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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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프 메릭은 1862년 잉글랜드 레스터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체 기형을 겪으며 생애 대부분을 고난 속에서 보냈다. 메릭은 어린 시절부터 기형이 시작되어 '엘리펀트 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기이 전시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런던 병원 외과 의사 프레데릭 트리브스와의 만남을 통해 병원에서 생활하며 상류 사회의 관심을 받았지만, 1890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메릭의 정확한 질병은 프로테우스 증후군 또는 신경섬유종증 등 다양한 추측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연극,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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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메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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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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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프 캐리 메릭 |
다른 이름 | 코끼리 인간 존 메릭 |
직업 | 예술가 |
활동 기간 | 1884년–1885년 |
키 | 5 ft 2 in (약 157.5 cm) |
생애 | |
출생 | 날짜: 1862년 8월 5일 장소: 레스터, 잉글랜드 |
사망 | 날짜: 1890년 4월 11일 (향년 27세) 장소: 런던 병원, 화이트채플, 런던, 잉글랜드 |
안장 장소 | 해부학적 표본은 로열 런던 병원에 전시됨. 연조직은 시티 오브 런던 묘지 및 화장터에 매장됨 |
사인 및 질병 | |
사인 | 질식사 |
알려진 원인 | 프로테우스 증후군 의심으로 인한 신체 기형 |
2. 초기 생애와 가족
조지프 캐리 메릭은 1862년 8월 5일 잉글랜드 레스터에서 조지프 록클리 메릭과 메리 제인 포터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조지프라는 이름을, 침례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윌리엄 캐리의 이름을 따서 "캐리"라는 중간 이름을 받았다.
메릭은 5세 무렵부터 피부가 두꺼워지고 덩어리가 생기는 등 외형 변화가 나타났다. 21개월에는 입술 부기, 이마 뼈 덩어리, 피부가 느슨해지고 거칠어지는 증상이 있었다. 성장하면서 양팔 크기가 달라지고, 두 발도 커졌다.
가족은 메릭의 증상이 어머니가 임신 중 유원지 코끼리에게 놀란 탓이라 믿었다. 이는 모성 감각 이론에 근거한 당시의 믿음이었다. 메릭 자신도 평생 이 믿음을 가졌다.
어릴 적 넘어져 왼쪽 엉덩이를 다쳐 감염으로 영구 장애를 입었다. 신체적 어려움에도 학교에 다녔고, 주일학교 교사였던 어머니와 가까웠다.
메릭에게는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1864년생 존 토마스는 천연두로 요절, 1866년생 윌리엄 아서, 1867년생 매리언 엘리자가 있었다. 윌리엄은 1870년 성홍열로, 매리언은 1891년 척수염 등으로 사망했다.[31] 어머니 메리 제인은 1873년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 아버지 조지프 록클리는 엠마 우드 안틸과 재혼했다.
2. 1. 출생과 부모의 배경
1862년 8월 5일, 잉글랜드 레스터에서 조지프 록클리 메릭(Joseph Rockley Merrick, 1838년-1897년)과 메리 제인(Mary Jane, 옛 성은 포터턴 Potterton, 1837년-1873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과 침례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윌리엄 캐리의 이름을 따서 "조지프 캐리"로 명명되었다.아버지 조지프 록클리 메릭은 런던 출신 직조공 바나바스 메릭(Barnabas Merrick, 1791년-1856년)의 아들로, 1820년대 또는 1830년대에 레스터로 이주했다. 어머니 메리 제인은 이빙턴 출신으로, 1851년 레스터셔 서머스턴 인구 조사에서 농업 노동자로 묘사된 윌리엄 포터턴의 딸이었다.[2] 그녀는 젊은 시절 레스터에서 가정부로 일했으며,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1861년 당시 창고 관리인이었던 조지프 록클리 메릭과 결혼했다.
