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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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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기의 난은 1876년,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사들의 봉기이다. 마에바라 잇세이를 중심으로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에 영향을 받아, 야마구치 현청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쿄로 향해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정보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고,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어 마에바라 잇세이와 그의 동료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메이지 정부의 가혹한 처벌과 연좌제로 이어졌으며, 마에바라 잇세이가 속했던 쇼카손주쿠의 폐쇄와 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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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마에바라 잇세이
마에바라 잇세이, 반란 지도자
기본 정보
분쟁명하기의 난
일부메이지 시대의 시족 반란
시기1876년 10월 28일 ~ 1876년 11월 5일
장소야마구치현 하기시
원인불명
결과정부군 승리
교전 세력 1일본 메이지 정부
교전 세력 1-1일본 제국 육군
교전 세력 2준토쿠
교전 세력 2-1조슈 번의 사무라이
지휘관 및 지도자
정부군미우라 고로
정부군세키구치 다카요시
반군마에바라 잇세이(사망)
반군오쿠다이라 겐스케(사망)
반군히가 마코토
병력 규모
정부군109,379명 (보병 연대 38개, 대대 12개, 포병 소대 1개)
반군하기 사무라이 200명
사상자 규모
정부군사망 178명, 부상 284명
반군사망 102명, 처형 49명

2. 배경

1868년, 메이지 유신일본 제국을 건국하고 1600년부터 봉건 국가로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서구화 정책을 시행했는데, 여기에는 폐번치현도쿠가와 신분 제도 폐지 등 일본의 봉건주의를 해체하는 개혁이 포함되었다. 이전의 강력한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의 많은 보수적인 구성원들은 개혁으로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를 잃고 수입이 없어졌으며,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이 대부분 대체되자 불만을 품었다. 일본의 매우 빠른 근대화와 서구화는 일본 문화, 의상 및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며, 많은 ''사무라이''에게 이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존왕양이'' 정당성의 "''양이''"("오랑캐를 몰아내자") 부분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메이지 유신의 영웅 중 한 명이자 아이즈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도자였으며, 제국 파벌의 불만 세력에 속했다. 마에바라는 사쓰마 번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번이었던 조슈 번의 ''사무라이''였으며, 제국 혁명가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를 통해 삿초 동맹을 중개한 후 중요한 지원을 받았다. 마에바라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으며 일본 근대화의 초기 옹호자였으며, 유신 이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군무대신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마에바라는 폐번치현 이후 전 ''다이묘''에 대한 대우 문제로 기도 다카요시와 의견 충돌을 겪은 후 결국 사임했다. 마에바라는 이전 조슈 번으로 돌아갔으며, 이곳은 현재 메이지 시대의 야마구치현의 일부가 되었다.

2. 1. 메이지 유신과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

1868년, 메이지 유신일본 제국을 건국하고 1600년부터 봉건 국가로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서구화 정책을 시행했는데, 여기에는 폐번치현도쿠가와 신분 제도 폐지 등 일본의 봉건주의를 해체하는 개혁이 포함되었다. 이전의 강력한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의 많은 보수적인 구성원들은 개혁으로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를 잃고 수입이 없어졌으며,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이 대부분 대체되자 불만을 품었다. 일본의 매우 빠른 근대화와 서구화는 일본 문화, 의상 및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며, 많은 ''사무라이''에게 이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존왕양이'' 정당성의 "''양이''"("오랑캐를 몰아내자") 부분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메이지 유신의 영웅 중 한 명이자 아이즈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도자였으며, 제국 파벌의 불만 세력에 속했다. 마에바라는 사쓰마 번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번이었던 조슈 번의 ''사무라이''였으며, 제국 혁명가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를 통해 삿초 동맹을 중개한 후 중요한 지원을 받았다. 마에바라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으며 일본 근대화의 초기 옹호자였으며, 유신 이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군무대신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마에바라는 폐번치현 이후 전 ''다이묘''에 대한 대우 문제로 기도 다카요시와 의견 충돌을 겪은 후 결국 사임했다. 마에바라는 이전 조슈 번으로 돌아갔으며, 이곳은 현재 메이지 시대의 야마구치현의 일부가 되었다.

