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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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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군정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 설치되어 프랑스를 통치한 행정 기구이다. 1940년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으로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 지역과 비시 정부 지배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군정청은 점령 지역의 행정, 경제, 사회 전반을 통제했다. 군정청은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탄압하고 프랑스 경제를 수탈했으며, 강제 노동을 통해 프랑스인들을 독일로 이송하는 등 혹독한 점령 통치를 펼쳤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군정청은 붕괴되었고, 전후 대독 협력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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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정청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프랑스의 독일 (빨간색) 및 이탈리아 (노란색) 점령 지역, 자유 지역, 금지 지역, 알자스-로렌
프랑스의 독일 (빨간색) 및 이탈리아 (노란색) 점령 지역, 자유 지역, 금지 지역, 알자스-로렌
기본 정보
공식 명칭프랑스 군정청
현지 명칭 (독일어)Militärverwaltung in Frankreich (밀리테르버발퉁 인 프랑크라이히)
현지 명칭 (프랑스어)Administration militaire en France (아드미니스트라시옹 밀리테르 엉 프랑스)
일반 명칭독일 점령 프랑스
지위독일 군정
소속 국가나치 독일
존속 기간1940년 - 1944년
수도파리
공용어독일어, 프랑스어, 오크어
정치
정치 체제군정
군정 장관군정 장관
군정 장관 (1940년–1942년)오토 폰 슈튈프나겔
군정 장관 (1942년–1944년)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군정 장관 (1944년)카를 키칭거
역사
주요 사건제2차 세계 대전
시작제2차 콩피에뉴 휴전협정 (1940년 6월 22일)
사건 1안톤 작전 (1942년 11월 11일)
종료파리 해방 (1944년 8월 25일)
이전 국가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남프랑스 점령지, 비시 프랑스
이후 국가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상징
나치 독일 군기
군기
나치 독일 국장
국장
국가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독일, 독일은 모든 것 위에) (1절만)
국가 2Die Fahne hoch! (깃발을 높이 올려라!)
국가 (프랑스 비시 정권)Maréchal, nous voilà ! (원수여, 여기 있습니다!)

2. 점령 배경

1940년 5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는 패배했다. 같은 해 6월 22일, 독일은 비시 정부와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 지역과 비시 정부 지배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알자스-로렌은 사실상 독일에 병합되어, "독일 국민 경제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편입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1940년 6월, 개선문을 지나 행진하는 독일 군인들.


독일군 점령 지역은 제네바와 스페인을 연결하고, 투르 (앤드르에루아르주)를 경유하는 선의 북서쪽, 파리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중 대서양 연안과 벨기에 국경 부근(노르-파드칼레 레지옹)은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프랑스 측 관헌의 출입이 금지되었다.[1] 프랑스 북동부 지역 또한 "금지 구역"으로, 전쟁 난민들의 귀환이 금지되었고, 독일인 정착민과 나치의 신질서 병합을 위한 곳이었다.[2]

비시 정부는 자유 구역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유지했지만, 휴전 협정의 제한과 독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으로 인해 독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3] 자유 구역과 점령 구역 사이의 경계선은 사실상의 국경이었으며, 독일 당국의 특별 허가와 통행증이 필요했다.[4]



휴전 협정 22조에 의거, 휴전 조건 달성을 확인하기 위한 휴전 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감독 하에 놓여 프랑스 측은 요청을 표명하고 집행 규칙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20조에서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전시 포로는 그대로 억류되고, 점령 지역의 무기는 독일에 인도되며, 자유 지역의 무기는 독일과 이탈리아 양군의 감독 하에 놓이고,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 새로운 군비 장비 제조는 금지되었다.

비시 정부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점령 경비를 지불해야 했으며, 1940년 6월 25일부터 독일에게 매일 2000만 마르크(4억 프랑), 이탈리아에게 월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은 이 비용을 경제 장관 관할에 맡겨, 독일 기업이 프랑스에서 자본이나 기업을 매수하는 비용에 충당했다. 점령 경비 지불은 10일분을 일괄 선불이었다.

2. 1.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

1940년 6월 22일, 독일은 비시 정부와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 지역과 비시 정부 지배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알자스-로렌은 사실상 독일에 병합되어, "독일 국민 경제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편입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독일군 점령 지역은 제네바와 스페인을 연결하고, 투르 (앤드르에루아르주)를 경유하는 선의 북서쪽, 파리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중 대서양 연안과 벨기에 국경 부근(노르-파드칼레 레지옹)은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프랑스 측 관헌의 출입이 금지되었다.[1] 프랑스 북동부 지역 또한 "금지 구역"으로, 전쟁 난민들의 귀환이 금지되었고, 독일인 정착민과 나치의 신질서 병합을 위한 곳이었다.[2]

비시 정부는 자유 구역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유지했지만, 휴전 협정의 제한과 독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으로 인해 독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3] 자유 구역과 점령 구역 사이의 경계선은 사실상의 국경이었으며, 독일 당국의 특별 허가와 통행증이 필요했다.[4]

휴전 협정 22조에 의거, 휴전 조건 달성을 확인하기 위한 휴전 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감독 하에 놓여 프랑스 측은 요청을 표명하고 집행 규칙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20조에서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전시 포로는 그대로 억류되고, 점령 지역의 무기는 독일에 인도되며, 자유 지역의 무기는 독일과 이탈리아 양군의 감독 하에 놓이고,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 새로운 군비 장비 제조는 금지되었다.

비시 정부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점령 경비를 지불해야 했으며, 1940년 6월 25일부터 독일에게 매일 2000만 마르크(4억 프랑), 이탈리아에게 월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은 이 비용을 경제 장관 관할에 맡겨, 독일 기업이 프랑스에서 자본이나 기업을 매수하는 비용에 충당했다. 점령 경비 지불은 10일분을 일괄 선불이었다.

3. 독일의 점령 통치



독일은 군정청을 통해 점령 지역을 통치했으며, 비시 정부와 협력하여 행정, 경제, 사회 전반을 통제했다. 프랑스는 휴전 협정에 따라 "독일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점령된 북부 지역과 비점령된 남부 지역으로 대략 나뉘었다.[8] 프랑스 식민 제국은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의 권한 아래에 있었다. 프랑스 주권은 점령 지역, 알자스, 모젤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영토에 대해 행사될 예정이었지만, 휴전의 세 번째 조항은 점령 지역의 프랑스 당국이 군정청의 명령을 따라야 하며 독일이 그 안에서 점령국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8]

>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독일 제국은 군사 점령에 따른 모든 권리를 행사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권리의 실행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용이하게 하고, 이를 위해 프랑스 행정 기관의 지원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프랑스 정부는 점령지의 모든 공무원과 행정관에게 독일 군사 당국의 규정을 준수하고 전적으로 협력하도록 즉시 지시할 것이다.[8]

군정청은 점령된 프랑스의 민사 업무를 담당했다. 프랑스 내 독일 해군 업무는 ''Höheres Kommando der Marinedienststellen in Groß-Paris''(대 파리 지역 해군 서비스 최고 사령부)를 통해 조정되었으며, "Admiral Frankreich"에게 보고했다. 안톤 작전 이후, "Admiral Frankreich" 해군 사령부는 해군 그룹 서부에 보고하는 더 작은 사무실로 분리되었다.