2. 2. 가정 환경
메릭의 가족은 레스터 시내의 리 스트리트(Lee Street)라는 빈민가에 살았다. 이 지역은 좁은 골목길에 작은 집들이 밀집해 있었고,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주변은 오수와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30] 또한 근처의 소아 강과 운하가 범람하면 자주 침수되곤 했다.[30]메릭의 아버지 조지프 록클리는 방적공으로 일하다가 더 높은 급여를 받는 창고 작업원으로 직업을 바꾸었고, 메릭은 그 시기에 태어났다. 메릭에게는 두 명의 동생과 한 명의 형이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존 토마스(John Thomas) | 1864년 4월 21일 | 1864년 7월 24일 | 천연두로 요절 |
윌리엄 아서(William Arthur) | 1866년 1월 | ||
매리언 엘리자(Marion Eliza) | 1867년 9월 28일 | 신체 장애가 있었음[31] |
조지프 록클리는 윌리엄 아서가 태어나기 직전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사했고, 방적 공장의 보일러 담당으로 직업을 바꿨다. 매리언 엘리자가 태어난 후에는 방적 공장의 기관사가 되었다. 1870년경부터는 집에서 의류 가게를 운영했고, 1880년까지 지역 상공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 3. 변화하는 가족
1870년, 동생 윌리엄 아서가 성홍열로 사망했고, 1873년에는 어머니 메리 제인이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메리 제인은 슬픔에 잠겨 서명 대신 X표를 간신히 남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32] 아버지 조지프 록클리는 이후 엠마 우드 안틸과 재혼했다.3. 고난의 시절
메릭은 레스터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삼촌인 찰스 메릭은 조카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를 찾아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했다. 메릭은 이후 2년간 레스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계속했지만,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결국 그의 기형은 대중의 좋지 않은 관심을 너무 많이 끌었고, 마차 위원회는 그의 행상 면허를 갱신해주지 않았다. 어린 자녀들을 부양해야 했던 삼촌 찰스는 더 이상 조카를 경제적으로 도울 여력이 없었다. 1879년 12월 말, 17세의 메릭은 결국 레스터 연합 구빈원에 들어갔다.
구빈원에 있던 1,180명의 거주자 중 한 명이었던 메릭은 거주 구역과 배급받는 음식의 양을 결정하는 분류를 받았다. 그는 신체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1계급으로 분류되었다. 1880년 3월 22일, 구빈원에 들어간 지 불과 12주 만에 메릭은 자진 퇴원하여 이틀간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구빈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4년간 구빈원에서 생활했다.
3. 1. 병변의 출현
메릭은 출생 당시에는 건강했으나, 생후 21개월경부터 입술에 부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마에 뼈 덩어리가 생기고 피부가 느슨해지고 거칠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성장하면서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의 크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양쪽 발도 상당히 커졌다.어린 시절에는 넘어져서 왼쪽 엉덩이를 다쳤는데, 이 부위가 감염되어 영구적인 장애를 입었다. 그의 가족들은 메릭의 증상이 어머니 메리 제인이 임신 중에 유원지 코끼리에게 부딪혀 겁을 먹은 결과라고 설명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임신한 여성의 정서적 경험이 태아에게 신체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모성 감각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고, 메릭 자신도 평생 동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882년경, 메릭은 얼굴에 수술을 받았다. 그의 입에서 돌출된 부분은 20~22센티미터까지 자라 말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수술은 구빈원 진료소에서 클레멘트 프레데릭 브라이언 박사의 지시하에 수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질량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
3. 2. 어린 시절의 고투
메릭은 당시 흔했던 13세에 학교를 자퇴했다. 그의 가정생활은 이제 "완전한 비참함"이었고, 아버지와 계모는 그에게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두세 번" 집을 나갔지만, 매번 아버지에 의해 다시 데려와졌다. 13세에 그는 공장에서 담배를 마는 일을 구했지만, 3년 후 그의 오른손 기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그 일에 필요한 손재주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실업자가 된 그는 거리를 방황하며 일자리를 찾고 계모의 비웃음을 피하며 시간을 보냈다.메릭이 가족에게 더 큰 재정적 부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행상 면허를 얻어 주어 잡화점에서 물건을 떼어 집집마다 판매하여 돈을 벌 수 있도록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는데, 메릭의 얼굴 기형으로 그의 말이 점점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고, 잠재적인 고객들은 그의 외모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했고, 그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그를 따라다녔다. 메릭은 행상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했다. 1877년 어느 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고 결국 집을 영원히 떠났다.

메릭은 이제 레스터 거리에서 노숙자가 되었다. 그의 삼촌이자 이발사인 찰스 메릭은 조카의 상황을 듣고 그를 찾아 자신의 집에서 숙소를 제공했다. 메릭은 그 후 2년 동안 레스터 주변에서 계속 행상을 했지만, 생계를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전보다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의 기형은 대중의 부정적인 관심을 너무 많이 끌어, 마차 위원회가 갱신될 때 그의 면허를 철회했다.
