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램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랭크 램지는 1903년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교류하며 《논리철학 논고》의 영어판 번역에 참여했고, 램지 이론으로 알려진 조합론 분야의 램지 정리를 증명했다. 또한, 경제학 분야에서 주관적 확률, 최적 과세, 램지 성장 모형 등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빈 학파 - 카를 구스타프 헴펠
카를 구스타프 헴펠은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로, 여러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다비트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받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거리가 조성되었다. - 빈 학파 - 리하르트 폰 미제스
리하르트 폰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응용 수학자로서 유체역학, 항공역학, 통계학 분야에 기여했고, 변형 에너지 이론을 개발했으며, 확률론 연구와 도박 시스템의 불가능성을 정의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 -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캐나다의 저명한 역사가, 소설가, 정치인이자 국제적 지식인으로, 인권, 국제 관계, 국가 건설에 관한 저술 활동과 하버드 케네디 스쿨 교수, 그리고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교수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거시경제 이론을 통해 현대 경제학과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그의 사상은 현대 경제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20세기 분석철학의 기초를 다지고 수학의 논리적 환원을 시도한 영국의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정치 운동가로, 평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독일어 시인이자 소설가, 서간 작가로, 그의 작품은 삶의 경험과 연관되어 종교적 신비주의, 죽음과 실존, 예술가의 고뇌 등을 다루며 20세기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랭크 램지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프랭크 플럼프턴 램지 |
출생 | 1903년 2월 22일 |
출생지 | 케임브리지, 캠브리지셔, 잉글랜드 |
사망 | 1930년 1월 19일 |
사망지 | 사우스워크, 런던, 잉글랜드 |
국적 | 영국 |
학력 | |
교육 |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 (BA, 1923년) |
경력 | |
소속 | 킹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
학문 분야 | |
주요 관심사 | 조합론 수학 철학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
주요 아이디어 | 단순 유형 이론 진리 중복 이론 램지 문장 램지-루이스 방법 램지 이론 램지 문제 램지-드보레츠키-밀만 현상 램지 테스트 램지 정리 램지-캐스-쿱먼스 모형 케인스-램지 규칙 베르나이스-쇤핑켈-램지 클래스 |
영향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찰스 샌더스 퍼스 버트런드 러셀 찰스 케이 오그던 |
영향받은 인물 | 수전 핵 이반 베르닝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개인사 | |
배우자 | 레티스 램지 (1925년 결혼) |
자녀 | 2명 |
2. 생애
프랭크 램지는 1903년 2월 22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막달렌 칼리지의 학장이었던 아버지 아서 램지이다.[37] 프랭크 램지 역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였다.
램지는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매료되어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38]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를 떠나서 오스트리아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램지는 그를 방문하여[39] 철학에 관한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램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영어판 번역자이기도 하다.
램지는 1903년 2월 22일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서 스탠리 램지(Arthur Stanley Ramsey, 1867–1954)는 수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마그달렌 칼리지(Magdalene College, Cambridge)의 학장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메리 에이그니스 스탠리(Mary Agnes Stanley, 1875–1927)였다. 그는 두 명의 남매와 두 명의 여동생 중 장남이었고, 네 명의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 그의 동생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는 후에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되었다. 그는 1915년 윈체스터 칼리지(Winchester College)에 입학했고, 나중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에서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제자이자 사도(Apostles)의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 1923년, 그는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최우등(first class)으로 탁월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수석 랭글러(Senior Wrangler, 수석 졸업생)로 선정되었다.[2] 쾌활하고, 소박하며 겸손했던 램지는 수학 및 과학 연구 외에도 많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십대 시절부터 램지는 그의 형제가 증명했듯이 심오한 능력과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보였다.
