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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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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이트채플은 런던 이스트엔드에 위치한 지역으로, 성 마리아 교회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로마 시대부터 런던과 콜체스터를 잇는 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16세기 후반부터 런던의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20세기에는 세계 대전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현재는 다양한 문화 시설과 다민족 인구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런던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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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채플
지도 정보
일반 정보
공식 명칭Whitechapel (화이트채플)
위치런던 타워햄릿
면적3.4 mi (5.5 km)
우편 번호 구역E
우편 번호E1
지역 번호020
OS 격자 참조TQ335815
인구 통계
인구12,558명
선거구베스널 그린 및 스텝니
이미지
화이트채플 역 입구
화이트채플 역 입구
로열 런던 병원 재개발
새로운 로열 런던 병원 건물

2. 역사

1905년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


화이트채플의 중심은 화이트채플 로드이며, 동쪽으로 뻗어있는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는 성 마리아에게 헌정된 작은 교회에서 이름을 따왔다. 1338년경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en)이 화이트채플 지역의 교구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격으로 파괴되었지만, 부지와 공동 묘지가 있던 곳은 현재 거리 남쪽에 면한 공원이 되었다.[51][52]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와 화이트채플 로드는 현재 A11 도로의 일부이며, 과거 런던 시와 콜체스터를 잇는 로마 가도의 첫 번째 구간이었다.[53] 이후 이 길을 통해 런던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에 위치한 코칭 인(현대의 로드사이드 이나 모텔과 유사)에 숙박했다.[51]

16세기 후반, 화이트채플과 주변 지역은 런던의 "또 다른 절반"이 되기 시작했다. 알드게이트 동쪽, 시벽 밖에 위치하여 관청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피혁 무두질 공장, 양조장, 주조소 (필라델피아자유의 종과 빅 벤을 주조한 화이트채플 벨 파운드리) 및 식육 처리장 등 악취를 풍기는 산업 시설이 밀집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산업과 상업의 이익을 찾아 지방에서 런던으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화이트채플 주변에는 많은 빈곤층이 정착하게 되었다. 1797년, 노어의 반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아 교수형에 처해진 리처드 파커의 유해가 부인에게 인도되어 화이트채플에서 매장(교회 장례)되었고, 매장 전 시신을 보려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1840년대, 화이트채플은 와핑, 알드게이트(en), 베스널 그린, 마일 엔드, 라임하우스, 보우, 브롬리 바이 보우, 포플러, 섀드웰, 스테프니 (오늘날 이스트 런던)와 함께 빈곤과 과밀의 문제를 안고 있는 "디킨스적" 런던으로 발전했다. 특히 도셋 스트리트(현재 사유지이지만, 과거에는 "런던에서 최악의 골목길"이라고 불렸다[54]), 스롤 스트리트, 버너스 스트리트(헨리케스 스트리트로 개명), 웬트워스 스트리트 등이 문제였다.

윌리엄 부스는 1865년 화이트채플에서 구세군의 전신인 '기독교 부흥 협회'를 창설하고 텐트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기독교 선교'에 동참했고, 1878년 화이트채플 로드에서 구세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55]

빅토리아 시대에는 아일랜드인과 유대인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빈곤층이 증가했다. 이디시 극장의 배우 제이콥 아들러는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이 화이트채플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여기가 런던인가? 러시아나 뉴욕의 최악의 빈민가에서도 이런 빈곤은 본 적이 없다"라고 기록했다.[56] 1888년 10월, 런던 경찰청은 화이트채플에 1,200명의 매춘부와 약 62개의 사창가가 있다고 추산했다.[57] 이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와 관련된 화이트채플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는 전국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58]

1902년, 미국 작가 잭 런던은 화이트채플에서 생활하며 그 경험을 『바닥의 사람들』에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빈곤이 미국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결론 내렸다. 화이트채플의 빈곤, 노숙, 착취적인 노동 환경 등은 조지 버나드 쇼, 레닌 등 개혁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에드워드 7세를 기리는 명판


18세기부터 존재해 온 로열 런던 병원의 옛 건물


"엘리펀트 맨"으로 알려진 조지프 메릭 (1862년 - 1890년)은 화이트채플 로드의 구경거리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후, 그 극장 맞은편에 있는 로열 런던 병원에서 프레데릭 트레브스가 진찰을 하게 된다. 조지프 메릭의 생애를 소개하는 박물관이 존재한다.

