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클라르스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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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출신으로, 나치 전범 추적 활동가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는 나치와 비시 정부 관리들을 찾아내 기소하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클라르스펠트는 1978년 프랑스에서 추방된 유대인 명단을 수록한 "프랑스 유대인 추방 기념관"을 출판했으며, "강제 이송된 프랑스 유대인 자녀 협회"를 설립하여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8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으며, 2024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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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클라르스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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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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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5년 9월 17일 |
출생지 | 부쿠레슈티, 루마니아 |
국적 | 루마니아 프랑스 |
배우자 |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1963년 결혼) |
자녀 | 2명 |
직업 | 프랑스의 활동가 및 나치 사냥꾼 |
웹사이트 | 클라르스펠트 재단 |
경력 | |
알려진 업적 | 프랑스 활동가 및 나치 사냥꾼 |
학력 | 파리 정치학교 |
소속 | 강제 이송된 프랑스 유대인 자녀 협회 (Fils et filles de déportés juifs de France: FFDJF) 회장 |
대표작 |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 기록 명부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 프랑스의 쇼아 (La Shoah en France) |
훈장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그랑크루아 (2014년)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 대십자장 (2015년) |
국가 공로 훈장 | 그랑크루아 (2018년) |
2. 어린 시절과 교육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1935년 9월 17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가족은 프랑스로 이주했다.[1] 아버지 아르노는 루마니아계 유대인 사업가였고, 어머니 라이사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클라르스펠트에게는 1931년에 태어난 누나 조르제트가 있었다.[40]
1년 후,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다.[40]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버지 아르노는 프랑스군에 지원했지만, 1940년 6월에 포로가 되었다. 1941년 봄, 아르노는 탈주하여 가족에게 돌아왔다.[40] 가족은 비시 정권 하에서 나치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중남부의 자유 지역을 전전한 후, 니스에 정착했다.[40]
1943년, 아르노는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같은 해 9월 30일, 가족은 친위대 대위 알로이스 브루너의 지휘하에 행해진 일제 검거로 인해 게슈타포의 가택 수색을 받았다. 아르노는 가족을 숨기고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다가 1944년 여름에 사망했다.[40] 어린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교 인도주의 단체인 어린이 구호 기구(Œuvre de secours aux enfants)가 운영하는 유대인 아동 보호 시설에서 양육되었다.[1]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비시 프랑스에서 전쟁을 살아남았고, 1943년 말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았다.[36]
클라르스펠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일제 검거의 밤의 일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 일제 검거를 받아 소중한 사람을 잃은 모든 유대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계승한 것은, 유대교나 유대 문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경으로서의 홀로코스트[40]와 유대 국가·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에 의해서이다"라고 말했다.[41][42]
전후,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루마니아로 돌아갔다가 1947년 1월 다시 파리에 정착했다.[42]
2. 1. 루마니아 출생과 프랑스 이주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1935년 9월 17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로 이주했다.[1] 아버지 아르노는 루마니아계 유대인 사업가였고, 어머니 라이사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클라르스펠트에게는 1931년에 태어난 누나 조르제트가 있었다.[40]1년 후,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다.[40]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버지 아르노는 프랑스군에 지원했지만, 1940년 6월에 포로가 되었다. 1941년 봄, 아르노는 탈주하여 가족에게 돌아왔다.[40] 가족은 비시 정권 하에서 나치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중남부의 자유 지역을 전전한 후, 니스에 정착했다.[40]
1943년, 아르노는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같은 해 9월 30일, 가족은 친위대 대위 알로이스 브루너의 지휘하에 행해진 일제 검거로 인해 게슈타포의 가택 수색을 받았다. 아르노는 가족을 숨기고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다가 1944년 여름에 사망했다.[40] 어린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교 인도주의 단체인 어린이 구호 기구(Œuvre de secours aux enfants)가 운영하는 유대인 아동 보호 시설에서 양육되었다.[1]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비시 프랑스에서 전쟁을 살아남았고, 1943년 말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았다.[36]
클라르스펠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일제 검거의 밤의 일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 일제 검거를 받아 소중한 사람을 잃은 모든 유대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계승한 것은, 유대교나 유대 문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경으로서의 홀로코스트[40]와 유대 국가·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에 의해서이다"라고 말했다.[41][42]
전후,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루마니아로 돌아갔다가 1947년 1월 다시 파리에 정착했다.[42]
2. 2. 아버지의 체포와 죽음
