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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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함마드는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메카에서 태어나 쿠라이시 부족 출신으로, 40세에 계시를 받아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하여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하고, 종교법과 사회적 규정을 정립했다. 메카와의 갈등 끝에 승리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으며, 632년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에서 알라가 보낸 마지막 예언자로 존경받으며, 그의 가르침은 꾸란과 하디스를 통해 전해진다. 그는 정치가이자 군사 지도자로서 아라비아 반도의 사회와 도덕 질서를 변화시켰으며, 가족으로는 아내 하디자와 여러 자녀가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하며, 결혼, 노예 소유, 전쟁 등과 관련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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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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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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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무함마드 |
로마자 표기 | Muḥammad |
의미 | 찬양받을 만한 자 |
다른 이름 | (신의 메신저) |
출생일 | 약 570년 CE (53년 BH) |
출생지 | 메카, 헤자즈, 아라비아 |
사망일 | 632년 6월 8일 CE (11년 AH; 61~62세) |
사망지 | 메디나, 메디나 국가 |
안장 장소 |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에 있는 녹색 돔 |
종교 | 이슬람교 |
활동 기간 | 583–609 CE (상인), 609–632 CE (종교 지도자) |
주요 업적 | 이슬람교 창시 |
직업 | 상인, 종교 지도자, 군사 지도자, 정치인 |
칭호 | 아부 알카심 (쿠냐), 라술 ("메신저"), "예언자" |
쿠냐 | 아부 알카심 |
라카브 | 카탐 알나비인 |
라카브 (의미) | 예언자의 인장 |
로마자 표기 (쿠냐) | Abū al-Qāsim |
로마자 표기 (라카브) | Khātam al-Nabiyyīn |
부모 | 압둘라 이븐 압드 알무탈리브(아버지) 아미나 빈트 와흐브(어머니) |
친척 | 아흘 알바이트 (집안사람들) |
가족 | |
배우자 | 하디자 빈트 후와일리드 (595–619) 사우다 빈트 자마 (619–632)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 (619–632) 하프사 빈트 우마르 (624–632) 자이나브 빈트 후자이마 (625–627) 움 살라마 (625–632) 자이나브 빈트 자흐시 (627–632) 주와이리야 빈트 알하리스 (628–632) 움 하비바 람라 빈트 아비 수프얀 (628–632) 레이하나 빈트 자이드 (629–631) 사피야 빈트 후야이 (629–632) 마이무나 빈트 알하리스 (630–632) 마리야 알키브티야 빈트 샤무운 (630–632) |
자녀 | 카심 (아들) 압둘라 (아들) 이브라힘 (아들) 자이나브 (딸) 루카이야 (딸) 움 쿨숨 (딸) 파티마 (딸) |
계보 | |
가계 | 아브드 알라의 아들, 아브드 알무탈리브의 아들, 하심의 아들, 압드 마나프의 아들, 쿠사이의 아들, 킬랍의 아들 |
기타 | |
후임 | 아부 바크르 알리 |
2. 생애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의 모든 주요 종파에서 신의 최종 예언자로 여겨지며, 현대 일부 종파에서는 이러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135] 그는 아라비아 반도를 하나의 이슬람 국가로 통일하였고, 꾸란과 그의 가르침 및 실천(순나)은 이슬람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약 570년(코끼리의 해)경 아라비아의 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는 6세에 고아가 되었다.[136] 외조부 압드 알무탈리브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고, 그의 사후에는 삼촌인 아부 탈리브에게 길러졌다. 그는 정기적으로 히라 산 동굴에서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40세가 되던 해 동굴에서 천사 지브릴을 통해 신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137] 613년부터[138] 무함마드는 이 계시들을 공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은 하나"이며, 신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슬람)[139]이 올바른 삶의 방식(딘)[140]이고, 자신이 다른 이슬람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예언자이자 사자임을 선포했다.[141][142][143]
초기 신자들은 수가 적었고, 메카의 다신교도들로부터 적대적인 박해에 직면했다. 무함마드는 615년 일부 신자들을 아비시니아로 피신시켰고, 622년에는 자신과 남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를 떠나 메디나(당시 야스리브)로 이주했다. 이 사건, 즉 히즈라는 이슬람력의 시작점이 되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메디나 헌장을 통해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8년간 메카 세력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으며, 대표적으로 바드르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6] 629년 12월(또는 630년), 무함마드는 1만 명의 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하여 거의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632년, 작별의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무함마드는 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태였다.[144] [145]
무함마드가 죽기 전까지 받았다고 여겨지는 계시들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 꾸란을 구성한다. 꾸란 외에도, 하디스와 시라(전기)에 기록된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실천(순나)은 이슬람 법(샤리아)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2. 1. 어린 시절과 청년기
무함마드의 생애 초기에 대한 정보는 주로 후대의 이슬람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들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의가 있다.[9] 초기 전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8세기 이븐 이샤크가 쓴 ''하나님의 사자의 삶''이지만 원본은 소실되었고, 이븐 히샴과 알-타바리의 저술에 인용된 형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븐 히샴 스스로 특정 내용을 생략했음을 밝히기도 했다.[10] 또한 알-와키디의 기록은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비판받기도 한다.[11] 서구 역사가들은 이러한 초기 전기들이 엄격한 역사 기록보다는 종교적 메시지 전달에 목적을 두었을 수 있다고 본다.[12]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압드 알무탈리브 이븐 하심[18]은 메카[19]에서 570년경 태어났다. 그의 이름 '무함마드'는 아랍어로 "칭찬할 만한"이라는 뜻이며, 꾸란에도 네 번 언급된다.[22] 어릴 적에는 '알-아민'(충실한 자)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이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별명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머니 '아미나'의 남성형 이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그는 아라비아 서부의 유력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 그중에서도 바누 하심 가문 출신이었으나, 당시 가세는 기울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무함마드의 탄생 연도는 아브라하가 코끼리를 이끌고 메카를 공격했다 실패한 '코끼리의 해'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23]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이러한 원정이 실제 있었다면 무함마드 탄생 훨씬 이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부 학자들은 후대 무슬림 학자들이 꾸란의 모호한 구절(105:1-5)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하의 이야기를 무함마드 탄생과 연결했을 수 있다고 본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할아버지 압드 알무탈리브와 삼촌 아부 탈리브의 보살핌 아래 자랐다. 청년기에는 삼촌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특히 부유한 과부 상인이었던 카디자의 대상 무역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그녀와 결혼하여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

605년경, 쿠라이시 부족이 카바를 재건축할 때 흑석을 제자리에 다시 놓는 문제를 두고 부족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이때 중재자로 나선 무함마드는 자신의 망토 위에 흑석을 놓고 각 부족 대표들이 함께 망토를 들어 올리게 하여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그는 직접 흑석을 벽에 고정시켰다.
2. 1. 1. 메카의 경제적, 종교적 배경
이슬람의 성지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곳은 인도양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대상 무역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예로부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경교와 같은 기독교 소수 교파들이 로마교회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자리 잡기도 했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해마다 많은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방문했다.2. 1. 2. 탄생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 무렵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중 하심가 출신이었다. 하심가에는 아브드 알 무딸립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브드 알라였다. 아브드 알라는 아미나와 결혼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다[167].무함마드는 570년경 메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유복자로 자랐다. 그의 가문은 명문 귀족이었으나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 1. 3. 고아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그가 태어나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24] 여섯 살 때, 어머니 아미나가 메디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사망하여 무함마드는 고아가 되었다. 이후 하녀의 손에 이끌려 메카로 돌아와 8살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할아버지 압드 알무탈리브의 보호 아래 자랐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삼촌인 아부 탈리브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아부 탈리브는 바누 하심 족의 새로운 지도자였지만, 가난했고 딸린 식구가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의 무역 활동을 따라다녔다.12세 무렵, 무함마드는 삼촌 아부 탈리브와 함께 시리아로 무역 여행을 가서 바히라라는 수도승을 만났다고 전하는 여러 이슬람 이야기가 있다. 바히라는 그에게 예언자의 운명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세부 사항이 있는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으며, 바히라와 무함마드의 만남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현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알다하비와 같은 일부 중세 무슬림 학자들에 의해서도 허구로 간주된다. 그 후 무함마드는 목동 일을 하며 성장한다.
