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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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터 다미안은 11세기의 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회 개혁가이자 추기경, 교회 학자이다. 그는 가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고아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학문적 재능을 발휘하여 라벤나, 파르마, 파엔차에서 교수로 명성을 얻었다. 1035년경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규율을 실천하며 개혁 운동에 헌신했다. 교황 특사로 활동하며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고, 교황청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057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철학에서는 자유 교양 과목의 종교 종속성을 주장했다. 1072년 파엔차에서 사망했으며, 성인으로 존경받아 1828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고, 축일은 2월 2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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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다미안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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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성인 |
이름 | 베드로 다미아노 |
출생일 | 기원 1007년 |
사망일 | 1072년 2월 22일 또는 1073년 |
기념일 | 2월 21일 (이전 2월 23일, 1823–1969년 일반 로마 달력) |
숭배 대상 | 로마 가톨릭 교회 |
출생지 | 라벤나, 교황령 |
사망지 | 파엔차, 교황령 |
칭호 | 주교, 고해 사제, 교회 박사 |
축복일 | 해당 없음 |
시성일 | 해당 없음 |
상징물 | 이탈리아의 추기경으로 표현되며 손에 매듭지어진 밧줄을 들고 있음. 또한 순례자로서 교황의 회칙을 들고 있음. 추기경 모자, 베네딕토회 수도복 |
존칭 접미사 | OSB |
종교 경력 | |
소속 수도회 | 베네딕토회 |
기타 직책 | 추기경 |
참고 정보 | |
다른 이름 | , , |
2. 어린 시절
피터 다미안은 1007년경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가난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1. 불우한 유년기
피터는 1007년경 라벤나에서 가난하지만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3] 고아가 된 그는 형에게 입양되었으나, 형은 그를 돼지치기로 고용하면서 학대하고 먹이를 주지 않았다.[2] 이후 라벤나의 대사제였던 다른 형제 다미아누스가 그를 불쌍히 여겨 교육을 시켰다. 피터는 형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더하여, 파르마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며 빠른 진전을 보였고, 25세쯤에는 파르마와 라벤나에서 유명한 교사가 되었다.[2]2. 2. 다미아누스 형과의 만남
일찍이 고아가 된 피터는 처음에는 형에게 입양되었는데, 형은 그를 돼지치기로 고용하면서 학대하고 먹이를 주지 않았다.[3] 몇 년 후, 라벤나의 대사제였던 또 다른 형 다미아누스가 그를 불쌍히 여겨 교육을 시켰다. 피터는 형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더하여, 파엔차와 파르마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여 파르마와 라벤나에서 유명한 교사가 되었다.[2]2. 3. 학문적 성장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라벤나, 파엔차, 파르마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며 빠르게 성장했다.[2] 25세 무렵에는 이미 파르마와 라벤나에서 유명한 교사가 되었다.[2]3. 종교 생활
1035년경,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구비오 근처의 폰테 아벨라나 수도원에 들어갔다.[2] 수련 수사와 수도사로서 열정적이었으나, 지나친 참회로 건강을 잃고 불면증을 겪기도 했다.[2] 회복 후, 동료 수도사들과 이웃 수도원 형제들에게 강의를 하였고, 1042년경 피에트라페르토사 수도사들을 위해 로무알두스의 일대기를 썼다. 1043년 폰테 아벨라나의 원장이 된 그는 107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수도원과 성직자 개혁에 열성적이었으며, 고행을 포함한 엄격한 규율을 도입하여 폰테 아벨라나를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모범이 될 정도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야간 예배 후 낮잠을 허용하고, 수도원 회랑을 건설하고, 은 성배와 은 십자가를 구입하고, 도서관에 많은 책을 추가하는 등 수도원 발전에 힘썼다.[3]
산 세베리노 마르케, 가모냐, 아체레타, 무르치아나, 산 살바토레, 시트리아, 오크리에 부속 은둔소가 세워졌다.[3]
3. 1. 폰테 아벨라나 수도원 생활
