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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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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후영은 전한 고조 유방과 친분을 맺고 고조를 섬긴 인물이다. 그는 고조가 세력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태복을 역임하며, 팽성 전투에서 고조를 보좌하여 혜제와 노원공주를 구출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후 흉노 정벌, 반란 진압에도 참여하여 여음후에 봉해졌으며, 혜제, 고황후, 문제 시대를 거쳐 문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후영의 후손으로는 하후돈과 하후연 등이 있으며, 그들은 후한 말기에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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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172년 사망 - 공취 (사람)
    공취는 전한 고제를 섬기며 해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으며, 고제 원년에 탕에서 집순으로 시작하여 좌사마로 한나라에 들어가 항우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데 기여했고, 문제 8년에 사망했다.
  • 기원전 172년 사망 - 당려
    당려는 전한 초기 고제를 도와 항우를 격파하고 영포를 치는 데 공을 세워 척구후에 봉해진 인물로, 좌사마, 동군도위, 중위를 역임했다.
  • 초군 하후씨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 초군 하후씨 - 하후연
    하후연은 조조 휘하의 장수로 동탁 토벌, 관도 전투, 황건적 토벌 등에서 활약했으며, 군수 물자 수송에도 기여했으나,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하후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후영
본명하후 영 (夏侯嬰)
출생지장쑤성 페이 현
관직
태복206년–172년 BC
재위 기간
군주한고제 / 한혜제 / 한문제
생몰
사망일기원전 172년
가족
자녀하후조
기타 정보
시호문후 (文侯)
작위여음후 (汝陰侯)
다른 이름등공 (滕公)

2. 일대기

하후영은 고조가 거병한 초기부터 그를 섬겨 태복으로서 활약했다. 고조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특히 팽성 전투에서 고조가 패주할 때 혜제노원공주를 구출한 일화로 유명하다.

팽성 전투 당시, 고조는 항우에게 대패하여 쫓기는 신세였다. 하후영은 고조와 함께 달아나던 중 혜제와 노원공주를 발견하고 수레에 태웠다. 고조는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이들을 버리려 했지만, 하후영은 아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며 고조를 설득했다. 덕분에 혜제와 노원공주는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고, 훗날 혜제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

고조가 황제가 된 후에도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여러 반란을 진압하고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혜제와 고황후 역시 하후영에게 특별한 대우를 했으며, 혜제 사후 문제를 옹립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문제는 하후영의 공을 인정하여 그에게 여음[7]의 6천 9백 호를 식읍으로 내렸다.[6] 하후영은 문제 즉위 후 8년 뒤 사망했으며,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6]

2. 1. 초기 생애와 유방과의 만남

하후영은 원래 패현 관청의 마굿간지기였는데, 사람을 보내러 오가며 패현의 사상정을 지나다니면서 고조와 친분을 맺었다.[6] 고조가 처음 세력을 일으켰을 때에는 현의 영사를 지내고 있다가 고조를 섬겼고, 고조가 패공을 일컫고서는 칠대부의 작위를 받고 태복이 됐다.[6] 고조와 희롱하다가 상처를 입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고발해 고조가 사람을 상하게 한 죄로 기소되자 고조가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다.[6] 나중에 재조사가 되면서 거짓 증언한 것이 들통나자 태형 수백 대에 처해졌으나 끝내 고조를 면책시켰다.[6]

2. 2. 진나라 말기 봉기와 초기 활약

고조가 처음 세력을 일으켰을 때, 하후영은 현의 영사를 지내다가 고조를 섬겼다. 고조가 패공을 일컫고서는 칠대부 작위를 받고 태복이 되었다.[6] 호릉 공격에서는 소하와 함께 호릉을 지키는 사수감 평을 항복시켜 오대부가 되었다.[6] 삼천군수 이유를 옹구에서 공격할 때에 병거를 급히 몰아쳐 집백 작위를 받았다.[6]

하후영은 항상 태복으로서 수레를 몰아 장함의 군사를 동아 · 복양에서 칠 때에도 병거를 급히 몰아쳐 격파하고 집규가 됐다.[6] 개봉에서 조분을 칠 때, 곡우에서 양웅을 칠 때, 낙양 동쪽에서 또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에 병거를 질풍처럼 몰아치고 포로와 투항병을 얻어 등공(滕公) 작위를 받았다.[6] 고조와 함께 남양을 공격하고, 관중에 들어가서는 남전과 지양에서 다시 병거를 급히 몰아쳐 패상까지 갔다.[6]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고조를 한왕에 봉하자 소평후로 일컫는 열후에 봉해지고 태복으로서 촉 · 한으로 수행했다.[6]