협력자 ''밀리시 프랑세즈''의 퍼레이드, 1944년


군정은 게슈타포, SS의 정보부인 ''지허르하이츠디엔스트 (SD)'' 그리고 보안 경찰인 ''지허르하이츠폴리차이 (SiPo)''와 긴밀히 협력하여, 레지스탕스와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또한, 프랑스 당국과 경찰의 지원을 받아 유대인, 반파시스트 및 기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폴 투비에와 모리스 파퐁과 같은 프랑스 협력자들과 ''밀리시'', ''프랑가르드'' 및 군단 질서 서비스와 같은 협력적 프랑스 보조 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스 인민당 (PPF)과 국민 랠리당 (RNP)은 주요 협력 정당이었다.

''밀리시''는 게슈타포와 함께 레지스탕스 구성원들과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을 체포하여 드랑시 수용소와 같은 구금 센터로 보냈다.

일부 프랑스인들은 반 볼셰비키 프랑스 의용군과 같은 독일군에 자원했다. 이들은 나중에 제33 무장 친위대 샬르마뉴 (제1 프랑스)의 간부를 구성했다.

스탠리 호프만은 1974년에[9], 로버트 팩스턴과 장피에르 아제마는 이념적 이유로 히틀러의 독일과의 강화된 협력을 원했던 파시스트와 나치 동조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협력주의자(collaborationniste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사리사욕으로 협력했던 "협력자"와는 대조적이다. 이들의 예로는 PPF 지도자 자크 도리오, 작가 로베르 브라실라크 또는 마르셀 데아트가 있다. ''협력주의자''들 사이의 주요 동기 부여와 이념적 기반은 반공주의였다.[9]

|thumb|1943년 10월, 북프랑스에 주둔한 투르케스탄 병사]]

독일 국방군(Wehrmacht)은 프랑스에 다양한 수의 사단을 유지했다. 1941년 12월, 프랑스 독일 점령 지역 전체에 10만 명의 독일인이 있었다.[10] 독일 국방군의 주력이 동부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독일 부대는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프랑스로 순환 배치되었다. 디에프 습격이 시작되면서 연합군의 침공 위협이 커지자 병력 수는 증가했다. 캐나다군과 영국 코만도의 독일군에 대한 공격으로 히틀러는 이들을 비정규전으로 규탄했다. 그는 코만도 명령에서 그들에게 합법적인 교전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체포 시 SS 보안국에 넘겨 즉결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에 주둔했던 몇몇 주요 부대 및 편성은 다음과 같다.

  • 1940년: ''Luftflotte 2'', ''Luftflotte 3''는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북프랑스 비행장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Luftflotte 3''는 1944년 철수할 때까지 연합군의 전략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렀다.
  • 1941년: 순양전함 와 . 전함 ''비스마르크''는 취역 후 프랑스 대서양 항구에 도달하려다 격침되었다.
  • 1942년: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4 SS 경찰 연대
  • 1943년: 대서양 해전 절정기에 60척에서 100척 이상의 독일 U-boat가 프랑스 대서양 항구인 라 로셸, 보르도, 생나제르, 브레스트, 로리앙 등에 주둔했다.
  • 1944년: 제157 산악 (예비) 사단, ''Panzer Lehr'', 제19 군, 제716 정규 보병 사단, 제12 SS 기갑 사단 ''히틀러유겐트''.

점령된 유럽 국가에 대한 군사 선전 부대는 포츠담에 본부를 두었다. 점령된 각 국가에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에 본부를 둔 하나의 선전 대대가 있었다. 이것은 지역 수준에서 추가로 세분화되었다.

프랑스의 본부는 파리의 마제스틱 호텔에 있었으며, 보르도, 디종 및 기타 도시에 선전 부서 (Staffelde)가 있었다.[13]

'''Propagandastaffelde''' ("선전 중대")은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언론과 출판물을 선전하고 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이 담당한 서비스였다. 각 주요 도시에 섹션 (Staffelde, "중대")이 있었다.[13]

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점령 당국은 처음에는 파리의 독일 대사관(오텔 보아르네)에 의존하여 간행물, 쇼 및 라디오 방송을 감시했다. 그런 다음 다양한 프랑스 지역에서 "Propagandastaffel"이라고 불리는 나치 선전 및 검열 서비스를 개발한 Propaganda-Abteilung Frankreichde (프랑스 선전부)를 설립했다.[13]

각 "Propagandastaffel"은 사령관이 이끌었고 약 30명의 사람들을 고용했다.[13] 특정 분야를 담당하는 Sonderführerde (특별 이사)가 있었다: 쇼 및 연극 검열, 출판 및 언론, 영화 작품, 공공 광고 및 연설.[13]

독일군이 파리 점령 직후인 1940년 6월 물랑 루즈 앞에서 프랑스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점령 한 달 후, 파리 코만단투르(Kommandantur)에서 격주로 발행하는 병사 잡지인 ''''(파리 독일 안내서)가 처음 발행되어 성공을 거두었다.[27] ''Guide aryien''과 같은 추가 가이드에서는 물랑 루즈를 파리의 필수 방문 장소 중 하나로 꼽았다.[28] Folies-Belleville이나 Bobino와 같은 유명 클럽도 인기 있는 장소였다. 독일 부대는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프랑스로 순환 배치되었고, 독일군은 "Jeder einmal in Paris"(모두 한 번은 파리에)라는 모토를 사용했다.[29] 이브 몽탕이나 샹송 콤파뇽과 같은 다양한 유명 예술가들이 점령 기간 동안 경력을 시작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칼링 본부 근처 뤼 로리스톤에 있는 유명한 사창가인 레투알 드 클레베르 위에 살았다. 파리의 야간 통행 금지는 다른 도시만큼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장고 라인하르트가 살 플레옐에서 프랑스 핫 클럽 5중주와 함께 연주한 "뉘아주"는 프랑스 팬과 독일 팬 모두에게 악명을 떨쳤다. 장 라인하르트는 를 위해 연주하도록 초청받기도 했다.[30]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방문에서 파리를 사용하고 남용한 것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점령 기간 동안의 과도한 매춘은 1946년 마르트 리샤르 법(Loi de Marthe Richard)으로 이어졌고, 이 법은 사창가를 폐쇄하고 선정적인 무대 쇼를 단순한 댄스 행사로 축소했다.

독불 휴전 협정의 여러 조건은 "오로지 독일의 안전을 위해 엄명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독일 경제성은 독일 내의 대기업과 전국 공업 집단(Reichsgruppe Industrie)에 프랑스 산업계에 대한 요구를 제출하게 했다. 당시 대기업 중 하나인 IG 파르벤 인더스트리를 중심으로 한 화학 공업 단체는 프랑스 화학 공업계에 참여하기를 원했는데, 이 중 IG 파르벤은 프랑스 염료 관련 기업 자본의 50%를 요구했다. 이 외에도 여러 기업의 요구는 "충분한 할당량의 보장", "환율·통상 정책에서의 독일 이익 배려", "독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체류 허가", "독일 측의 필요에 따른 독일인의 노동 허가", "조세상의 불이익 조치 배제" 등 독일 측의 우위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 특히 IG 파르벤의 요구는 국가의 신질서 계획에 통합되어 독일의 공적 정책이 되었다.