화이트채플은 20세기 전반에는 다소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가난한 상태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더 블리츠 및 나치 독일의 보복 무기에 의한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2. 1. 기원 및 지명

화이트채플은 원래 스테프니 영주 및 교구의 일부였으나, 알게이트 바로 바깥쪽, 에식스로 가는 로마 도로에 위치하여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세인트 메리에게 헌정된 편의 예배당이 세워져 사람들이 스테프니의 교구 교회인 세인트 던스턴스까지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알려진 가장 초기의 교구 사제는 1329년의 휴 드 풀본이었다.

화이트채플이라는 지명은 근처의 화이트 타워와 마찬가지로 한때 백색 페인트칠을 하여 눈에 띄고 매력적인 외관을 갖추었던 교회인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에서 유래했다. '매트펠론'의 어원은 불분명하며 독특한 것으로 보인다.

1338년경 화이트채플은 독립된 교구가 되었고, 원래 스테프니 내의 편의 예배당이었던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이 교구 교회가 되었다.[51][52]

2. 2. 고대 교구의 지리

화이트채플의 중심축은 런던 성벽의 올드게이트에서 출발하여 에식스의 콜체스터(로마 브리타니아의 첫 번째 수도)를 거쳐 더 멀리까지 뻗어 있던 고대 로마 도로였다. 이 도로는 나중에 '그레이트 에식스 로드'로 명명되었으며, 현재는 A11로 지정되었다. 이 역사적인 경로는 화이트채플을 지나거나 그 경계를 따라가면서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와 화이트채플 로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2] 수세기 동안 이 길을 통해 런던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에 줄지어 있던 많은 역참 여관에서 숙박을 했다.[21]

교구의 면적은 런던 시 경계에서 약 1400미터까지 뻗어 있었는데, 원래는 올드게이트 자체에서 동쪽으로 약 180미터 떨어진 '올드게이트 바'로 표시되었으며, 마일 엔드와 베스널 그린의 경계가 만나는 캠브리지 히스 로드 교차로 부근까지였다. 북쪽 경계에는 웬트워스 스트리트와 올드 몬태규 스트리트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또한 이 교구에는 시와 가깝고 교구 교회인 세인트 메리 교회 남쪽에 있는 굿맨 필즈 주변 지역도 포함되었다.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와 화이트채플 로드는 현재 A11 도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오래전 런던 시와 콜체스터를 잇는 로마 가도의 첫 번째 구간이었다.[53] 이후 시대에는, 이 길을 통해 런던 시내를 오가는 여행객들이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에 위치한 코칭 인(현대의 로드사이드 이나 모텔과 유사)에 숙박하게 되었다.[51]

2. 3. 행정 역사

이 지역은 1338년경에 독립된 교구가 되었다. 당시 교구는 교회적인 기능만을 수행했고, 튜더 시대에 병렬적인 민간 교구가 형성되었다. 민간 교구의 원래 목적은 빈민 구제였다. 이 지역은 역사적인 (또는 고대) 카운티인 미들섹스의 일부였지만, 군사 및 대부분의 (또는 모든) 민간 카운티 기능은 타워 디비전(타워 햄리츠라고도 함)에 의해 더 지역적으로 관리되었다.

1889년 화이트채플이 새로운 런던 카운티의 일부가 되면서 ''타워 디비전''의 역할은 종료되었고, 1900년에 이 지역이 스테프니 자치구에 합류하면서 대부분의 민간 교구 기능이 사라졌다.

1965년에는 ''스테프니 자치구''가 베스널 그린 자치구 및 팝라 자치구와 합병하여 새로운 타워 햄리츠 자치구를 형성하면서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다. 새로운 타워 햄리츠 자치구는 역사적인 타워 디비전(또는 타워 햄리츠)의 일부만 포함했다. 동시에 이 지역은 이전의 작고 오래된 ''런던 카운티''를 대체한 새로운 대런던의 일부가 되었다.

1900년에 설립된 스테프니 자치구의 구획 중 화이트채플 교구가 3개를 형성하고 있다.