3. 3. 구빈원 생활
메릭은 17세 때인 1879년 12월 말, 레스터 연합 구빈원에 들어갔다. 구빈원은 1,180명의 거주자들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메릭은 신체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1계급으로 분류되었다.1838년에 설립된 레스터 연합 구빈원은 처음에는 400명의 빈민을 수용할 계획이었으나, 1851년 메리야스 관련 업계 불황으로 실업자와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메릭이 입소했을 당시에는 노인, 과부, 고아, 알코올 의존증 환자, 신체 및 지적 장애인, 실업자와 그 가족 등 928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연령, 성별, 건강 상태 등에 따라 그룹별로 나뉘어 생활했으며, 부부조차도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다.
구빈원 생활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이루어졌다. 수용자들은 종소리에 맞춰 기상하고 취침했으며, 남성에게는 폐재나 석재 가공, 농작업, 장작 패기 등의 일이, 여성에게는 세탁, 청소, 재봉 등의 일이 주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식사가 매우 조악했고, 술과 담배는 금지되었으며, 면회와 외출은 허가제로 제한되었다. 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식사 제한이나 감금 등의 벌칙이 주어졌고, 심한 경우에는 형무소에 보내지기도 했다. 위생 환경 또한 열악하여 결막염이 자주 발생했다.
메릭은 이러한 생활 환경을 견디기 힘들어했으며, 1880년 3월, 구빈원에 들어간 지 12주 만에 자진 퇴원하여 이틀 동안 일자리를 찾아다녔으나 실패하고 다시 구빈원으로 돌아갔다.
1882년경, 메릭은 구빈원 진료소에서 입에서 20~22센티미터까지 자란 돌출된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로 인해 그의 말하기와 음식 섭취가 다소 개선되었다.
4. 인간 구경거리 (Freak Show)
메릭은 구빈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인간 기이 전시회를 선택했다.[5] 그는 레스터 음악당 코미디언이자 사업가인 샘 토르에게 편지를 썼고, 토르는 메릭을 전시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84년 8월 3일, 메릭은 구빈원을 떠나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쇼맨들은 메릭을 코끼리 인간이라 이름 붙이고, "절반은 인간, 절반은 코끼리"라고 광고하며, 이스트 미들랜즈 지역을 순회하며 전시했다. 겨울 시즌에는 런던으로 이동하여, 런던 이스트 엔드의 페니 개프 가게를 운영하는 톰 노먼이 메릭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노먼은 화이트채플 로드의 가게에서 메릭을 전시했고, '조셉 캐리 메릭의 자서전'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판매했다.
코끼리 인간 전시회는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메릭은 자신의 몫을 저축할 수 있었다. 런던 병원의 의대생과 의사들도 메릭을 방문했는데, 그 중 수습 의사 레지널드 터켓이 프레데릭 트리브스 경에게 메릭을 소개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분위기가 변화하면서 인간 기이 전시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줄어들었고, 경찰은 노먼의 가게를 폐쇄했다. 1885년, 메릭은 샘 로퍼의 이동 박람회와 함께 길을 떠났고, "로퍼의 난쟁이"로 알려진 버트럼 둘리, 해리 브램리와 친구가 되었다.
4. 1. '엘리펀트 맨'의 탄생
1884년 메릭은 레스터의 음악당 코미디언 샘 토르의 제안을 받고 '인간 구경거리'에 참여하게 되었다.[5] 토르는 구빈원에 있던 메릭을 방문하여 그를 전시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84년 8월 3일, 메릭은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기 위해 구빈원을 떠났다.쇼맨들은 메릭을 코끼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고, "절반은 인간, 절반은 코끼리"라고 광고했다. 토르와 다른 사업가들은 메릭을 '반인반상 (Half a man & Half an Elephant)'으로 홍보하며 전시했다.[38]
4. 2. 의사 프레데릭 트리브스와의 만남
1884년 11월, 런던 이스트엔드의 화이트채플 로드에서 구경거리 가게를 운영하던 톰 노먼은 '코끼리 인간'이라 불리는 조지프 메릭을 전시했다. 이 가게는 런던 병원 바로 맞은편에 있었는데, 이곳의 외과 의사였던 프레데릭 트리브스는 메릭의 존재를 알게 되어 직접 진찰하게 되었다.