1940년 6월 13일, 4개년 계획 전권 헤르만 괴링은 서부 점령 지역의 경제 이용에 관한 명령을 발했다. 괴링은 "프랑스가 정복된 나라이며, 거기서 얻어야 할 주요 이익은 전리품이다"라고 생각했고, 점령지에서 자원·기계·가축 몰수를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히틀러도 이 방침에 찬성하며 "프랑스와의 모든 교섭은 정치적 측면에서만 보아야 하며, 결코 경제적 측면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경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프랑스가 철폐를 요구했던 점령 구역의 경계선 검문소 폐지에도 응하지 않았다. 독일 측의 생각은 이러한 착취와 징벌에 의한 것이었고, 경제성 안에는 프랑스를 "몇몇 사치품 공업을 가진 농업 국가"로 전환하려는 계획마저 있었다. 한편 외무성은 프랑스를 "신질서"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더 온건한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에는 주불 대사 오토 아베츠가 파리로 부임했다. 아베츠는 독일의 선전과 비시 정부와의 연락, 정치적 중요 문서의 조사 등 다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아베츠는 파리의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10억 마르크를 쓴 남자라고 불렸다. 아베츠는 프랑스를 "게르만 전사의 휴식처", "휴식의 정원, 환락의 장"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군정 당국에 조언할 정도의 권한밖에 없어, 독일 측의 잔혹함을 토로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이 1940년 10월까지의 시기는 주로 독일의 일방적인 착취의 시기였다. 비시 정부도 패배로 인해 방향을 잃었고, 대독 협력의 움직임도 그다지 없었다. 프랑스의 대독 수출입은 전쟁 중과 다름없는 저수준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효율적인 군수 생산이 요구되면서, 독일 측은 방침 전환을 강요받게 되었다.

8월 26일, 괴링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부 점령 지역의 군수·공적·사적 주문을 조정하는 기관으로 중앙 발주소(Zentralauftragsstelle)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각 관청과 공사 기업은 점령 지역별(네덜란드, 벨기에와 북프랑스, 비시 정부) 중앙 발주소에 발주를 신고하게 되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 생산을 우선시하는 체제가 갖춰졌다. 한편 프랑스 측 산업도 대부분이 군수 생산에 투입되었고, 군수 생산을 지속하고 싶어하는 프랑스 산업계 측의 요구도 있었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 11월까지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정 부분의 이해관계 조절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피에르 라발 등의 대독 협력(콜라보라시옹)이 활발해지면서 독일 측은 점차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에 대한 수출도 전체의 40%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고, 수입량도 개선되었다. 이러한 콜라보라시옹의 결과 중 하나가 1941년 7월에 성립된 항공기 제조를 위한 독불 공동 계획이다. 1943년에는 프랑스의 모든 항공기 산업이 독일에 병합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독일 경제에 대한 원료, 식량, 그리고 공업 제품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가 되었다". 1941년 5월 11일부터는 점령 경비 지불액이 1,500만 마르크로 감액되었다.

한편, 독일의 권위를 배경으로 한 독일 기업에 의한 프랑스 기업의 흡수가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염료 기업은 IG 파르벤이 51%를 출자하는 "프랑칼라"사에 통합되어 사실상 IG 파르벤의 지배 하에 놓였다. 또한, 일반적인 거래에서도 독일군의 압력을 배경으로 프랑스 측에 불이익이 가해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 통화 프랑과 독일 통화 마르크의 환율은 12프랑 = 1마르크가 시세였지만, 일방적으로 20프랑 = 1마르크로 공정되었다. 또한, 1940년 11월에 비시 정부와 맺어진 상쇄 협정은 물자 수출입 시 지불을 즉시 하지 않고 양국 간의 수출입액을 균형시키는 명목이었지만, 프랑스 측은 그 지불 대금을 받을 수 없었고, 사실상 독일 측의 수입 대금 떼먹기에 이용되었다. 한편 유대계 기업의 자산 몰수로 인해 나 파리바, 국립상공은행 등의 은행 업계는 자산을 두 배로 늘렸다.

1942년이 되자 대사관의 기능은 독일 노동 전선이나 친위대에 의해 대체되었고, 아베츠의 역할은 점점 작아졌다. 4월부터는 게슈타포가 점령 지구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5월에는 프랑스의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에 카를 오베르크가 취임했다. 비시 정부 수상 피에르 라발은 친위대나 아프베어 (독일 국방군 첩보부)의 활동을 자유 지역에서도 허용했다.

콜라보라시옹

독일 대사 아베츠는 프랑스 언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필리프 앙리오(:fr:Philippe Henriot) 등 협력자를 얻어 대독 협력을 선전하게 했다. 독일 대사관은 1943년까지 파리의 언론계에 3억 프랑을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로베르 브라지야크, 아벨 보나르 등, 전전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파시스트 지식인도 대독 협력에 적극적이었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국민 계몽·선전 대신 요제프 괴벨스가 프랑스 작가 · 예술가를 독일로 초청하여, 독일에 호의를 갖도록 유도했다. 『신 프랑스 평론』을 발행하는 갈리마르 사는 대응에 고심하여, 한편으로는 독일의 의향에 맞는 편집자 · 작가를 기용하는 한편, 반독일적 작가를 고용하는 등 곡예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나치 운동에 매료되어, 군사적 · 정치적으로 대독 협력을 한 자크 도리오나 조제프 다르낭과 같은 존재도 있었지만, 독일 측은 그다지 신뢰를 두지 않았다. 게다가 전전 좌파 중, 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나 평화주의자도 대독 협력에 적극적이었다. 데아는 국가인민연합 (RNP)을 결성하여, 비시 정부보다 적극적인 대독 협력을 주장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지지했기 때문에, 개전 이후 금지되고 탄압받았다. 또한 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독일과 싸우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독일 점령 후에는, 오히려 제국주의 정부가 타도된 것을 환영하며, 독일 측과 당의 합법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의 관계가 미묘해진 1941년 5월경부터는 항독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독소 전쟁 개시 후에는, 대량의 당원이 체포된 것도 있어, 분명하게 반독으로 나섰다.

1940년 7월, 비시 정부는 3개의 국영 방송국과 민간 방송국 2개를 점령군의 사용에 넘겼고, 프랑스 국내에서는 독일의 선전 방송이 펼쳐지게 되었다. 는 가장 유명한 선동가 중 한 명이었으며, 반공, 반유대, 반연합국을 외쳤다. 또한 점령 지역의 영화관에서는 상영에 앞서 뉴스 영화의 상영이 의무화되어, 반공, 반유대, 반연합국, 비시 정부의 국민 혁명 등이 선전되었다。

이러한 선전도 있어서, 항복 이전부터 이미 높아져 있던 비시 정부 수반 페탱 원수에 대한 개인 숭배는 매우 높아졌다. 1944년 4월 페탱이 파리를 비공식 방문했을 때에도 열광적인 환영이 일어날 정도였다。

독소전 개시 이후에는 반볼셰비키·반공 캠페인이 강화되었다。

3. 1. 점령 지역



파리를 포함한 북부와 서부 지역은 독일군에 의해 직접 점령되었다.[1][2] 알자스-로렌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로 반환되었으나, 제3제국에 의해 다시 병합되었다.[1] 노르 및 파드칼레 주는 벨기에 및 북부 프랑스 군정청에 소속되었으며,[1] 프랑스 북동부 지역은 독일인 정착민과 나치의 신질서 (''Neue Ordnung'')의 병합을 위한 곳이었다.[2]

점령 구역(, , )은 프랑스 북부와 서부의 나머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벨기에 국경 지역과 대서양 연안 지역은 "금지 구역"으로 설정되어 프랑스 관헌의 접근이 제한되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아키텐의 서쪽 절반을 제외한 프랑스 남부는 비시 프랑스가 독립 국가로 주권을 유지하는 ''자유 구역''이 되었지만, 독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3] 자유 구역과 점령 구역 사이의 경계선은 사실상의 국경이었으며, 이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독일 당국의 특별 허가와 통행증이 필요했다.[4]

이탈리아 점령 구역은 알프스 국경을 따라 작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3. 2. 비시 프랑스

남부 지역은 비시 프랑스 정부가 통치했지만, 독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2년 11월, 독일은 안톤 작전을 실행하여 비시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다. 이 시기 독일은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양의 물자를 수탈했으며, 프랑스는 독일 국민 총생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고, 총 수출의 80% 이상을 독일에 의존했다. 이는 독일 총수입의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1943년 2월, 비시 정부는 강제 노동국(STO)을 설치하고 독일로 노동자를 이송했다.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키라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 하에서 프랑스 경찰은 독일군의 지휘를 받았으며, 게슈타포는 프랑스인을 통해 밀고와 암살을 자행하며 치안 활동을 벌였다.