2. 1. 4. 다신교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셈어족 언어를 사용하던 사바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며 서로 종교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신성한 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는 관습 역시 사바인의 종교적 영향으로 여겨진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파되기도 했으나, 대다수 아랍인들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메카의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이슬람교에서 유일신으로 섬기는 알라 역시 본래는 카바 신전에서 숭배되던 여러 신들 중 하나였다.2. 1. 5. 청년 시절
가난했던 삼촌 아부 탈리브를 돕기 위해 수익성 좋은 직업을 찾던 무함마드는 삼촌의 소개로 부유한 과부 상인 카디자에게 고용되었다. 그는 카디자를 대신해 시리아로 대상(隊商) 무역을 떠나 큰 성공을 거두고 메카로 돌아왔다. 이 시기 이전, 무함마드는 사촌 파키타 빈트 아비 탈리브에게 청혼했으나 가난 때문에 거절당하기도 했다.무함마드의 사업적 명성은 40세의 먼 친척이자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던 카디자의 관심을 끌었다. 카디자는 그에게 시리아로 가는 상단 중 하나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의 능숙함에 깊은 인상을 받아 15살 어린 25세의 무함마드에게 먼저 청혼했다. 무함마드는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고, 이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카디자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와 일부일처 관계를 유지했다. 결혼 후 경제적으로 안정된 무함마드는 삼촌 아부 탈리브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알리를 입양하여 키웠다.
2. 2. 이슬람교의 창시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 섹션에서는 해당 내용을 생략함)2. 2. 1. 계시

경제적인 안정 덕분에 무함마드는 생계 걱정 없이 금식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은 어린 시절부터 나타났는데, 삼촌이 관리하던 카바 신전의 검은 돌 숭배를 보며 그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168]

610년, 40세가 되던 해, 무함마드는 메카 근처 누르 산의 히라 동굴에서 고독하게 명상하던 중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지브릴은 꾸란 구절이 적힌 천을 보여주며 읽으라고 명령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한다고 답했지만, 지브릴은 그를 강하게 끌어안아 숨 막힐 정도로 압박하며 명령을 반복했다. 세 번째 반복 후에야 지브릴은 구절을 직접 읊어주었고, 무함마드는 이를 암기할 수 있었다. 이 구절들은 훗날 꾸란의 96장 1절에서 5절(꾸란 96:1-5)이 되었다.
이 경험 이후 무함마드는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지니(정령)에게 홀렸다고 생각하며 절망감에 빠져 산 정상에서 몸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렀을 때, 그는 지평선을 가득 메운 거대한 존재를 보았고,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그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이 존재는 '계시의 영'(rūḥ|루흐ar)으로, 무함마드는 나중에 이를 지브릴이라 불렀다. 이는 일반적인 천사가 아닌, 인간의 이해와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묘사된다.[26][27]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아내 카디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나를 덮어달라"고 외쳤다. 카디자는 그를 진정시키고 담요로 감싸 안으며 그의 경험이 악령이 아닌 진실된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녀는 무함마드를 자신의 사촌이자 네스토리우스교 신앙을 가진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데려갔다. 와라카는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만난 존재가 모세에게 나타났던 위대한 신성, 즉 대천사 지브릴이며 무함마드가 예언자라고 선언했다.[28] 집으로 돌아온 카디자는 와라카의 말을 전하고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최초의 무슬림(신자)이 되었다. 카디자는 지브릴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 존재가 천사임을 확인하는 시험을 통해 무함마드를 안심시켰다고도 전해진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보인 비범한 모습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지니에 홀렸거나 점쟁이, 마술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시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상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낮으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와라카가 사망한 후, 계시는 한동안 중단되었고 무함마드는 깊은 고뇌에 빠져 다시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산 정상에서 몸을 던지려 할 때마다 지브릴이 나타나 그가 참된 신의 사자임을 확인시켜 주며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생각과 신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29] 초기 꾸란 계시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징벌을 경고하고, 신자들에게는 보상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임박한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위협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계시 경험의 충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저했지만, 곧 소수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밀리에 자신의 경험과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신자는 아내 카디자였고, 그 뒤를 이어 10세의 사촌 알리 빈 아비 탈리브, 절친한 친구 아부 바크르, 양아들 자이드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148] 소식이 퍼지면서 가족 내에서도 젊은 세대와 여성들은 대체로 그를 지지했지만, 나이 든 남성들은 대부분 강하게 반대하며 분열이 일어났다.
약 613년부터 무함마드는 공개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2] 초기 추종자들은 주로 여성, 해방 노예, 하인, 노예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하층 계급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전하는 새로운 계시를 열심히 듣고 암기했으며, 글을 아는 이들은 이를 기록했다. 무함마드는 기도(살라트(Salat)|살라트ar) 의식과 신(알라)에 대한 완전한 복종(Islām|이슬람ar)을 의미하는 자세, 그리고 공동체(움마(Ummah)|움마ar)의 의무로서 자선(자카트(Zakat)|자카트ar)을 강조했다. 이 시기 그의 종교 운동은 '정화'를 의미하는 Tazakka|타자카ar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메카 주민 대부분이 무함마드의 활동에 무관심했지만, 그가 기존의 다신교 신앙과 우상 숭배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달라졌다.[148] 특히 메카의 지배 부족인 쿠라이시는 카바 신전 관리와 순례객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위협받고, 자신들의 전통과 조상들이 부정당한다고 느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148] 그들은 무함마드에게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하거나(물을 솟게 하라 등), 신이 왜 그에게 보물을 주지 않느냐고 조롱했으며, 하늘에 올라가 꾸란의 원본을 가져오라고 비꼬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자연의 질서 자체가 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꾸란의 말씀 자체가 기적이라고 응수했다.
쿠라이시족과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암르 이븐 알 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쿠라이시 지도자들은 무함마드가 자신들의 문화를 조롱하고 조상을 비방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번은 카바 신전 근처에서 무함마드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졌고, 세 번째에는 무함마드가 "쿠라이시여, 내 말을 들으시오! 내 목숨을 손에 쥐고 계신 분(신)께 맹세코, 나는 여러분에게 도살을 가져왔소."라고 강하게 경고하자 잠시 침묵하기도 했다. 다음 날, 일부 쿠라이시족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옷을 붙잡고 위협하자 아부 바크르가 나서서 "신이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느냐?"고 외치며 막아섰다.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에게 상인 집단에 합류시켜 주거나 유력 가문과의 결혼을 제안하며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30] 결국 막즘 족의 지도자인 아부 자흘을 중심으로 한 대표단이 무함마드의 보호자이자 삼촌인 아부 탈리브에게 찾아가 무함마드를 포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들은 아부 탈리브에게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조상들에 대한 비방, 우리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조롱, 우리 신들에 대한 학대를 견딜 수 없소. 당신이 직접 무함마드를 막거나, 우리가 그를 막도록 해야 하오. 당신도 그가 말하는 것에 반대하니, 우리가 그를 없애겠소."라고 압박했다. 아부 탈리브는 처음에는 그들을 돌려보냈으나, 무함마드의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하고는 "조카여,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신께 맹세코, 나는 어떤 이유로도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끝까지 그를 보호할 것을 다짐했다.
쿠라이시족은 야스리브(훗날의 메디나)의 유대인 랍비들에게 사람을 보내 무함마드에 대해 문의했다. 랍비들은 무함마드의 진위를 시험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하라고 조언했다: 1) 먼 옛날 모험을 떠났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2) 세상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 3) 영혼의 본질. 랍비들은 만약 무함마드가 정확히 답하면 예언자이고, 그렇지 못하면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메카로 돌아온 이들이 질문하자 무함마드는 다음 날 답을 주겠다고 했으나, 신의 계시가 15일 동안 내려오지 않아 곤경에 처했다. 마침내 지브릴이 나타나 답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동굴 속에서 잠든 사람들의 이야기(꾸란 18:9-25, 에페소스의 일곱 잠자는 사람 전설과 연관됨),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두 뿔을 가진 자'(Dhu al-Qarnayn|둘 카르나인ar, 알렉산드로스 대왕 설화와 연관됨)의 이야기(꾸란 18:93-99)를 전했다. 세 번째 질문인 영혼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답했다(꾸란 17:85). 그러나 질문을 했던 쿠라이시족이나 답을 알려준 유대인들 중 누구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질문을 전달했던 나드르 이븐 알하리스와 우크바 이븐 아비 무아이트는 훗날 바드르 전투 후 무함마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처형 직전 우크바가 "내 아이들은 누가 돌보나?"라고 묻자 무함마드는 "지옥이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615년, 박해가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일부 추종자들을 아비시니아(악숨 왕국)로 이주시켰다. 기독교 국가였던 아비시니아의 황제 아스하마 이븐 아브자르는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했다. 쿠라이시족은 이들을 송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 이주가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나뉘며, 박해 외에 무역 경쟁 등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시기, 무함마드가 쿠라이시족과의 타협을 모색하며 메카의 세 여신(알라트, 알우자, 마나트)을 인정하는 듯한 구절("이들은 높이 나는 자들이니, 그들의 중재를 기대할 수 있다")을 잠시 낭송했다는 사탄의 구절 사건이 전해진다.[31][32] 이로 인해 잠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아비시니아 이주민 일부가 귀환하기도 했으나, 다음 날 무함마드는 지브릴의 지시에 따라 이 구절이 사탄의 속삭임이었다며 철회하고 여신들을 비난하는 구절로 대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초기 이슬람 기록에는 나타나지만, 후대 하디스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무함마드의 무오류성 교리에 따라 이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구 학계에서는 당혹스러움의 기준에 따라 이 사건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편이다.