1035년경, 피터 다미안은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구비오 근처의 고립된 은둔소인 폰테 아벨라나에 들어갔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타락한 사치를 피하고자 이곳을 선택했다.[2] 수련 수사와 수도사로서 그는 놀라운 열정을 보였지만, 지나친 참회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심각한 불면증을 겪었다.[2]회복 후, 그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임명되었다. 폼포사의 귀도와 이웃 수도원장들의 요청에 따라 2, 3년 동안 그들의 형제들에게도 강의했으며, 1042년경에는 피에트라페르토사 수도사들을 위해 로무알두스의 일대기를 썼다.[2] 폰테 아벨라나로 돌아온 직후, 그는 원장에 의해 수도원의 ''집사''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원장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043년 그는 폰테 아벨라나의 원장이 되었고, 107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2]
그는 수도원 및 성직자 개혁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그는 고행 ("''disciplina''")의 실천을 포함하여 더욱 엄격한 규율을 수도원에 도입했는데, 그의 통치 하에 폰테 아벨라나는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심지어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참회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그의 끈기 있는 옹호는 그것의 수용을 보장했으며,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은수자 중 일부의 무분별한 열정을 완화해야 할 정도였다.[3]
그는 야간 예배의 피로를 보충하기 위해 매일 낮잠을 자는 혁신을 도입했다. 원장 재임 기간 동안 수도원 회랑이 건설되었고, 은 성배와 은 십자가가 구입되었으며, 많은 책이 도서관에 추가되었다.[3]
3. 2. 수도원 개혁
1035년경, 페트루스는 세속적인 직업을 버리고 구비오 근처의 폰테 아벨라나에서 고독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2] 수행자이자 수도사로서 페트루스의 열의는 뛰어났지만, 과도한 수행은 그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2] 건강을 회복한 후, 동료 수도사들에게 강의하도록 임명되었고, 폼포사의 귀도나 인근 수도원장들의 요청으로 2, 3년 동안 인근 수도사들에게도 강의했다. 1042년경에는 피에트라페르토사의 수도사들을 위해 『성 로무알드의 생애』를 집필했다. 폰테 아벨라나로 돌아온 직후, 그는 장로[15]에 의해 수도원의 회계로 임명되었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043년부터 페트루스는 폰테 아벨라나의 장로였다.[2]페트루스는 수도사 및 성직자 개혁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폰테 아벨라나에 채찍질을 동반하는 엄격한 계율을 도입했다. 이 엄격한 계율로 인해 폰테 아벨라나는 매우 유명해졌고,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비롯한 다른 수도원에서도 채택되었다.[3] 페트루스의 계율에 대해 많은 이의가 제기되었지만, 그의 끈기 있는 보급 활동으로 서서히 지지를 얻어, 나중에는 일부 지나친 지지자들을 페트루스 자신이 억제하고 달래야 할 정도였다.[3] 페트루스는 또한 야간 예배의 피로를 보충하기 위해 계율에 낮잠을 도입했다. 그가 장로였던 동안, 수도원의 회랑이 증설되었고, 은으로 된 성체 잔[16]과 은으로 된 행렬용 십자가[17]가 구입되었으며, 서고의 책이 늘어났다.[3]
4. 개혁 운동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수도원에 은거하면서도 교회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거의 2세기 동안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있었고, 교리적 무지와 성직자들의 매수 행위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하인리히 3세와 소통하며 클레멘스 2세가 하인리히 3세와 그의 배우자 아그네스에게 관을 씌워주는 자리에 로마에 있었다.[4] 이후 은둔처로 돌아갔지만, 다양한 신학적, 징계적 논쟁에 대한 공개 서한을 끊임없이 발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11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 고독을 사랑하고 동시에 교회의 두려움 없는 사람이자 개혁의 임무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5]
4. 1. 교황 베네딕토 9세 퇴위 옹호
베네딕토 9세가 1045년 대사제 요한 그라티안(그레고리오 6세)에게 교황직을 사임하자, 피터 다미안은 이 변화를 기뻐하며 새 교황에게 편지를 써 페사로, 치타 디 카스텔로, 파노의 사악한 주교들을 지목하며 이탈리아 교회의 스캔들을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3] 그는 친구 힐데브란트(후의 그레고리오 7세)와 함께 개혁에 힘썼다.4.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의 관계
그는 하인리히 3세와 소통하며 교회의 개혁을 위해 협력했다. 1047년 초,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하여 성직 매매를 금지하는 법령 통과에 기여했다.[4]4. 3. 《고모라의 서》 저술
1050년경, 교황 레오 9세에게 《리베르 고모리아누스》(“''Liber Gomorrhianus''”, 《고모라의 서》)를 보냈다. 이 책에서 성직 매매 관행을 맹렬히 비난하며 성직자의 순결성을 위협했다.[5] 특히 동성애 행위를 과도한 욕망과 결부된 광기가 초래한 풍기 문란과 혼란의 예로 비판했다.[18] 이 저작은 큰 물의를 일으켰고, 피터 다미안에 대한 적지 않은 원한을 낳았다. 교황조차 처음에는 칭찬했지만, 설득을 거쳐 과장된 내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교황의 냉담함에 대해 피터 다미안은 여러 번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18]4. 4. 성직매매 서임의 유효성 옹호