3. 3. 이탈리아 점령 지역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부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2] 이탈리아 점령 구역은 알프스 국경을 따라 비무장지대와 함께 소규모 지역으로 구성되었다가, 1942년 11월 11일 독일과 함께 비시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강 좌안의 모든 영토로 확장되었다.[2] 리옹마르세유 주변 지역은 독일의 ''존 쉬드''("남부 구역")에 추가되었고,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의 통제하에 놓였다.[2]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 점령 구역을 점령하여 ''존 쉬드''에 추가했다.[2] 코르시카는 자유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공동 교전국이 된 현지 이탈리아군이 상륙하여 해방되었다.[2]

4. 경제 수탈과 강제 노동

독일 군정청은 프랑스 경제를 자국 전쟁 수행에 종속시켰다.

== 경제 정책 ==

독일 군정청은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일 기업은 프랑스 기업을 흡수했으며, 특히 IG 파르벤은 프랑스 염료 기업의 51%를 출자하여 "프랑칼라"사를 설립, 사실상 지배 하에 두었다. 또한, 수출입 통제를 통해 프랑스의 대독 수출을 전체의 40%까지 증가시켰다.

프랑은 독일에 유리하게 평가 절하되어 20프랑 = 1마르크로 공정되었다. 이는 시세(12프랑 = 1마르크)보다 훨씬 낮은 가치였다.[15] 또한, 1940년 11월에 비시정부와 맺어진 상쇄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수입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프랑스는 막대한 점령 비용을 독일에 지불해야 했다. 초기에는 매일 2천만 ''제국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으며,[15] 이는 프랑스 프랑에 대한 독일 통화의 인위적인 환율(1 RM당 20 FF)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15] 1941년 5월부터 점령 경비 지불액이 1,500만 마르크로 감액되었으나, 안톤 작전 이후 다시 증액되어 2,500만 마르크가 되었고,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에는 월 5,000만 마르크의 보상금까지 추가되었다.

독일은 프랑스 식량 생산량의 약 80%를 압수하여[17] 프랑스 국민들의 가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다. 연료, 비료, 노동력 부족으로 프랑스 농업 생산량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독일은 고기의 절반, 농산물의 20%, 샴페인의 80%를 압수했다.[18]

1940년 10월부터 1942년 11월까지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일정 부분의 이해관계 조절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독일은 피에르 라발 등의 대독 협력(콜라보라시옹)을 통해 이익을 얻었고, 프랑스에서의 수출도 증가했다. 1941년 7월에 성립된 항공기 제조를 위한 독불 공동 계획에 이어, 1943년에는 프랑스의 모든 항공기 산업이 독일에 병합되었다.

1942년 11월부터 1943년까지 독일은 프랑스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었다. 프랑스는 독일 국민 총생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고, 총 수출의 80% 이상을 독일에 할애했다. 이는 독일 총수입의 40% 이상에 해당했다.

독일은 강제 노동국(STO)을 통해 프랑스 노동자들을 독일로 이송했다. 1943년 3월까지 25만 명이 독일로 이송되었으며,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키에 참여했다.

== 강제 노동 ==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강제 노동 의무 부과"라고 불리는 강제 노동 정책으로 수십만 명의 프랑스인이 독일로 강제 이송되어 노동에 동원되었다.[31] 이들은 공장, 농업, 철도 노동 수용소뿐 아니라 V-1 발사 시설과 같은 군사 시설에도 동원되었다.[31] 1943년 2월 16일, 비시 정부는 강제 노동국(STO, 의무 협력 노동/Service du travail obligatoire (France)프랑스어)을 설치하여 독일로의 노동자 징발을 강제했다.[31]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키라고 불리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4. 1. 경제 정책

독일 군정청은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독일 기업은 프랑스 기업을 흡수했으며, 특히 IG 파르벤은 프랑스 염료 기업의 51%를 출자하여 "프랑칼라"사를 설립, 사실상 지배 하에 두었다. 또한, 수출입 통제를 통해 프랑스의 대독 수출을 전체의 40%까지 증가시켰다.

프랑은 독일에 유리하게 평가 절하되어 20프랑 = 1마르크로 공정되었다. 이는 시세(12프랑 = 1마르크)보다 훨씬 낮은 가치였다. 또한, 상쇄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수입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프랑스는 막대한 점령 비용을 독일에 지불해야 했다. 초기에는 매일 2천만 ''제국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으며,[15] 이는 프랑스 프랑에 대한 독일 통화의 인위적인 환율(1 RM당 20 FF)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15] 1941년 5월부터 점령 경비 지불액이 1,500만 마르크로 감액되었으나, 안톤 작전 이후 다시 증액되어 2,500만 마르크가 되었고,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에는 월 5,000만 마르크의 보상금까지 추가되었다.

독일은 프랑스 식량 생산량의 약 80%를 압수하여[17] 프랑스 국민들의 가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다.[17] 연료, 비료, 노동력 부족으로 프랑스 농업 생산량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독일은 고기의 절반, 농산물의 20%, 샴페인의 80%를 압수했다.[18]

1940년 10월부터 1942년 11월까지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일정 부분의 이해관계 조절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독일은 피에르 라발 등의 대독 협력(콜라보라시옹)을 통해 이익을 얻었고, 프랑스에서의 수출도 증가했다. 1943년에는 프랑스의 모든 항공기 산업이 독일에 병합되었다.

1942년 11월부터 1943년까지 독일은 프랑스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었다. 프랑스는 독일 국민 총생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고, 총 수출의 80% 이상을 독일에 할애했다. 이는 독일 총수입의 40% 이상에 해당했다.

독일은 강제 노동국(STO)을 통해 프랑스 노동자들을 독일로 이송했다. 1943년 3월까지 25만 명이 독일로 이송되었으며,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키에 참여했다.

4. 2. 강제 노동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강제 노동 의무 부과"라고 불리는 강제 노동 정책으로 수십만 명의 프랑스인이 독일로 강제 이송되어 노동에 동원되었다.[31] 이들은 공장, 농업, 철도 노동 수용소뿐 아니라 V-1 발사 시설과 같은 군사 시설에도 동원되었다.[31] 1943년 2월 16일, 비시 정부는 강제 노동국(STO, 의무 협력 노동/Service du travail obligatoire (France)프랑스어)을 설치하여 독일로의 노동자 징발을 강제했다.[31] 강제 노동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키라고 불리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5. 유대인 박해

독일과 비시 정권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강화했다.