2. 4. 초기 역사

화이트채플의 중심은 화이트채플 로드이며, 동쪽으로 뻗어있는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는 성 마리아에게 헌정된 작은 교회(chapel of ease)에서 이름을 따왔다. 1338년경에는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en)이라 불리며 화이트채플 지역의 교구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격으로 파괴되었지만, 부지와 공동 묘지가 있던 곳은 현재 거리 남쪽에 면한 공원이 되었다.[51][52]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와 화이트채플 로드는 현재 A11 도로의 일부이며, 과거 런던 시와 콜체스터를 잇는 로마 가도의 첫 번째 구간이었다.[53] 이후, 이 길을 통해 런던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화이트채플 하이 스트리트에 위치한 코칭 인(현대의 로드사이드 이나 모텔과 유사)에 숙박했다.[51]

16세기 후반, 화이트채플과 주변 지역은 런던의 "또 다른 절반"이 되기 시작했다. 알드게이트 동쪽, 시벽 밖에 위치하여 관청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피혁 무두질 공장, 양조장, 주조소(화이트채플 벨 파운드리 - 필라델피아자유의 종과 빅 벤 주조), 식육 처리장 등 악취를 풍기는 산업 시설이 밀집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산업과 상업의 이익을 찾아 지방에서 런던으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화이트채플 주변에는 많은 빈곤층이 정착하게 되었다. 1797년, 노어의 반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아 교수형에 처해진 리처드 파커의 유해가 부인에게 인도되어 화이트채플에서 매장(교회 장례)되었고, 매장 전 시신을 보려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1840년대, 화이트채플은 와핑, 알드게이트(en), 베스널 그린, 마일 엔드, 라임하우스, 보우, 브롬리 바이 보우, 포플러, 섀드웰, 스테프니 (오늘날 이스트 런던)와 함께 빈곤과 과밀의 문제를 안고 있는 "디킨스적" 런던으로 발전했다. 특히 도셋 스트리트(현재 사유지이지만, 과거에는 "런던에서 최악의 골목길"이라고 불렸다[54]), 스롤 스트리트, 버너스 스트리트(헨리케스 스트리트로 개명), 웬트워스 스트리트 등이 문제였다.

윌리엄 부스는 1865년 화이트채플의 토마스 스트리트에 "프렌드 묘지"를 만들고 "기독교 부흥 협회"를 창설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이후 "기독교 전도회"를 거쳐 1878년 8월 7일 화이트채플 로드 272번지에서 열린 집회에서 구세군이 설립되었다.[55]

빅토리아 시대에는 아일랜드인과 유대인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빈곤층이 증가했다. 이디시 극장의 배우 제이콥 아들러는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이 화이트채플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여기가 런던인가? 러시아에서도, 후기의 뉴욕의 최빈 슬럼가에서도 1880년대 런던과 같은 빈곤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56] 1888년 10월, 런던 경찰청은 화이트채플에 1,200명의 "상당히 낮은 계급"의 매춘부와 62개의 매춘 업소가 존재한다고 추정했다.[57] 이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와 관련된 화이트채플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는 전국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58]

1902년, 미국 작가 잭 런던은 화이트채플에서 생활하며 그 경험을 『바닥의 사람들』에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빈곤이 미국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결론 내렸다. 화이트채플의 빈곤, 노숙, 착취적인 노동 환경 등은 조지 버나드 쇼, 레닌 등 개혁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지역은 무정부주의 출판사인 프리덤 프레스(en)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2. 4. 1. 화이트채플 마운트

화이트채플 마운트는 크고 아마도 인공적인 언덕으로, 그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올드게이트에서 동쪽으로 약 1200미터 떨어진 화이트채플 로드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현대의 로열 런던 병원 바로 서쪽에 있었다. 마운트는 17세기 중반 세 왕국 전쟁 동안 런던의 방어 시설의 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1642년부터 1647년까지 운영되었던 교통선으로 알려진 요새의 고리 일환이었거나,[3] 또는 그 이후에 그 방어 시스템을 대체한 세 개의 요새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이 언덕은 1807~1808년 주거 개발을 위해 제거되었다.

1753년의 런던 병원, 화이트채플. 화이트채플 마운트가 바로 오른쪽에 서 있다 (서쪽).