트리브스는 메릭을 처음 본 후 "내가 본 가장 혐오스러운 인간 표본"이며, "인간의 이러한 타락하거나 왜곡된 모습을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머리 둘레가 약 91.44cm, 오른쪽 손목 둘레가 약 30.48cm, 손가락 중 하나가 약 12.70cm임을 측정했다. 메릭의 피부는 유두종으로 덮여 있었고, 피하 조직이 약해져 피부가 늘어져 있었다.
트리브스는 1884년 12월 2일 런던 병리학회에 메릭을 발표했다. 이후 메릭은 노먼에게 더 이상 병원 검사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옷을 벗겨진 채 소 시장의 동물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4. 3. 유랑의 세월
영국 내에서 '인간 구경거리'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지면서, 1885년 메릭은 샘 로퍼의 이동 박람회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로퍼의 난쟁이"로 알려진 버트럼 둘리, 해리 브램리와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때때로 메릭을 대중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했다.경찰과 치안 판사는 쇼를 폐쇄하는 데 점점 더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메릭은 여전히 관객들에게 끔찍한 구경거리였지만, 로퍼는 지역 당국으로부터 부정적인 관심을 받는 것에 불안해했다. 결국 메릭의 매니저 그룹은 유럽 대륙으로 순회하는 것이 당국이 더 관대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결정했고, 메릭은 대륙으로 떠났다.
메릭은 유럽 대륙에서도 성공하지 못했고, 당국은 그를 관할 구역에서 내쫓기 위해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브뤼셀에서 메릭은 새로운 매니저에게 버려졌고, 그는 메릭의 저축액 50파운드(약 50GBP)를 훔쳐 달아났다. 버려지고 빈털터리가 된 메릭은 기차를 타고 오스텐데로 갔고, 거기서 도버행 페리에 탑승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앤트워프로 가서 에섹스 주의 하리치로 가는 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가서 리버풀 스트리트 역에 도착했다.
메릭은 1886년 6월 24일 런던에 도착했고,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런던의 구빈원에 하룻밤 이상 들어갈 자격이 없었고, 그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레스터 연합 구빈원이었지만, 레스터는 약 157.72km 떨어져 있었다.
그는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외모는 혐오스러웠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자, 메릭은 한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빈 대기실로 들어가 구석에 웅크리고 지쳐 있었다.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지 못했고, 그가 가진 유일한 신분 증명서는 트리브스의 명함이었다.
경찰은 트리브스에게 연락했고, 그는 기차역으로 가서 메릭을 알아보고 한솜 택시를 타고 런던 병원으로 데려갔다. 메릭은 기관지염으로 입원하여 씻겨지고, 음식을 먹고 병원 다락방에 있는 작은 격리실 침대에 눕혀졌다.
5. 런던 병원에서의 생활
프레더릭 트리스는 매일 메릭을 방문하여 진찰하고, 매주 일요일에는 몇 시간씩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트리스는 메릭의 말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고, 둘은 긴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메릭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전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고, 트리스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메릭은 병원 생활에 적응하면서 책을 읽고 카드 모형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트리스와 그의 동료 의사들의 방문을 받았고, 매일 오후에는 작은 안뜰을 산책했다.
트리스는 메릭이 여성과의 교류를 통해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돕고 싶어 했다. 그는 친구인 레일라 매튜린 부인에게 부탁하여 메릭을 방문하게 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메릭은 매튜린 부인이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악수를 해준 최초의 여성이라며 감격했다. 이 만남은 메릭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이후 다른 여성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메릭은 "진짜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트리스에게 다양한 질문을 했다. 그는 평범한 집을 방문하고 싶어 했고, 트리스는 자신의 윔폴 스트리트 집으로 메릭을 초대하여 아내를 만나게 해주었다.
5. 1. 안식처
메릭이 런던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의 신체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기형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 런던 병원 이사장 프랜시스 카 고무는 메릭을 입원시키기로 한 트리스의 결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런던 병원은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돌볼 장비나 인력이 없었다.
카 고무는 다른 기관과 병원에 연락했지만, 메릭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카 고무는 1886년 12월 4일 ''더 타임스''에 편지를 써서 메릭의 사례를 설명하고 독자들에게 제안을 요청했다. 이 편지는 ''영국 의학 저널''에도 다루어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기부자들의 재정적 지원 덕분에, 고무는 메릭을 병원에 계속 둘 수 있도록 위원회를 설득했고, 메릭은 남은 생애 동안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작은 안뜰에 인접한 두 개의 방을 사용할 수 있는 지하실로 이사했다. 방은 메릭에게 맞춰 개조 및 가구가 배치되었으며, 특별히 제작된 침대와 트리스의 지시에 따라 거울은 없었다.
