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도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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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도키마사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인물로, 이즈의 호족 출신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이자,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기여했다. 딸 호조 마사코가 요리토모와 결혼하면서 막부의 권력자로 부상했고, 요리토모 사후에는 섭정 회의를 주도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말년에 사네토모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실각, 유배되었고, 이후 그의 아들 호조 요시토키가 싯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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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도키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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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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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조 도키마사 (北条 時政) |
별명 | 호조 시로 (北条四郎) |
생몰년 | 1138년 - 1215년 2월 6일 |
출생지 | 이즈국 |
사망지 | 불명 |
묘소 | 이즈노쿠니시 데라케 간쇼주인 |
계명 | 간조주인 묘세이 (願成就院明盛) |
가문 | 호조 씨 (称・간무 헤이시나오카타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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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호조 씨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
직책 | 스루가국 슈고 이즈국 슈고 도토미국고쿠시 |
주요 직위 | 가마쿠라 막부13인의 합의제 교토슈고 초대 싯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호조 도키카타 또는 호조 도키카네 |
어머니 | 이즈노조 반노 다메후사의 딸 |
배우자 | 이토 스케치카의 딸, 마키노카타 외 |
자녀 | 호조 무네토키 호조 마사코 호조 도키코 호조 요시토키 아와노 쓰보네 호조 도키후사 호조 마사노리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아내 이나게 시게나리의 아내 히라가 도모마사의 아내 (후에 후지와라노 구니미치의 아내) 산조 사네노부의 아내 우쓰노미야 요리쓰나의 아내 보몬 다다키요의 아내 고노 미치노부의 아내 오오카 도키치카의 아내? 기타 딸 8명 |
정치 경력 | |
쇼군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역임 관직 | 싯켄 |
재임 기간 | 1203년 - 1205년 |
이전 | (신설) |
이후 | 호조 요시토키 |
13인의 합의제 | 1199년 - 1200년 |
13인의 합의제 구성원 | 오에노 히로모토 미요시노 야스노부 나카하라노 치카요시 니카이도 유키마사 가지와라 가게토키 아다치 도모토 아다치 모리나가 핫타 도모이에 히키 요시카즈 호조 요시토키 미우라 요시즈미 와다 요시모리 |
교토 수호 | 1185년 - 1186년 |
이전 | (신설) |
이후 | 이치조 요시야스 |
기타 정보 | |
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2. 가계
호조 씨(北条氏)는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의 타카모치(平高望)의 후예를 자처하며, 이즈국(伊豆国) 다가타군(田方郡) 호조(北条, 현재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를 본거지로 삼은 호족이다.[10] 하지만 도키마사 이전의 계보는 여러 족보마다 기록이 달라 간무 헤이시의 후예라는 점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10] 할아버지는 호조 도키이에(北条時家), 아버지는 호조 도키카타(北条時方) 또는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라는 점은 여러 족보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다.[10]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도키마사를 '호조도노(北條殿)' 또는 '호걸(豪傑)'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어떤 관직이나 위상을 가졌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10] 당시 호조 가문이 보유했던 무력 또한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의 구성을 볼 때 그리 강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도키마사 이전의 호조 가문은 계보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세력이었으며, 도키마사 역시 직계 당주가 아닌 방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호조 가문이 대대로 이즈의 재청관인(在庁官人)이었고, 도키마사가 '호조노스케(北条介)'라는 통칭으로 불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후대의 사료 중에는 도키마사를 재청관인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10] 호조 가문의 본거지가 이즈국의 중심지인 미시마(三島)나 가노강(狩野川) 유역과 가까운 군사적, 교통적 요충지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10] 그러나 《아즈마카가미》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생전에 관직이 없었던 도키마사가 다른 유력 고케닌들보다 높은 서열로 기록된 점 등을 들어 '호조도노'라는 호칭 자체가 후대에 호조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10] 교토에서 도키마사의 대관(代官)으로 활동하며 좌병위위(左兵衛尉) 관직을 가졌던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가 호조 씨의 적통이고 방계인 도키마사가 재청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는 족보 분석을 통해 도키사다가 도키마사의 동생[11] 또는 사촌 동생[12]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도키마사의 젊은 시절과 내란 이전 호조 가문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호조 가문이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전적으로 도키마사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관계를 맺으면서부터였다. 도키마사에게는 형제나 사촌 등 가까운 친척이 거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으며(숙청 기록도 없음), 이후 크게 번성한 호조 일족( 도쿠소(得宗) 가문 외 나고에(名越), 가나자와(金沢), 다이부쓰(大仏) 등)은 모두 도키마사의 두 아들, 호조 요시토키와 호조 도키후사의 후손들이다.