2. 4. 2. 데버넌트 재단 학교

1680년, 화이트채플 교구의 교구 목사인 랄프 데버넌트와 그의 아내, 처제는 교구의 40명의 소년들에게 문해력, 수리력, 그리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원리"를 가르칠 교사를 위해 거액을 유증했다. 같은 증서에서 헨리와 사라 걸리퍼는 30명의 가난한 소녀들을 교육하기로 약속했는데, 즉 여교사는 그들에게 "교리 문답, 읽기, 뜨개질, 바느질 및 기타 유용한 작업"을 가르치기로 했다.[4] 1701년, 익명의 기부자가 재단에 1000GBP를 기증하여 아이들이 교육뿐만 아니라 적절한 옷을 입을 수 있게 했다.[4] 1783년과 1830년 사이에 학교는 총 5000GBP 이상의 20개의 기부를 받았다.[4] 연간 수입은 약 500GBP로, 이는 대부분의 목사나 교구 목사의 순수 수입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4] 현대 교육을 지원하는 데버넌트 센터는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데버넌트 재단 학교는 1966년부터 에식스주 로턴에 위치해 있다.[4]

2. 4. 3. 로열 런던 병원

런던 인퍼머리는 1740년에 자선 병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년 안에 핀스버리에서 화이트채플 남부의 프레스콧 스트리트로 이전했다. 이 병원의 목표는 "모든 병든 사람, 특히 제조업자, 상선 선원 및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구제하는 것"이었다.[5]

1757년에 당시 대부분 시골이었던 화이트채플 로드 부지로 이전했으며, 런던 병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90년 250주년을 맞아 로열 런던 병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2년에 옛 건물을 대체하는 새 건물이 문을 열었다.[5]

2023년에는 오래된 병원 건물이 새로운 타워 햄리츠 타운 홀이 되었다.[5]

"엘리펀트 맨"으로 알려진 조지프 메릭 (1862년 - 1890년)은 화이트채플 로드의 구경거리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후, 그 극장 맞은편에 있는 로열 런던 병원에서 프레데릭 트레브스가 진찰을 하게 된다. 조지프 메릭의 생애를 소개하는 박물관이 존재한다.

2. 5. 18세기와 19세기

18세기와 19세기의 화이트채플은 런던 동부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빈곤, 인구 과밀,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 문제로 악명이 높았다.[6][7] 찰스 부스의 1889년 빈곤 지도에는 화이트채플의 일부 지역이 중산층(붉은색)부터 "반범죄자" 거주 지역(검은색)까지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찰스 부스의 1889년 화이트채플 지도 일부. 붉은색 지역은 "중산층"이고, 검은색 지역은 "반범죄자"이다.




윌리엄 부스는 1865년 화이트채플에서 구세군의 전신인 '기독교 부흥 협회'를 창설하고 텐트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기독교 선교'에 동참했고, 1878년 화이트채플 로드에서 구세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8]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9]

19세기에는 영국 각지와 아일랜드, 유대인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다. 웨스턴 화이트채플과 워핑 지역은 많은 독일인들이 이주해와 ''리틀 독일''로 알려지기도 했다.[10] 이디시어 극장 배우 야코프 아들러는 1883~1884년 화이트채플의 빈곤을 목격하고 "여기가 런던인가? 러시아나 뉴욕의 최악의 빈민가에서도 이런 빈곤은 본 적이 없다"라고 기록했다.[11]

만연한 빈곤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매춘으로 내몰렸다. 1888년 10월 런던 경시청은 화이트채플에 1,200명의 매춘부와 약 62개의 사창가가 있다고 추산했다.[12] 1889년에 설립된 런던 카운티 의회는 슬럼 정비등에 투자를 제공했다.

"코끼리 인간" 조셉 메릭은 화이트채플 로드의 한 상점에 전시되다가 로열 런던 병원의 프레데릭 트리스의 도움을 받았다. 병원에는 그의 삶에 대한 박물관이 있다.[14]

2. 5. 1. 잭 더 리퍼

1888년 가을, 화이트채플은 잭 더 리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에 의해 런던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잭 더 리퍼는 주로 매춘부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 1888년 10월, 런던 경찰청은 화이트채플에 1,200명의 "상당히 낮은 계급"의 매춘부와 62개의 매춘 업소가 있다고 추정했다.[57]