클라르스펠트는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1]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아버지 아르노는 프랑스군에 지원했지만, 1940년 6월에 포로가 되어 이듬해인 1941년 봄에 탈주하여 가족에게 돌아왔다. 가족은 비시 정권 하에서 나치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중남부의 자유 지역을 전전한 후, 니스에 정착했다. 1943년, 아르노는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40] 같은 해, 그의 아버지는 알로이스 브루너의 명령에 따라 니스에서 ''친위대''(Schutzstaffel)에 의해 체포되었다.[1] 9월 30일, 가족은 친위대 대위 알로이스 브루너의 지휘하에 행해진 일제 검거로 인해 게슈타포의 가택 수색을 받았다. 아르노는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숨겼고,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40]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다가 이듬해인 1944년 여름에 사망했다.[1],[40] 어린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교 인도주의 단체인 어린이 구호 기구(Œuvre de secours aux enfants)가 운영하는 유대인 아동 보호 시설에서 양육되었다.[1]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비시 프랑스에서 전쟁을 살아남았고, 1943년 말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았다.[36]2. 3. 전후 교육
클라르스펠트는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1943년, 그의 아버지는 알로이스 브루너의 명령에 따라 니스에서 친위대(Schutzstaffel)에 의해 체포되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클라르스펠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어린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교 인도주의 단체인 어린이 구호 기구(Œuvre de secours aux enfants)가 운영하는 유대인 아동 보호 시설에서 양육되었다.[1]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비시 프랑스에서 전쟁을 살아남았고, 1943년 말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았다.[36]3. 나치 전범 추적 활동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나치 전범 추적과 기소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1979년,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민의 아들과 딸들(FFDJF)을 창설하여 강제 이주민 후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책임자를 기소하는 활동을 펼쳤다.[15] 1981년에는 이스라엘에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약 8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추모의 숲을 조성했다.[15] 또한 쇼아 기념 재단(Fondation pour la Mémoire de la Shoah)의 부회장을 역임했다.[15]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전후 수십 년 동안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는 독일 나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 관리들을 찾아내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43년 니스에서 그의 아버지를 체포하여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낸 알로이스 브루너를 추적하는 데 힘썼다.[1]
이들의 노력으로 클라우스 바르비, 장 르구에, 르네 부스케, 폴 투비에, 모리스 파퐁 등 여러 전범이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1995년까지 전쟁 범죄로 기소된 프랑스 고위 비시 정부 관리는 4명뿐이었고, 그중 투비에만이 재판을 받았다.[11]
1989년, FFDJF는 비시 정부 시절 프랑스 경찰 수장이었던 르네 부스케를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고발했다.[15] 그는 1991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인 1993년에 사망했다.[15]
클라르스펠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치인들의 전시 활동을 폭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1986년에는 전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이 베르마흐트 장교 시절의 전시 활동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12] 1996년, 구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는 라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가 보스니아 무슬림에 대한 전쟁 범죄와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14]
2012년 1월, 클라르스펠트는 샤를 아즈나부르 등과 함께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부인자를 처벌하는 법안을 프랑스 의회가 비준하도록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16][17]
60년이 지난 후, 클라르스펠트는 나치 사냥에서 벗어나 현대 우익 및 신 파시즘에 반대하며 사회 정의를 위한 보다 일반적인 활동으로 전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18]
3. 1.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 뺨 사건
1968년 4월 2일, 베아트 클라르스펠트는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당 대회에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의 연설을 막고 "키징어는 나치다, 사임하라"고 외치며 경비원에게 끌려 나갔다.[42] 같은 해 11월 7일, 베아트는 CDU 당 대회에서 키징어에게 뺨을 때려 체포되었다.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 유예 4개월로 감형되었다.[42] 베아트는 "과거 나치가 당수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뺨을 때린 것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전 세계에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독일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42]2012년, 슈타지 기록 보관소는 1968년 11월 7일 베아트 클라르스펠트가 키징어 총리의 뺨을 공개적으로 때린 사건[2]이 동독 정부의 동의와 지원 하에 이루어졌음을 밝혔다(''브라운부흐'')[3][4] 베아트 클라르스펠트는 이 사건으로 슈타지로부터 2000DM을 받았다.[5][6]
3. 2. 쿠르트 리슈카 등 나치 전범 기소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 독일 나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 관리들을 찾아내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노력으로 클라우스 바르비(1987년 유죄 판결), 장 르구에(1989년 사망, 프랑스 사법부는 사망 후 그의 반인도적 범죄 연루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인되었다고 공식 발표), 르네 부스케(1993년 재판 중 암살), 폴 투비에(1994년 유죄 판결), 모리스 파퐁(1998년 유죄 판결) 등 여러 관리가 기소되었다.[11] 1970년대에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모사드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한 것처럼 바르비를 납치하려 했으나,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국제적 압력을 통해 그의 인도를 강요하기로 결정했다.[11]1971년부터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프랑스에서 유대인 강제 이송을 주도한 주요 친위대 대원들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79년 10월 23일부터 1980년 2월 11일까지 쾰른 지방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프랑스 유대인 수천 명의 체포와 강제 이송을 주도한 쿠르트 리슈카, 보르도 및 파리의 유대인 일제 검거를 주도한 헤르베르트 하겐, 1942년 7월의 벨 디브 학살 사건에 연루된 Ernst Heinrichsohn|에른스트 하인리히존프랑스어이 기소되었다. 그 결과, 리슈카는 징역 10년, 하겐은 12년, 하인리히존은 6년의 판결을 받았다.