616년, 쿠라이시족은 바누 하심 부족 전체에 대해 교역과 결혼을 금지하는 보이콧을 시행했다. 약 3년간 지속된 이 제재는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으나, 무함마드는 신체적 위해 없이 설교를 계속했다. 619년, 쿠라이시 내부의 동정 여론과 노력으로 보이콧은 해제되었다.
619년은 무함마드에게 '슬픔의 해'였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 카디자와 보호자였던 삼촌 아부 탈리브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148] 아부 탈리브는 임종 직전까지 무함마드를 보호했지만 끝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바누 하심 족장직을 계승한 다른 삼촌 아부 라합은 처음에는 보호를 약속했으나,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믿지 않은 아부 탈리브와 압드 알무탈리브가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말하자 격분하여 보호를 철회했다.[33]
메카에서의 입지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무함마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타이프로 향했다. 그곳 주민들에게 이슬람을 전하고 지원을 얻으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거절과 조롱뿐이었다. "당신이 진짜 예언자라면 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 신이 당신을 보냈다면 왜 당신을 보호하지 않는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심지어 타이프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입혔고, 무함마드는 간신히 우트바 이븐 라비아의 정원으로 피신해야 했다. 절망 속에서 기도하던 그에게 우트바의 기독교 노예 아다스가 포도를 가져다주었고,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들은 아다스는 그의 예언자됨을 인정하며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34][35]
타이프에서의 실패 소식은 메카에 전해져 아부 자흘 등 적대자들의 기세를 더욱 높였다. 메카로 돌아가는 것조차 위험해진 무함마드는 여러 사람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마침내 바누 나우팔 족의 족장 무팀 이븐 아디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들, 조카들과 함께 무장하고 무함마드를 메카 시내로 안전하게 호위했다. 아부 자흘이 무팀에게 보호하는 것인지 개종한 것인지 물었을 때, 무팀이 "보호하는 것"이라고 답하자 아부 자흘은 "우리는 당신이 보호하는 사람을 보호할 것"이라며 물러섰다.
2. 2. 2. 초기 포교 활동
첫 계시를 받은 후,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그 경험의 강렬함과 복잡성 때문에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비밀리에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의 아내 카디자가 가장 먼저 그의 예언자적 사명을 믿었으며, 이후 10살 사촌 알리, 절친한 친구 아부 바크르, 양자 자이드 등이 초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169][9][10][11][16][12][13][14][15][17][15][15][16][13][17][18][19][20][21][22][23][24][25][26][27][28][29]
약 3년간의 비밀 포교 후, 613년경 무함마드는 공개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2] 그는 자신이 '알라의 사자'임을 선언하고, 유일신 알라의 절대적 능력, 창조, 최후의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역설했다. 초기 추종자들은 주로 여성, 해방 노예, 하인, 노예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전하는 계시를 열심히 듣고 암기했으며, 글을 아는 이들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무함마드는 또한 정기적인 기도(Salat|살라트ar)와 자선(Zakat|자카트ar)을 공동체(Ummah|움마ar)의 중요한 의무로 가르쳤다. 이 시기 그의 운동은 Tazakka|타자카ar(정화)로 불렸다.
초기에 메카의 주류 사회는 무함마드의 활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가 메카의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과 조상 숭배를 비판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쿠라이시족 지도자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기존의 사회 질서와 카바 순례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이익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점차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무함마드에게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하거나 그의 메시지를 조롱하며 압박했다.
쿠라이시족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그들은 무함마드의 삼촌이자 보호자인 아부 탈리브에게 여러 차례 찾아가 무함마드의 활동을 중단시키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조상을 모독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고 비난하며, 아부 탈리브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고 위협했다. 아부 탈리브는 부족 내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카를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무함마드 역시 "오른손에 태양을, 왼손에 달을 준다 해도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고, 이에 아부 탈리브는 그를 계속 지지하기로 했다.
쿠라이시 지도자들은 무함마드의 정체를 시험하고자 야스리브(메디나의 옛 이름)의 유대인 랍비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랍비들은 세 가지 질문(오래전 동굴에서 잠든 젊은이들, 세상 끝까지 여행한 인물, 영혼의 본질)을 통해 그를 시험해 보라고 조언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통해 이 질문들에 답했지만(꾸란 18장), 이를 통해 쿠라이시족이나 유대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박해가 심화되자 615년, 무함마드는 일부 추종자들에게 아비시니아(악숨 왕국)로 이주하도록 권했다. 기독교 국가였던 아비시니아의 황제 아스하마 이븐 아브자르는 무슬림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보호했다. 쿠라이시족은 사절단을 보내 이들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아비시니아 이주는 초기 무슬림 공동체가 직면했던 박해의 정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무렵, 무함마드가 쿠라이시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잠시 메카의 여신들을 인정하는 듯한 구절을 낭송했다가 사탄의 유혹이었다며 철회했다는 사탄 구절 사건이 있었다고 초기 이슬람 전승은 기록한다. 이 일로 아비시니아로 갔던 일부 무슬림이 메카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무함마드가 해당 구절을 철회하면서 쿠라이시족과의 갈등은 다시 깊어졌다. 이 사건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후대 이슬람 신학자들과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거리다.
616년, 쿠라이시족의 여러 씨족들은 무함마드가 속한 바누 하심 씨족에 대해 교역과 결혼을 금지하는 사회적, 경제적 제재(보이콧)를 가했다. 이로 인해 바누 하심 씨족은 약 3년간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씨족 내부의 결속과 일부 쿠라이시족 인사들의 동정으로 619년 보이콧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619년은 무함마드에게 '슬픔의 해'로 기억된다. 그의 든든한 정신적, 경제적 지주였던 아내 카디자와 그를 보호해주던 삼촌 아부 탈리브가 같은 해에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부 탈리브의 뒤를 이어 바누 하심의 족장이 된 아부 라합은 처음에는 무함마드를 보호하려 했으나,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믿지 않은 조상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자 보호를 철회했다. 이로 인해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메카에서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무함마드는 새로운 지지 기반을 찾기 위해 타이프로 향했다. 하지만 타이프의 지도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부추겨 그에게 돌을 던지게 하는 등 극심한 적대감을 보였다. 상처 입고 절망한 무함마드는 메카 귀족 우트바 이븐 라비아 소유의 정원으로 피신하여 기도했고, 그곳에서 만난 기독교인 노예 아다스에게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타이프에서의 실패 후 메카로 돌아오는 것조차 어려웠으나, 무팀 이븐 아디라는 인물의 보호 약속을 받고서야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난이 극심했던 시기에 무함마드는 Isra|이스라ar와 Mi'raj|미라즈ar로 알려진 신비로운 밤의 여정과 하늘로의 승천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 꾸란 17장 1절은 무함마드가 하룻밤 사이에 메카의 카바에서 '가장 먼 경배의 장소'로 여행했다고 언급한다. 후대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 '가장 먼 경배의 장소'를 예루살렘(Bayt al-Maqdis|바이트 알 마크디스ar)으로 해석하며,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 신과 만났다고 믿는다. 이 사건은 무함마드에게 큰 영적 위안을 주었을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 역사적 실재성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37][38] 메카에서의 계속되는 박해와 지지 기반 약화는 무함마드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했고, 이는 결국 메디나로의 Hijra|히즈라ar(이주)라는 중대한 결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2. 3. 메카에서의 박해
그러나 친구와 친족들은 무함마드를 비난하고 무시하며 모욕했고, 무함마드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알라가 유일신이라는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다. 카바 신전을 관리하며 순례객들로부터 수입을 얻던 메카의 부족원들은 이러한 활동에 반발하여 무함마드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알라가 유일한 신임을 주장했다.613년경, 무함마드는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2] 그의 초기 추종자들은 주로 여성, 해방 노예, 하인, 노예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무함마드는 기도(살라트)와 신(알라)에게 완전히 복종하는(이슬람) 자세를 포함한 의례, 그리고 무슬림 공동체의 의무로서 자선(자카트)을 도입했다. 이 시기 무함마드의 종교 운동은 '정화'를 의미하는 타자카(تزكى|타자카ar)로 알려졌다.
초기 메카 주민들은 그의 설교에 대체로 무관심하여 큰 반대는 없었으나, 무함마드가 기존의 신앙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갈등이 커졌다.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에게 기적을 요구했지만, 그는 자연의 질서 자체가 신의 증거라며 거절했다. 일부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부유하지 못한 것을 조롱하거나, 꾸란이 실물로 존재하지 않음을 들어 비판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전하는 꾸란 자체가 기적적인 증거라고 응수했다.
