 역시 갚을 능력이 없었다. 키몬의 누이 엘피니케는 키몬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부유한 칼리아스와 결혼했다.[2][3][4] 엘피니케는 키몬을 아버지처럼 옥사하게 할 수 없었기에 칼리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키몬은 알크메오니드 가문 출신의 이소디케와 결혼하여 쌍둥이 아들 라케다이모니오스와 엘레우스를 낳았고, 세 번째 아들 테살로스를 얻었다.[15] 라케다이모니오스는 아테네의 지휘관이 되었고, 테살로스는 정치인이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키몬을 뇌물 혐의로 기소했지만, 키몬은 자신은 스파르타를 본받아 검소하게 살았으며, 전리품으로 아테네를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변론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1]

Ἐφιάλτης|에피알테스grc는 키몬의 정적으로, 스파르타 지원에 반대하고 아테네 민주주의 개혁을 주도했다.[11][24][26] 헤일로타이 봉기 때 키몬은 에피알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파르타 원군을 이끌었으나, 아테네 군은 스파르타에 의해 쫓겨났고 키몬은 정치적 신용을 잃고 도편 추방되었다.[24]

4. 1. 밀티아데스

키몬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영웅 밀티아데스트라키아의 왕 오로로스의 딸 헤게시필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한, 역사가 투키디데스와 친척 관계이다.[2][3][4]

키몬이 젊었을 때,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파로스 섬 공략 실패로 국가에 대한 배신죄로 고소되어 50 타란톤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밀티아데스는 이를 지불할 수 없어 투옥되었고, 기원전 489년에 옥사했다. 벌금은 아들 키몬에게 승계되었지만, 그 역시 지불할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엘피니케라는 친누이를 아내로 두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반한 칼리아스라는 부유한 남자가 엘피니케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벌금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키몬은 거절했지만, 엘피니케는 키몬을 아버지처럼 옥사하게 할 수 없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15]

4. 2. 엘피니케

부유한 칼리아스는 키몬의 이복 누이 엘피니케와 결혼을 조건으로 키몬의 빚을 갚겠다고 제안했고, 키몬은 이에 동의했다.[2][3][4] 키몬은 엘피니케와 결혼했거나 다른 관계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엘피니케가 칼리아스와 결혼하기 전의 일이며, 단순한 정치적 비방일 수도 있다.[5]

4. 3. 칼리아스

칼리아스는 키몬의 누이 혹은 이복 누이인 엘피니케에게 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칼리아스는 엘피니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키몬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제안했고, 키몬은 이에 동의했다.[2][3][4] 엘피니케는 키몬을 아버지처럼 옥사하게 할 수 없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4. 4. 이소디케

키몬은 메가클레스의 손녀이자 알크메오니드 가문의 일원인 이소디케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 아이는 라케다이모니우스 (아테네의 지휘관이 됨)와 엘레우스라는 쌍둥이 아들이었다. 그들의 세 번째 아들은 테살루스(정치인이 됨)였다.[15]

4. 5. 라케다이모니오스, 엘레우스, 테살로스

키몬은 알크메오니드 가문 출신의 이소디케와 결혼하여 쌍둥이 아들 라케다이모니오스와 엘레우스를 낳았다. 라케다이모니오스는 아테네의 지휘관이 되었고, 세 번째 아들 테살로스는 정치인이 되었다.[15] 라케다이모니오스는 라케다이몬인, 엘레우스는 엘리스인, 테살로스는 테살리아인을 의미하는데, 키몬의 이러한 외국 취향은 페리클레스에게 비판받았다.[17]

4. 6.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키몬을 기소했다.[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재판에서 페리클레스는 키몬에게 매우 온화했고, 고발을 위해 한 번만 연설했다.[1] 키몬은 자신의 변론에서 이오니아나 테살리아의 부유한 왕국에 파견된 적이 없고, 오히려 검소함을 사랑했던 스파르타에 파견되었으며,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적에게서 얻은 전리품으로 아테네를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1] 결국 키몬은 무죄로 풀려났다.[1]