'''부모'''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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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스케치카(伊東 祐親)의 딸 (통설. 스케치카의 여동생이라는 이설도 있음) | |
마키노카타(牧の方)[22] |
호조 도키마사는 간무 헤이시 다카모치류의 다이라노 나오카타를 시조로 하는 일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즈 국의 호조 지역 장원을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직계보다는 방계 혈족에 가깝다는 설도 있다. 대대로 이즈의 재청관인을 지낸 호조 가문은 이즈노스케를 맡아 호조노스케라는 통칭으로 불렸다고도 전해지나,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는 그를 '호조도노'나 '호걸' 정도로만 기록할 뿐, 정확한 관직이나 위상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호조 가문의 군사력 또한 이시바시 산 전투 당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의 구성을 볼 때 그다지 강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키마사 이전의 가계도 기록마다 달라, 그 이전의 호조 가문은 계보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호조 가문이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훗날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이 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관계를 통해서였다.
호조 도키마사는 주로 "호조 시로(北条 四郎)"라고 불렸으며, 나중에는 "호조 도노(北条 殿)"로 불렸다. 쇼지 2년(1200년) 4월 관직(도토미노카미)에 임명된 후에는 "엔슈(遠州)"라고 불렸다.
3. 생애
도키마사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로 유배되기 전까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부모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희소한데, 이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가 교토였기 때문이다. 그는 1138년 이즈 국의 유력한 지역 호족인 호조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호조 도키카타 또는 호조 도키카네로 추정된다.
호조 가문의 수장이었던 도키마사는 호겐의 난이나 헤이지의 난과 같이 당시 서일본을 휩쓴 교토 조정의 계승 분쟁이나 미나모토 씨와 헤이케 간의 권력 다툼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헤이지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패배하고 처형되면서, 그의 장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3세의 나이로 도키마사의 영지인 이즈로 유배되었다. 이후 요리토모는 도키마사의 딸 호조 마사코와 결혼하였고, 이는 훗날 도키마사가 요리토모의 거병을 지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도키마사의 첫 번째 정실 부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장남 호조 무네토키와 차남이자 후계자인 호조 요시토키(1163년생)를 두었다. 이후 마키노 카타(牧の方)를 두 번째 정실로 맞이하여 아들 호조 마사노리(1189년생)를 낳았고,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의 사이에서 호조 도키후사(1175년 추정)를 두었다. 딸로는 훗날 요리토모와 결혼하는 장녀 호조 마사코(1156년생)와 요리토모의 동생 아노 젠조와 결혼한 아와노 쓰보네(1169년 추정) 등이 있다.
도키마사는 주로 '호조 시로'라고 불렸으며, '호조도노'로도 칭해졌다. 쇼지 2년(1200년) 4월 도토미노카미 관직에 임명된 후에는 '엔슈'라고도 불렸다. 다만 '호조도노'라는 호칭은 후대에 편찬된 《아즈마카가미》에서 호조 가문의 시조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10]. 요리토모 생전 도키마사는 관직이 없는 무관이었기에, 관위를 가진 다른 고케닌들보다 서열이 낮았다.