암르 이븐 알 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쿠라이시족 지도자들이 히즈르 이스마일에 모여 무함마드로 인한 문제들을 논의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전통 문화를 조롱하고, 조상을 비방하며, 기존 신앙을 경멸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신들을 모독한다고 비판했다. 얼마 후 무함마드가 나타나 흑석에 입을 맞추고 카바 주위를 도는 타와프 의식을 행했다. 무함마드가 그들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모욕적인 말을 던졌다. 세 번째 지나갈 때 무함마드는 멈춰 서서 "쿠라이시여, 내 말을 들으시오! 내 영혼을 손에 쥔 분(알라)께 맹세코, 나는 그대들에게 심판을 가져왔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에 쿠라이시족 사람들은 침묵했고,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다음 날, 몇몇 쿠라이시족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다가와 전날 했던 말에 대해 물었다. 무함마드가 이를 인정하자, 그들 중 한 명이 그의 옷을 잡았다. 아부 바크르가 눈물을 흘리며 "알라가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느냐?"라고 외치며 막아서자, 그들은 무함마드를 놓아주었다.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에게 상류층 사회 편입과 유리한 결혼을 제안하며 설교 중단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30] 그러자 막즘 족의 지도자인 아부 자흘을 포함한 대표단이 무함마드의 보호자이자 바누 하심 족의 족장인 삼촌 아부 탈리브를 찾아가 무함마드에 대한 보호 철회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 "신께 맹세코,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조상들에 대한 비방, 우리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조롱, 우리 신들에 대한 학대를 견딜 수 없습니다. 아부 탈리브, 당신이 직접 무함마드를 막거나, 우리가 그를 막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 자신도 그가 말하는 것에 반대하는 우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를 없애겠습니다."
아부 탈리브는 처음에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대표단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활동이 계속되자 아부 탈리브는 조카에게 자신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눈물을 흘리며 "오른손에 태양을, 왼손에 달을 준다 해도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돌아서려 하자 아부 탈리브는 그를 불러 세우고 "조카여, 원하는 대로 하거라. 맹세코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619년은 무함마드에게 '슬픔의 해'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카디자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그의 삼촌이자 보호자였던 아부 탈리브마저 사망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임종 직전의 아부 탈리브에게 이슬람 수용을 권했지만, 그는 끝내 전통 신앙을 지키며 숨을 거두었다. 아부 탈리브의 뒤를 이어 바누 하심 족장이 된 무함마드의 또 다른 삼촌 아부 라합은 처음에는 조카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아부 탈리브와 할아버지 압드 알-무탈리브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말하자, 아부 라합은 분노하여 보호 약속을 철회했다.[33]
보호자를 잃은 무함마드는 새로운 지지 기반을 찾기 위해 타이프로 향했지만, 그곳 주민들로부터 냉담한 반응과 조롱을 받았다. 그들은 무함마드의 예언자 자격을 의심하며 비웃었다. 타이프에서의 실패가 알려지면 메카에서의 입지가 더욱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무함마드는 타이프 사람들에게 비밀 유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무함마드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입혔다. 박해를 피해 무함마드는 근처에 있던 메카 지도자 우트바 이븐 라비아 소유의 정원으로 피신했다. 타이프에서의 거절과 적대감에 깊이 절망한 무함마드는 오직 신만이 의지할 대상임을 깨닫고 기도했다. 이때 우트바의 기독교인 노예 아다스가 포도를 가져다주었다. 무함마드와의 대화 끝에 아다스는 그의 예언자됨을 인정하고 존경의 표시로 그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다고 전해진다.[34][35]
무함마드가 메카로 돌아가려 할 때, 타이프에서의 일이 아부 자흘에게 알려졌다. 아부 자흘은 무함마드의 메카 귀환을 막으려 했다. 위험을 감지한 무함마드는 메카의 유력자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어머니 쪽 친척인 악나스 이븐 샤릭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악나스는 자신이 쿠라이시 본족이 아닌 동맹 부족 소속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다음으로 수하일 이븐 아미르에게 요청했으나, 그 역시 부족 간의 관계를 이유로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바누 나우팔 족의 족장인 무팀 이븐 아디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무팀은 이를 수락하고 아들 및 조카들과 함께 무장하여 무함마드를 메카 시내까지 안전하게 호위했다. 아부 자흘이 무팀에게 무함마드를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종교를 따른 것인지 물었다. 무팀은 단지 보호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에 아부 자흘은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의 보호를 존중하겠다"고 말하며 물러섰다.
2. 4. 메디나 이주 (히즈라)
619년, 무함마드는 아내 카디자와 삼촌이자 보호자였던 아부 탈리브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아부 탈리브의 뒤를 이어 바누 하심 족장이 된 다른 삼촌 아부 라합은 처음에는 무함마드를 보호하려 했으나, 무함마드가 죽은 아부 탈리브와 압드 알무탈리브가 이슬람을 믿지 않아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말하자 보호를 철회했다.[33]메카에서의 지지 기반을 잃은 무함마드는 타이프로 가서 새로운 지원과 보호를 얻으려 했으나, "알라가 예언자를 보내고자 했다면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겠는가?"[170] 와 같은 냉담한 반응과 함께 거절당하고 돌에 맞아 상처를 입는 등 박해를 받았다. 그는 우트바 이븐 라비아의 정원으로 피신하여 기도했고, 그곳에서 만난 기독교 노예 아다스는 무함마드의 예언자됨을 인정했다.[34][35] 타이프에서의 실패 후 메카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험난했으나, 무팀 이븐 아디의 보호 아래 간신히 메카로 돌아올 수 있었다.[170]
메카에서의 박해가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메카 외부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메디나(당시 야스리브)의 바누 카즈라즈 부족 사람 여섯 명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 유대인들로부터 예언자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무함마드의 메시지를 듣고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메디나로 돌아가 이슬람을 전파하며, 오랜 기간 불화를 겪던 카즈라즈 부족과 아우스 부족이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통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170]
이듬해, 메카 근처 아카바(Aqaba)에서 메디나 출신 12명(카즈라즈 10명, 아우스 2명)이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알-아카바의 첫 번째 맹세). 무함마드는 무사브 이븐 우마이르를 메디나에 파견하여 이슬람을 가르치게 했다. 622년 6월, 다시 아카바에서 메디나 출신 개종자 75명(여성 2명 포함)과 무함마드가 비밀리에 만났다. 이 자리에서 메디나 측 대표들은 자신들의 가족처럼 무함마드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으며(알-아카바의 두 번째 맹세 또는 전쟁의 맹세), 무함마드는 그 대가로 천국을 약속했다.[170]
이 맹세 이후 무함마드는 메카의 무슬림들에게 메디나로 이주할 것을 촉구했다. 이 사건은 혈족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히즈라(هجرة|히즈라ara)로 알려졌으며,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었다. 이주는 약 3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무함마드는 모든 추종자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메카에 남아 이주를 독려했다.[170]
쿠라이시 부족은 무함마드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알게 된 무함마드는 사촌 알리에게 자신의 침대에 대신 누워 있도록 하고, 자신은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를 빠져나왔다. 암살자들은 알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고, 쿠라이시는 무함마드를 잡기 위해 낙타 100마리의 현상금을 걸었다.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는 사흘간 동굴에 숨어 추격을 피한 뒤, 622년 9월 4일 메디나에 도착했다.[170] 메카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들은 무하지룬(이주자)으로, 메디나에서 그들을 맞이한 무슬림들은 안사르(협력자)로 불리게 되었다.[170]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곧 모스크 건설을 시작했다. 이 건물은 기도 장소이자 공동체 모임 장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소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기도 방향(키블라)을 예루살렘으로 정했으며, 기도 시간을 알리는 방식으로는 빌랄의 아잔(육성 외침)이 채택되었다.[170]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예언자이자 정치적 지도자, 군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메디나 헌장을 통해 메디나 내 여러 부족(아랍계와 유대계 포함) 간의 평화 공존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특히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공동체(움마)의 기틀을 다졌다.[170] 이 헌장은 무함마드가 메디나 내 세력을 파악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무함마드는 계속해서 하늘의 계시를 받아 꾸란을 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법, 사회 및 경제 규범들을 제정하여 이슬람 공동체의 운영 원리를 확립했다. 메디나 정착 이후, 메카와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했다. 무함마드는 메카와 시리아를 잇는 쿠라이시 부족의 교역로를 위협했으며, 624년에는 바드르 전투에서 메디나를 공격해 온 메카 군대를 격파하여 무슬림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170]
이슬람의 확산 과정에 대해 일부 유럽인들은 '한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슬람이 강제로 개종시킨 것처럼 악선전을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무함마드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슬람 신앙을 넓혔다. 그는 메디나에서 아랍계와 유대계 간의 갈등을 이슬람이라는 유일신 신앙을 통해 평화적으로 중재하려 했으며,[170] 630년에는 무력이 아닌 외교 협상을 통해 메카에 입성하여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했다. 당시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고 선언했다. 이후 이슬람은 정복지 주민들에게 비교적 낮은 세율의 조세를 부과하고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하는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피정복민들을 복속하게 했다.[171]
2. 5. 메카와의 갈등과 승리