피터 다미아노는 1050년경 교황 레오 9세에게 《리베르 고모리아누스》를 보내 성직 매매 관행을 맹렬히 비난하며 성직자의 순결성을 강조했다. 한편, 성직 매매로 서임된 성직자들의 서임 유효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1053년경 《리베르 그라티시무스》를 저술하여 그 유효성을 옹호했다. 이 작품은 당시 많은 반대를 받았지만, 12세기 말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5] 그는 성직 매매에 의한 서임의 유효성은 옹호했지만, 성직 매매 자체는 끈질기게 반대했으며, 성직자의 결혼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했다.[19]5. 교황 특사 및 추기경 활동
1057년 11월 30일, 스테파노 9세는 피터를 오스티아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9] 피터는 순회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 편안하게 여겼고, 교황청 내부 개혁가로 활동하는 것을 꺼려 오랫동안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수락하였다. 또한 구비오 교구의 행정관으로도 임명되었다.
새로운 추기경은 자신의 직무가 갖는 막중한 책임감에 감명받아, 다른 형제 추기경들에게 모든 이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는 열정적인 편지를 썼다. 4개월 후 교황 스테파노 9세가 피렌체에서 사망했고, 교회는 다시 한번 분열로 혼란에 빠졌다. 피터는 대립 교황 베네딕토 10세에 대한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힘의 균형은 베네딕토 10세에게 있었고, 피터는 일시적으로 폰테 아발라나로 물러났다.
1061년 7월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한 후, 피터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대립 교황 호노리우스 2세 간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터는 대립 교황 카달루스(호노리우스 2세)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062년 10월, 쾰른의 안노 2세 대주교가 독일의 섭정으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고, 피터 다미안의 긴 논쟁이 낭독되어 알렉산데르 2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5] [24]
5. 1. 교황 특사 활동
1059년 말, 교황 니콜라오 2세는 피터를 교황 특사로 밀라노에 파견했다. 당시 밀라노에서는 성직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성직자들은 공공연하게 아내를 두고 함께 살고 있었다. 아리알도 디아코노와 루카의 안젤모가 이를 개혁하려 했지만, 밀라노 성직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성좌에 항소하게 되었다.[5]니콜라오 2세는 피터와 루카 주교를 사절로 보냈다. 밀라노 성직자들은 로마가 밀라노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터는 대성당에서 그들과 대담하게 맞서며 성좌의 권위를 증명하고, 모든 당사자들이 그의 결정에 복종하게 만들었다.[5]
그는 먼저 대주교와 모든 성직자들에게 앞으로 어떠한 승진도 돈을 주고 사지 않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에게 참회를 부과하고, 독신 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한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교회 봉사직에 복귀시켰다. 로마의 일부 강경파들은 이 신중한 결정을 공격했지만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하자 분쟁이 다시 발생했고, 1066년 아리알도의 순교 이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22]
피터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대립 교황 호노리우스 2세 간의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61년 7월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한 후 발생한 분열에서, 피터는 대립 교황 카달루스(호노리우스 2세)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쾰른의 안노 2세 대주교가 독일의 섭정으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고, 피터 다미안의 긴 논쟁이 낭독되어 알렉산데르 2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5] [24]
1063년,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었고, 피터 다미안은 클뤼니 수도원과 마콩 주교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는 샬롱쉬르손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클뤼니의 주장이 정당함을 증명하고, 프랑스 교회에서 쟁점이 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한 후 가을에 폰테 아벨라나로 돌아갔다.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대립 교황 카달루스는 다시 로마를 차지하려 시도했고, 피터 다미안은 알렉산데르와 힐데브란트로부터 왕권에 호소하여 사건을 다시 판결받으려 한 것에 대해 질책을 받았다. 1067년, 그는 발롬브로사의 주교와 수도사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피렌체로 보내졌지만, 사건을 잘못 판단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다음 해에 교황이 직접 해결했다.