3. 1. 요리토모의 장인
도고쿠(東国)에서 세력을 떨치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헤이지의 난에서 패배하고 살해된 후, 그의 아들인 14세의 요리토모는 이즈로 유배되었다. 이때 도키마사는 요리토모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도키마사의 딸 마사코가 요리토모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처음에는 이 관계를 반대했던 도키마사였지만 결국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하고 요리토모의 후원자가 되었다. 지쇼 4년(1180년) 4월, 모치히토 왕이 헤이케 타도를 촉구하는 영지를 요리토모에게 보냈고, 헤이케 측의 압박이 강해지자 요리토모는 거병을 결심했다.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와 거병 계획을 세워, 8월 17일 이즈의 메다이였던 야마키 가네타카를 습격하여 처치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
이후 요리토모는 미우라 씨와 합류하기 위해 이즈를 떠나 사가미 국으로 향했으나, 8월 23일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헤이케 측의 오바 가게치카가 이끄는 군대에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도키마사의 장남 호조 무네토키가 전사했다. 요리토모 일행은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마나즈루 곶에서 배를 타고 아와 국으로 탈출했다. 한편,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와 헤어져 가이로 가서 다케다 노부요시 등 가이 겐지 세력과 합류했다. 이후 세력을 회복한 요리토모 군이 스루가 국으로 진격하자, 가이 겐지와 함께 기세가와에서 요리토모와 합류하여 후지강 전투에서 헤이케 군을 패주시켰다.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기반을 잡고 간토 무사들로부터 '가마쿠라도노'로 추대되면서 도키마사도 요리토모의 장인으로서 어느 정도 존중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호조 가문보다 더 강력한 고케닌들이 많았고, 요리토모는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권력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키마사가 정권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주에이 2년(1182년) 11월, 요리토모의 애첩이었던 가메노 마에를 둘러싼 문제로 마사코가 보복하는 과정에서 도키마사의 장인인 마키 무네치카가 연루되자, 요리토모가 무네치카를 불러 모욕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에게 항의하며 일족을 이끌고 이즈로 내려가 버렸고,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남은 처남 요시토키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24]
분지 원년(1185년) 헤이케가 멸망하고, 교토에서 활동하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실각하자,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명을 받아 1천 기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다. 그는 조정과의 교섭을 맡아 슈고와 지토 설치를 요청하여 허락받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해 11월 25일에는 교토 슈고[26]에 임명되었다.
3. 2. 가마쿠라 막부에서의 활동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지의 난에서 패배한 후 이즈로 유배되자, 도키마사는 그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딸 마사코가 요리토모와 혼인하고, 1180년 요리토모가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도키마사는 일족을 이끌고 이에 동참하여 가마쿠라 입성을 도왔다.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패배한 요리토모가 숨어있을 때, 도키마사는 요리토모를 도우러 온 사자에게 요리토모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했으나 간파당하기도 했다.
요리토모가 간토 무사들에게 '가마쿠라도노'로 추대되면서 도키마사도 장인으로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호조 가문보다 더 강력한 고케닌들이 많았고 요리토모는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기에 도키마사가 정권의 중심에 서지는 못했다. 오히려 헤이케 측 야마키 가네타카(山木兼隆) 토벌 당시 진군 경로 문제로 요리토모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182년에는 요리토모의 애첩 가메노 마에(亀の前)에 대한 마사코의 보복 행동에 도키마사의 장인 마키노 무네지카(牧宗親)가 연루되자, 요리토모가 무네치카를 불러 모욕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도키마사는 항의의 표시로 일족을 이끌고 이즈로 돌아갔고,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남은 도키마사의 아들 요시토키에게 상을 주었다.[24] 같은 해 마사코와 요리토모 사이에서 장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태어났고, 이듬해에는 요시토키의 아들 호조 야스토키가 태어났다.