메디나로 이주한 후, 메카 사람들은 무슬림 이주민들의 재산을 압수했다.[39] 이후 메카 사람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이 메카 사람들과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하는 꾸란 구절(22:39–40)을 전달했다.[40]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624년 2월 11일 메디나의 알-키블라타인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중, 무함마드는 기도 방향(키블라)을 예루살렘이 아닌 메카의 카바를 향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즉시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었고, 함께 기도하던 동료들도 그를 따랐다.무함마드는 메카의 무역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습격을 지시했으며, 이 중 낙흘라 습격에서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져 전리품과 포로를 얻었다.[6] 624년 3월, 무함마드는 약 300명의 전사를 이끌고 메카 상인 대상을 습격하기 위해 바드르로 향했다.[41] 이 계획을 알게 된 메카 대상은 경로를 바꾸어 피했지만,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메카 군대는 무슬림들과 대치하기로 결정했다.[42] 3배가 넘는 수적 열세 속에서 무함마드는 신이 천 명의 천사를 보내 도울 것이라는 계시를 전하며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43] 무함마드는 전략적으로 우물을 선점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바드르 전투에서 무슬림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아부 자흘을 포함한 많은 메카 지도자들을 포함해 45명 이상을 사살했다. 무슬림 측 사망자는 14명이었다.[44] 70명의 메카인이 포로로 잡혔고, 대부분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45][46] 이 승리는 무슬림 공동체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의 지위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47]
바드르 전투 이후 메디나 내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반대는 줄어들었지만, 일부 이교도들은 여전히 적대감을 드러냈다. 아스마 빈트 마르완과 아부 아팍은 무슬림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다가 살해당했으며, 무함마드가 이를 묵인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부에서는 이 기록이 날조되었다고 본다.[48] 이 사건들 이후 해당 부족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교도의 반대는 거의 사라졌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의 세 주요 유대인 부족 중 하나인 바누 카이누카를 메디나에서 추방했다. 추방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시장에서의 다툼이나 무슬림 여성에 대한 희롱 등이 거론된다. 포위 공격 끝에 항복한 카이누카 부족 남성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카즈라즈 부족의 지도자 압둘라 이븐 우바이의 간청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50][51] 또한 무함마드는 헤자즈 북부의 여러 베두인 부족과 상호 지원 동맹을 맺어 공동체를 보호하려 했다. 메카 출신의 유대인 시인 카브 이븐 알 아슈라프는 바드르 전투의 패배를 애도하며 메카인들의 복수를 촉구하는 시를 지었다가 무함마드의 지시를 받은 무슬림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625년,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아부 수피얀의 지휘 아래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메디나로 진격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 외곽의 우후드 산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우후드 전투 초반 무슬림들은 우세했지만, 측면을 방어하던 궁수 일부가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챙기러 자리를 이탈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무함마드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 메카 군대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메디나를 점령하지 않고 철수했다. 우후드 전투의 많은 사상자로 인해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늘어나자, 무함마드는 남성들이 최대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시(꾸란 4장 안니사)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이슬람의 이슬람의 일부다처제 관행의 배경이 되었다.
우후드 전투 후, 무함마드는 바누 아미르 부족에게 혈족 보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유대 부족인 바누 나디르에게 금전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기다리는 동안 무함마드는 바누 나디르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포위했다. 포위 중 무함마드는 그들의 생계 수단인 야자수 과수원을 베고 태우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당시 아라비아 관습상 명백한 전쟁 선포 행위였다. 약 2주 후 바누 나디르는 항복했고, 제한된 물품만 가지고 메디나를 떠나도록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땅과 재산은 무슬림들에게 분배되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메디나를 공격하려던 무스타리크 부족을 선제공격하여 격퇴하고 많은 전리품(가축, 여성 포로 등)을 얻었다. 이때 병사들이 포로로 잡힌 여성들과의 관계 및 임신 중절(사정 중단)에 대해 질문하자 무함마드가 이를 허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627년, 추방된 바누 나디르의 사주를 받은 메카의 아부 수피얀은 여러 부족과 연합하여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메디나를 공격했다. 무함마드는 약 3,000명의 병력으로 맞섰고, 페르시아 출신 살만 파르시의 제안에 따라 메디나 주위에 참호를 파서 방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아라비아에서는 생소한 전술이었다. 참호 전투(알-칸다크 전투)로 알려진 이 포위 공격은 2주간 지속되었으나, 참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연합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했다.
전투 중 메디나 남쪽의 유대 부족 바누 쿠라이자는 메카 군대와 내통하여 무함마드를 배신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첩자가 협상을 방해하여 실제적인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연합군 철수 후 무슬림들은 바누 쿠라이자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25일간 포위했다. 결국 바누 쿠라이자는 항복했고, 무함마드는 바누 아우스 부족 출신이자 당시 부상으로 죽어가던 사드 이븐 무아즈에게 판결을 맡겼다. 사드는 모든 성인 남성을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으라는 판결을 내렸고, 무함마드는 이를 신의 판결이라며 승인했다. 이븐 이샤크 등의 기록에 따르면 600~900명의 남성이 처형되었으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처형 규모가 더 작았거나 일부는 노예로 팔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53][54][55][56][57]
참호 전투 이후 메카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시리아와의 무역로도 위협받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북쪽으로 두 차례 원정을 떠났으나 큰 전투는 없었다. 이 시기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가 간음 혐의를 받았으나, 무함마드가 아이샤의 결백을 주장하고 간음죄 성립 요건으로 네 명의 목격자를 요구하는 계시(꾸란 24장 안 누르)를 받았다고 발표하면서 무마되었다.[82]
바누 쿠라이자 사건 몇 달 후, 자이드 이븐 하리사가 이끄는 무슬림 대상단이 시리아로 가던 중 바누 파자라 부족에게 습격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함마드는 자이드에게 응징 원정을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부족 여족장 움 키르파가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 순례(움라)를 선언하고 평화적인 목적으로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 근처 후다이비야까지 갔다.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무력 충돌을 우려하여 그를 막아섰다. 양측은 협상 끝에 후다이비야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10년간의 휴전, 다음 해 무슬림들의 메카 순례 허용, 부족 간 동맹의 자유 보장 등이었으나, 무슬림에게 불리한 조항(메카로 도망친 무슬림은 송환하지 않지만, 메디나로 도망친 메카인은 송환해야 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다이비야 조약 체결 후 약 10주 뒤, 무함마드는 메디나 북쪽 약 120.70km 거리에 있는 유대인 거주지 카이바르 오아시스를 공격했다. 이곳에는 이전에 메디나에서 추방된 바누 나디르 부족 일부도 거주하고 있었다. 한 달 이상의 격렬한 전투 끝에 무슬림들은 카이바르를 점령했다. 전투 과정에서 유대인 지도자 케나나 이븐 알-라비는 숨겨둔 보물의 행방을 대라는 요구를 거부하다 고문 후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었다. 패배한 카이바르 유대인들은 수확량의 절반을 바치는 조건으로 농사를 계속 짓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언제든 추방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파다크 등 인근 유대인 공동체들도 카이바르와 유사한 조건으로 무함마드에게 항복했다. 카이바르 전투 후 열린 연회에서 자이납 빈트 알-하리스라는 유대인 여성이 무함마드에게 독이 든 양고기를 권했고, 이를 먹은 무슬림 한 명이 사망했다. 무함마드 자신도 맛을 보았으나 뱉어내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 죽을 때까지 독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다이비야 조약은 2년 만에 깨졌다. 쿠라이시와 동맹을 맺은 바누 바크르 부족이 무함마드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바누 후자아 부족을 공격했고, 쿠라이시가 이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쿠라이시에게 책임자 처벌, 바누 바크르와의 동맹 파기, 또는 휴전 조약 파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쿠라이시가 휴전 파기를 선택하자, 무함마드는 630년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했다. 아부 수피얀을 포함한 메카 지도자들은 저항을 포기했고, 무함마드는 거의 저항 없이 메카에 입성했다. 그는 과거의 적대 행위에 대해 대사면을 선포했지만, 일부 극렬 반대자는 처형했다.[63][64]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 안팎의 모든 우상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으며, 예수와 마리아의 성화는 남겨두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논란이 있다.[66] 대부분의 메카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메카 정복 소식을 들은 하와진 부족 등 일부 아랍 부족들이 저항에 나섰다. 무함마드는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후나인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타이프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무함마드는 후나인 전투의 전리품을 분배하면서 메카 출신 신규 개종자들에게 많은 몫을 할애했는데, 이는 초기부터 그를 따랐던 안사르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하와진 부족과 타이프 주민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630년 말, 무함마드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충돌을 예상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타부크까지 진군했으나, 실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타부크 원정을 통해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북부 여러 부족들에게 지즈야(인두세)를 부과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의 부족들이 무함마드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거나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632년 3월, 무함마드는 메카로 마지막 순례(고별 순례)를 떠나 이슬람의 의례와 원칙에 대한 설교를 남겼다. 메디나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32년 6월 8일, 그는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 내 자택 자리에 안장되었다.