1069년, 피터는 교황 사절로 독일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아내 사보이의 베르타와 이혼하려는 것을 막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 임무를 완수하고 폰테 아벨라나로 돌아갔다.
5. 2. 추기경 임명
1057년 가을, 스테파노 9세는 피터 다미안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다미안은 순회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 편안하게 여겼고, 교황청 내부의 개혁가로 활동하는 것을 꺼려했기에 오랫동안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여 1057년 11월 30일 오스티아 주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9]게다가 그는 구비오 교구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추기경은 자신의 직무가 갖는 막중한 책임감에 감명받아, 다른 형제 추기경들에게 모든 이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는 열정적인 편지를 썼다.
5. 3. 대립 교황과의 갈등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대립 교황 베네딕토 10세에 맞서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힘의 균형은 베네딕토 10세에게 있었다. 그래서 다미아니는 일시적으로 폰테 아발라나로 물러났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대립 교황 호노리우스 2세와 벌인 투쟁에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23] 1061년 7월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하면서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피터 다미안은 대립 교황 카달루스(호노리우스 2세)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쾰른의 안노 2세 대주교는 독일의 섭정으로서 1062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고, 피터 다미안의 긴 논쟁이 낭독되었으며, 알렉산데르 2세를 정통 교황으로 인정하는 결정에 크게 기여했다.[5][24]6. 철학
다미아노는 철학을 포함한 자유 교양 과목이 종교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 그는 예수가 철학자를 제자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도사들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철학은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여주인을 섬기는 하인처럼 신학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귀속됨)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7] 이러한 생각은 논리가 현실의 본질보다는 논증의 타당성에만 관련되어 있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 가잘리와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유사한 견해가 발견된다.
다미아노의 논문 《De divina omnipotentia》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다미아노의 목적은 "전능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를 신이 선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어 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토이보 J. 홀로파이넨은 《De divina omnipotentia》를 "양상 및 신의 전능성에 관한 중세 논의의 초기 발전에 관련된 흥미로운 문서"로 꼽았다.[2] 페트루스는 또한 신이 시간 밖에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이는 나중에 리미니의 그레고리가 주장한 바와 같다.[8]
7. 마지막 여정과 죽음
1072년 초,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호노리우스 2세를 지지하는 라벤나 대주교를 지지한 탓에 파문된 라벤나 주민과 교황청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라벤나로 파견되었다.[1] 라벤나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엔차 근교에서 열병에 걸렸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25] 수도원에서 일주일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6] 전날 밤, 축일 업무 지시를 내리고 이를 복창한 후, 찬가가 끝나자 숨을 거두었다. 다른 교회가 페트루스의 유해를 옮겨 성유물로 삼지 못하도록, 즉시 수도원 교회에 매장되었다.