3. 3. 알로이스 브루너 추적
1943년 9월 30일, 클라르스펠트 가족은 친위대 대위 알로이스 브루너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일제 검거로 인해 게슈타포의 가택 수색을 받았다. 아버지 아르노는 가족을 숨기기 위해 희생하여 체포되었고,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르노는 아우슈비츠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다 1944년 여름에 사망했다.[40]3. 4. 클라우스 바르비, 모리스 파퐁 등 기소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전후 수십 년 동안 홀로코스트의 최악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 독일 나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 관리들을 찾아내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는 데 힘썼다.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노력으로 여러 관리들이 기소되었다.인물 | 기소/판결 연도 | 비고 |
---|---|---|
클라우스 바르비 | 1987년 유죄 판결 | |
장 르구에 | 1989년 사망 | 프랑스 사법부는 사망 후 그의 반인도적 범죄 연루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인되었다고 공식 발표 |
르네 부스케 | 1993년 | 재판 중 암살 |
폴 투비에 | 1994년 유죄 판결 | |
모리스 파퐁 | 1998년 유죄 판결 |
1970년대에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모사드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바르비를 납치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그들은 그의 인도를 강요하기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995년까지 전쟁 범죄로 기소된 프랑스 고위 비시 정부 관리는 4명뿐이었고, 투비에만이 재판을 받았다.[11]
4. 홀로코스트 연구 및 기념 활동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홀로코스트 연구 및 기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9년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민의 아들과 딸들(FFDJF)을 창설하여 강제 이주민 후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책임자를 기소하는 활동을 펼쳤다.[1] 1981년 FFDJF는 이스라엘에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약 8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추모의 숲을 조성했다. 기념비에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8만 명의 프랑스인 희생자들의 이름, 출생 날짜, 출생지가 새겨져 있다.[15]
1978년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를 출판하여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프랑스에서 살해된 8만 명 이상의 유대인 명단을 기록했다.[22][23] 이 책은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간 75,700명 이상의 유대인 추방자 명단을 담고 있으며, 이들 중 2,564명만이 살아남았음을 밝혔다. 추방자들은 신생아부터 93세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였고, 37개국 출신이었으며, 프랑스와 폴란드 출신이 가장 많았다.[22][23] 2012년에는 희생자들의 추가 정보를 담은 증보판이 출판되었고, 2018년부터는 온라인 검색이 가능해졌다.[24]
2001년에는 클라르스펠트가 수집한 자료와 사진, 연표와 해설을 묶은 《프랑스의 쇼아》 전 4권이 출판되었다. 클라르스펠트는 쇼아 기념 재단의 부회장이기도 하다.[15]
4. 1.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 출판
1978년,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에서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프랑스에서 살해된 8만 명 이상의 유대인 명단을 수록한 책인 《프랑스 유대인 추방 기념관》을 출판했다.[22][23]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강제 수용소로 추방된 75,7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기록하고 있으며, 추방자 중 2,564명만이 전쟁에서 살아남았음을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드랑시의 임시 수용소에서 왔으며, 신생아부터 93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고 37개국에서 왔으며, 프랑스(22,193명)와 폴란드(14,459명) 출신이 가장 많았고, 미국(10명) 출신도 소수 있었으며, 심지어 타히티 출신도 있었다.[22][23]2012년,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인 추방 기념관》의 증보판을 출판하여 여성의 결혼 전 성, 프랑스 내 추방자들의 마지막 주소, 그리고 거쳐간 임시 또는 억류 수용소를 추가했다. 이 명단은 알파벳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2018년부터 이 기념관은 온라인 검색 엔진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24]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1978년,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를 제작·출판했다. 이 명부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7만 6천 명을 열차별로 분류한 것으로, 쾰른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었다. 클라르스펠트는 1994년까지 희생된 유대인 어린이 1만 1천 명의 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의 정보와 사진을 찾아 조사를 계속했다. 2012년에는 이후 신원이 밝혀진 유대인 명부를 추가한 증보판이 출판되었다.[44]