1886년 12월 4일, 런던 병원 이사장 프랜시스 카 고므는 타임스에 메릭의 취업 불가능, 경제적 자립 불가능, 일반 환자와 함께 요양 불가, 왕립 혜민원과 국립 양호 홈 수용 거부, 구빈원 기피 등의 사정을 설명하며 개인실 설치와 생활 기금 기부를 요청했다. 12월 11일,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도 카 고므의 투고를 보도했고, 다른 일반지, 지방지도 이에 따랐다. 이 보도로 방대한 양의 편지와 거액의 기부금이 답지했고, 연금 지급을 제안하는 독지가도 나타났다.[43] 한편으로는 맹인 병원, 등대, 감옥 등으로 보내라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44] 이러한 사회 반응을 바탕으로 이사회는 메릭의 수용 연장을 결정했다. 런던 병원 부속 주임 기술자 윌리엄 테일러 주도로, "베드스테드 스퀘어"Bedstead Square|베드스테드 스퀘어|설명=런던 병원에서 사용되던 침대 뼈대의 수리, 점검이 이루어지던 곳.영어에 면한 크고 작은 두 개의 지하실이 메릭의 거주지로 개조되었다. 큰 방은 거실 겸 침실로 침대, 테이블, 의자, 작은 벽난로가 갖춰졌고, 작은 방은 욕실이 되었다. 트리스의 방침에 따라 어느 방에도 거울은 설치되지 않았다.[45]
5. 2. 열려가는 마음
메릭은 처음에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고 짜증을 내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간호사가 내미는 손길조차 무서워했으며, 만약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면 맹인 수용 시설이나 등대로 보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46] 그러나, 트레브스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의 변형된 입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말에 익숙해지고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메릭의 태도도 점차 온화해졌다.트레브스는 매일 최소 한 번 메릭의 방을 방문했고, 일요일에는 오전 시간을 메릭과 함께 보냈다. 메릭은 점차 트레브스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자신의 과거, 특히 아버지와 형제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에 관해서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어머니에게서 왜 자신과 같은 인간이 태어났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구경거리로 나섰던 시절에 대해서도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흥행사에 대해서는 결코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빈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48]
어린 시절부터 병으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메릭은, 독서로 고독을 달랬다. 그는 각종 신문, 잡지, 순수 문학, 대중 소설, 성경, 기도문 등을 읽었으며, 버려진 것을 줍는 등 우연히 입수한 것이었기에 지식은 잡다하고 편향되었지만, 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갔다.[49] 제인 오스틴의 엠마에 묘사된 것과 같은 평범한 집을 방문하여 독서가인 메릭을 납득시키기도 했다.[50]
트레브스의 주선으로, 그의 지인인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Mrs.Lelia Maturin과의 면회를 경험한 후, 메릭은 점차 타인과의 교류를 원하게 되었다. 면회는 매우 짧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방에 들어온 Maturin에게 메릭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놓자 울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후에 메릭은 여성에게 웃음을 받거나 악수를 청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51] Maturin과의 친교는 그 후에도 이어졌고, 그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메릭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은 오늘날 현존하는 유일한 메릭이 쓴 편지이다.

5. 3. 의사들이 본 메릭
프레더릭 트리스는 메릭을 면밀히 검사하면서 그의 신체 상태가 악화되었고, 기형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메릭에게 심장 질환이 있을 수 있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메릭의 전반적인 건강은 병원 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개선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외모에 당황했던 일부 간호사들도 이를 극복하고 그를 돌보았다.메릭의 불쾌한 냄새는 잦은 목욕으로 완화되었고, 트리스는 점차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진이 촬영되었다. 트리스는 처음에 메릭이 지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리스는 메릭이 매우 민감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는 것을 관찰했다. 메릭은 때때로 지루함과 외로움을 느꼈고, 우울증의 징후를 보였다.