1185년 헤이케가 멸망하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실각하자,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1천 기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다. 그는 고시라카와 상황과의 교섭을 통해 슈고와 지토 설치를 인정받았고(분지의 칙허), 조정의 인사 문제에도 개입하여 요리토모에게 비협조적인 구교들을 몰아내고 친 요리토모파 인물들을 중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교토 체류 4개월 동안 도키마사에 대한 조정의 불만은 크지 않았으며[25],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교토 슈고[26]에 임명되었다. 도키마사는 교토의 치안 유지, 헤이씨 잔당 수색, 요시쓰네 문제 처리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시책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시골 무사 취급을 받거나[13] 가신들의 횡포 문제도 있었다. 결국 제2의 요시나카나 요시쓰네가 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14] 1186년 3월, 교토 경비를 위해 일족 일부를 남겨두고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후임 교토 슈고는 요리토모의 의제 이치조 요시야스가 맡았다.
가마쿠라로 돌아온 후 한동안 도키마사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1189년 오슈 정벌의 전승 기원을 위해 호조 가문의 영지에 간조주인을 건립했다. 1192년 요리토모가 쇼군으로 임명되자 도키마사는 쇼군의 장인으로서 막부 내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1193년 요리토모가 후지노에서 개최한 대규모 사냥(마키가리) 행사 중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이 발생했다. 소가 스케나리와 도키무네 형제가 아버지의 원수 쿠도 스케츠네를 살해한 후, 동생 도키무네가 요리토모의 숙소를 습격하려다 체포되었다. 도키마사가 도키무네의 에보시 오야(후견인)였고, 사전에 사냥 준비를 위해 현지에 가 있었으며[4], 스케츠네의 죽음이 이즈 지역에서 도키마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5] 때문에 도키마사가 사건의 배후라는 설이 제기되었다.[6][7][8] 이 사건 이후 도키마사는 1194년 이즈 국의 미시마 신사 경영권을 확보하고, 같은 해 도토미의 실력자 야스다 요시사다가 처형되자 도토미 슈고직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도키마사는 이즈, 스루가, 도토미 3개국에 걸친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다.[15]
1199년 요리토모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쇼군이 되었다. 하지만 요리이에는 외할아버지인 도키마사보다 자신의 장인인 히키 요시카즈와 더 가까웠고, 호조 가문에 비협조적이었다. 이에 도키마사, 마사코, 요시토키 등은 13인의 합의제를 구성하여 막부 운영에 참여했다. 1200년, 요리토모의 측근이었으나 요리이에와 대립하던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숙청되었는데, 호조 가문이 그의 영지였던 사가미 국을 차지했기 때문에 도키마사의 관여가 의심된다. 같은 해 도키마사는 오미 국의 다이묘가 되었다.[9]
도키마사는 요리이에 대신 그의 동생이자 자신의 다른 외손자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203년 요리이에가 중병에 걸리자, 도키마사는 일본을 사네토모와 요리이에의 아들 이치만에게 분할 상속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눈치챈 히키 요시카즈가 도키마사 제거를 계획했으나, 오에노 히로모토를 통해 이를 먼저 알게 된 도키마사는 요시카즈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암살했다. 곧이어 호조 군대는 히키 일족의 저택을 공격하여 이치만을 포함한 히키 일족을 멸족시켰다. 쇼군 요리이에는 강제로 출가당하여 이즈 국 슈젠지에 유폐되었고, 이듬해 암살당했는데 이 역시 도키마사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요리이에와 히키 일족을 제거한 도키마사는 12세의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3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만도코로 벳토에 취임하여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시기 도키마사는 어린 쇼군 사네토모를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하고 단독으로 명령을 내리는 등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초대 싯켄 취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사위인 히라가 도모마사가 교토 슈고로 부임하자 무사시의 국무를 대행하며 해당 지역 고케닌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명하는 등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11월에는 히키 요시카즈의 난 때 도망쳤던 이치만이 체포되어 도키마사의 아들 요시토키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3. 3. 정권 쟁탈