나치 독일 점령하의 생활을 그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1941년. 파리의 수배자》(원제는 주인공 유대인 소녀의 이름에서 따온 도라 브뤼데르 (''Dora Bruder''); 1997년 출판)를 쓰게 된 계기가 이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였으며, 실제로 클라르스펠트로부터 직접 도라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모디아노는 『리베라시옹』지에 게재된 기사에서 "문학을 만들어내는 주요 원동력은 종종 기억이다. 그렇기 때문에 써야만 했던 유일한 책은 세르주 클라르스펠트가 쓴 것과 같은 종류의 '기록 명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세르주 클라르스펠트가 보여준 규범을 따르려고 했다. 며칠이고 이 '기록 명부'를 뒤적이면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어떤 보충적인 사실, 주소, 어떤 사소한 정보라도 좋으니 찾아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41]
저서
-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 1978.
-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 신판 증보판. FFDJF (강제 이송된 프랑스 유대인 자녀), 2012.
4. 2. 《프랑스의 쇼아》 출판
1978년,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에서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프랑스에서 살해된 8만 명 이상의 유대인 명단을 수록한 ''프랑스 유대인 추방 기념관''을 출판했다. 이 책은 파리 유대인 공동체 기록 보관소에서 클라르스펠트 부부가 찾아낸, 각 추방 열차에 대해 타자된 원본 명단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각 추방 열차별로 명단을 작성하여 모든 추방자의 이름, 출생지, 출생일 및 국적을 기록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강제 수용소로 추방된 75,7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기록하고 있으며, 추방자 중 2,564명만이 전쟁에서 살아남았음을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드랑시 수용소의 임시 수용소에서 왔으며, 신생아부터 93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고 37개국에서 왔으며, 프랑스(22,193명)와 폴란드(14,459명) 출신이 가장 많았고, 미국(10명) 출신도 소수 있었으며, 심지어 타히티 출신도 있었다.[22][23]2012년,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인 추방 기념관''의 업데이트된 버전을 출판하여 여성의 결혼 전 성, 프랑스 내 추방자들의 마지막 주소, 그리고 거쳐간 임시 또는 억류 수용소를 추가했다. 이 명단은 알파벳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2018년부터 이 기념관은 온라인 검색 엔진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24]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1978년,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프랑스어)』를 제작·출판했다. 이 명부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7만 6천 명을 열차별로 분류한 것으로, 쾰른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었다. 클라르스펠트는 1994년까지 희생된 유대인 어린이 1만 1천 명의 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의 정보와 사진을 찾아 조사를 계속했다. 2012년에는 이후 신원이 밝혀진 유대인 명부를 추가한 증보판이 출판되었다.[44]
파트릭 모디아노는 『1941년. 파리의 수배자』(원제는 주인공 유대인 소녀의 이름에서 따온 Dora Bruder프랑스어, 1997년 출판)를 쓰게 된 계기가 이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의 기록 명부』였으며, 실제로 클라르스펠트로부터 직접 도라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모디아노는 『리베라시옹』지에 게재된 기사에서 "문학을 만들어내는 주요 원동력은 종종 기억이다. 그렇기 때문에 써야만 했던 유일한 책은 세르주 클라르스펠트가 쓴 것과 같은 종류의 '기록 명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라고 말했다.[41]
2001년, 클라르스펠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사진,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연표와 해설을 묶은 『프랑스의 쇼아 (La Shoah en France프랑스어)』 전 4권이 출판되었다(어린이 『기록 명부』는 제4권에 수록).