잭 더 리퍼는 최소 5명, 많게는 11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들은 화이트채플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범인에게 '잭 더 리퍼'라는 별명을 붙였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의 빈곤, 여성의 지위, 언론의 선정성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 개혁가들은 화이트채플의 열악한 환경과 부도덕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이트채플 연쇄 살인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으며,[58] 잭 더 리퍼의 정체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2. 6. 20세기

1902년, 미국의 작가 잭 런던은 누더기 옷을 입고 화이트채플에 기거하며 그곳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한 ''심연의 사람들''을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빈곤이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고 결론 내렸다.[18] 조지 버나드 쇼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여러 좌파 개혁가와 혁명가들이 화이트채플의 빈곤, 노숙, 착취적인 노동 환경, 매춘, 유아 사망률 등에 주목했다.[18]

내무장관 처칠이 화이트채플 시드니 스트리트의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


1911년 1월, 화이트채플이 속한 메트로폴리탄 버러 오브 스텝니에서 경찰, 군대, 라트비아 혁명가 간의 총격전인 시드니 스트리트 포위전이 발생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현장에 উপস্থিত해 지휘를 맡았는데, 이로 인해 정치적 논란이 일었다.[15][16] 메트로폴리탄 경찰 기록에는 이 사건이 "내무장관이 경찰 작전 지휘 결정을 내린 매우 드문 경우"라고 명시되어 있다.[17]

1936년 10월 4일, 오스왈드 모슬리가 이끄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 엔드를 통과하는 행진을 계획했다. 이에 수십만 명의 지역 주민들이 행진을 막기 위해 모였고,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로 알려진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가디너스 코너에서 큰 충돌이 있었다.[19]

1939년에는 세인트 마크 스트리트와 알리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할랄 식당이 문을 열었다. 이 식당은 현재 이스트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인도 레스토랑이다.[20]

화이트채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 유대인 난민 이민자들의 생활의 중심지였다.


화이트채플은 제2차 세계 대전블리츠나치 독일의 V-무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교구 교회인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은 1940년 12월 29일 공습으로 심각하게 손상되어 1952년에 잔해가 철거되었다.[21][22]

1978년 5월 4일, 방글라데시 출신 의류 노동자 알타브 알리가 인종차별적 공격으로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지역 벵골 공동체가 대규모로 동원되었고, 이전 교회 묘지는 알타브 알리 공원으로 개명되었다.[23][24]

1990년, 해머스미스 & 시티선이 새로운 노선으로 분리되면서 해머스미스와 화이트채플 사이의 메트로폴리탄선 운행이 중단되었다.[25][26]

2. 7. 21세기

화이트채플 역의 벵골어 표지판


크로스레일은 엘리자베스선의 화이트채플 역에 정차한다.[27] 동쪽 방향 열차는 2010년에 시작된 대대적인 재개발을 거친 유서 깊은 역을 출발한 후 두 갈래로 나뉜다.[28]

2016년 1월, 구 화이트채플 역은 크로스레일을 준비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 및 역 수용 능력 확대를 위한 개보수 및 현대화 작업을 위해 폐쇄되었다.[29]

로열 런던 병원은 2012년에 폐쇄되었다가 6.5억파운드가 소요된 최신 건물 뒤편에 다시 문을 열었다.[30] 이후 구 부지는 지방 의회에 의해 재구매되어 현재 멀버리 플레이스에 있는 타운 홀을 대체하는 새로운 타운 홀이 열렸다.[31]

2022년 3월, 화이트채플 역 표지판에 벵골 문자로 "হোয়াইটচ্যাপেল"이 설치되었다.[32] 영국계 파키스탄인 런던 시장 사디크 칸은 3월 26일 방글라데시 독립 기념일을 앞두고 이 표지판이 설치된 것에 "매우 기뻐했다".[32] 이 설치에는 방글라데시인 외교관과 서벵골의 주 총리 마마타 바네르지가 참석했다.[33]

또한 2022년에는 유대계 미국 역사 보존 협회 영국 지부에 의해 과거 애들러 하우스가 위치했던 애들러 스트리트와 코크 스트리트 교차로의 화이트채플에 역사적인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애들러 하우스는 1891년부터 1911년까지 대영 제국의 최고 랍비였던 허먼 애들러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이 표지판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화이트채플이 영국 유대인 난민 생활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기리고 있다.[34]

3. 문화

화이트채플 미술관의 독특한 타일 외관


이스트런던 모스크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아잔 방송에 확성기 사용을 허가받은 곳 중 하나였다.