1923년, 램지는 케임브리지에서 몰팅 하우스 스쿨(Malting House School)을 설립하려던 제프리(Geoffrey Pyke)와 마가렛 파이크(Margaret Pyke)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파이크 부부는 램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휴가를 함께 보냈고, 어린 아들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가렛은 램지의 애정의 대상이 되었고, 램지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느 오후 나는 그녀와 오르타 호수(Lake Orta)에 혼자 나갔고 욕망으로 가득 차서 돌아와 나란히 두 개의 침대에 누웠는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책을 읽는 척했지만, 마음속에는 끔찍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약 한 시간 후에 나는 말했습니다.(그녀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버네 존스풍으로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마가렛, 나랑 자고 싶어요?'[3]
마가렛은 그의 제안을 고려할 시간을 원했고, 그들 사이에는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1924년 초 램지의 우울한 기분에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정신분석을 위해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다. 비엔나에서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한 동료 사도 리오넬 페노즈(Lionel Penrose, 역시 지크프리트 베른펠트(Siegfried Bernfeld)와 정신분석을 받았다)를 포함한 많은 동시대 사람들처럼 램지는 정신분석에 지적으로 관심이 있었다. 램지의 정신분석가는 프로이트(Freud)의 제자인 테오도어 라이크(Theodor Reik)였다. 치료를 받기 위한 정당성 중 하나로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의식적인 충동이 수학자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방문하기 위해 푸흐베르크암슈네베르크(Puchberg am Schneeberg)로 여행을 갔고, 비트겐슈타인 가족과 친구가 되었으며, 비엔나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손타크스베르크(Sonntagsberg)의 A.S. 네일(A.S. Neill)의 실험 학교를 방문했다. 1924년 여름, 그는 라이크와 함께 돌비아코(Dobbiaco)(남티롤(South Tyrol))에서 정신분석을 계속했는데, 그곳에서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가 함께 정신분석을 받고 있었다. 램지는 1924년 10월에 영국으로 돌아왔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지원을 받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Cambridge)의 펠로우가 되었다. 그는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 리오넬 페노즈(Lionel Penrose), 해롤드 제프리스(Harold Jeffreys), 존 릭먼(John Rickman (psychoanalist)),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와 함께 케임브리지 정신분석 그룹에 합류했는데, 회원 자격 요건은 정신분석 완료였다.
램지는 1925년 8월 레티스 베이커(Lettice Baker)와 결혼했는데, 램지가 그의 아내가 묘사했듯이 '급진적인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결혼식은 등록 사무소에서 거행되었다. 이 결혼으로 두 명의 딸을 얻었다. 램지가 사망한 후, 레티스 램지(Lettice Ramsey)는 사진작가 헬렌 머스프랫(Helen Muspratt)과 함께 케임브리지에 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4] 그의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램지는 그의 형제가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의 사제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관용적"이었다.[5]
1926년 그는 수학 강사가 되었고, 나중에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수학 연구소장이 되었다.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 선언문(1929)에는 그의 세 편의 논문이 밀접하게 관련된 저자들의 서지에 나와 있다.[6][7][8]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프랭크 램지는 1903년 2월 22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막달렌 칼리지의 학장이었던 아서 스탠리 램지(Arthur Stanley Ramsey, 1867–1954)이다.[37] 그의 어머니는 메리 에이그니스 스탠리(Mary Agnes Stanley, 1875–1927)였다.[2] 그는 두 명의 남매와 두 명의 여동생 중 장남이었고, 네 명의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 그의 동생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는 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2]램지는 1915년 윈체스터 칼리지(Winchester College)에 입학했고, 나중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1923년, 그는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최우등(first class)으로 탁월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수석 랭글러(Senior Wrangler, 수석 졸업생)로 선정되었다.[2] 쾌활하고, 소박하며 겸손했던 램지는 수학 및 과학 연구 외에도 많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십대 시절부터 램지는 심오한 능력과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보였다. 그의 동생 마이클 램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으며, 영문학에 대해 엄청나게 폭넓게 읽었고, 수학 전문가가 되려는 직전이었음에도 고전을 즐기고 있었으며, 정치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고, 잘 알고 있었으며, 정치적 관심과 약자를 옹호하는 좌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23년, 램지는 케임브리지에서 몰팅 하우스 스쿨(Malting House School)을 설립하려던 제프리(Geoffrey Pyke)와 마가렛 파이크(Margaret Pyke)와 친구가 되었다. 램지는 마가렛에게 애정을 느껴 구애를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 인해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고, 1924년 초 램지는 우울한 기분에 정신분석을 위해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다.[3] 비엔나에서 램지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하여[39] 푸흐베르크암슈네베르크(Puchberg am Schneeberg)로 여행을 갔고, 비트겐슈타인 가족과 친구가 되었으며, 비엔나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손타크스베르크(Sonntagsberg)의 A.S. 네일(A.S. Neill)의 실험 학교를 방문했다. 램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영어판 번역자이기도 하다.[38] 1924년 여름, 그는 라이크와 함께 돌비아코(Dobbiaco)(남티롤(South Tyrol))에서 정신분석을 계속했는데, 그곳에서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가 함께 정신분석을 받고 있었다. 램지는 1924년 10월에 영국으로 돌아왔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지원을 받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Cambridge)의 펠로우가 되었다.[3] 그는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 리오넬 페노즈(Lionel Penrose), 해롤드 제프리스(Harold Jeffreys), 존 릭먼(John Rickman (psychoanalist)),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와 함께 케임브리지 정신분석 그룹에 합류했는데, 회원 자격 요건은 정신분석 완료였다.