4. 3. '강제 이송된 프랑스 유대인 자녀 협회(FFDJF)' 설립
1979년,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민의 아들과 딸들(FFDJF)을 창설했다.[1] 이 단체는 강제 이주민 후손들의 권익을 옹호하며,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기소하는 활동을 펼쳤다. 1981년, 이 협회는 이스라엘에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8만 명의 프랑스인 희생자들의 이름, 출생 날짜, 출생지가 새겨져 있다. 약 8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추모의 숲을 조성했다. 클라르스펠트는 쇼아 기념 재단(Fondation pour la Mémoire de la Shoah)의 부회장이기도 하다.[15]4. 4. 쇼아 기념 재단 활동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쇼아 기념 재단(Fondation pour la Mémoire de la Shoah)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15]5. 슈타지 협력 논란
2012년, 슈타지의 기록 보관소는 베아트 클라르스펠트가 1968년 11월 7일에 당시 독일 총리였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의 뺨을 공개적으로 때린 사건[2]이 동독 정부의 동의와 지원 하에 서독 정치인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던 중 이루어졌음을 밝혔다(''브라운부흐'')[3][4] 베아트 클라르스펠트는 이 행동에 대해 슈타지로부터 2000DM을 받았다.[5][6]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베아트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모두 정기적인 슈타지 접촉자였음이 밝혀졌다.[7] 작센주 슈타지 기록 보관 담당관에 따르면, 그들은 196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활동으로 서독 정치인들을 협박하기 위해 슈타지와 협력했다.[8]
2012년 작센 주 슈타지 문서 담당 국가 위원인 루츠 라테노우는 독일 통일과 슈타지 문서 공개 이후, 베아트 클라르스펠트가 1960년대 동독 슈타지와 협력했다고 밝혔다. 슈타지는 그녀에게 서독 정치인들의 전시 활동에 대한 증거 자료를 제공했다.[27][28] 전 슈타지 간부였던 귄터 본작과 헤르베르트 브레머의 새로운 저서에도 두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슈타지 협력 및 접촉자 신분이 기록되었다.[7]
6. 최근 활동 및 입장
클라르스펠트는 나치 전범 추적 활동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의 극우주의와 신 파시즘에 반대하는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 1월, 샤를 아즈나부르, 로베르 게디기앙 등과 함께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부인자를 처벌하는 법안을 프랑스 의회가 비준하도록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16][17]
2022년에는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의 딸, 르 펜에게는 안 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공동 서명했다.[19] 그러나 2024년 프랑스 입법 선거를 앞두고는 국민 연합이 더 이상 극우 정당이 아니며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포퓰리즘 그룹이라고 주장하며, 좌파 연합인 새로운 인민 전선에 맞서 마린 르 펜과 국민 연합에 투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20][21] 그는 장-뤽 멜랑숑이 이끄는 급진 좌파가 반유대주의와 반 시오니즘으로 이동했다며, 이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20][21]
클라르스펠트는 라 셰느 인포와의 인터뷰에서 "국민 연합은 유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며, 지난 60년간 제가 해온 활동을 고려할 때, 반유대주의 정당과 친유대 정당 사이에서 친유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라고 말했다.[19] 이러한 그의 입장 변화는 르 몽드로부터 "역사를 뒤집기 위해 단락을 끊다"라는 비판을 받으며,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지적을 받았다.[19]
6. 1. 반유대주의 및 극우주의 반대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전후 수십 년 동안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 독일 나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 관리들을 찾아내어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노력으로 클라우스 바르비(1987년 유죄 판결), 장 르구에(1989년 사망, 프랑스 사법부는 사망 후 그의 반인도적 범죄 연루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인되었다고 공식 발표), 르네 부스케(1993년 재판 중 암살), 폴 투비에(1994년 유죄 판결), 모리스 파퐁(1998년 유죄 판결) 등 여러 관리가 기소되었다.[11] 1970년대에는 모사드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한 것처럼 바르비를 납치하려 했으나, 국제적 압력을 통해 그의 인도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95년까지 프랑스 고위 비시 정부 관리 중 4명만이 전쟁 범죄로 기소되었고, 투비에만이 재판을 받았다.[11]클라르스펠트 부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치인들의 전시 활동을 폭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1986년에는 쿠르트 발트하임 전 유엔 사무총장이 베르마흐트 장교 시절의 전시 활동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1996년 구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는 라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가 보스니아 무슬림에 대한 전쟁 범죄와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2009년 12월에는 교황 비오 12세의 시복에 대해, 유대인들이 이 과정에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많은 이들이 비오 12세가 유대인 박해에 기여하고 나치에 맞서 교회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시복에 항의했다.[12][13][14]