밤의 화이트채플 스트리트 마켓


화이트채플 로드에는 19세기 극장 두 곳이 있었다. 에핑엄 극장(1834–1897)과 파빌리온 극장(1828–1935; 건물은 1962년에 철거됨)이다. 찰스 디킨스의 장남 찰스 디킨스 주니어는 1879년 저서 ''런던 디킨스 사전''에서 파빌리온을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동쪽 끝의 대형 극장. 거친 멜로드라마, 풍자극, 판토마임, 등등"이라고 묘사했다. 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을 위한 이디시 극장의 본거지가 되었고, 앵글로 유대인 '화이트채플 보이즈' 아방가르드 문학 및 예술 운동을 탄생시켰다.

1970년대 이후, 화이트채플과 이스트런던의 다른 인근 지역은 런던의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장소는 1901년에 설립되어 가난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고급 문화의 전초 기지였던 화이트채플 미술관일 것이다. 이웃이 젠트리피케이션되면서 도시 전체와 심지어 국제적인 가시성과 지원을 얻었다. 2005년부터 미술관은 헤리티지 복권 기금에서 3260000GBP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확장을 거쳤다. 확장된 시설은 2009년에 문을 열었다.

21세기 초의 화이트채플은 런던의 펑크 록과 스커즈 록 신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 신의 주요 초점은 화이트채플 팩토리와 리듬 팩토리 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었다. 이 장면에는 더 리버틴스, Zap!, 노바, 더 아더스, 레이저라이트, 더 레이크스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음악 차트에서 어느 정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4. 인구 통계

2021년 화이트채플의 총 인구는 18,841명이었다.[37] 영국 방글라데시인이 이 지역의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화이트채플 구역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38] 화이트채플 로드 끝에 위치한 이스트 런던 모스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모스크 중 하나이다. 모스크 단체는 1910년 초에 설립되었으며, 실레트 출신 공동체가 수년에 걸쳐 급증하면서 모스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1985년에는 돔과 첨탑이 있는 이 대규모의 특별히 지어진 모스크가 화이트채플 중심부에 건설되어 매주 수천 명의 신자를 끌어모았으며, 2004년에는 런던 무슬림 센터와 함께 더욱 확장되었다.[39]

2005년 데이비드 아자예의 디자인으로 윌리엄 베리가 1200만파운드의 비용으로 건설한 화이트채플 아이디어 스토어 도서관은 2006년 스터링 상 후보에 올랐다.[40][41]

2021년 화이트채플 비교[42]-- 또는 ------
화이트채플 인구 18,841명34.6%51.3%4.9%
타워 햄리츠 런던 자치구39.4%44.4%7.3%


5. 교통

화이트채플은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채플 로드의 A11과 남쪽의 동서 방향으로 달리는 A13 및 더 하이웨이 A1203 도로를 통해 국가 도로망과 연결된다. 자전거 슈퍼하이웨이 CS2는 올드게이트에서 스트랫퍼드까지 A11 도로를 따라 운행된다.

런던 버스 15, 25, 106, 115, 135, 205, 254, D3, N15, N205, N253, N550, N551번 노선이 이 지역에서 운행된다.

5. 1. 철도

화이트채플에는 올드게이트 이스트와 화이트채플 두 개의 지하철역이 있다. 올드게이트 이스트역은 디스트릭트선과 해머스미스 & 시티선이 운행된다. 화이트채플역은 이 노선들과 더불어 엘리자베스선, 런던 오버그라운드의 동런던선 및 사우스런던선이 운행하며, 곧 윈드러시선으로 개명될 예정이다.[45]

화이트채플역은 원래 화이트채플과 마일 엔드의 경계, 그리고 베스널 그린과의 경계 바로 안쪽에 위치하여 ''화이트채플 (마일 엔드)''로 불렸다.

올드게이트 이스트역은 원래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런던 이스트 모스크 바로 동쪽에 ''세인트 메리스 (화이트채플 로드)''라는 추가적인 디스트릭트 라인 역이 있었다.