램지는 1925년 8월 레티스 베이커(Lettice Baker)와 결혼했는데, 램지가 '급진적인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결혼식은 등록 사무소에서 거행되었다.[4] 이 결혼으로 두 명의 딸을 얻었다. 램지가 사망한 후, 레티스 램지(Lettice Ramsey)는 사진작가 헬렌 머스프랫(Helen Muspratt)과 함께 케임브리지에 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4] 그의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램지는 그의 형제가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의 사제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관용적"이었다.[5]
1926년 그는 수학 강사가 되었고, 나중에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수학 연구소장이 되었다.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 선언문(1929)에는 그의 세 편의 논문이 밀접하게 관련된 저자들의 서지에 나와 있다.[6][7][8]
2. 2.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과 교류
1903년 2월 22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프랭크 램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38] 램지는 I. A. 리차즈와 C. K. 오그던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19세의 나이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독일어 원문 번역 초고를 작성하였다.[9][10] 램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1923년 수학 트라이포스에서 수석 수석 졸업자로 졸업한 후 오스트리아 푸흐베르크 암 슈네베르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를 방문하여 2주 동안 ''논리철학 논고''에 대해 토론했다.[39] 비트겐슈타인은 램지의 번역본을 수정하고 주석을 추가했으며, 이는 1933년 두 번째 판에 반영되었다.램지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협력하여 비트겐슈타인을 케임브리지로 다시 데려왔다.[38]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했고, G. E. 무어와 버트런드 러셀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램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명목상 지도교수가 되었으며, 세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의 연구 활동을 위한 재정 지원을 마련했다.
1929년 램지는 비트겐슈타인, 피에로 스라파와 함께 수학과 철학에 대한 문제를 정기적으로 논의했다. 램지의 이러한 대화에 대한 기여는 스라파와 비트겐슈타인 모두 후속 연구에서 인정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서문에서 램지와의 "끝없는 대화"가 ''논리철학 논고''의 "중대한 실수"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한다.[11]
2. 3. 결혼과 무신론
1925년 8월, 프랭크 램지는 레티스 베이커(Lettice Baker)와 결혼했다. 램지는 스스로를 '급진적인 무신론자'라고 묘사했기 때문에[4] 결혼식은 등기소에서 거행되었다.[4] 이들은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4] 램지는 무신론을 주장하였지만, 그의 동생 마이클 램지가 잉글랜드 교회의 사제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관용적"이었다.[5]2. 4.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
1923년, 램지는 케임브리지에서 몰팅 하우스 스쿨(Malting House School)을 설립하려던 제프리(Geoffrey Pyke)와 마가렛 파이크(Margaret Pyke)와 친구가 되었다.[3] 램지는 정신분석을 위해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고, 프로이트의 제자인 테오도어 라이크(Theodor Reik)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3]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의식적인 충동이 수학자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3]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하기 위해 푸흐베르크암슈네베르크(Puchberg am Schneeberg)로 여행을 갔고, 비트겐슈타인 가족과 친구가 되었으며, 비엔나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A.S. 네일(A.S. Neill)의 실험 학교를 방문했다.[3] 램지는 1924년 여름, 라이크와 함께 돌비아코(Dobbiaco)(남티롤(South Tyrol))에서 정신분석을 계속 받았고,[3] 같은 해 10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3] 그는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 리오넬 페노즈(Lionel Penrose), 해롤드 제프리스(Harold Jeffreys), 존 릭먼(John Rickman (psychoanalist)), 제임스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와 함께 케임브리지 정신분석 그룹에 합류했는데, 회원 자격 요건은 정신분석 완료였다.[3]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 선언문(1929)에는 그의 세 편의 논문이 밀접하게 관련된 저자들의 서지에 나와 있다.[6][7][8]2. 5. 이른 죽음