1940년 9월, 프랑스 군정청은 교사에게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이 아님을 서약하도록 의무화했으며, 1927년 이후 이민한 6300명의 유대인의 귀화를 취소했다. 이 조치는 교사뿐만 아니라 상급 공무원, 장교, 잡지 편집자, 영화 감독, 극장 지배인에게까지 미쳤다. 비시 정권은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정의했고, 또한 알제리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프랑스 국적을 취소했다는 점에서 독일보다 가혹했다. 독일이 점령 지역에서 시행한 유대인 단속법은 곧 자유 지역에서도 시행되었다. 유대인은 공공 시설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또한 독일 본토에서 행해지던 경제의 아리아화 정책은 점령지 및 자유 지역에서도 행해져, 유대계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기업의 흡수·자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다.

점령 초기, 페탱은 "국제 유대 자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파리의 상점에는 "유대인 출입 금지"라는 벽보가 등장하는 등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명확해졌다. 1940년 9월에는 교사에게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이 아님을 서약하도록 의무화했으며, 1927년 이후 이민한 6300명의 유대인의 귀화를 취소했다. 비시 정부는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정의했고, 알제리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프랑스 국적을 취소했다는 점에서 독일보다 가혹했다. 유대인들은 공공 시설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또한 독일 본토에서 행해지던 경제의 아리아화 정책은 점령지 및 자유 지역에서도 행해져, 유대계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기업의 흡수·자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다.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에는 약 49개의 강제 수용소가 사용되었으며, 그 중 가장 큰 곳은 드랑시에 있었다. 점령 지역에서는 1942년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노란색 배지를 착용해야 했고, 파리 메트로의 마지막 객차만 탈 수 있었다.[32] 1942년 7월 16일과 17일, 벨 디브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파리 지역에 거주하는 13,152명의 유대인이 친나치 프랑스 당국에 의해 대량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32]

프랑스 비시 정권에 의해 의무화된 노란색 다윗의 별.


이 유대인 색출의 이면에는 재불 유대인 총연합/Union générale des israélites de France프랑스어 (UGIF)의 대독 협력이 존재했다. UGIF는 동유럽 및 외국 국적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나치에 넘겨주어 프랑스 국적 유대인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1943년부터 조직은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 UGIF는 완전히 게슈타포의 도구로 전락했다.

1942년 6월, 독일이 비시 정부에 유대인 10만 명의 이송을 요구했고, 비시 정부 측은 프랑스 국적 유대인을 체포하지 않지만 외국 국적 유대인은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체포하는 방침을 굳혔다. 7월 16일에는 "봄의 바람" 작전이 실행되어 1만 2천 884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벨로드롬 디베르 경기장에 모였다 (벨로드롬 디베르 대량 검거 사건).

이 유대인 박해는 비시 정부에 협력적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불렀고, 추기경 회의는 페탱과 수상 피에르 라발에게 대량 검거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탈리아 점령 지역에서는 유대인 단속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프랑스 각지에서 유대인이 도망쳐 왔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탈리아 휴전 이후 유대인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프랑스에 없어졌다.

전반적으로,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의 상세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77,500명 미만이 전쟁 중 사망했으며, 압도적으로 절멸 수용소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33][34] 1940년 프랑스의 유대인 인구 350,000명 중 4분의 1보다 약간 적은 수가 사망했다.[35]

5. 1. 반유대주의 정책

1940년 9월, 프랑스 군정청은 교사에게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이 아님을 서약하도록 의무화했으며, 1927년 이후 이민한 6300명의 유대인의 귀화를 취소했다. 이 조치는 교사뿐만 아니라 상급 공무원, 장교, 잡지 편집자, 영화 감독, 극장 지배인에게까지 미쳤다. 비시 정권은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정의했고, 또한 알제리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프랑스 국적을 취소했다는 점에서 독일보다 가혹했다. 독일이 점령 지역에서 시행한 유대인 단속법은 곧 자유 지역에서도 시행되었다. 유대인은 공공 시설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또한 독일 본토에서 행해지던 경제의 아리아화 정책은 점령지 및 자유 지역에서도 행해져, 유대계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기업의 흡수·자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다.

점령 시작 후 페탱은 "국제 유대 자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파리의 상점에서는 "유대인 출입 금지"라는 벽보가 등장했다. 1942년 기준으로 점령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노란색 배지를 착용해야 했고, 파리 메트로의 마지막 객차만 탈 수 있었다.[32]

1942년 7월 16일과 17일에는 벨 디브 학살이 일어나 파리 지역에 거주하는 13,152명의 유대인이 친나치 프랑스 당국에 의해 대량 체포되었으며,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32]

전반적으로,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의 상세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77,500명 미만이 전쟁 중 사망했으며, 압도적으로 절멸 수용소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33][34] 1940년 프랑스의 유대인 인구 350,000명 중 4분의 1보다 약간 적은 수가 사망했다.[35]

5. 2. 강제 수용소와 학살

프랑스 내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 수용소에서 학살되었다.[33][34] 1942년 7월 16일과 17일, 벨 디브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파리 지역에 거주하는 13,152명의 유대인이 친나치 프랑스 당국에 의해 대량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32]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의 상세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77,500명 미만이 전쟁 중 사망했으며, 압도적으로 절멸 수용소로 이송된 후 사망했다.[33][34]

점령 초기, 페탱은 "국제 유대 자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파리의 상점에는 "유대인 출입 금지"라는 벽보가 등장하는 등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명확해졌다. 1940년 9월에는 교사에게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이 아님을 서약하도록 의무화했으며, 1927년 이후 이민한 6300명의 유대인의 귀화를 취소했다. 비시 정부는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정의했고, 알제리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프랑스 국적을 취소했다는 점에서 독일보다 가혹했다. 유대인들은 공공 시설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쇼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또한 독일 본토에서 행해지던 경제의 아리아화 정책은 점령지 및 자유 지역에서도 행해져, 유대계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기업의 흡수·자산 몰수 등이 이루어졌다.

이 유대인 색출의 이면에는 (UGIF)의 대독 협력이 존재했다. UGIF는 동유럽 및 외국 국적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나치에 넘겨주어 프랑스 국적 유대인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1943년부터 조직은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 UGIF는 완전히 게슈타포의 도구로 전락했다.

1942년 6월, 독일이 비시 정부에 유대인 10만 명의 이송을 요구했고, 비시 정부 측은 프랑스 국적 유대인을 체포하지 않지만 외국 국적 유대인은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체포하는 방침을 굳혔다. 7월 16일에는 "봄의 바람" 작전이 실행되어 1만 2천 884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벨로드롬 디베르 경기장에 모였다 (벨로드롬 디베르 대량 검거 사건).

이 유대인 박해는 비시 정부에 협력적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불렀고, 추기경 회의는 페탱과 수상 피에르 라발에게 대량 검거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탈리아 점령 지역에서는 유대인 단속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프랑스 각지에서 유대인이 도망쳐 왔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탈리아 휴전 이후 유대인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프랑스에 없어졌다.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에는 약 49개의 강제 수용소가 사용되었으며, 그 중 가장 큰 곳은 드랑시에 있었다. 점령 지역에서는 1942년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노란색 배지를 착용해야 했고, 파리 메트로의 마지막 객차만 탈 수 있었다.

6. 프랑스인의 저항 (레지스탕스)

프랑스 국민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일에 저항했다.

점령 직후의 항독 레지스탕스는 개인의 자발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밀고를 경계하며 개인의 협력자를 구했고, 이윽고 소규모 저항 조직이 생겨났다. 1940년 6월 18일에는 샤를 드 골이 런던에서 프랑스를 향해 항전을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지만, 이 시점의 그는 아직 큰 존재는 아니었다.