1979년, 클라르스펠드는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민의 아들과 딸들(FFDJF)을 창설하여 강제 이주민 후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책임자를 기소하는 활동을 펼쳤다. 1981년, 이 협회는 이스라엘에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8만 명의 프랑스인 희생자들의 이름, 출생 날짜, 출생지가 새겨져 있으며, 약 8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추모의 숲을 조성했다. 클라르스펠드는 쇼아 기념 재단(Fondation pour la Mémoire de la Shoah)의 부회장이기도 하다. 1989년, FFDJF는 비시 정부 시절 프랑스 경찰 수장이었던 르네 부스케를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고발했다. 그는 1991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재판 직전인 1993년에 사망했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국 영토 내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으며, 정부는 2000년 반유대주의 박해 희생자의 자녀들에게 보상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클라르스펠드의 활동은 1995년 시라크 대통령의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5]
2012년 1월, 클라르스펠드는 샤를 아즈나부르, 로베르 게디기앙, 베르나르-앙리 레비, 미셸 온프레 등과 함께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 부인자를 처벌하는 법안을 프랑스 의회가 비준하도록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16][17] 60년이 지난 후, 클라르스펠드는 나치 사냥에서 벗어나 현대 우익 및 신 파시즘에 반대하며 사회 정의를 위한 보다 일반적인 활동으로 전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18]
2022년, 클라르스펠드는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의 딸, 르 펜에게는 안 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공동 서명했다.[19] 2024년 프랑스 입법 선거를 앞두고 ''라 스탐파''(La Stampa)와의 인터뷰에서, 2017년과 2022년에 마린 르 펜의 극우 정당을 막기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투표했지만, 1차 투표에서는 마크롱의 정당에 투표하겠지만 좌파 연합인 새로운 인민 전선에 맞서 르 펜과 국민 연합에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2023년 하마스가 주도한 이스라엘 공격을 비난했다.[20][21] 그는 국민 연합이 더 이상 극우 정당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포퓰리즘 그룹이며, 새로운 인민 전선은 라 프랑스 앵수미즈와 장-뤽 멜랑숑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급진 좌파가 반유대주의와 반 시오니즘으로 이동했으며, 이는 "위험"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며 멜랑숑이 반유대주의자이고 이스라엘에 반대하며, 이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했다.[20][21] 라 셰느 인포와의 인터뷰에서, "국민 연합은 유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며, 지난 60년간 제가 해온 활동을 고려할 때, 반유대주의 정당과 친유대 정당 사이에서 친유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라고 말했다.[19] ''르 몽드''는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역사를 뒤집기 위해 단락을 끊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예상치 못한 국민 연합의 정당화"가 그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다.[19]
6. 2. 2024년 프랑스 총선 관련 입장
2024년 프랑스 입법 선거를 앞두고 라 스탐파와의 인터뷰에서 클라르스펠트는 2017년과 2022년에 자신과 아내가 마린 르 펜의 극우 정당을 막기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투표했지만, 1차 투표에서는 마크롱의 정당에 투표하겠지만, 좌파 연합인 새로운 인민 전선에 맞서 르 펜과 국민 연합에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20][21] 그는 2023년 하마스가 주도한 이스라엘 공격을 비난했다.[20][21]그는 국민 연합이 더 이상 극우 정당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포퓰리즘 그룹이며, 새로운 인민 전선은 라 프랑스 앵수미즈와 장-뤽 멜랑숑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20][21] 그는 급진 좌파가 반유대주의와 반 시오니즘으로 이동했으며, 이는 "위험"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며 멜랑숑이 반유대주의자이고 이스라엘에 반대하며, 이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했다.[20][21]
라 셰느 인포와의 인터뷰에서 클라르스펠드는 만약 두 세력 중 선택해야 한다면 결정을 내렸으며, "국민 연합은 유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며, 지난 60년간 제가 해온 활동을 고려할 때, 반유대주의 정당과 친유대 정당 사이에서 친유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라고 말했다.[19]