조지(正治) 원년(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그의 적자인 외손자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가마쿠라 막부의 2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요리이에는 할아버지인 도키마사보다 자신의 장인이자 유부(乳父, 젖아버지)인 히키 요시카즈를 더 신뢰하고 중용했다. 이로써 쇼군 가문의 외척 지위는 호조 가문에서 히키 가문으로 넘어갔고, 도키마사가 이끄는 호조 가문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듬해인 1200년 정월 초하루, 도키마사는 쇼군 요리이에에게 '오반(御盤)'을 헌상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행정 서열과 무관하게 고케닌 중 가장 격이 높은 인물이 맡는 상징적인 자리였다.[27] 요리토모 생전에는 '가마쿠라도노의 장인'으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던 도키마사가, 쇼군이 바뀐 첫 해에 고케닌의 대표로서 이 역할을 맡은 것은, 외척 지위 대신 고케닌으로서 정국 운영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 호조 씨가 막부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28]
요리토모 사후, 그의 생전에 억눌려 있던 유력 고케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리이에의 측근이자 고케닌 통제에 능했던 사무라이도코로 별당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다른 고케닌들의 미움을 사 탄핵을 받고 실각하여 가마쿠라에서 추방되었다(1200년,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변).[29] 『교쿠요』 기록에 따르면, 가게토키는 요리이에의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요리이에에게 참소했으나, 이것이 거짓으로 밝혀져 추방되었다고 한다. 도키마사는 가게토키 탄핵 연판장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탄핵의 발단이 된 것이 그의 딸 아와노 쓰보네였고, 가게토키 일족이 토벌된 스루가국 기요미가세키(清見関)가 도키마사의 세력권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도키마사가 가게토키 실각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같은 해 4월 1일, 도키마사는 도토미노카미(遠江守)에 임명되었다. 이는 겐지(源氏) 일문 외의 고케닌으로서는 최초로 슈고이면서 고쿠시를 겸하게 된 사례로, 막부 내에서 도키마사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9]
도키마사와 히키 요시카즈 사이의 권력 다툼은 점차 격화되었다. 겐닌(建仁) 3년(1203년) 7월, 쇼군 요리이에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 9월 2일, 도키마사는 히키 요시카즈를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여 암살하고, 군대를 보내 요리이에의 아들 미나모토노 이치만이 머물던 고고쇼(小御所)를 습격하여 히키 일족을 멸망시켰다(히키 요시카즈의 변). 이 사건 직후, 도키마사는 병석에 있던 요리이에의 쇼군직을 박탈하고 이즈 국의 슈젠지로 추방했다. 요리이에는 이듬해인 1204년 그곳에서 암살되었는데, 이 역시 도키마사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키씨를 제거한 도키마사는 1203년 9월, 요리이에의 동생이자 요리토모의 차남인 12세의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고 자신의 저택에서 후견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사네토모의 유모 역시 도키마사의 딸이었다. 도키마사는 오에노 히로모토와 함께 정무를 총괄하는 만도코로의 장관 격인 벳토(別当)에 취임했다. 66세의 도키마사는 어린 쇼군 사네토모를 대신하여, 자신 혼자의 서명만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하지장(下知狀)'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문서를 통해 고케닌 영지 문제 등 막부의 정무를 처리했다. 이를 통해 도키마사는 다른 유력 고케닌이나 기존 합의제의 권한을 억누르고 막부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했으며, 이 시기 도키마사를 사실상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초대 싯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30]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도키마사는 잠재적 경쟁 세력을 계속 제거해 나갔다. 겐큐(元久) 2년(1205년) 6월, 도키마사는 후처 마키노카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남편 히라가 도모마사가 유력 고케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참소하자, 이를 그대로 믿고 시게타다 부자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제거하였다(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31]
3. 4.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겐큐(元久) 2년(1205년)에 일어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은 호조 도키마사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이다. 도키마사가 무사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면서, 무사시국의 유력 고케닌이자 총검교직으로서 국내 무사단을 통솔하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의 갈등이 깊어졌다.[31] 이러한 갈등은 이미 1204년 교토에서 "호조 도키마사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싸워 패배하여 산 속에 숨었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명월기』 겐큐 원년 1월 18일 조)[16]