1940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에는 모든 소재로 만든 삼색기장을 단 학생 수천 명이 샹젤리제 거리를 퍼레이드했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고, 그중에는 낚싯대 두 개(드 골, 샤를 드 골과 연관지음)를 든 학생도 있었다. 군정 당국은 123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5명의 학생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데모의 발단이 된 대학을 일시 폐쇄했다.

이 시기에 생긴 주요 레지스탕스 조직으로는 북부 해방/Libération-Nord프랑스어 (프랑스 사회당 계열), 콩바 (기독교 민주 계열), 남부 해방/Libération-Sud프랑스어이 알려져 있다. 또한 노트르담 신심회는 그 신도 조직을 이용하여 북부와 남부 레지스탕스 조직 간의 연락을 취했다.

1941년이 되자 런던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 간에 연락이 닿게 되었다. 6월 22일에는 독소전이 시작되었고, 그동안 대독 협조적이었던 "모스크바의 딸" 프랑스 공산당의 방침이 반독으로 바뀌었다. 공산당 계열의 레지스탕스 조직은 국민 전선/Front national (Résistance)프랑스어이었으며, 공산당 계열 이외의 사람도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국민 전선은 직업별 조직을 만들어 점차 확대되었고, 레지스탕스 조직의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는 자유 프랑스의 호소에 따라 파리 시민들이 청·백·적색의 것을 몸에 걸치고, 몰래 삼색기를 나타내는 "데모"가 열렸다. 또한 이 해에는 파리의 각지에서 "V"라는 문자가 낙서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이는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는 "V 사인"이며, 독일군은 반대로 에펠탑과 의사당에 독일의 승리를 나타내는 "V"를 게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41년 8월 23일, 공산당에 의한 독일 장교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장교가 암살될 경우 구금된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의 "인질"을 처형한다는 포고가 8월 22일에 내려졌으며, 8월 30일에는 8명의 인질이 처형되었다. 8월 28일에는 라발과 마르셀 데아를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에는 프랑스에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는 허가가 내려졌다. 비시 정부와 독일군의 단속은 가혹해졌고, 드 골이 레지스탕스에 자제를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였다. 12월에는 『밤과 안개의 포고』가 내려져 독일 장병의 살상 행위를 한 자는 처형될 것이 되었다. 1942년 4월부터는 점령 지역의 경찰 활동은 친위대가 하게 되었고, 단속은 더욱 격렬해졌다.

1942년 11월 전토 점령까지는 점령 지역에서는 군사적인, 자유 지역에서는 정치적인 저항이 행해졌다. 북부 지역에서는 개인적인 암살과 인프라 파괴, 대규모 파업 등이 일어났다. 독일 측은 격렬한 적발과 밀고 장려로 대항했다. 전토 점령 후에는 비시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소멸된 것도 있어, 레지스탕스 운동의 확대와 조직화가 촉진되었다. 1943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709명의 치안 관계자가 암살되었고, 9000건의 폭탄 사건이 일어났으며, 600개의 열차가 탈선되었다.

1943년이 되자 공산당 계열 조직도 자유 프랑스와 드 골을 승인하게 되었다. 5월에는 전국 저항 평의회(CNR) 가 결성되어 자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신생 프랑스 수립을 목표로 했다. 6월 9일에는 프랑스 비밀군/Armée secrète (France)프랑스어 지휘관 샤를 드레스토랑 준장이 체포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는 격렬한 징용에서 도망친 사람들로 결성된 마키의 저항이 활발해졌다.

예술가 중에는 가브리엘 페리/Gabriel Péri영어알베르 카뮈처럼 스스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Liberté (poème)프랑스어』나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Les Mouches영어』 등도 발표되었다. 당시 삽화가였던 베르코르 (장 브륄의 필명)는 심야 총서를 창설하고, 자서 『바다의 침묵』 외에 루이 아라공, 장 카수, 장 겡 등 레지스탕스 작가의 작품을 지하 출판했다.

6. 1. 초기 저항

점령 직후의 항독 레지스탕스는 개인의 자발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밀고를 경계하며 개인의 협력자를 구했고, 이윽고 소규모 저항 조직이 생겨났다. 샤를 드 골이 1940년 6월 18일 런던에서 프랑스를 향해 항전을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지만, 이 시점의 그는 아직 큰 존재는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인 1940년 11월 11일, 모든 소재로 만든 삼색기장을 단 학생 수천 명이 샹젤리제 거리를 퍼레이드했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고, 그중에는 낚싯대 두 개(드 골, 샤를 드 골과 연관지음)를 든 학생도 있었다. 군정 당국은 123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5명의 학생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데모의 발단이 된 대학을 일시 폐쇄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 사회당 계열의 "", 기독교 민주 계열의 콩바, ""등의 주요 레지스탕스 조직이 생겨났다. 노트르담 신심회는 그 신도 조직을 이용하여 북부와 남부 레지스탕스 조직 간의 연락을 취했다.

1941년, 런던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 간에 연락이 닿게 되었다. 독소전이 시작된 6월 22일, 그동안 대독 협조적이었던 "모스크바의 딸" 프랑스 공산당의 방침이 반독으로 바뀌었다. 공산당 계열의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었으며, 공산당 계열 이외의 사람도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국민 전선은 직업별 조직을 만들어 점차 확대되었고, 레지스탕스 조직의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는 자유 프랑스의 호소에 따라 파리 시민들이 청·백·적색의 것을 몸에 걸치고, 몰래 삼색기를 나타내는 "데모"가 열렸다. 또한 이 해에는 파리의 각지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는 "V 사인"을 뜻하는 "V"라는 문자가 낙서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독일군은 반대로 에펠탑과 의사당에 독일의 승리를 나타내는 "V"를 게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41년 8월 23일, 공산당에 의한 독일 장교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장교가 암살될 경우 구금된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의 "인질"을 처형한다는 포고가 8월 22일에 내려졌으며, 8월 30일에는 8명의 인질이 처형되었다. 8월 28일에는 라발과 마르셀 데아를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에는 프랑스에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는 허가가 내려졌다. 비시 정부와 독일군의 단속은 가혹해졌고, 드 골이 레지스탕스에 자제를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였다. 12월에는 『밤과 안개의 포고』가 내려져 독일 장병의 살상 행위를 한 자는 처형될 것이 되었다. 1942년 4월부터는 점령 지역의 경찰 활동은 친위대가 하게 되었고, 단속은 더욱 격렬해졌다.

1942년 11월 전토 점령까지 점령 지역에서는 군사적인, 자유 지역에서는 정치적인 저항이 행해졌다. 북부 지역에서는 개인적인 암살과 인프라 파괴, 대규모 파업 등이 일어났다. 독일 측은 격렬한 적발과 밀고 장려로 대항했다. 전토 점령 후에는 비시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소멸된 것도 있어, 레지스탕스 운동의 확대와 조직화가 촉진되었다.

예술가 중에는 나 알베르 카뮈처럼 스스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 『』나 사르트르의 희곡 『』 등도 발표되었다. 당시 삽화가였던 베르코르 (장 브륄의 필명)는 심야 총서를 창설하고, 자서 『바다의 침묵』 외에 루이 아라공, 장 카수, 장 겡 등 레지스탕스 작가의 작품을 지하 출판했다.

6. 2. 조직화된 저항

점령 직후의 항독 레지스탕스는 개인의 자발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밀고를 경계하며 개인의 협력자를 구했고, 이윽고 소규모 저항 조직이 생겨났다. 1940년 6월 18일에는 샤를 드 골이 런던에서 프랑스를 향해 항전을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지만, 이 시점의 그는 아직 큰 존재는 아니었다.