트리스는 자신의 후배 수련의들에게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메릭을 문병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랐던 수련의 중 한 명인 윌프레드 그렌펠은 자서전 "래브라도의 한 의사"에서 메릭이 자신의 용모를 신경질적으로 신경 썼던 점과 정상이었던 왼손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점을 기록했다. 레지날드 타켓도 메릭이 왼손에 대해 느꼈던 자부심과 아름다운 것과 훌륭한 의복을 좋아하는 그의 기호를 이야기했다. D.G. 할스테드는 회상록에 그의 얼굴은 코끼리보다는 맥을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맥 남자"는 구경거리 선전 문구로는 부적절했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관찰했고, 메릭을 찾아간 후 다른 담당 구역으로 돌아갈 때는 안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고백했다.
5. 4. 상류 사회의 관심
카 고무가 ''더 타임스''에 편지를 쓴 결과, 메릭의 사례는 런던 상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배우 매지 켄달이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메릭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메릭을 위한 기금 모금과 대중의 공감을 얻는 데 기여했다. 켄달은 메릭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냈고, 바구니 짜는 사람을 보내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다른 상류층 사람들도 그를 방문하여 사진과 책을 선물했다. 메릭은 편지와 카드 모형, 바구니를 만들어 선물로 답했다. 그는 이러한 방문을 즐겼고,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얻었다.1887년 5월, 에드워드 7세와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가 런던 병원 부속 의과 대학 신관 및 간호사 기숙사 낙성식에 참석했을 때 메릭의 방을 방문했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메릭과 악수하고 함께 앉았는데, 그는 이 경험에 매우 기뻐했다. 왕비는 메릭에게 서명한 자신의 사진을 주었고, 메릭은 이를 소중하게 간직했으며, 왕비는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5. 5. 갑작스러운 죽음
메릭의 상태는 런던 병원에서 4년 동안 점차 악화되었다. 그는 간호사들의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했고, 침대나 자신의 거처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에너지가 줄어들었다. 그의 얼굴 기형은 계속 커졌고, 머리는 더 커졌다. 1890년 4월 11일, 잠을 자다가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후 3시경에 트레브스의 주치의가 메릭을 방문했고, 그는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삼촌 찰스 메릭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4월 27일, 화이트채플 살인사건 (1888)에 대한 검시를 수행하여 악명을 얻은 윈 에드윈 벡스터가 검시를 진행했다.메릭의 죽음은 사고사로 판결되었고, 사망 원인은 그가 누웠을 때 머리의 무게로 인한 질식사로 확인되었다. 부검 후 트레브스는 메릭이 목이 탈구되어 척추 동맥이 절단되어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메릭이 항상 똑바로 앉아서 잠을 잤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트레브스는 메릭이 "다른 사람들처럼" 누워서 잠을 자려고 "실험을 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사후 즉시 검시관 윈 박스터에 의해 검시 배심이 열렸고, 메릭의 삼촌 찰스 버나버스가 형식적인 유해 확인을 했다. 생전의 메릭을 마지막으로 본 아일랜드와 죽어있는 그를 처음 본 호지스가 각각 증언했고, 그들에 근거하여 사인은 경추 탈구 또는 질식에 의한 자연사로 판단되었다.[56]
일설에는 천장을 보고 누우려 시도했을 때의 사고, 또한 자살설도 거론되었다. 디스커버리 채널이 2011년에 제작한 『되살아나는 엘리펀트 맨』에서는 그의 골격 표본을 자세히 검사한 결과, 경추의 손상 상태로 보아 그 특유의 취침 방법[58] 을 취하려 했을 때 경추가 탈구되어 절명했고, 결과적으로 거대한 머리의 무게로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로 발견된 사고로 결론짓고, 자살설을 부정하고 있다.