같은 해 11월 5일, 도키마사와 그의 후처 마키노카타 사이의 외아들이자 총애받던 호조 마사노리가 교토에서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사노리의 죽음은 이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과 마키 씨 사건으로 이어지는 호조 가문 내분 발생의 한 계기가 되었다.[16]
도키마사와 시게타다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겐큐 2년(1205년) 정월, 지바 나리타네의 중재로 양자는 잠시 화해하기도 했다.[17] 그러나 이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도키마사는 자신의 사위인 히라가 도모마사와 이나게 시게나리의 참소를 받아들여, 또 다른 사위였던 시게타다에게 모반 혐의를 씌우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31][17]
도키마사는 아들 호조 요시토키와 호조 도키후사에게 시게타다 토벌을 명령했다. 요시토키와 도키후사는 매형인 시게타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명령에 항의했지만, 도키마사는 듣지 않고 직접 토벌을 지시했다. 결국 시게타다 부자는 모반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31] 이 사건으로 인해 요시토키, 도키후사를 비롯한 자식들은 아버지 도키마사의 독단적인 행동과 냉혹함에 실망하여 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제거는 도키마사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호조 가문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5. 마키 씨 사건과 실각
겐큐(元久) 2년(1205년) 6월, 도키마사는 후처 마키노카타(牧の方)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의 남편 히라가 도모마사(平賀朝雅)의 참소를 받아들여, 유력 고케닌이었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 부자를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였다(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31] 이 사건은 이후 도키마사의 정치적 몰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같은 해 윤7월, 도키마사는 후처 마키노카타와 공모하여 외손자인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살해하고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32]. 그러나 이 음모는 사네토모의 어머니이자 도키마사의 딸인 마사코와 아들 요시토키에게 발각되었다. 윤7월 19일, 마사코와 요시토키는 유우키 도모미쓰(結城朝光),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 나가누마 무네마사(長沼宗政) 등을 보내 도키마사의 저택에 있던 사네토모를 요시토키의 저택으로 안전하게 옮겼다. 도키마사를 지지하던 고케닌 대부분도 사네토모를 옹호하는 요시토키 측으로 돌아서면서 음모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일설에는 도키마사 본인은 사네토모 살해에 소극적이었고, 마키노카타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동시대 기록인 『구간초』는 사건의 주모자를 일관되게 도키마사로 지목하고 있어, 호조 가문의 시조인 도키마사를 옹호하기 위해 『아즈마카가미』가 마키노카타의 역할을 부풀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막부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도키마사는 음모가 발각된 당일(윤7월 19일) 출가하였고, 다음 날 마사코와 요시토키에 의해 가마쿠라에서 추방되어 이즈의 호조 장원으로 사실상 유배되었다[33]. 이 사건을 마키 씨 사건(牧氏事件)이라 부른다.
마키 씨 사건에 대한 기록은 시대와 사서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인 《보력간기(保暦間記)》는 사네토모 살해가 거의 성공 직전에 이르렀다고 기록했고, 가마쿠라 초기의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는 도키마사가 음모의 최종 결행을 기획했다고 했으며, 《호조구대기(北条九代記)》는 모든 것이 도키마사의 계획이었다고 서술했다[34]. 반면 《아즈마카가미》는 도키마사가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나머지 마키 씨의 꾀임에 넘어가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5].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살해에 반대했던 아들 요시토키와의 대립이 이미 깊어진 상태였고[36], 시게타다 제거 이후 그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면서 도키마사는 정치적 명망을 크게 잃었다. 이는 요시토키가 아버지를 더욱 경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으며[37], 결국 마키 씨 사건을 통해 도키마사와 마사코·요시토키 남매 간의 정치적 대립이 폭발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38]. 이 사건으로 도키마사는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밀려나 정치 생명을 마감했다.
겐포(建保) 3년(1215년) 1월 6일, 도키마사는 유배지인 이즈에서 부스럼(종기)이 악화되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싯켄의 지위는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계승되었다.