1940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에는 모든 소재로 만든 삼색기장을 단 학생 수천 명이 샹젤리제 거리를 퍼레이드했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고, 그중에는 낚싯대 두 개(드 골, 샤를 드 골과 연관지음)를 든 학생도 있었다. 군정 당국은 123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5명의 학생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데모의 발단이 된 대학을 일시 폐쇄했다.

이 시기에 생긴 주요 레지스탕스 조직으로는 프랑스 사회당 계열의 "북부 해방/Libération-Nord프랑스어", 기독교 민주 계열의 콩바, "남부 해방/Libération-Sud프랑스어"이 알려져 있다. 또한 노트르담 신심회는 그 신도 조직을 이용하여 북부와 남부 레지스탕스 조직 간의 연락을 취했다.

1941년이 되자 런던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 간에 연락이 닿게 되었다. 6월 22일에는 독소전이 시작되었고, 그동안 대독 협조적이었던 "모스크바의 딸" 프랑스 공산당의 방침이 반독으로 바뀌었다. 공산당 계열의 레지스탕스 조직은 "국민 전선/Front national (Résistance)프랑스어"이었으며, 공산당 계열 이외의 사람도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국민 전선은 직업별 조직을 만들어 점차 확대되었고, 레지스탕스 조직의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는 자유 프랑스의 호소에 따라 파리 시민들이 청·백·적색의 것을 몸에 걸치고, 몰래 삼색기를 나타내는 "데모"가 열렸다. 또한 이 해에는 파리의 각지에서 "V"라는 문자가 낙서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이는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는 "V 사인"이며, 독일군은 반대로 에펠탑과 의사당에 독일의 승리를 나타내는 "V"를 게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43년이 되자 공산당 계열 조직도 자유 프랑스와 드 골을 승인하게 되었다. 5월에는 전국 저항 평의회(CNR) 가 결성되어 자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신생 프랑스 수립을 목표로 했다. 6월 9일에는 프랑스 비밀군/Armée secrète (France)프랑스어 지휘관 샤를 드레스토랑 준장이 체포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는 격렬한 징용에서 도망친 사람들로 결성된 마키의 저항이 활발해졌다.

예술가 중에는 가브리엘 페리/Gabriel Péri영어알베르 카뮈처럼 스스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Liberté (poème)프랑스어』나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Les Mouches영어』 등도 발표되었다. 당시 삽화가였던 베르코르 (장 브륄의 필명)는 심야 총서를 창설하고, 자서 『바다의 침묵』 외에 루이 아라공, 장 카수, 장 겡 등 레지스탕스 작가의 작품을 지하 출판했다.

6. 3. 레지스탕스 활동



점령 직후 항독 레지스탕스는 개인의 자발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밀고를 경계하며 개인 협력자를 구했고, 소규모 저항 조직이 생겨났다. 1940년 6월 18일 샤를 드 골이 런던에서 프랑스를 향해 항전을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지만, 당시에는 큰 영향력이 없었다.

1940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에는 학생들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고 낚싯대 두 개(드골을 상징)를 들기도 했다. 군정 당국은 학생들을 체포, 유죄 판결하고 대학을 일시 폐쇄했다.

주요 레지스탕스 조직으로는 프랑스 사회당 계열의 "", 기독교 민주 계열의 콩바, "" 등이 있었다. 노트르담 신심회는 신도 조직을 통해 북부와 남부 레지스탕스 조직 간 연락을 취했다.

1941년 런던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 간 연락이 닿았다. 독소전 발발 후, 프랑스 공산당은 반독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공산당 계열의 ""은 직업별 조직을 만들어 확대되었고, 레지스탕스의 큰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자유 프랑스의 호소에 따라 삼색을 나타내는 "데모"를 벌였다. 또한,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는 "V 사인"이 파리 각지에 낙서되었고, 독일군은 에펠탑과 의사당에 독일 승리를 나타내는 "V"를 게시하여 대응했다.

8월 23일 공산당원이 독일 장교를 암살했고, 독일은 인질 처형을 예고했다. 8월 30일 8명의 인질이 처형되었다. 8월 28일에는 라발과 마르셀 데아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 9월에는 강제 수용소 건설 허가가 내려졌다. 비시 정부와 독일군의 단속은 가혹해졌고, 드 골은 레지스탕스에 자제를 촉구했다. 12월, 『밤과 안개의 포고』가 내려져 독일 장병 살상 행위자는 처형 대상이 되었다. 1942년 4월부터 점령 지역 경찰 활동은 친위대가 담당하여 단속이 격화되었다.

1942년 11월 전토 점령까지 점령 지역에서는 군사적 저항, 자유 지역에서는 정치적 저항이 이루어졌다. 북부에서는 암살, 인프라 파괴, 파업이 일어났다. 전토 점령 후 비시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사라지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확대, 조직화되었다. 1943년 9월부터 3개월간 709명의 치안 관계자가 암살되었고, 9000건의 폭탄 사건, 600개 열차 탈선이 발생했다.

1943년 공산당 계열 조직도 자유 프랑스와 드 골을 승인했다. 5월, 전국 저항 평의회 (CNR)가 결성되어 자유 프랑스를 중심으로 신생 프랑스 수립을 목표로 했다. 6월 9일, 지휘관 샤를 드레스토랑 준장이 체포되었다. 징용을 피한 사람들로 결성된 마키의 저항도 활발해졌다.

예술가 중에는 나 알베르 카뮈처럼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거나, 폴 엘뤼아르의 시 『』, 사르트르의 희곡 『』처럼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작품도 발표되었다. 베르코르는 심야 총서를 창설, 자서 『바다의 침묵』 외 루이 아라공, 장 카수, 장 겡 등 레지스탕스 작가 작품을 지하 출판했다.

특수 작전 집행부와 전략 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무기와 보급품을 공중 투하하고, 낸시 웨이크와 같은 요원을 침투시켜 라디오 운용 및 파괴와 같은 전술적 조언과 전문 기술을 제공하면서, 이들은 조직적으로 철도 노선을 파괴하고, 다리를 파괴하고, 독일의 보급선을 끊고, 연합군에게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했다.[11] 독일의 대(對)파르티잔 작전으로 프랑스인 13,000~16,000명이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무고한 민간인 4,000~5,000명이 포함되었다.[11]

7. 연합군의 프랑스 해방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어 프랑스에 다시 연합군이 상륙했다. 8월 11일에는 드래군 작전이 실행되어 남프랑스도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 8월 25일에는 파리 해방이 이루어졌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파리로 이전했다.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고, 각료들은 독일 본토로 납치되었다. 한편 6월 10일에는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이 무장친위대에 의해 불태워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7월 19일에는 벨기에 국경 부근 지역과 벨기에에 "Reichskommissariat" (벨기에와 북프랑스 군정)가 설치되었고, 요제프 그로에/요제프 그로에de가 국가 변무관이 되었지만, 이 지역도 곧 연합군에게 탈환되었다. 1944년 중에 프랑스의 대부분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1945년 2월의 콜마르 전투에 의해 알자스-로렌도 탈환되었다. 하지만 생나제르, 라로셸, 로리앙의 독일군 부대는 항복을 거부했고, 연합군도 굳이 강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항복은 5월의 독일 항복 이후가 되었다 (유럽 전선 종전 (제2차 세계 대전)).

7. 1. 해방 과정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했다. 8월 11일에는 드라군 작전이 실행되어 남프랑스도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8월 25일, 파리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파리로 이전했고,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다. 한편, 6월 10일에는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이 무장친위대에 의해 불태워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1944년 중, 프랑스 대부분 지역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1945년 2월 콜마르 전투로 알자스-로렌도 탈환되었다.