2. 6. 죽음

632년 3월,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직접 순례를 지휘했다.[60][61]

같은 해 6월, 메디나로 돌아와 매장지에서 기도를 마친 후 무함마드는 심한 두통을 겪기 시작했다. 병세가 깊어져 각 아내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으나, 마이무나의 집에서 쓰러졌다. 그는 다른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병간호를 위해 아이샤의 집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너무 쇠약해져서 알리와 파들 이븐 아바스의 부축 없이는 걷기 힘들었다. 의식을 잃었을 때 가족들은 에티오피아식 민간요법으로 약을 먹였는데, 깨어난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흉막염 치료를 했느냐고 물으며 신이 자신에게 그런 병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에게 약을 먹인 모든 여성들에게도 그 약을 먹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 기록(사히흐 알부카리 포함)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임종 직전 카이바르에서 먹었던 음식 때문에 대동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한다.[147]
632년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디나의 자택에서 사망했다.[57][31] 그의 마지막 말은 "오 신이시여, 저를 용서하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저를 가장 높은 동반자들과 함께하게 하소서."였다고 전해진다.[132] 역사가 알프레드 T. 웰치는 무함마드의 사인이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악화된 메디나 열병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의 유해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른 후, 사망한 장소인 아이샤의 집터에 매장되었다.[69][90] 후일 우마이야 칼리파 알 왈리드 1세 통치 시기에 예언자의 모스크가 확장되면서 무함마드의 묘역이 모스크 안으로 편입되었다.[70] 묘 위에 세워진 녹색 돔은 13세기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알 만수르 칼라운이 건설했으며, 16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 때 녹색으로 칠해졌다.[71] 무함마드의 묘 옆에는 그의 동료이자 초기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묘가 있으며, 이슬람 전승에 따라 예수의 재림 시 묻힐 자리로 비워둔 빈 묘도 있다.[90][72][73]
1805년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가 메디나를 점령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인 와하비즘 신봉자들은 우상 숭배를 배격한다는 이유로 메디나의 거의 모든 묘역 돔을 파괴했으나, 무함마드의 묘는 금과 보석 장식만 제거되고 돔 자체는 파괴를 면했다고 전해진다.[74][75] 1925년 사우디 민병대가 메디나를 재점령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136][76][77] 와하비즘은 표식 없는 매장을 선호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묘역 참배를 공식적으로 권장하지 않지만, 많은 순례자들은 여전히 زيارة|지야라트ar(의례적 방문)를 위해 묘소를 찾는다.[78]
무함마드의 죽음은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57][31]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는 아부 바크르를 지지했고, 결국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지지하는 세력은 가디르 훔 사건을 근거로 알리가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이 결정에 반발했다. 이 논쟁은 이후 이슬람 세계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3. 무함마드의 가르침
무함마드의 사상은 이슬람의 핵심 경전인 꾸란에 잘 나타나 있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알라(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제자들에게 구술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3][4][5] 이슬람의 중심적인 종교 경전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대천사 지브릴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을 나타낸다고 믿는다.[3][4][5]
꾸란은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사자"로 언급하며 그에게 주어진 계시를 담고 있다. 이슬람의 핵심 교리는 6신(여섯 가지 믿음)을 중심으로 하며, 신자들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다섯 가지 실천)을 통해 이러한 교리를 실천하고 터득하고자 한다. 꾸란에는 쿠라이시족에 의해 추방된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야스리브에 정착한 내용이나 바드르 전투와 같은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사건들도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6]
4. 무함마드에 대한 평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애와 가르침이 미친 광범위한 영향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무함마드는 알라가 보낸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류의 가장 완벽한 모범으로 여겨지며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다.[88] 그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는 꾸란과 더불어 무슬림의 삶과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91]
역사적으로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를 종교적,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이후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당시 아랍 사회의 부족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움마(Ummah)라는 새로운 공동체 개념을 제시했으며, 자카트 제도 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07][108][110]
반면, 이슬람 외부 세계, 특히 서구에서는 역사적으로 무함마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를 거짓 예언자나 이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으며,[112]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결혼 생활, 노예 소유, 전쟁 과정에서의 행적, 특정 교리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112]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서구에서도 무함마드를 위대한 입법가나 개혁가로 재평가하려는 시각이 나타났으며,[112] 현대 학계에서는 그의 진정성, 역사적 역할, 이슬람 문명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118][119][120]
무함마드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이슬람 내부에서의 신앙적 관점, 타 종교적 관점, 그리고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4. 1. 이슬람교에서의 평가
알라의 유일신론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무함마드의 예언자임을 믿는 것은 이슬람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모든 무슬림은 샤하다|Shahadaara에서 "나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언하며,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라고 선언한다. 샤하다|Shahadaara는 이슬람의 기본 신조이다.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이상적으로 샤하다|Shahadaara는 신생아가 처음 듣는 말이며, 아이들은 즉시 그것을 배우고 사망 시에 낭송된다. 무슬림들은 아잔(Adhan)과 기도 자체에서 샤하다를 반복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려는 비무슬림은 이 신조를 낭송해야 한다.[88]
이슬람 신앙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 의해 보내진 마지막 예언자로 여겨진다.[135] 하디스|Hadithara와 시라|Sīraara와 같은 기록들은 무함마드에게 여러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묘사한다.[90] 그중 하나는 달의 분열인데, 가장 오래된 타프시르|Tafsirara 편찬에서는 이를 문자 그대로 달이 갈라진 사건으로 해석한다.
순나|Sunnahara는 하디스|Hadithara에 보존된 무함마드의 행동과 말씀을 나타내며, 종교 의식, 개인 위생, 사망자 매장에서부터 인간과 신 사이의 사랑을 포함한 신비로운 질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활동과 신앙을 다룬다. 순나는 경건한 무슬림들을 위한 모범으로 여겨지며, 무슬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매일 기도, 금식, 연례 순례와 같은 주요 이슬람 의식의 많은 세부 사항은 꾸란이 아닌 순나|Sunnahara에서만 발견된다.[91] 순나는 특히 이슬람력 1세기 말부터 이슬람 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21]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무함마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해 왔다. 무함마드의 삶, 그의 중재 및 그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대중적인 무슬림 사상과 시(나아트|Na'atara)에 스며들었다. 무함마드에 대한 아랍어 서사시 중 이집트의 수피 알부시리(1211-1294)의 카시다 알부르다|Qaṣīda al-Burdaara("외투의 시")는 특히 잘 알려져 있으며, 치유력과 영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널리 여겨진다.[92] 꾸란은 무함마드를 "세계에 대한 자비(라흐마|raḥmahara)"라고 부른다.[93] 동양 문화권에서는 비와 자비를 연관 짓는 경향이 있어, 무함마드를 축복을 내리는 비구름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는 마치 비가 메마른 땅을 되살리듯, 무함마드가 죽은 마음을 되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함마드의 탄생일은 와하비즘이 지배적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주요 축제로 기념된다.[94] 무슬림이 무함마드의 이름을 말하거나 쓸 때, 그들은 보통 아랍어 구절 ṣallā llahu ʿalayhi wa-sallam|ṣallā llahu ʿalayhi wa-sallamara(''알라께서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평화를 주시기를'') 또는 영어 구절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을 덧붙인다.[95]
수피즘에서는 무함마드를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간으로 여긴다. 꾸란의 내적 의미와 무함마드의 내적 본성을 추구했던 수피들은 모든 수피 수도회의 영적 계보를 무함마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22] 유수프 아부 알-하가그와 같은 일부 저명한 수피들은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123]
4. 2. 다른 종교에서의 평가
기독교 세계에서는 역사적으로 무함마드를 거짓 예언자나 이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중세 서방과 비잔티움의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짓 예언자, 적그리스도, 또는 이단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12]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에서는 무함마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욤 포스텔은 무함마드를 기독교에서도 유효한 예언자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초기 인물 중 하나였다.[112]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무함마드가 "자연 종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며 칭찬했다.[112] 앙리 드 불랭빌리에는 1730년 사후 출판된 저서 Vie de Mahomed|비 드 마오메프랑스어에서 무함마드를 재능 있는 정치 지도자이자 공정한 입법자, 신의 영감을 받은 메신저로 묘사했다.[112] 볼테르는 무함마드에 대해 엇갈린 시각을 보였는데, 희곡 Le fanatisme, ou Mahomet le Prophète에서는 광신주의의 상징으로 비판했지만, 역사적 저술 Essai sur les mœurs|에세 쉬르 레 뫼르스프랑스어에서는 입법자이자 정복자로 제시하기도 했다.[112]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무함마드를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현명하게 융합한 입법자로 평가했다.[112] 클로드-에마뉘엘 드 파스토레는 1787년 저서 ''조로아스터, 공자 그리고 무함마드''에서 무함마드를 조로아스터, 공자와 함께 "우주 최고의 입법자들" 중 한 명으로 꼽으며, 사기꾼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꾸란의 숭고함과 무함마드 법의 절제, 관용, 연민을 강조했다.[11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존경하며 그를 모범적인 입법자이자 정복자로 여겼다.[113][112] 토마스 칼라일은 그의 저서 영웅숭배론(1841)에서 무함마드를 "침묵하는 위대한 영혼"으로 묘사하며 그의 진지함을 높이 평가했다.[114][115]