2. 3. 주요 전투 활약과 등공 작위

고조가 처음 세력을 일으켰을 때, 하후영은 현의 영사를 지내다가 고조를 섬겼고, 고조가 패공을 칭하면서 칠대부 작위를 받고 태복이 되었다. 호릉 공격에서는 소하와 함께 호릉을 지키는 사수감 평을 항복시켜 오대부가 되었다.[6] 삼천군수 이유를 옹구에서 공격할 때 병거를 급히 몰아쳐 집백 작위를 받았다. 항상 태복으로서 수레를 몰아 장함의 군사를 동아 · 복양에서 칠 때에도 병거를 급히 몰아쳐 격파하고 집규가 되었다.[6] 개봉에서 조분을 칠 때, 곡우에서 양웅을 칠 때, 낙양 동쪽에서 또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에 병거를 질풍처럼 몰아치고 포로와 투항병을 얻어 등공(滕公) 작위를 받았다.[6]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고조를 한왕에 봉하자, 하후영은 소평후로 일컫는 열후에 봉해지고 태복으로서 촉 · 한으로 수행했다.[6]

기원전 209년,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유방이 패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영은 그에게 합류하여 고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방은 스스로를 "패공"(沛公)이라고 칭하고, 하후영을 7급 관리(七大夫)로 임명하여 자신의 수레를 모는 운전수로 삼았다.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206년 사이에 하후영은 유방이 이끄는 반란군에 합류하여, 현재의 동부 허난성에 위치한 당현(碭縣), 제양(濟陽), 옹구(雍丘), 현재의 산둥성 랴오청 시에 위치한 동아(東阿), 푸양, 카이펑, 뤄양, 난양, 란톈, 그리고 현재 산시성 시안 시 동쪽에 위치한 지양(芷陽) 등 여러 지역에서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 중 그는 빠른 속도로 전차를 몰고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카이펑 전투에서 그는 적군 68명을 사로잡고 850명의 항복을 받았으며, 금 인장 상자를 획득했다.

팽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하후영은 유방과 유방이 데려온 아들 유영(후의 혜제)과 딸 (후의 노원공주)과 함께 도망쳤지만, 추격자에게 따라잡히자 공포에 질린 유방은 유영과 노원공주를 마차에서 떨어뜨렸다. 하후영은 두 사람을 주워 올렸고, 유방은 화가 나서 하후영을 베려 했지만, 결국 일행은 무사히 아군 진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유씨 일문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 공적으로 식읍으로 기양을 더 받았다.[6]

2. 4. 초한쟁패와 팽성 전투

기원전 206년, 고조항우에게서 한왕에 봉해지자, 하후영은 소평후에 봉해지고 태복으로서 촉 · 한으로 들어가는 고조를 수행했다.[6]

한왕 2년(기원전 205년), 고조가 삼진을 평정하고 서초패왕 항우팽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달아날 때, 하후영은 고조를 모시고 함께 달아났다.[6] 도중에 혜제노원공주를 발견하고 수레에 태웠으나, 고조는 상황이 급박하여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해 혜제와 노원공주를 여러 차례 수레에서 버렸다. 하지만 하후영은 그 때마다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안정을 찾으면 그제서야 전속력으로 달렸다. 고조는 이 때문에 10여 차례나 하후영을 베려고 했으나, 결국 무사히 빠져나와 혜제와 노원공주를 풍읍에 안전하게 데려다 놓았다.[6]

이 일로 하후영은 유씨 일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6]

2. 5. 한나라 건국 이후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고조를 한왕에 봉하자 소평후에 봉해지고 태복으로서 촉 · 한으로 갔다.[6]

한왕 2년(기원전 205년), 한왕이 된 고조가 삼진을 아우르고 서초패왕 항우와 싸우다 팽성 전투에서 크게 지고 달아날 때 하후영은 고조를 모시고 달아나다 혜제노원공주를 발견하고 같이 수레에 태웠다. 고조는 상황이 급하고 지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해 혜제와 노원공주를 자주 버렸으나 하후영은 그 때마다 아이들을 받아내 다시 태우고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편안해지자 전속력으로 달렸다. 고조는 10여 번 하후영을 베려고 했으나, 결국은 무사히 빠져나와 혜제와 노원공주를 풍읍에 안치했다. 고조가 형양에 도착해 패군을 수습하고 세력을 회복하자, 기양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6] 대 항우 전역에서 항상 병거를 주관해 종군했고, 진(陳)까지 항우를 추격했으며 항우 사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노(魯)까지 따라갔다.[6] 식읍에 자지(玆氏) 땅을 더했다.[6]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고조가 한왕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가을에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태복으로서 반란 진압에 수행했다. 이듬해(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 체포에 수행했고, 한왕 신의 모반 평정에도 종군해 한신과 흉노의 기병을 무찌를 때에도 함께했다. 고조의 본대가 묵돌 선우의 속임수에 넘어가 평성에서 포위됐다가 연지(閼氏)에게 뇌물을 줘 묵돌이 포위망의 일각을 풀어줬는데, 이때 하후영이 급히 달아나려는 고조를 자제시키고 천천히 퇴각하면서 쇠뇌를 들고 경계시켜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6] 이후에도 태복으로서 여러 차례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웠고, 다시 진희영포의 반란 진압에서도 태복으로서 공을 세워 여러 차례 식읍이 늘어난 끝에 여음[7]의 6천 9백호를 받고 기존 식읍은 모두 정리했다.[6]