1930년대에 올드게이트 이스트역이 원래 위치에서 동쪽으로 150m 이전하면서 3개 역이 매우 가까워졌다. 그 결과, 철도는 비용 절감을 위해 3개 역 중간에 있던 세인트 메리스역을 폐쇄했다.

5. 2. 버스

런던 버스의 15, 25, 106, 115, 135, 205, 254, D3, N15, N205, N253, N550, N551 노선이 이 지역에서 운행된다.

화이트채플은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채플 로드의 A11과 남쪽의 동서 방향으로 달리는 A13 및 더 하이웨이 A1203 도로를 통해 국가 도로망과 연결된다.

자전거 슈퍼하이웨이 CS2는 올드게이트에서 스트랫퍼드까지 A11 도로를 따라 운행된다.

5. 3. 도로

런던 버스 15, 25, 106, 115, 135, 205, 254, D3, N15, N205, N253, N550, N551번 노선이 이 지역에서 운행된다.

화이트채플은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채플 로드의 A11과 남쪽의 동서 방향으로 달리는 A13 및 더 하이웨이 A1203 도로를 통해 국가 도로망과 연결된다.

자전거 슈퍼하이웨이 CS2는 올드게이트에서 스트랫퍼드까지 A11 도로를 따라 운행된다.

6. 문학 작품 속 화이트채플

화이트채플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피크윅 페이퍼스''(22장)에서 피크윅 일행이 입스위치로 가는 마차를 타는 불 인(Bull Inn)이 있는 곳으로 등장한다. 샘 웰러는 이곳이 "별로 좋은 동네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가난과 굴 가게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43]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페이긴의 은신처 중 하나도 화이트채플에 있었으며, 페이긴은 악명 높은 지역 장물아비인 아이키 솔로몬(1785–1850)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화이트채플은 이스라엘 장윌의 ''게토의 아이들''과 ''스노러의 왕'', 사이먼 블루멘펠드의 ''Jew Boy'' 등 유대인 작가들의 소설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숄렘 알레이켐의 이디시어 소설 ''칸토르의 아들 모텔의 모험''의 여러 장은 20세기 초 화이트채플을 배경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친 가난한 동유럽 유대인 가족의 시점에서 묘사된다. 에마누엘 리트비노프의 소설 ''작은 행성을 여행하며''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화이트채플과 그 유대인 거주자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윌리엄 깁슨브루스 스털링의 소설 차이점 엔진에서 러다이트 지도자의 딸이자 매춘부인 시빌 제라드는 주요 등장인물이며, 소설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마이클 무어코크의 소설 ''폐허 속의 아침 식사''의 한 에피소드는 1905년 화이트채플에서 벌어진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난민인 열한 살 소년의 시점에서 묘사되는데, 그는 부모님과 함께 고된 작업장에서 일하며, 러시아 혁명가들과 차르 비밀 경찰 요원들 간의 치명적인 대결에 휘말린다.

모니카 알리의 2003년 소설 ''브릭 레인''은 화이트채플을 배경으로 하며,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런던 타워 햄리츠에서 살아가는 어린 방글라데시 여성의 삶을 기록한다.

화이트채플은 대부분의 잭 더 리퍼 픽션에서 배경으로 사용된다. 이언 싱클레어의 ''White Chappel Scarlet Tracings''(1987)가 그 예이다.[44] 또한 워렌 엘리스가 쓴 SF 웹코믹 ''FreakAngels''의 배경이기도 하다.

화이트채플은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C'est à Hambourg''에서 매춘부들의 고된 삶을 묘사하며 언급된 장소 중 하나이다.

2002년, 화이트채플은 아서 코난 도일의 ''서섹스 뱀파이어의 모험''을 기반으로 한 셜록 홈즈 영화 ''화이트채플 뱀파이어 사건''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화이트채플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리퍼 스트리트''의 배경이다.