르 몽드는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역사를 뒤집기 위해 단락을 끊다"라는 제목으로, 학자 미셸 코엔-할리미, 작가 프란시스 코엔, 영화 감독 레오폴드 폰 페르슈어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그의 "예상치 못한 국민 연합의 정당화"가 그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다.[19]
7. 서훈
198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받아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업적이 인정받았다.[29] 2010년 7월 7일, 당시 프랑스 총리 프랑수아 피용으로부터 프랑스 총리 관저인 마티뇽 저택에서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받았다.[30][31] 2014년 1월, 레지옹 도뇌르 서열은 그랑 오피시에로 승격되었다.[32][33] 2015년 5월, 나치 전범을 재판에 넘기기 위한 노력의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1급 연방 공로 십자장)을 받았다.[34][35] 2015년 10월 26일, 유네스코는 클라르스펠트 부부를 "홀로코스트 교육 및 대량 학살 방지를 위한 명예 대사 및 특별 특사"로 지정했다.[36] 2015년 11월 20일, 생 샤를 훈장 오피시에가 되었다.[37] 2024년 5월 27일,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그를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로 승진시켰다.[38]
8. 저서
-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프랑스어, 1978. 이 책은 프랑스에서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프랑스에서 살해된 8만 명 이상의 유대인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각 추방 열차별로 명단을 작성하여 모든 추방자의 이름, 출생지, 출생일 및 국적을 기록했다.[22][23]
-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프랑스어. 신판 증보판. FFDJF (강제 이송된 프랑스 유대인 자녀), 2012. 이 책은 여성의 결혼 전 성, 프랑스 내 추방자들의 마지막 주소, 그리고 거쳐간 임시 또는 억류 수용소를 추가했다. 2018년부터 이 기념관은 온라인 검색 엔진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24]
- The Children of Izieu: A Human Tragedy영어. 뉴욕: 해리 N. 에이브럼스 출판사, 1985. Les enfants d'Izieu프랑스어, 1985의 번역본.
- French Children of the Holocaust: A Memorial영어. 뉴욕: 뉴욕 대학교 출판부, 1996. Le mémorial des enfants juifs déportés de France프랑스어, 1995의 번역본.
- L'Album d'Auschwitz프랑스어. 공저; 서문 시몬 베이유, Al Dante, 2005
- Adieu les enfants (1942-1944)프랑스어, Fayard, 2005
- L'étoile des Juifs프랑스어, L'Archipel, 2002
- En souvenir de Georgy : Lettres de la maison d'Izieu : 1935-1944프랑스어, Aperture, 2002
- La Shoah en France (septembre 1942-août 1944)프랑스어, Fayard, 2001
- 제1권: Vichy-Auschwitz. La solution finale de la question juive en France프랑스어; 초판 1983년
- 제2권: Le calendrier des déportations프랑스어; 초판 1993년
- 제3권: Le calendrier des déportations프랑스어
- 제4권: Le mémorial des enfants juifs déportés de France프랑스어; 초판 1994년
- La spoliation dans les camps de province프랑스어, 공저, La Documentation Française, 2000
- Destin à part. Seul déporté rescapé de la rafle de Clans du 25 octobre 1943프랑스어, 공저, L'Harmattan, 2000
- La rafle de la rue Sainte-Catherine à Lyon le 9 février 1943프랑스어
- Les transferts de juifs du camp de Rivesaltes et de la région de Montpellier vers le centre de Drancy en vue de leur déportation, 10 août 1942프랑스어, 1993
- Journal de Louis Aron, Directeur de la Maison Israélite de Refuge pour l'enfance: Neuilly-sur-Seine 1939, Crocq (Creuse) 1939-1942프랑스어, FFDJF, 베아트 클라르스펠트 재단 등 공저, 1998
- La traque des nazis - De 1945 à nos jours프랑스어, 공저, ACROPOLE, 2010
- La traque des criminels nazis프랑스어, 공저, Éditions Tallandier, 2013
- Le combat d'une vie, 25 ans à traquer les nazis프랑스어, J'AI LU - LIBRIO, 2015
- Mémoires프랑스어, 베아트 클라르스펠트와 공저, Fayard / Flammarion, 2015.
- 앙리 키치카의 캠프의 밤 속에서 잃어버린 청소년기프랑스어 서문.[25]
- Mémorial de la Déportation des Juifs de France프랑스어, 베아트 클라르스펠트와 공저, 20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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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웹사이트
Les Fils et Filles des déportés juifs de France
http://www.memoriald[...]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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