7. 2. 비시 정권의 몰락

프랑스 해방은 1944년 여름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과 드래군 작전의 결과였다. 1944년 9월까지 프랑스 대부분이 해방되었으나, 일부 요새화된 프랑스 대서양 해안 잠수함 기지는 1945년 5월 독일 항복 시까지 잔류 "요새"로 남아 있었다.[36]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는 임시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여 붕괴된 제3공화국과의 연속성을 보장했다.

1944년 8월 25일, 프랑스 제2 기갑 사단은 파리를 해방하였고, 같은 해 11월 22일에는 스트라스부르를 해방하여 쿠프라의 맹세를 이행했다. 프랑스 제1 기갑 사단은 론 강, 라인 강, 다뉴브 강에 도달한 최초의 서방 연합군 부대였으며, 1945년 4월 22일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지크마링겐 망명지를 점령하여 페탱 원수를 포함한 마지막 비시 정권 망명자들을 체포했다.[37]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어 프랑스에 다시 연합군이 상륙했다. 8월 11일에는 드래군 작전이 실행되어 남프랑스도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 8월 25일에는 파리 해방이 이루어졌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파리로 이전했다.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고, 각료들은 독일 본토로 납치되었다.

협력자들은 법적 숙청(''épuration légale'')에서 재판을 받았고, 피에르 라발을 포함한 다수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 국가 원수"인 페탱 원수도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형량은 3일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37] 수천 명의 협력자들이 이른바 "야만적 숙청"(''épuration sauvage'')으로 지역 저항군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

8. 점령의 유산

독일 점령은 프랑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36]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8월 11일 드래군 작전을 통해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면서 해방이 시작되었다.[36] 8월 25일 파리 해방이 이루어졌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파리로 이전했다.[36] 프랑스 해방은 1944년 여름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과 드래군 작전의 결과였다.[36] 프랑스 대부분은 1944년 9월까지 해방되었으나, 일부 요새화된 프랑스 대서양 해안 잠수함 기지는 1945년 5월 독일 항복 시점까지 잔류 "요새"로 남아 있었다.[36]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알자스와 엘자스-로트링겐의 수도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근처 쿠프라의 맹세를 기념하는 명판, 그리고 전쟁 후 유럽의 수도.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는 임시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여 붕괴된 제3공화국과의 연속성을 보장했다.[36] 무기 대여법 덕분에 점령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장비와 보급품이 충분했으며, 프랑스 국내군을 군사 간부와 숙련된 전투병력 풀로 활용하여 프랑스 해방군(''Armée française de la Libération'')은 1944년 여름 50만 명에서 유럽 전승 기념일까지 130만 명 이상으로 성장하여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연합군이 되었다.[36]

프랑스 제2 기갑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고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해방자유 프랑스 군대의 선봉이었으며, 1944년 11월 22일 스트라스부르를 해방하여 거의 4년 전에 르클레르 장군이 맺은 쿠프라의 맹세를 이행했다.[36] 1944년 8월 15일 프로방스에 상륙한 자유 프랑스 제1군의 선봉은 제1 군단이었다. 그 선두 부대인 프랑스 제1 기갑 사단은 론 강(1944년 8월 25일), 라인 강(1944년 11월 19일) 및 다뉴브 강(1945년 4월 21일)에 도달한 최초의 서방 연합군 부대였다.[36] 1945년 4월 22일, 그들은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지크마링겐 망명지를 점령했는데, 이곳에서 페탱 원수를 포함한 마지막 비시 정권 망명자들이 호엔촐레른 왕조의 조상 성 중 하나에서 독일군에 의해 수용되었다.[36]

협력자들은 법적 숙청(''épuration légale'')에서 재판을 받았고, 그 중 1942-44년 비시 정권의 총리였던 피에르 라발을 포함하여 다수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37]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 국가 원수"인 페탱 원수도 사형을 선고받았지만(1945년 8월 14일), 그의 형량은 3일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37] 수천 명의 협력자들이 이른바 "야만적 숙청"(''épuration sauvage'')으로 지역 저항군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37]

전후, 프랑스 법정에서 독일 기업이 프랑스 기업과 맺은 여러 계약은 무효가 되었고, IG 파르벤도 해체되었다. 대독 협력자 (콜라보라시옹), 또는 그렇게 보인 사람들은 재판이나 린치 (여성의 삭발)에 처해졌고,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된 사람은 1만 명에 달했다.

8. 1. 인명 피해

8. 2. 전후 처리

프랑스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는 대독 협력자(콜라보라시옹)에 대한 숙청 작업(''에퓌라시옹'')이 이루어졌다.[37] 이 과정에서 1942-44년 비시 정권의 총리였던 피에르 라발을 포함한 다수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37]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 국가 원수"였던 페탱 원수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의 형량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37] 수천 명의 협력자들은 "야만적 숙청"(''épuration sauvage'')으로 지역 저항군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37]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된 사람은 1만 명에 달했다.

전후 프랑스 법정에서는 독일 기업이 프랑스 기업과 맺은 여러 계약을 무효화했고, IG 파르벤도 해체되었다.

8. 3. 역사적 교훈

참조

[1] 서적 The Unfree French: Life under the Occupation Allen Lane
[2] 간행물 'Eine Art "Generalplan West": Die Stuckart-Denkschrift vom 14. Juni 1940 und die Planungen für eine neue deutsch-französische Grenze im Zweiten Welt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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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France: the dark years, 1940-1944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5] 문서 The name ''ligne de démarcation'' did not figure in the terms of the armistice, but was coined as a translation of the German ''Demarkationsli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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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Webarchive « L’occupation italienne » https://web.archive.[...]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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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The Civilian Experience in German Occupied France, 1940-1944 http://digitalcommon[...] Connecticut College
[11] 서적 Konventioneller Krieg oder NS-Weltanschauungskrieg? Kriegführung und Partisanenbekämpfung in Frankreich 1943/44 München,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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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간행물 Tactical and Technical Trends https://archive.org/[...] 1943-07-29
[14] 간행물 Statistiques récentes [La population de la France d'après le recensement du 1er avril 1941] http://www.persee.fr[...]
[15] 웹사이트 "Book Review of ''Morts d'inanition: Famine et exclusions en France sous l'Occupation''" http://www.historyco[...]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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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E. M. Collingham, ''The Taste of War: World War Two and the Battle for Food'' (2011)
[18] 뉴스 Food Rationing and the Black Market in France (1940-1944) 2010-06
[19] 문서 Mouré, "Food Rationing and the Black Market in France (1940-1944)" pp 26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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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Occupation The Ordeal of France, 1940-1944 New York: CooperSquar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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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웹사이트 Les bombardements alliés sur la France durant la Seconde Guerre Mondiale, Stratégies, bilans matériels et humains http://www.cehd.sga.[...] 200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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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Django – The Life and Music of a Gipsy Legend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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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서 Summary from data compiled by the Association des Fils et Filles des déportés juifs de France, 1985.
[34] 서적 La France des années noires Paris, Seuil
[35] 간행물 Historiens et Géographes
[36] 서적 The Fog of Peace and War Planning: Military and Strategic Planning Under Uncertainty Routledge, 2007 2007-01-24
[37] 문서 by de Gaulle, then lead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French Republic]]
[38] 웹사이트 ドイツ連邦共和国国歌 https://japan.diplo.[...] ドイツ連邦共和国大使館・総領事館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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