프랭크 램지는 만성 간 질환을 앓다가 복부 수술 후 황달이 발생하여 1930년 1월 19일 런던의 가이 병원(Guy's Hospital)에서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그의 사망 원인은 진단되지 않은 렙토스피라증(leptospirosis)일 가능성이 있는데, 열렬한 수영 애호가였던 램지는 캠 강에서 수영을 하다 감염되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있다.[12]그는 승천 교구 묘지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부모도 같은 곳에 묻혀 있다.[13]
램지의 노트와 원고는 니콜라스 레셔(Nicholas Rescher)에 의해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의 과학철학 아카이브에 인수되었다.[14][15] 이 자료에는 편지가 몇 통밖에 없지만, 많은 논문 초고와 책의 장들, 그리고 일부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그의 미망인 레티스 램지(Lettice Ramsey)와 그의 아버지가 쓴 회고록을 포함한 다른 자료들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현대 기록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3. 업적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
또한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외에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을 서술하였다.
3. 1. 수학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또한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외에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을 서술하였다.
1928년 논문 "공식 논리의 한 문제에 관하여"에서 램지가 증명한 정리 중 하나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딴 램지의 정리로 불린다. 이 정리는 램지가 가장 잘 알려진 업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논문의 진정한 목표였던 1계 논리의 결정 문제(Entscheidungsproblem)의 특수한 경우, 즉 현재 베르나이스–쇤핀켈–램지 클래스로 알려진 1계 논리의 결정가능성을 푸는 과정에서 부수적인 보조 정리로 증명된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논리 단편의 스펙트럼을 특징짓기도 했다. 앨런조 처치는 1계 논리의 결정 문제의 일반적인 경우가 풀 수 없음을 보이고 1계 논리가 결정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처치의 정리 참조). 램지가 그의 결정가능성 증명에 사용한, 외견상 부수적인 보조 정리는 수학의 후속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보조 정리는 조합론에서 중요한 초기 결과로 밝혀졌으며, 충분히 큰 시스템 내에는 아무리 무질서하더라도 어떤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사실 램지의 정리는 매우 중요하여 오늘날에는 램지 이론으로 알려진 수학의 한 분야 전체가 유사한 결과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1926년에[16] 램지는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저술한 "수학 원리"에서 개발한 타입 이론을 단순화하는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나온 이론은 오늘날 단순 타입 이론(TST) 또는 단순 타입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램지는 타입의 계층 구조가 수학적 역설을 다루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의미적 역설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분기 계층을 제거했다.[17] 램지 버전의 이론은 쿠르트 괴델이 그의 첫 번째 불완전성 정리의 원래 증명에서 고려한 것이다.[18] 램지의 단순 타입 이론은 윌러드 반 오먼 콰인이 그의 새로운 기초 (집합론에 대한)에서 더 단순화되었는데, 여기서 이론의 언어에서 타입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제거되었다.[19]
베이즈 확률 확률론의 주관적 해석(후에 베이즈주의라고 불림)은 램지(Frank Ramsey)에 의해 제시되었다.