2. 2. 마에바라 잇세이와 존왕양이

마에바라 잇세이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존왕양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군무대신 등 요직을 맡았으나, 기도 다카요시 등과의 갈등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마에바라는 존왕양이 사상에 따라 서구 열강에 대항하고, 일본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급격한 서구화를 추진하였고, 이는 마에바라를 비롯한 불평사족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일본 제국을 건국하고 1600년부터 봉건 국가로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서구화 정책을 시행했는데, 여기에는 폐번치현도쿠가와 신분 제도 폐지 등 일본의 봉건주의를 해체하는 개혁이 포함되었다. 이전의 강력한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의 많은 보수적인 구성원들은 개혁으로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를 잃고 수입이 없어졌으며,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이 대부분 대체되자 불만을 품었다. 일본의 매우 빠른 근대화와 서구화는 일본 문화, 의상 및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며, 많은 ''사무라이''에게 이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존왕양이'' 정당성의 "''양이''"("오랑캐를 몰아내자") 부분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메이지 유신의 영웅 중 한 명이자 아이즈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도자였으며, 제국 파벌의 불만 세력에 속했다. 마에바라는 사쓰마 번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번이었던 조슈 번의 ''사무라이''였으며, 제국 혁명가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를 통해 삿초 동맹을 중개한 후 중요한 지원을 받았다.

3. 전개

1876년 10월 24일, 마에바라 잇세이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봉기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비록 신푸렌의 난은 다음 날 아침 진압되었지만, 봉기에 동조하는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도록 자극받았다.

마에바라는 10월 26일, 옛 조슈번의 수도인 하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사들을 모아 야마구치에 있는 메이지 정부 청사에 대한 기습 공격을 제안했다. 같은날, 마에바라 잇세이는 구 번교메이린칸을 거점으로 동지들을 모으고, 야마구치 현청을 습격하려 했다. 10월 28일, 마에바라를 지도자로 하는 '순국군'이 거병했지만, 현청 습격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야마구치현 지사는 마에바라의 준비에 대해 통보를 받았고, 신푸렌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에게 물러설 것을 촉구했다.

결국 마에바라는 천황에게 직소하기 위해 시후쿠를 거쳐 산인도를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마에바라는 동해 연안을 따라 국가 수도 도쿄로 진격하여 가는 길에 여러 옛 번의 전 무사들을 규합하고 메이지 천황의 발 앞에서 집단 할복을 하기로 결정했다.

1876년 10월 24일, 마에바라는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봉기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신푸렌의 난은 다음 날 진압되었고, 마에바라는 현청 습격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이에 마에바라는 10월 28일조슈번의 수도인 하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사들을 모아 '순국군'을 결성하고,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려 했다. 이들은 산인도를 통해 상경을 시도했으나, 악천후와 정보 부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특히, 袂를 갈라선 이사하야 모토키요가 하기를 점거하고 근친자를 처벌하고 있다는 허보(스사 향토사 연구회)는 순국군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순국군은 10월 31일 하기로 돌아와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에바라 등 간부 5명은 직소를 위해 별도로 행동했지만, 11월 5일 시도한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하기에서는 11월 6일까지 미우라 고로 소장이 이끄는 히로시마 진대와 군함 맹춘의 공격으로 순국군은 진압되었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봉기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신푸렌의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일본 제국 육군구마모토현 관리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마에바라는 10월 26일, 옛 조슈번의 수도 하기에서 무사들을 모아 야마구치현 청사에 대한 기습 공격을 제안했으나, 병력이 100명에 불과하여 10월 28일에 야간 기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야마구치현 지사가 마에바라의 준비에 대해 통보를 받고, 신푸렌의 난 진압 소식을 전하며 물러설 것을 촉구했다.

기습 공격 계획이 실패할 것을 깨달은 마에바라는 도쿄로 진격하여 메이지 천황 앞에서 집단 할복을 할 계획을 세웠다. 마에바라의 반군은 하기에서 스사로 이동하여 약탈을 하고 더 많은 무사들을 모집하여 스스로를 순덕군이라고 불렀다. 이와미국 하마다로 해상 이동을 하려던 계획은 강풍으로 무산되었고, 마에바라는 하기로 돌아왔으나 비밀 탄약 저장고가 바다에 버려져 군대가 무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11월 5일, 마에바라는 도쿄로 가기 위해 소수의 병력과 함께 하기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혔고, 순덕군의 나머지 병력은 하기에서 육군 부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별도 행동을 취한 이세이, 오쿠다이라 등 간부와 종자들은 도쿄로 향하던 중 11월 5일시마네현사토 노부히로 등에게 포위되어 투항 후 체포되었다.