4. 7. 에피알테스

Ἐφιάλτης|에피알테스grc는 키몬의 정적으로, 스파르타 지원에 반대하고 아테네 민주주의 개혁을 주도했다.[11][24][26] 키몬이 스파르타를 지원하려 할 때, 에피알테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경쟁자이므로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주장했다.[11] 헤일로타이 봉기 때 키몬은 에피알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파르타 원군을 이끌었으나, 아테네 군은 스파르타에 의해 쫓겨났고 키몬은 정치적 신용을 잃고 도편 추방되었다.[24] 에피알테스는 페리클레스와 협력하여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민회로 권력을 이전하는 민주화를 추진했다.[26]

5. 키몬의 업적

살라미스 해전에서 키몬은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7] 기원전 478년에서 476년 사이, 에게 해 주변의 많은 그리스 해상 도시들은 아리스티데스를 통해 아테네에 충성을 맹세하고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으며, 키몬은 주 지휘관이 되었다.[7] 스트라테고스(strategos)로서 키몬은 기원전 463년까지 동맹 작전의 대부분을 지휘했다. 그는 아리스티데스와 함께 파우사니아스 휘하의 스파르타군을 비잔티움에서 몰아냈다.[7]

키몬은 페르시아 장군 보게스로부터 스트리몬 강가의 아이온을 점령했다.[8] 도리스쿠스를 제외한 이 지역의 다른 해안 도시들은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또한 스키로스를 정복하고 해적들을 몰아냈다.[2][8]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신화적인 테세우스의 "뼈"를 아테네로 가져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 개의 헤르마 조각상이 아테네에 세워졌다.[2]

기원전 466년경, 키몬은 소아시아에서 에우리메돈 전투를 벌여 페르시아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그의 육상 및 해상 부대는 페르시아 진영을 점령하고 200척의 페르시아 삼단노선을 파괴하거나 포획했다. 그는 암피폴리스라는 아테네 식민지를 건설하고,[7] 파셀리스와 같은 많은 새로운 동맹국들이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키몬이 에우리메돈 전투에서의 승리 후 동맹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를 협상했다고 본다. 이는 칼리아스 평화 조약이 때때로 키몬의 평화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키몬은 "전쟁이 요구하는 모든 자질에서 테미스토클레스와 자신의 아버지 밀티아데스와 완전히 동등했다."[2][7]

키몬은 델로스 동맹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주변의 성벽 확장, 공공 도로, 공공 정원, 그리고 많은 정치적 건물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다.[13]

참조

[1] 웹사이트 Κίμων of Lakiadai https://athnames.org[...] 2024-02-01
[2] 문서 Plutarch, Lives. Life of Cimon https://www.ucalgary[...]
[3] 서적 Cornelius Nepos, Lives of Eminent Commanders http://www.tertullia[...]
[4] 문서 Plutarch, Lives. Life of Themistocles http://classics.mit.[...]
[5] 문서 Plutarch, Cimon 481
[6] 서적 A history of Greece to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Ox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gutenber[...]
[8] 서적 Herodotus, The History of Herodotus https://www.gutenber[...]
[9] 서적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y Thucydides, Donald Lateiner, Richard Crawley page 33'
[10] 서적 "Who's who in the Greek world By John Hazel Page 56"
[11] 문서 'The Greek World: 479–323 BC, Simon Hornblower. Page 126.'
[12] 간행물 Plutarch on Cimon, Athenian Expeditions, and Ephialtes' Reform (Plut. Cim. 14-17) https://grbs.library[...] 2019-02-26
[13]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14] 문서 Plutarch, Cimon, 19
[15]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4
[16] 문서 ibid, 5
[17] 문서 プルタルコス, 「ペリクレス伝」, 29
[18]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6
[19] 문서 ibid, 4; ヘロドトス, VII. 107; トゥキュディデス, I. 98
[20]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8
[21] 문서 ibid, 12-13;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0
[22]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4
[23]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2
[24]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6-17
[25] 문서 プルタルコス, 「ペリクレス伝」, 10
[26]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5
[27] 문서 ibid, 18
[28]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112;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5
[29] 문서 プルタルコス, 「キモン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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