3. 1. 1. 램지 이론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40] 1928년 논문 "공식 논리의 한 문제에 관하여"에서 램지가 증명한 정리 중 하나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딴 램지의 정리로 불린다. 이 정리는 램지가 가장 잘 알려진 업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논문의 진정한 목표였던 1계 논리의 결정 문제(Entscheidungsproblem)의 특수한 경우, 즉 현재 베르나이스–쇤핀켈–램지 클래스로 알려진 1계 논리의 결정가능성을 푸는 과정에서 부수적인 보조 정리로 증명된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논리 단편의 스펙트럼을 특징짓기도 했다. 앨런조 처치는 1계 논리의 결정 문제의 일반적인 경우가 풀 수 없음을 보이고 1계 논리가 결정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처치의 정리 참조). 램지가 그의 결정가능성 증명에 사용한, 외견상 부수적인 보조 정리는 수학의 후속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보조 정리는 조합론에서 중요한 초기 결과로 밝혀졌으며, 충분히 큰 시스템 내에는 아무리 무질서하더라도 어떤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사실 램지의 정리는 매우 중요하여 오늘날에는 램지 이론으로 알려진 수학의 한 분야 전체가 유사한 결과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40]램지의 정리와 관련된 개념으로는 램지 수, 램지 그래프, 램지 문제 등이 있다.
3. 1. 2. 결정 문제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는 1928년 논문 "공식 논리의 한 문제에 관하여"에서 1계 논리의 결정 문제(Entscheidungsproblem)의 특수한 경우인 베르나이스–쇤핀켈–램지 클래스의 결정가능성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램지의 정리를 보조 정리로 증명하였다.[40] 또한 그는 이 논리 단편의 스펙트럼을 특징짓기도 했다. 앨런조 처치는 1계 논리의 결정 문제의 일반적인 경우가 풀 수 없음을 보이고 1계 논리가 결정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처치의 정리 참조). 램지가 사용한 이 보조 정리는 조합론에서 중요한 초기 결과로, 충분히 큰 시스템 내에는 아무리 무질서하더라도 어떤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램지 이론은 이와 유사한 결과를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3. 1. 3. 타입 이론 단순화
1926년에[16] 램지는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저술한 "수학 원리"에서 개발한 타입 이론을 단순화하는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나온 이론은 오늘날 단순 타입 이론(TST) 또는 단순 타입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램지는 타입의 계층 구조가 수학적 역설을 다루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의미적 역설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분기 계층을 제거했다.[17] 램지 버전의 이론은 쿠르트 괴델이 그의 첫 번째 불완전성 정리의 원래 증명에서 고려한 것이다.[18] 램지의 단순 타입 이론은 윌러드 반 오먼 콰인이 그의 새로운 기초 (집합론에 대한)에서 더 단순화되었는데, 여기서 이론의 언어에서 타입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제거되었다.[19]3. 2. 철학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또한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외에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을 서술하였다.
주요 철학 저서로는 『보편자』(1925), 『사실과 명제』(1927)(진리의 중복 이론을 제안), 『법칙과 사실의 보편자』(1928), 『지식』(1929), 『이론들』(1929), 『진리에 관하여』(1929), 『인과적 속성』(1929), 『일반 명제와 인과성』(1929) 등이 있다. 램지는 아마도 처음으로 신뢰주의적 지식 이론을 제안했을 것이다.[20] 또한 철학자 알란 하예크가 "주관적 확률 해석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버전"이라고 묘사한 것을 제시했다.[21] 이 분야에서 그의 사상은 1926년에 쓰여졌지만 1931년에 사후에 처음 출판된 논문 "진리와 확률"(아래에서 논의)에 개괄되어 있다.[24]
- 『논리철학논고』 서평
-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 『논리철학논고』 영어 번역가 중 한 명.