12월 3일, 마에바라와 그의 동료 6명은 후쿠오카현의 군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아키즈키의 난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같은 날 야마구치 재판소・하기 임시 재판소(재판소장 이와무라 미치토시)에서 이세이와 오쿠다이라를 포함한 주요 간부들이 즉시 참수되었다. 살아남은 반군 40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 1. 거병과 야마구치 현청 습격 시도

1876년 10월 24일, 마에바라 잇세이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봉기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비록 신푸렌의 난은 다음 날 아침 진압되었지만, 봉기에 동조하는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도록 자극받았다.

마에바라는 10월 26일, 옛 조슈번의 수도인 하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사들을 모아 야마구치에 있는 메이지 정부 청사에 대한 기습 공격을 제안했다. 같은날, 마에바라 잇세이는 구 번교메이린칸을 거점으로 동지들을 모으고, 야마구치 현청을 습격하려 했다. 10월 28일, 마에바라를 지도자로 하는 '순국군'이 거병했지만, 현청 습격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야마구치현 지사는 마에바라의 준비에 대해 통보를 받았고, 신푸렌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에게 물러설 것을 촉구했다.

결국 마에바라는 천황에게 직소하기 위해 시후쿠를 거쳐 산인도를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마에바라는 동해 연안을 따라 국가 수도 도쿄로 진격하여 가는 길에 여러 옛 번의 전 무사들을 규합하고 메이지 천황의 발 앞에서 집단 할복을 하기로 결정했다.

3. 2. 상경 시도와 좌절

1876년 10월 24일, 마에바라는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봉기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신푸렌의 난은 다음 날 진압되었고, 마에바라는 현청 습격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이에 마에바라는 10월 28일조슈번의 수도인 하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무사들을 모아 '순국군'을 결성하고,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려 했다. 이들은 산인도를 통해 상경을 시도했으나, 악천후와 정보 부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특히, 袂를 갈라선 이사하야 모토키요가 하기를 점거하고 근친자를 처벌하고 있다는 허보(스사 향토사 연구회)는 순국군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순국군은 10월 31일 하기로 돌아와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에바라 등 간부 5명은 직소를 위해 별도로 행동했지만, 11월 5일 시도한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하기에서는 11월 6일까지 미우라 고로 소장이 이끄는 히로시마 진대와 군함 맹춘의 공격으로 순국군은 진압되었다.

3. 3. 정부군의 진압과 마에바라의 최후

마에바라 잇세이는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 지도자들로부터 봉기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신푸렌의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일본 제국 육군구마모토현 관리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마에바라는 10월 26일, 옛 조슈번의 수도 하기에서 무사들을 모아 야마구치현 청사에 대한 기습 공격을 제안했으나, 병력이 100명에 불과하여 10월 28일에 야간 기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야마구치현 지사가 마에바라의 준비에 대해 통보를 받고, 신푸렌의 난 진압 소식을 전하며 물러설 것을 촉구했다.

기습 공격 계획이 실패할 것을 깨달은 마에바라는 도쿄로 진격하여 메이지 천황 앞에서 집단 할복을 할 계획을 세웠다. 마에바라의 반군은 하기에서 스사로 이동하여 약탈을 하고 더 많은 무사들을 모집하여 스스로를 순덕군이라고 불렀다. 이와미국 하마다로 해상 이동을 하려던 계획은 강풍으로 무산되었고, 마에바라는 하기로 돌아왔으나 비밀 탄약 저장고가 바다에 버려져 군대가 무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11월 5일, 마에바라는 도쿄로 가기 위해 소수의 병력과 함께 하기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혔고, 순덕군의 나머지 병력은 하기에서 육군 부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별도 행동을 취한 이세이, 오쿠다이라 등 간부와 종자들은 도쿄로 향하던 중 11월 5일시마네현사토 노부히로 등에게 포위되어 투항 후 체포되었다.