4. 인물과 평가
당시 이즈에 유배된 죄인에 불과했던 요리토모의 가치를 알아보고 헤이케가 장악하고 있던 교토 조정에 반기를 든 도키마사의 선견지명은 높이 평가받는다. 이를 통해 도고쿠의 이름 없는 호족이었던 호조씨를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 가문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요리이에 암살[39]이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살해[36], 마키노카타 사건 등 말년의 행적으로 인해 평판은 좋지 않다. 겐큐 2년(1205년) 윤7월, 도키마사는 후처 마키노카타와 공모하여 외손자 사네토모를 살해하고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다[32]. 그러나 이 음모는 딸 마사코와 아들 요시토키에게 발각되었다. 윤7월 19일, 마사코 남매가 보낸 유우키 도모미쓰, 미우라 요시무라, 나가누마 무네마사 등에 의해 사네토모는 요시토키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도키마사를 지지하던 고케닌 대부분도 요시토키에게 가담하면서 음모는 실패했다. 일설에는 도키마사 본인은 사네토모 살해에 소극적이었고 마키노카타가 주도했다고도 한다.
마키씨 사건(牧氏事件)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 남북조 시대의 《보력간기(保暦間記)》는 사네토모 살해가 거의 성공 직전이었다고 기록했고, 가마쿠라 초기의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는 도키마사가 최종 결행을 기획했다고 했으며, 《호조구대기(北条九代記)》는 모든 것이 도키마사의 계획이었다고 전한다[34]. 《아즈마카가미》는 도키마사가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나머지 마키씨의 주도에 휘말렸다고 기술했다[35]. 한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살해는 아들 요시토키와의 대립을 심화시켰고[36], 시게타다에 대한 동정 여론이 모이면서 도키마사는 덕망을 잃고 요시토키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37]. 이는 결국 도키마사와 마사코·요시토키 남매 간 정치적 대립의 배경이 되었다[38].
막부 내에서 고립된 도키마사는 19일에 출가했고, 다음 날 마사코와 요시토키에 의해 이즈의 호조 장원으로 사실상 유배되었다[33]. 이후 정치 무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정치 생명을 마감했다. 겐포 3년(1215년) 1월 6일, 부스럼이 악화되어 은거지인 호조에서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이러한 말년의 행적 때문에 아들인 요시토키조차 도키마사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청렴함으로 유명했던 손자이자 3대 싯켄 호조 야스토키는 요리토모, 마사코, 요시토키를 막부의 조묘(祖廟)로 삼아 공경했지만, 도키마사에 대해서는 마키씨 사건을 들어 쇼군 사네토모를 살해하려 한 반역자로 간주하여 공양조차 하지 않는 등 그의 존재를 부정했다[39].
주로 '호조 시로(北条 四郎)'라고 불렸으며, 쇼지 2년(1200년) 관직 임명 후에는 '엔슈(遠州)'라고도 불렸다(『아즈마카가미』). '호조 도노(北条 殿)'라는 호칭도 사용되었으나, 이는 후대에 호조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 후 시조를 높여 부르기 위해 사용된 명칭일 가능성이 제기된다[10].
5. 도키마사의 저택
1940년경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은 의장산衣張山일본어 기슭의 한 유적을 호조 도키마사의 저택 터로 추정하였다. 이후 가나가와현 교육위원회가 작성한 유적 지도나 유적 대장에도 '호조 도키마사 저택 터'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2008년 후반 가마쿠라시가 주도한 발굴 조사 결과, 도키마사가 살았던 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 터 역시 13세기 후반의 것으로 밝혀졌다. 도키마사는 13세기 전반에 사망했기 때문에, 해당 유적이 실제 도키마사의 저택 터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결국 2009년에 유적의 명칭은 '호조 도키마사 저택 터'에서 오마치 석가당구 유적大町釈迦堂口遺跡|오마치 샤카도구치 유적일본어으로 변경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해당 유적은 가마쿠라 시대의 종교 시설(절터)로 추정되며,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8월 5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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