현대의 일부 서구 학자들, 예를 들어 윌리엄 몽고메리 와트와 리처드 벨 등은 무함마드가 의도적으로 추종자들을 속였다는 견해를 비판하며, 그가 "절대적으로 진실했고 완전한 성실로 행동했다"고 주장한다.[118] 와트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대의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 점이 그의 진심을 보여준다고 보았다.[112] 다만, 와트는 진실성이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무함마드가 자신의 잠재의식적 경험을 신의 계시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112] 와트와 버나드 루이스는 무함마드를 단순히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꾼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이슬람의 발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19][120] 알포드 T. 웰치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토록 영향력 있고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112]
유대교에서는 초기부터 무함마드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다. 7세기 아라비아의 유대 부족들은 무함마드가 성경 이야기와 인물들을 차용하고 자신을 아브라함 종교의 마지막 예언자인 "예언자의 인장"이라고 선언한 것을 비판했다.[112] 현대 유대교에서는 대체로 예수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내용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변형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인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 시대 등 일부 유럽 유대인 지식인들은 이슬람 문화, 특히 알안달루스 시기 유대인과 무슬림의 공존에 주목하며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거나 복합적인 시각을 나타내기도 했다.[116][117]
바하이 신앙에서는 무함마드를 아담 이후 이어져 온 예언자들, 즉 "하느님의 현시자" 중 한 명으로 존경한다. 바하이 신앙은 무함마드를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예언 주기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장'으로 인정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현 시대의 계시자인 바하올라의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완성되었다고 믿는다.[124][125]
드루즈교 전통 역시 여러 "스승"과 "예언자"를 존중하며, 무함마드를 하느님의 중요한 예언자이자 역사상 여러 시대에 나타난 일곱 예언자 중 한 명으로 여긴다.[126][127][128]
시크교에서도 무함마드는 예언자이자 성인으로서 높은 존경을 받는다.
이 외에도 현대에 이르러 무함마드에 대한 비판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정통성, 결혼 생활을 포함한 도덕성, 노예 소유, 전쟁 및 적대 세력에 대한 대우, 교리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심리적 상태 등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다.[112]
4. 3. 역사적 평가
W. 몽고메리 왓에 따르면, 무함마드에게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그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 전반에 대한 반응이었다.[107] 버나드 루이스는 이슬람이 메디나의 국무 총리로서의 무함마드와 메카의 반란군으로서의 무함마드라는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전통을 가지며, 새로운 사회에 도입될 때 혁명과 같은 큰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108]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슬람이 사회 보장, 가족 구조, 노예 제도, 여성과 아동의 권리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 아랍 사회의 관행을 개선하는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는 데 동의한다.[108] 루이스에 따르면 이슬람은 초기부터 귀족 특권을 비판하고 계층제를 거부하며 능력 위주의 사회를 지향했다.[108]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사회와 도덕 질서를 바꾸었으며, 사람들의 정체성, 세계관,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왔다.[109] 경제 개혁은 특히 자힐리야 시대 메카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10] 꾸란은 빈민 구제를 위한 자카트 납부를 의무화했으며, 무함마드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맹을 맺는 부족들에게 자카트 납부를 요구했다.[111]
세속적인 관점에서 무함마드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여 훗날 거대한 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할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생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26번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때로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거나 전략을 사용하여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는 등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객관적인 상황 분석 능력과 외교적 수완도 갖추고 있었다. 통치자로서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아라비아 정복은 정복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에 대한 선교와 회유에도 크게 기인한다.
초기 꾸란 계시에서 나타나듯, 많은 이들은 무함마드를 당시 기준으로 관용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그는 자발적인 개종을 장려하는 한편, 딤미로서 세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메카와의 교전 시기에는 메디나 헌장에도 불구하고 메디나 내 유대인 부족들과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특히 바누 카이누카 부족 등 일부 유대인 부족이 메카 측과 내통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624년 무력 충돌 끝에 이들을 메디나에서 추방했다. 이후 키블라(예배 방향)가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대교도가 완전히 추방된 것은 후대 칼리파 우마르의 시대였다.
무함마드는 최후의 설교에서 인종과 민족에 따른 차별을 부정하고 오직 정의로움만이 인간의 우월성을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아랍인이 비아랍인보다 우월하지 않고, 비아랍인이 아랍인보다 우월하지 않다.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지 않고, 흑인이 백인보다 우월하지 않다. 사람은 오직 정의로움으로만 우월하다.”[153]
서구에서는 무함마드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해왔다. 초기에는 주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욤 포스텔은 무함마드를 기독교에서도 존중해야 할 예언자로 본 초기 인물 중 하나였다.[112]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그가 "자연 종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며 칭찬했다. 앙리 드 불랭빌리에는 1730년 사후 출판된 그의 Vie de Mahomedfra에서 무함마드를 유능한 정치 지도자이자 공정한 입법자로 묘사했다. 볼테르는 그를 광신주의의 상징으로 비판하기도 했지만(희곡 '마호메트'), 다른 글(Essai sur les mœursfra)에서는 입법자이자 정복자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무함마드를 종교와 정치를 현명하게 결합한 입법자로 보았다. 클로드-에마뉘엘 드 파스토레는 그를 "위대한 인물"이자 "우주 최고의 입법자들"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사기꾼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꾸란의 도덕적 가치를 인정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무함마드를 모범적인 입법자이자 정복자로 존경했다.[113]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무함마드를 "진지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영혼"으로 묘사하며 높이 평가했다.[114][115]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 역시 무함마드에게 긍정적이었다. 괴테는 그를 특별한 시인 예언자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국가 건설자로 보았다.[116] 유럽의 유대인들 중 일부는 알안달루스 시기 이슬람 사회의 관용을 높이 평가하며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117]
현대 학자들 중 윌리엄 몽고메리 왓과 리처드 벨 등은 무함마드가 의도적으로 추종자들을 속였다는 견해를 부정하며, 그가 "절대적으로 진실했고 완전한 성실로 행동했다"고 주장한다.[118] 왓은 무함마드가 겪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신념을 지킨 것이 그의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다만, 왓은 진실성이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무함마드가 자신의 잠재의식적 경험을 신의 계시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왓과 버나드 루이스는 무함마드를 단순히 사기꾼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이슬람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19][120] 알포드 T. 웰치 역시 무함마드의 성공은 그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무함마드에 대한 비판은 이슬람 초기부터 존재했다. 당시 비무슬림 아랍인들은 그의 일신교 주장을 비난했고, 유대인 부족들은 그가 성경 이야기와 인물을 차용하고 스스로를 마지막 예언자("예언자의 인장")라고 칭한 점을 비판했다.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그를 거짓 예언자, 적그리스도, 또는 이단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무함마드의 예언자로서의 정통성, 그의 도덕성(특히 결혼 생활과 노예 소유), 적들에 대한 처우, 특정 교리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심리 상태 등에 대한 비판과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5. 무함마드의 가족
무함마드는 25세에 15세 연상의 부유한 여성 사업가였던 카디자와 결혼했다.[80] 이 결혼은 25년간 지속되었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고,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여성과 결혼하지 않았다.[81] 카디자와의 사이에서는 네 딸 루카이야, 움 쿨숨, 자이납, 파티마와 두 아들 카심, 압둘라를 두었으나, 아들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딸들 중에서는 파티마를 제외하고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86] 일부 시아파 학자들은 파티마가 무함마드의 유일한 친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5]
카디자가 사망한 후 쿨라 빈트 하킴은 무함마드에게 무슬림 과부인 سودة بنت زمعة|사우다 빈트 자마아ar 또는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무함마드는 두 사람 모두와의 결혼 준비를 요청했다고 전해진다.[82]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6~7세였을 때 결혼했으며, 그녀가 9세, 무함마드가 53세였을 때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 수는 출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11명에서 13명 사이로 본다. 이 중 ريحانة بنت زيد بن عمرو|라이하나 빈트 자이드 이븐 아므르ar와 مارية القبطية|마리야 알킵티야ar는 정식 아내가 아닌 첩이었다는 기록도 있다.[79] 이슬람 공동체(움마)가 확장되면서 무함마드는 동맹 강화, 부족 간 통합, 전쟁 과부 보호 등의 이유로 여러 아내를 맞이했다. 쿠란에서는 전쟁 미망인의 지위 보호를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하며, 후에 아내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최대 4명까지 두도록 규정했다. 마리야 알킵티야는 아들 이브라힘을 낳았으나, 이브라힘은 두 살 때 사망했다.[86] 그의 아내들 중 9명이 무함마드보다 오래 살았다.[79] 수니파 전통에서 무함마드의 가장 사랑받는 아내로 알려진 아이샤는 그보다 수십 년 더 오래 살았고, 무함마드의 언행을 집대성한 하디스 문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2]
무함마드는 음식 준비, 옷 수선, 신발 수리 등 집안일을 도왔으며, 아내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조언을 경청했다고 전해진다.[83]
자이드 이븐 하리사는 카디자가 무함마드에게 준 노예였으며, 후에 양아들로 삼았으나, 무함마드가 자이드의 전처 자이납 빈트 자흐슈와 결혼하면서 양자 관계는 파기되었다.