7. 저명한 출신 및 거주자


  • 데이먼 알반 - 블러의 리드 싱어이자 가상 록 밴드 고릴라즈의 공동 제작자로 1968년에 태어났다.[46]
  • 줄리어스 스태포드 베이커 - 만화가[47]
  • 에이브러햄 비임 - 뉴욕시 최초의 유대인 시장(1906년 출생, 2001년 사망)
  • 잭 키드 버그 - 권투 선수, "화이트채플 풍차", 1934년 영국 경량급 챔피언
  • 스탠리 블랙 - 악단장(1913년 출생, 2002년 사망)
  • 사이먼 블루멘펠드 - 소설가, 극작가, 칼럼니스트(1907년 출생, 2005년 사망)
  • 조지아 브라운(본명 릴리안 클로트) - 배우 겸 가수(1933년 출생, 1992년 사망)
  • 티나 찰스 - 1970년대 디스코 아티스트(1954년 출생)
  • 피터 체이니 - 미스터리 작가 겸 저널리스트(1896년 출생, 1951년 사망)
  • 잭 코헨 - 테스코 슈퍼마켓 체인을 설립한 앵글로-유대인 사업가(1898년 출생, 1979년 사망)
  • 애슐리 콜 - 첼시잉글랜드 축구 선수(1980년 출생)
  • 잭 "스팟" 코머 - 유대인 갱스터이자 반파시스트(1912년 출생, 1996년 사망)
  • 로저 델가도 - 배우 (닥터 후에서 "마스터" 역으로 유명, 1918년 출생, 1973년 사망)
  • 로이드 도일리 - 축구 선수
  • 버드 플래너건(본명 하임 레우벤 웨인트로프) - 무대,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의 음악 홀 코미디언(1896년 출생, 1968년 사망)
  • 미키 플래너건 - 코미디언
  • 케말 이제트 - 축구 선수
  • 머지 이제트 - 축구 선수
  • 케니 존스 - 드러머
  • 모리스 케스텔만 - 예술가
  • 시드니 카이트 - 악단장(1896년 출생, 1981년 사망)[48]
  • 찰리 리 - 레이턴 오리엔트 축구 선수
  • 에마누엘 리트비노프 - 앵글로-유대인 작가, ''작은 행성을 여행하며''의 저자
  • 새뮤얼 핍스의 어머니 마가렛 핍스 (née 카이트) - 1667년 사망
  • 브렌던 페리 - 음악 그룹 데드 캔 댄스의 창립 멤버
  • 엘라 퍼넬 - 배우
  • 에이브 사퍼스타인 - 하렘 글로브트로터스 농구팀 창립자
  • 배리 실크먼 - 축구 선수(1952년 출생)
  • 사라 테일러 - 크리켓 선수
  • 앨런 틸번 - 영화 및 텔레비전 배우(1918년 출생, 2003년 사망)
  • 안와르 우딘 - 다겐햄 앤 레드브리지의 주장
  • 게리 웹스터 - 배우
  • 알타브 알리 - 1978년 화이트채플 공원에서 살해됨
  • 바니 바르나토 - 다이아몬드 채굴 산업가이자 랜드로드(1851년 출생, 1897년 사망)
  • 리처드 브랜든 - 찰스 1세의 처형자로 알려짐, 화이트채플 교구 교회인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에 묻힘. 교회 기록에는 그가 로즈메리 레인(현대 로열 민트 스트리트)에 살았다고 기록됨.
  • 메리 휴즈 - 자원 봉사 교구 노동자(1860년 출생, 1941년 사망), 처음에는 블랙월 빌딩에 살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밸런스 로드의 개조된 펍으로 이사함.
  • 잭 더 리퍼 - 연쇄 살인범
  • 찰스 라르 - 독일 태생의 무정부주의자, 런던 서적상 겸 출판업자, 직접 행동주의 산업 연합(IUDA) 화이트채플 지부 서기(1885년 출생, 1971년 사망)
  • 잭 런던 - 화이트채플에 머물면서 ''심연의 사람들''을 씀(1902년 이스트 엔드 빈민가 체류 기록)
  • 리처드 파커 - 영국 해군 반역자, 세인트 메리 매트펠론에 묻힘
  • 루돌프 로커 - 아나코 생디칼리즘 작가, 역사가이자 저명한 활동가, 1895년부터 1918년까지 화이트채플에서 활동(1873년 출생, 1958년 사망)
  • 오바디아 셔틀워스 -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겸 교구 교회 오르간 연주자(1734년 사망)
  • 아브롬 스텐클 - 폴란드 태생의 이디시 시인, 프란츠 카프카의 초기 동료, 화이트채플에서 ''Loshn and Lebn'' 출판(1897년 출생, 1983년 사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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