메릭은 매장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뼈와 연조직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신체 부위가 연구를 위해 보존되었다. 트레브스는 시체를 해부하고 메릭의 머리와 사지의 석고 모형을 만들었다. 그는 피부 샘플을 채취하고 골격을 조립했다. 피부 샘플은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분실되었지만 골격은 화이트채플의 로열 런던 병원 병리학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으며, 1995년 세인트 바돌로뮤 병원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런던 퀸 메리 대학교의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을 설립했다.[6] 메릭의 조립된 골격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7][8]
그의 유해는 대학의 개인실에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으며, 의과대학 학생들과 전문가들이 "[조지프 메릭의 상태로 인한 신체 기형을 보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약속을 통해 볼 수 있다. 대학은 그의 골격을 의과대학에 보관할 예정이지만, 일부에서는 메릭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그의 고향인 레스터에서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9][10][11]
2019년 5월 5일, 작가 조 비고르-뭉고빈은 메릭의 연조직이 런던 시립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2]
그가 사용한 모자나 본인이 조립한 건물의 모형 등, 몇몇 유품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6. 의학적 소견
조지프 메릭의 정확한 병명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메릭은 1890년 4월 11일,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머리 무게로 인한 질식사로 판명되었지만, 부검 결과 척추 동맥이 절단된 것이 확인되었다. 프레데릭 트레브스는 메릭이 "다른 사람들처럼" 누워서 자려고 시도하다가 이러한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메릭은 사망 후 매장되지 않고, 그의 뼈와 연조직은 연구를 위해 보존되었다. 트레브스는 시신을 해부하고 석고 모형을 만들었으며, 피부 샘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분실되었지만 골격은 로열 런던 병원 병리학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 조립된 골격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지만, 의과대학 학생들과 전문가들은 약속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7][8] 일부에서는 메릭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9][10][11] 2019년 5월 5일, 메릭의 연조직이 런던 시립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2]
6. 1. 불확실한 진단
메릭이 화이트채플 로드에서 기형 쇼의 전시물로 활동한 이후, 그의 상태는 의료 전문가들에게 지속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13] 1884년 런던 병리학회 회의에서 그의 모습은 의사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영국 의학 저널''에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 ''랜싯''에는 언급되지 않았다.4개월 후인 1885년, 프레데릭 트레브스는 두 번째로 회의를 열었고, 피부 질환 권위자인 헨리 래드클리프 크로커는 메릭의 상태가 피부비대증과 명명되지 않은 뼈 기형의 조합일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신경계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1909년, 피부과 의사 프레데릭 파크스 웨버는 ''영국 피부과학 저널''에 기사를 썼는데, 메릭을 폰 레클링하우젠병 (신경섬유종증)의 예로 잘못 인용했다. 이 유전 질환에서 항상 나타나는 증상에는 신경 조직과 뼈의 종양, 피부에 작은 사마귀 모양의 성장, 그리고 카페오레 반점이라고 하는 피부의 옅은 갈색 색소 침착이 포함되는데, 이는 폰 레클링하우젠병 진단에 특히 중요하지만, 메릭의 몸에서는 관찰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20세기 대부분 동안 이 진단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마푸치 증후군 및 다발성 섬유 이형성증 (올브라이트병)과 같은 다른 추측성 진단이 제시되었다.
1986년 ''영국 의학 저널''에 실린 기사에서, 마이클 코헨과 J. A. R. 티블스는 메릭이 1979년 코헨이 확인한 매우 희귀한 선천성 질환인 프로테우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들은 메릭에게 보고된 카페오레 반점이 없고, 이전에 추측된 증후군을 앓았다는 조직학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용했다. 코헨과 티블스는 메릭이 프로테우스 증후군의 다음과 같은 징후를 보였다고 말했다. "거대뇌증; 큰 두개골의 과골증; 긴 뼈의 비대; 그리고 특히 손과 발의 두꺼워진 피부와 피하 조직, 여기에는 족저 과형성, 지방종, 그리고 기타 명시되지 않은 피하 덩어리가 포함된다."
2001년 6월 ''더 바이올로지스트''에 보낸 서한에서, 영국의 교사이자 생물학자인 폴 스피링[14]은 메릭이 프로테우스 증후군과 신경섬유종증의 조합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이 가설은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특파원인 로버트 매튜스에 의해 보도되었다.
2002년, BBC는 메릭의 모계 가계를 추적하기 위한 호소를 했다. 연구팀은 메릭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DNA 샘플을 채취했지만, 이 검사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2003년, 영화 제작자들은 메릭의 머리카락과 뼈에서 얻은 DNA를 사용하여 추가 진단 검사를 의뢰했지만, 이 검사 결과 역시 결정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메릭의 건강 상태의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불확실하다.[15]
6. 2. 프로테우스 증후군과 신경섬유종증
메릭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관심은 1884년 런던 병리학회에서 처음 나타났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85년, 프레데릭 트레브스는 메릭의 사진을 통해 다시 한번 학회에 그의 사례를 제시했고, 피부 질환 권위자인 헨리 래드클리프 크로커는 메릭의 상태가 피부비대증과 뼈 기형의 조합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1909년, 프레데릭 파크스 웨버는 메릭이 폰 레클링하우젠이 설명한 폰 레클링하우젠병(신경섬유종증)을 앓고 있다고 잘못 주장했지만, 카페오레 반점과 같은 신경섬유종증의 주요 증상이 메릭에게 나타나지 않아 이는 오류로 밝혀졌다.