- 비트겐슈타인의 논문 지도
3. 2. 1. 진리론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3. 2. 2. 신뢰주의 인식론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램지는 아마도 처음으로 신뢰주의적 지식 이론을 제안했을 것이다.[20] 또한 철학자 알란 하예크가 "주관적 확률 해석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버전"이라고 묘사한 것을 제시했다.[21] 이 분야에서 그의 사상은 1926년에 쓰여졌지만 1931년에 사후에 처음 출판된 논문 "진리와 확률"에 개괄되어 있다.[24]
3. 2. 3. 확률론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을 제시했다.[40]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는 참이다" 부분이 생략된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하며,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철학자 알란 하예크가 "주관적 확률 해석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버전"이라고 묘사한 것을 제시했다.[21] 이 분야에서 그의 사상은 1926년에 쓰여졌지만 1931년에 사후에 처음 출판된 논문 "진리와 확률"에 개괄되어 있다.[24]
1921년 저서 『확률에 관한 논고』(A Treatise on Probability)에서 케인스는 인식론적 확률에 대한 주관적 접근 방식에 반대했다. 케인스는 지식이 비물질적이고 개인적이지 않기 때문에 지식과 확률 사이에 객관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램지는 이러한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논문 "진실과 확률"(Truth and Probability, 1926)에서 그는 물리학과 논리학에서의 확률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24] 램지는 확률은 비물질적인 지식 집합과 관련이 없고 각 개인이 혼자서 가지고 있는 지식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적 지식에 의해 형성된 개인적인 믿음이 확률을 지배하여 주관적 확률과 베이즈 확률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주관적 확률은 개인의 개인적인 믿음을 반영하는 행동을 관찰하여 추론할 수 있다. 램지는 개인이 특정 결과에 부여하는 확률의 정도는 그 결과에 내기할 때 개인이 받아들일 배당률을 찾음으로써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램지는 불확실성 하에서 일관된 선택 이론을 도출하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주관적 확률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신념과 선호도를 분리할 수 있었다.[25] 하지만 램지는 나중에 "우연한 사건의 전체 영역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일반화는 불가능하다(예를 들어 전염병, 육행시의 지문, 말 발차기로 인한 사망, 위인의 출생 등을 고려해 보라)"고 언급했다.[26]
램지의 확률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1944년(1947년 제2판) 존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르겐슈테른이 저술한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이 출판될 때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램지 사후에 그의 접근 방식과 유사한 확률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이탈리아 수학자 브루노 드 피네티에 의해 독립적으로 개발되었다.[27]
3. 3. 경제학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또한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외에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을 서술하였다.
케인즈와 피구는 램지에게 경제학 연구를 장려했는데, 케인즈(1933)는 "매우 어린 나이, 16세쯤부터 그의 조숙한 마음은 경제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램지는 케인즈의 권유에 따라 경제 이론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경제학계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램지의 세 편의 논문은 주관적 확률과 효용(1926), 최적 과세(1927), 그리고 일부문 경제에서의 최적 성장(1928)에 관한 것이었다.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1970년에 이 논문들을 "수학과 지식의 기초에 대한 그의 주요 관심사의 부산물에 불과했던 세 가지 위대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22]
램지의 경제적 견해는 사회주의적이었다.[23] 램지의 연구 분야는 다음과 같다.
- 주관적 불확실성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연구. Subjective expected utility영어
- 경제성장이론에서 Ramsey–Cass–Koopmans model영어
- 램지 가격, 보아토-램지 가격 결정 규칙, 램지 규칙.
- Keynes-Ramsey-Regelde
3. 3. 1. 최적 과세 이론
논리학자로서 프랭크 램지의 업적으로는 진리론에 관한 축소주의 이론(deflationary theory) 등이 있다. 이는 임의의 명제를 참이라고 주장하는 서술에서 '참'이라는 서술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예컨대 "눈은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대등한 논리값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는 참이다"의 부분이 생략되어 "눈은 하얗다"로 축약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언어적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의 문장은 두 단계로 분리하여 해석하여야 함을 지적하였다.[40] 과잉주의 이론(redundancy theory)라고도 한다. 이후 윌러드 콰인 등에 의하여 재주장되었다.또한 조합론과 연관된 램지 이론의 창안자 중 하나로, 그래프의 색칠 문제에 관한 정리인 램지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이외에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을 서술하였다.
램지는 1927년에 논문을 처음 출판하였는데,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이를 "공공 재정 경제학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묘사했다.[28][29] 같은 논문에서 램지는 램지 가격결정(Ramsey pricing)이라는 우아한 개념을 경제 이론에 기여했다. 이는 (규제된) 독점 기업이 소비자잉여를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비용을 충분히 충당하고자 할 때 적용 가능하다. 이는 한계비용에 대한 가격 마크업이 해당 재화의 수요 가격탄력성에 반비례하도록 가격을 설정함으로써 달성된다. 램지는 논문 서두에서 해결해야 할 질문을 제기한다. "일정한 세수를 소득의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한 비례세로 조달해야 하는데, 서로 다른 용도에 대한 세율이 다를 수 있습니다. 유틸리티 감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러한 세율을 얼마나 조정해야 합니까?"[29] 이 문제는 경제학자 아서 피구(Arthur Pigou)에 의해 제시되었고, 이 논문은 램지의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다.