무함마드의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 카디자 빈트 후와일리드
- سودة بنت زمعة|사우다 빈트 자마아ar
-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 (아부 바크르의 딸)
- حفصة بنت عمر|하프사 빈트 우마르ar (우마르 이븐 알 핫탑의 딸)
- زينب بنت خزيمة|자이납 빈트 쿠자이마ar
- أم سلمة هند بنت أبي أمية|움 살라마 힌드 빈트 아비 우마이야ar
- 자이납 빈트 자흐슈
- جويرية بنت الحارث|주와이리야 빈트 알하리스ar
- رملة بنت أبي سفيان|람라 빈트 아비 수피얀ar (아부 수피얀의 딸)
- صفية بنت حيي|사피야 빈트 후야이ar (하이바르 출신 유대인)
- ميمونة بنت الحارث الهلالية|마이무나 빈트 알하리스 알힐랄리야ar
- مارية القبطية|마리야 알킵티야ar (콥트 기독교인, 아들 이브라힘의 어머니)
- ريحانة بنت زيد بن عمرو|라이하나 빈트 자이드 이븐 아므르ar (일부 기록에서는 첩으로 분류)
6. 논란
무함마드에 대한 비판은 이슬람 초기인 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비무슬림 아랍인들은 무함마드가 일신교를 설파하고 기존의 신앙을 부정한다는 이유로 비판했으며, 유대 부족들은 그가 성경 이야기와 인물을 차용하고 스스로를 "예언자의 인장"이라 칭한 것을 문제 삼았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무함마드를 거짓 예언자, 적그리스도, 또는 이단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무함마드의 예언자로서의 정통성, 도덕성, 결혼 생활, 노예 소유, 전쟁 포로 및 적에 대한 처우, 심리 상태 등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결혼 및 여성 관계무함마드의 결혼 생활, 특히 여러 아내를 둔 점과 어린 아이샤와의 결혼은 현대적 관점에서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 일부다처제: 무함마드는 첫 아내 카디자가 사망한 후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 당시 아라비아 사회에서 부유하고 지위 있는 남성이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160] 특히 히즈라 이후 공동체가 확장되면서 정치적 동맹, 부족 간의 화합, 전쟁 과부 보호 등의 이유로 여러 결혼이 이루어졌다. 꾸란에서는 남편을 잃은 여성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언급하며, 아내를 여럿 둘 경우 공평하게 대할 것을 강조하고 최대 4명까지 허용하는 규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 자체는 현대 인권 관점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 및 인권 침해로 비판받는 주요 원인이 된다. 무함마드의 행적은 이슬람 내에서 규범성을 가지므로, 그의 일부다처제는 과거의 관습을 넘어 현대 사회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받으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아이샤와의 결혼: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50대에 9세였던 아이샤와 결혼했다. 아이샤는 무함마드의 아내 중 유일하게 처녀였으며, 당시 아랍 사회에서는 명문가 여성의 처녀성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반이슬람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무함마드가 어린 소녀와 성관계를 했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전근대 사회에서 10세 전후의 조혼은 흔했으며, 결혼 후에도 초경 이후 적령기가 될 때까지 성관계는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반박한다. 인도의 이슬람 학자 마울라나 무함마드 알리(Maulana Muhammad Ali)는 아이샤가 무함마드와 첫날밤을 보낸 나이는 15세였다고 주장하고 있다.[158]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어린 나이의 결혼 자체가 아동 인권 침해 및 아동 성 학대로 간주될 수 있어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크다.
- 자이납 빈트 자후슈와의 결혼: 무함마드는 자신의 양자였던 자이드 이븐 하리사의 전 부인 자이납 빈트 자후슈와 결혼했다. 자이납은 무함마드의 사촌이기도 했다. 자이드와 자이납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고, 자이드가 이혼을 원했으나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만류했다.[156] 결국 이혼이 이루어진 후, 무함마드는 꾸란의 계시(33장 37절)에 따라 자이납과 결혼했다. 이는 "양자는 친자가 아니므로 양자의 전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157]는 이슬람 율법을 예언자 자신이 실천하여 당시 아랍 사회의 관습(양자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금기시함)을 타파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이 결혼으로 고귀한 신분이었던 자이납은 이혼 후에도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아내였던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는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결혼 관련 규정: 꾸란과 하디스에는 결혼 가능한 상대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근친혼의 범위가 규정되어 있으며(꾸란 4:23), 아내의 자매와 동시에 결혼하는 것, 유모나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형제자매(젖형제)의 딸과 결혼하는 것 등은 금지되었다.[154] 또한, 여성 본인의 동의 없이 강제로 결혼시키는 것은 무효라는 전승도 존재한다.[155]
- 성욕에 대한 관점: 무슬림 정통 문헌에는 무함마드가 여성을 보고 성욕을 느꼈을 때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관계를 가졌으며, 동료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성욕을 다스리라고 조언했다는 기록이 있다.[161]
여성 포로 문제당시 전쟁 관습에 따라 여성 포로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슬람 초기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있었으며, 부하리의 하디스집 「사히흐 알부하리」에는 무함마드 생존 당시 예멘 원정에서 여성 포로를 취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162] 이는 현대적 인권 기준에 비추어볼 때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다만 꾸란에서는 포로라 할지라도 비무슬림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7. 무함마드의 묘사
이슬람에서는 알라 외의 대상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교리가 있어,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 예술의 발달이 제한되었다. 특히 인물화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무함마드를 묘사해야 할 경우에도 '예언자 이전의 무함마드'와 같은 방식으로 금기를 피하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정 지역이나 시대에는 인물화를 포함한 회화나 조각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초상화 역시 적지 않게 그려졌다. 무함마드의 초상화는 얼굴을 가린 형태와 가리지 않은 형태 두 가지 모두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현대 일본에서도 고려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주식회사 집영사의 학습만화 「세계의 역사」 제6권(1986년 간행)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검게 칠하거나 역광, 뒷모습, 얼굴 부분을 잘라내는 기법을 사용하여 독자가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묘사했다. 책의 난외주석에는 "이슬람교도 중에는 신이나 예언자의 얼굴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주목할 점은 같은 시리즈의 「세계 역사 인물 사전」(1984년 간행) 초판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이 다른 인물들처럼 그려졌으나, 2002년 개정판에서는 검게 칠해졌다는 것이다. 가켄(학연)의 학습만화 「가켄 만화 세계의 역사」 역시 시리즈 초기(1992년)에는 제7권 「이슬람 제국과 예언자 마호메트」에서 표지를 포함한 여러 곳에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렸지만, 1995년에 해당 7권을 다른 주제(「서유럽의 성립과 카를 대제」)로 교체하면서 구판을 절판시켰다. 다른 역사 만화들 중에서도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지 않도록 배려한 사례가 있다.[163][164]
영화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무스타파 악카드 감독의 영화 메시지(1976년)와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영화 '예언자 무함마드'(2015년)는 모두 우상숭배를 피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직접적으로 화면에 보여주지 않는 연출을 사용했다. '메시지'는 무함마드의 시점에서 본 풍경을 화면에 비추는 기법을 활용했고,[165] '예언자 무함마드'는 무함마드 자체는 등장시키지만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으며, 해당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이름도 공개하지 않았다.[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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