1986년, 마이클 코헨과 J. A. R. 티블스는 메릭이 프로테우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는데, 이는 신경 외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산발적 질환이며, 메릭에게서 거대뇌증, 과골증, 긴 뼈의 비대, 두꺼워진 피부와 피하 조직 등의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2001년, 폴 스피링은 메릭이 프로테우스 증후군과 신경섬유종증을 함께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했고,[14]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끼리 인간의 저주''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진행된 DNA 검사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아, 메릭의 정확한 병명은 여전히 불확실하다.[15]
메릭의 질환은 골격 변형과 피부 이상 증식을 동반했다. 피부는 유두상 종양을 보였고, 특히 머리와 몸통에서 피하 조직 증대로 인해 늘어져 있었다. 오른쪽 팔과 양쪽 다리는 심하게 변형되었지만, 왼쪽 팔과 성기는 건강했다.[13] 윗입술의 코끼리 코 모양 피부 조직은 대화와 식사를 어렵게 했지만, 지능은 정상이었고 읽고 쓰기에 능숙했다. 또한 어린 시절 넘어져 허리를 다치고 척추가 굽어 지팡이를 사용했다. 원인에 대해서는 신경섬유종증 1형 혹은 프로테우스 증후군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7. 대중문화
조지프 메릭의 삶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뤄졌다. 그의 삶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79년 연극 ''코끼리 인간''과 1980년 영화 ''코끼리 인간''이 있다.
프레더릭 트리브스는 1923년에 ''코끼리 인간과 기타 회상록(The Elephant Man and Other Reminiscences)''을 출판하여 메릭과의 만남과 그의 삶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메릭의 이름을 존 메릭(John Merrick)으로 잘못 표기하는 등 몇 가지 부정확한 내용이 있었다. 이후 애슐리 몬태규의 ''코끼리 인간: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구(The Elephant Man: A Study in Human Dignity)''(1971), 마이클 하웰과 피터 포드의 ''코끼리 인간의 진실된 역사''(The True History of the Elephant Man)''(1980) 등을 통해 메릭의 삶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가 밝혀졌다.
메릭의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연극,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버나드 포머란스의 연극 ''코끼리 인간''은 토니상을 수상했고,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코끼리 인간''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7. 1. 조지프 메릭을 다룬 작품
1979년 희곡 디 엘리펀트 맨과 1980년 영화 디 엘리펀트 맨을 비롯하여 조지프 메릭의 삶을 다룬 여러 작품들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메릭의 삶은 연극, 영화, 오페라, 드라마, 다큐멘터리, 소설,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재탄생되었다. 특히 1979년부터 1980년 사이에 그의 생애가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 2010년 12월 5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 Ripper Street|리퍼 스트리트영어 - 영국 BBC 드라마. 2013년 방영된 시즌 2의 에피소드 1~2에 메릭과 트레베스 박사가 등장한다.
- 되살아나는 엘리펀트 맨 - 2011년 디스커버리 채널 제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조지프의 골격 표본을 바탕으로 최신 3D 기술로 보행 방법, 육성, 사인 등을 추구한다.
- 1888년 잭 더 리퍼 (핫토리 마유미, 카도카와 쇼텐, 2002년 3월) ISBN 9784041785058 - 이야기 속에서 잭 더 리퍼의 협력자로 추리된다.
- 헬 프롬 - 1999년에 출간된 앨런 무어 작, Eddie Campbell영어 그림의 그래픽 노블.
7. 1. 1. 영화
1980년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한 영화 디 엘리펀트 맨은 8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존 허트가 메릭 역을, 앤서니 홉킨스가 프레데릭 트리브스 역을 맡았다.[18]7. 1. 2. 연극
1979년 버나드 포머란스의 토니상 수상작 연극 엘리펀트 맨이 상연되었다. 메릭을 모델로 한 캐릭터는 처음에는 데이비드 스코필드가 연기했고,[18][19] 이후 필립 앤글림, 데이비드 보위, 브루스 데이비슨, 마크 해밀, 브래들리 쿠퍼 등 다양한 배우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7. 1. 3. 오페라
로랑 프티지라르가 작곡하고 에릭 넌이 대본을 쓴 오페라 Joseph Merrick dit Elephant Man프랑스어는 2002년 2월 7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27] 콘트랄토 야나 시코로바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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