3. 3. 2. 램지 가격결정
경제학에 관한 유명한 3편의 논문중 하나로, 1927년에 처음 출판된 논문에서 램지는 램지 가격결정(Ramsey pric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28][29] 램지 가격결정은 (규제된) 독점 기업이 소비자잉여를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비용을 충분히 충당하고자 할 때 적용 가능하다. 이는 한계비용에 대한 가격 마크업이 해당 재화의 수요 가격탄력성에 반비례하도록 가격을 설정함으로써 달성된다. 램지는 논문 서두에서 해결해야 할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일정한 세수를 소득의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한 비례세로 조달해야 하는데, 서로 다른 용도에 대한 세율이 다를 수 있습니다. 유틸리티 감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러한 세율을 얼마나 조정해야 합니까?"[29] 이 문제는 경제학자 아서 피구에 의해 제시되었고, 이 논문은 램지의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이 논문을 "공공 재정 경제학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묘사했다.[28][29]3. 3. 3. 램지-캐스-쿠프만스 모델
케인스(Keynes)는 램지의 논문을 "주제의 본질적 중요성과 난이도, 사용된 기술적 방법의 힘과 우아함, 그리고 저자의 사고가 주제를 밝히는 명료하고 순수한 조명 측면에서 모두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수학적 경제학(mathematical economics)의 업적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32] "경제학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독서이지만, 그 안에 과학적이고 미학적인 특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감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라고도 평했다.[32] 램지 모델은 오늘날 최적 축적 이론의 출발점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처음 발표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인식되었다.이 모델의 주요 기여는 첫째, 램지가 제기한 저축 규모에 대한 초기 질문이었고, 둘째, 동적 최적화 기법을 적용하여 집합적 또는 개별적 효용을 시간에 따라 극대화(최적화)하는 분석 방법이었다. 팃징 쿠프만스(Tjalling C. Koopmans)와 데이비드 캐스(David Cass)는 램지 모델을 수정하여 일정한 비율로 인구 증가와 하로드 중립적 기술 진보의 동적 특징을 통합하여, 이제 가구의 효용 함수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램지-캐스-쿠프만스 모델(Ramsey–Cass–Koopmans model)을 탄생시켰다.
3. 3. 4. 케인스-램지 규칙
파르타 다스굽타(Partha Dasgupta)가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해당 항목에서 "학문적 경제학 분야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 12편 중 하나"라고 평가한 "저축에 관한 수학적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Saving)"은 1928년 《경제 저널(The Economic Journal)》에 처음 발표되었다.[30][31]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논문은 미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가 소비가 아닌 투자에 할당해야 하는 최적의 양을 결정하기 위해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을 전략적으로 아름답게 적용한 것"이었다.[22] 램지(Ramsey)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국가가 얼마나 많은 소득을 저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31]케인스(Keynes)는 이 논문을 "주제의 본질적 중요성과 난이도, 사용된 기술적 방법의 힘과 우아함, 그리고 저자의 사고가 주제를 밝히는 명료하고 순수한 조명 측면에서 모두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수학적 경제학(mathematical economics)의 업적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경제학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독서이지만, 그 안에 과학적이고 미학적인 특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감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32] 램지 모델은 오늘날 최적 축적 이론의 출발점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처음 발표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인식되었다.
이 모델의 주요 기여는 첫째, 램지가 제기한 저축 규모에 대한 초기 질문이었고, 둘째, 동적 최적화 기법을 적용하여 집합적 또는 개별적 효용을 시간에 따라 극대화(최적화)하는 분석 방법이었다. 팃징 쿠프만스(Tjalling C. Koopmans)와 데이비드 캐스(David Cass)는 램지 모델을 수정하여 일정한 비율로 인구 증가와 하로드 중립적 기술 진보의 동적 특징을 통합하여, 이제 가구의 효용 함수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램지-캐스-쿠프만스 모델(Ramsey–Cass–Koopmans model)을 탄생시켰다.