12월 3일, 마에바라와 그의 동료 6명은 후쿠오카현의 군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아키즈키의 난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같은 날 야마구치 재판소・하기 임시 재판소(재판소장 이와무라 미치토시)에서 이세이와 오쿠다이라를 포함한 주요 간부들이 즉시 참수되었다. 살아남은 반군 40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 결과 및 영향

마에바라 잇세이, 오쿠다이라 료스케 등 간부 5명과 시종 시라 린조, 마레 모코 등 총 7명은 도쿄로 가기위해 배로 하기의 에츠 항을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시마네현 우류 항에 피난했다. 도선사의 도움으로 겨우 상륙한 그들은 11월 5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시마네 현령 사토 노부히로와 경찰들이 몰려와 대치 중 소명 기회 부여를 조건으로 투항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그들에겐 어떤 소명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신정부는 마에바라 잇세이에게 전 아이즈 번사 나가오카 히사시게(永岡久茂)와 내란을 공모했다는 누명까지 씌웠다. 나가오카는 10월 29일에 지바현청 습격 미수 사건(시안바시 사건)을 일으켰었다.

12월 3일 야마구치 지방법원 하기 출장소(재판장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판결에서 마에바라 잇세이 이하 오쿠다이라 료스케, 요코야마 도시히코(横山俊彦), 사세 잇세이(佐世一清,마에바라 잇세이의 친동생), 야마다 에이타로(山田頴太郎, 마에바라 잇세이의 친동생), 유후쿠 준인(有福旬允), 오구라 신이치(小倉信一), 고노 기이치(河野義一)는 즉결 처분(참수)됐다. (다음날 참수됐다는 설도 있음) 자기 변호의 기회조차 박탈된 채였다. 300 군세 중 포로들과 그 외 연루자들의 처분은 1876년 법무성 산하 내란음모 판결 법정에서 유죄 72명, 무죄 1명, 훈방 299명 등으로 결정됐다. 당시 판결에 대해 다른 사실 기록이 많아 특정하기 어려운데 다음과 같다.


  • 하기의 난으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나무 액자의 기록으로는 징역 48명, 제족방면(≒폐서인)[6] 15명, 방면 388명이라고 돼있다.
  • 하기 출장소 재판장 이와무라 미치토시 판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징역이 60여 명, 방면이 2천 여명이라고 돼있다.
  • 시미즈 기요타로(清水清太郎)의 일기에는 재판에 오른 폭도가 무려 3천5백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어쨌든 처벌의 법원(法原,법적 근거)는 메이지 9년(1876) 11월 8일 사법경 오키 다카토에 의해 제정된 폭도처분 임시 시행령(臨時暴徒処分例)이었다.

4. 1. 가혹한 처벌과 연좌제

메이지 정부는 하기의 난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주모자들은 즉결 처형되었고, 연루자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12월 3일 야마구치 지방법원 하기 출장소(재판장 이와무라 미치토시)의 판결에서 마에바라 잇세이 이하 관련자들이 즉결 처분(참수)됐다. 이들에게는 자기 변호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876년 법무성 산하 내란음모 판결 법정에서 유죄 72명, 무죄 1명, 훈방 299명 등으로 결정됐다. 당시 판결에 대한 기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하기의 난으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나무 액자의 기록으로는 징역 48명, 제족방면(≒폐서인)[6] 15명, 방면 388명이라고 되어있다. 하기 출장소 재판장 이와무라 미치토시 판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징역이 60여 명, 방면이 2천 여명이라고 되어있다. 시미즈 기요타로(清水清太郎)의 일기에는 재판에 오른 폭도가 3천5백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처벌의 법적 근거는 메이지 9년(1876) 11월 8일 사법경 오키 다카토에 의해 제정된 폭도처분 임시 시행령이었다.

4. 2. 쇼카손주쿠의 폐쇄와 재건

하기의 난 주모자 마에바라 잇세이쇼카손주쿠(松下村塾) 출신으로,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친족까지 난에 끌어들였다.[7] 이로 인해 쇼카손주쿠 교장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은 할복하고 학교는 폐교되었다.[7]

쇼인의 친형 스기 민지(杉民治)는 은거했지만 1880년(메이지 13년) 쇼카손주쿠를 재건했다.[7] 그러나 10년 후 교육령이 반포되면서 다시 폐교되기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7]

5. 역사적 평가

5. 1. 보수 반동 세력의 저항

5. 2.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병자 하기사변 재판 조서 요시다 장당 문고
[2] 문서 기헤이타이의 탈대소동 혹은 탈퇴소동
[3] 문서 후쿠에 촌
[4] 문서 스사쵸
[5] 발표자료 스사 향토사 연구회 발표
[6] 문서 제족방면
[7] 문서 데릴사위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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