8. 사후
페트루스는 1067년 교황 사절로서 프랑스와 피렌체에서의 직무를 마친 후 추기경직을 사임했을 수도 있었다. 만년에 그는 힐데브란트와 정치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힐데브란트가 그레고리오 7세로 즉위하기 전 해에 페트루스는 파엔차에서 사망했다. 노먼 F. 칸터는 "그것은 그레고리오 7세를 제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을 무대에서 끌어내린 것"이라고 말했다[27]。
8. 1. 시성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공식적으로 성인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폰테 아벨라나, 몬테 카시노, 클뤼니 등에서 그를 숭배했다.[27] 1828년 레오 12세는 페트루스를 교회 학자로 선언했다.페트루스는 매듭 밧줄을 든 추기경으로 묘사된다. 또한, 사절로서 많은 활약을 했기 때문에 교황의 친서를 휴대하는 순례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8. 2. 유해 이장
그의 유해는 여섯 번 이장되었으며, 1898년 이후에는 파엔차 대성당의 성자 전용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27]참조
[1]
논문
Did St. Peter Damian Die in 1073 ? A New Perspective on his Final Days
http://www.kbr.be/~s[...]
2010-06
[2]
웹사이트
Peter Damian
http://plato.stanfor[...]
[3]
간행물
St. Peter Damian
[4]
웹사이트
Saint Peter Damian
https://www.francisc[...]
2016-02-21
[5]
뉴스
St. Peter Damiani
https://web.archive.[...]
[6]
간행물
Damian, Peter (1007–72)
https://www.rep.rout[...]
Taylor and Francis
1998
[7]
문서
PL 145, p. 603, 1867.
[8]
서적
A Companion to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Blackwell
2002
[9]
뉴스
St. Peter Damian
http://www.americanc[...]
[10]
서적
The Growth of Mysticism
1994
[11]
웹사이트
La diabolica forchetta
http://www.festivald[...]
2016-01-06
[12]
웹사이트
Italian inventions: the utilitarian table fork, once a "scandalous" innovation
https://italoamerica[...]
[13]
웹사이트
Taccuini Gastrosofici
https://www.taccuini[...]
[14]
문서
「Peccator」とは「罪人」の意。
[15]
문서
prior、聖ベネディクトの修道会則において、修道院内で上位の位置にある者をこう呼んだ。修道院長よりは下位であるが、この称号を授けられたからといって、とくに特別な権限が生じるわけではない。
[16]
문서
chalice、聖餐の際にワインを注ぐ祭具。
[17]
문서
Processional cross、宗教的な行列に使われる、杖の先に十字架がついた祭具。
[18]
웹사이트
相互自慰、素股、肛門性交など
http://www.fordham.e[...]
[19]
문서
ペトルスの『秘蹟論』に対して、ただちに同じ改革派枢機卿であるフンベルトゥスは『聖職売買者駁論』(“Libri Tres Adversus Simoniacos”)を書いて反論し、論争が起こった。
[20]
문서
当時ローマの貴族達と改革派は対立しており、改革派はローマの貴族による教皇擁立を阻止する必要があった。この時代、枢機卿による教皇の選挙制度が確立されていくのであるが、このことが「ローマのパトリキウス」として教皇任命権を主張する神聖ローマ皇帝との対立を生み出したのである。
[21]
문서
後にアレクサンデル2世 (ローマ教皇)|アレクサンデル2世となるルッカの大アンセルムス。彼の後に1071年にルッカの小アンセルムスがミラノ大司教となっている。
[22]
문서
とくにヒルデブラントは聖職売買について、フンベルトゥスに近い立場であった。一方でルッカの大アンセルムス、すなわちアレクサンデル2世はペトルスと考えが近かった。
[23]
문서
改革派がアレクサンデル2世を選出したのに対し、ローマの都市貴族と改革反対派の司教は神聖ローマ皇帝ハインリヒ4世 (神聖ローマ皇帝)|ハインリヒ4世に教皇の選出を求めた。こうして帝国議会においてピエトロ・カダルスがホノリウス2世として選出されたが、幼い皇帝の摂政であった母后アグネスの失脚と共に実権を握ったケルン大司教アンノ2世により、後述のアウクスブルク教会会議が開かれ、決定は覆されることになる。
[24]
문서
公会議によって決定が下るまでは、アレクサンデル2世が教皇としての職務を遂行するという決定であった。事実上アレクサンデル2世を教皇と承認したことになる。
[25]
문서
現在のサンタ・マリア・ヴェッキア。
[26]
문서
2月22日
[27]
문서
"It removed from the scene the one man who could have restrained Gregory." Norman F. Cantor, "Civilization of the Middle Ages", p 251)(英語版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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