4. 평가
4. 1. 램지 효과
1999년,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슨은 자신의 훌륭한 새로운 철학적 발견이 이미 프랭크 램지의 연구 업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현상을 "램지 효과(the Ramsey Effect)"라고 명명했다.[36]4. 2. 프랭크 P. 램지 메달
의사결정 분석 학회는 매년 프랭크 P. 램지 메달(Frank P. Ramsey Medal)을 수여하여 의사결정 이론과 중요한 실제 의사결정 문제에 대한 응용에 대한 상당한 공헌을 인정한다.[34][33]4. 3. 프랭크 램지 교수직
하워드 라이파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최초의 프랭크 P. 램지 교수(경영경제학)가 되었다. 리처드 제크하우저는 1971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프랭크 P. 램지 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었다.[35] 라이파의 교수직은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합동 교수직이었고, 제크하우저의 교수직은 케네디스쿨에 있었다.[35] 파르타 다스굽타는 199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프랭크 램지 경제학 교수가 되었고, 2010년에는 프랭크 램지 경제학 명예교수가 되었다.[35]참조
[1]
서적
Cambridge Pragmatism: From Peirce and James to Ramsey and Wittgenstein
Ox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Frank P. Ramsey's Papers
http://digital.libra[...]
Special Collections Department, University of Pittsburgh
2013-09-19
[3]
문서
Ramsey's Diary
1924-01-13
[4]
웹사이트
Biography
https://web.archive.[...]
2018-01-29
[5]
서적
Ramsey
[6]
논문
Universals
http://www.hist-anal[...]
[7]
논문
Foundations of Mathematics
https://www.gwern.ne[...]
[8]
논문
Facts and Propositions
https://web.archive.[...]
2019-01-20
[9]
서적
Ramsey
[10]
문서
[11]
서적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asil Blackwell Ltd
[12]
웹사이트
Frank Ramsey: A Genius By All Tests for Genius
https://www.hnn.us/a[...]
2024-10-07
[13]
서적
A Guide to Churchill College, Cambridge
[14]
서적
On truth : original manuscript materials (1927-1929) from the Ramsey Collection at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https://www.worldcat[...]
Kluwer Academic Publishers
[15]
웹사이트
Frank Plumpton Ramsey Papers {{!}} Digital Pitt
https://digital.libr[...]
2021-04-30
[16]
논문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17]
웹사이트
Type Theory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22-11-28
[18]
논문
Über formal untentscheidbare Sät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 I
[19]
논문
New Foundations for Mathematical Logic
[20]
웹사이트
Reliabilist Epistemology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9-10-17
[21]
웹사이트
Interpretations of Probability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9-10-19
[22]
논문
What Makes for a Beautiful Problem in Science?
[23]
논문
Frank Plumpton Ramsey and the Politics of Motherhood
[24]
서적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and other Logical Essays
https://core.ac.uk/d[...]
[25]
서적
Foundations of Bayesianism
Springer
[26]
서적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and other Logical Essays
https://core.ac.uk/d[...]
[27]
논문
La prévision: ses lois logiques, ses sources subjectives
http://archive.numda[...]
[28]
논문
In Praise of Frank Ramsey's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Taxation
https://www8.gsb.col[...]
2015-03-01
[29]
논문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Taxation
https://eml.berkeley[...]
[30]
웹사이트
Ramsey and Intergenerational Welfare Economics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9-10-17
[31]
논문
A Mathematical Theory of Saving
http://piketty.pse.e[...]
[32]
논문
F. P. Ramsey
https://www.jstor.or[...]
[33]
웹사이트
DAS Decision Analysis Society
https://www.informs.[...]
[34]
웹사이트
Frank P. Ramsey Medal
https://www.informs.[...]
[35]
웹사이트
CURRICULUM VITAE
https://web.archive.[...]
[36]
서적
Frank Ramsey: A Sheer Excess of Powers
Oxford University Press
[37]
논문
Frank P. Ramsey: A Cambridge Economist
[38]
논문
Frank Ramsey's Notes on Saving and Taxation
[39]
논문
Cambridge Philosophers I: F. P. Ramsey
http://www.dspace.ca[...]
[40]
논문
Ramsey on Truth and Truth on Ramsey
http://www.tcnj.edu/[...]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