고조가 죽고 혜제 치하에서도 태복으로 혜제를 섬겼다. 예전에 혜제와 노원공주를 구출한 일 때문에 혜제와 고황후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혜제가 죽은 후에도 고황후 치하에서 태복으로 일했다. 고황후가 죽고 고황후가 세운 소제 대신 대왕으로 있던 문제를 세우기로 결의되자, 동모후 유흥거와 함께 소제를 폐위하고 데려나왔으며, 대왕을 모시고 나와 대신들과 함께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계속 태복을 지냈다. 8년 후에 죽어 시호를 이라 했다.[6]

2. 6. 혜제, 문제 시대의 활동과 죽음

고조가 한왕 2년 삼진을 아우르고 서초패왕 항우와 싸우다 팽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달아날 때, 하후영은 고조를 모시고 달아나다 혜제노원공주를 발견하고 같이 수레에 태웠다. 고조는 사세가 급하고 지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해 혜제와 노원공주를 자주 버렸으나, 하후영은 그 때마다 아이들을 받아내 다시 태우고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편안해지자 전속력으로 달렸다. 고조는 10여 번 하후영을 베려고 했으나, 결국은 무사히 빠져나와 혜제와 노원공주를 풍읍에 안치했다.[6] 고조가 형양에 도착해 패군을 수습하고 세력을 회복하자, 기양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하후영은 항우와의 전투에서 항상 병거를 주관해 종군했고, (陳)까지 항우를 추격했으며 항우 사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노(魯)까지 따라갔다. 이후 식읍에 자지(玆氏) 땅을 더했다.[6]

고제 5년, 고조가 한왕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가을에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태복으로서 반란 진압에 수행했다. 이듬해(기원전 201년), 초왕 한신 체포에 수행했고, 한왕 신의 모반 평정에도 종군해 한신과 흉노의 기병을 무찌를 때에도 함께했다. 고조의 본대가 묵돌 선우의 속임수에 넘어가 평성에서 포위됐다가 연지(閼氏)에게 뇌물을 줘 묵돌이 포위망의 일각을 풀어줬는데, 이때 하후영이 급히 달아나려는 고조를 자제시키고 천천히 퇴각하면서 쇠뇌를 들고 경계시켜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6] 이후에도 태복으로서 여러 차례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웠고, 진희영포의 반란 진압에서도 태복으로서 공을 세워 여러 차례 식읍이 늘어난 끝에 여음[7]의 6천 9백호를 받고 기존 식읍을 모두 정리했다.[6]

고조가 죽고 혜제 치하에서도 태복으로 혜제를 섬겼다. 혜제와 고황후는 예전에 혜제와 노원공주를 구출한 일 때문에 하후영에게 특별한 대우를 했다. 혜제가 죽은 후에도 고황후 치하에서 태복으로 일했다. 고황후가 죽고 고황후가 세운 소제 대신 대왕으로 있던 문제를 세우기로 결의되자, 동모후 유흥거와 함께 소제를 폐위하고 데려나왔으며, 대왕을 모시고 나와 대신들과 함께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계속 태복을 지냈다. 8년 후에 죽어 시호를 이라 했다.[6]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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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관계 및 후손

하후영의 많은 후손들은 후한 말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중 가장 저명한 인물들은 군벌 조조 휘하에서 복무했던 장군 하후돈하후연이었다. 그들의 후손들 또한 삼국 시대 동안 조위에서 복무했다.

하후영의 적자 하후조(夷侯)[3], 손자 하후사(共侯), 증손 하후파는 여음후(汝陰侯) 작위를 세습받았다. 하후파는 경제의 딸 平陽公主|평양공주중국어와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의 측실과 밀통한 죄로 기원전 115년에 사사되었다. 이로 인해 여음후 작위는 박탈되고 소유지는 몰수되었다. 선제 시대에 하후영의 현손 하후신이 하후가 재흥을 허락받았지만, 여음후 작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후파의 아내 평양공주가 "손공주(孫公主)"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하여, 하후파의 자손들은 "손씨(孫氏)"를 칭하게 되었다.

4. 1. 하후돈, 하후연과의 관계

후한 말기, 조조와 함께 거병한 하후돈, 하후연 등은 하후영의 후예로 여겨진다.[4]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원래 하후돈의 숙부인 하후씨였으며, 조참의 자손인 조등의 양자가 되어 조(曹)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5]

참조

[1] 문서 8th year of the ''Qian'yuan'' period of Emperor Wen's reign. The year corresponds to 29 Oct 173 BCE to 16 Nov 172 BCE in the prophetic Julian calendar.
[2] 서적 史記
[3] 문서 夏侯竈の墓は1977年に安徽省阜陽市で発見された。墓は早いうちから盗掘され、さらには墓道が第二次世界大戦の際に塹壕の被害に遭っていたものの、妻の墓と隣り合わせになっていることや、出土品に「汝陰侯」と彫られていることからそれと判明した。
[4] 서적 三国志
[5] 서적 三国志
[6] 서적 사기 권95 번역등관열전
[7] 문서 회양국의 속현으로, 지금의 푸양시에 있다.
[8] 서적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9]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10] 서적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1] 서적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12] 서적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13] 서적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14]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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