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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 (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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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량은 오대 십국 시대에 주전충이 건국한 왕조이다. 주전충은 당나라 말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907년 당나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대량(大梁)을 건국하고 연호를 개평으로 정했다. 후량은 중원의 5개 왕조 중 영토가 가장 작았으며, 주전충은 이극용 등 지방 군벌과의 전투를 지속했다. 912년 주전충 사후 그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고, 923년 후당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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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 (오대)
지도
후량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양 (梁)
일반 명칭후량 (後梁)
시대오대십국시대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 시작907년 6월 1일
존속 기간 끝923년 11월 19일
건국 사건건국
멸망 사건개봉 항복
이전 국가당나라
다음 국가후당
다음 국가 2
다음 국가 3
수도뤄양(907년–913년), 카이펑(913년–923년)
공용어중국어
역대 황제
초대 황제태조 (907년–912년)
제2대 황제주우규 (912년–913년)
제3대 황제말제 (913년–923년)
황제 칭호황제
기타 정보
현재 국가중국

2. 역사

주전충이극용과 격렬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8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주를 반년간 포위했으나, 다음 해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진왕이 되어 반격하자 포위를 풀었다.[2]

이듬해 주전충은 이존욱을 공격하기 위해 약 5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이존욱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한다는 소식에 놀라 군을 후퇴시켰다.[2]

910년, 후량 공신들의 반란을 진왕 이존욱이 구원하면서 911년 초 백향(柏鄕, 지금의 하북성 형대시 백향현 서남)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후량은 대패했고, 진군은 150여 나 추격했다. 주전충은 낙양에 방어진을 구축했고, 후량은 주력군에 큰 피해를 입어 쇠퇴하였다.[2]

912년, 주전충은 병석에서 양자 주우문을 후계자로 삼으려다 친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했다. 주우규는 동생 주우정에게 살해당하고 제위를 빼앗겼다.[3]

915년 봄, 후량군은 이존욱의 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태행산 황택령(黃澤嶺, 지금의 산서성 진중시 좌권현 동남쪽 고개)·덕주·전주에서 연패했다. 이듬해 봄, 왕단(王檀)이 3만 명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918년 8월 이존욱의 남하에 맞서 싸운 호류파(胡柳陂,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 복양현 동남쪽 언덕) 전투에서 진군 명장 주덕위가 전사했다. 이사소·왕건급이 이끄는 진나라 기병대가 후량 보병대를 격파해 후량은 대패, 3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진군도 큰 피해를 입어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921년 진주(鎭州)를 포위한 진군을 후량군이 격파하여 진군은 약 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3]

923년,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당'''(후당)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 4월 말, 이사원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대가 후량 운주를 기습했다. 왕언장이 이끄는 10만 명의 후량 정예군은 이존욱이 이끄는 후당군에 격파당했다. 왕언장은 중도현(中都縣,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 문상현)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후량 수도 개봉부를 함락시키자, 후량은 멸망했고 주우정은 자결했다. 후량은 3대 16년 만에 멸망했다.[4]

2. 1. 건국 배경

주온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당나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선무군(宣武軍) 절도사가 되어 선무군의 군부 변주를 다스렸고, 선무군은 당나라 말기 최대의 번진(藩鎭)이 되어 왕에 봉해졌다. 904년 4월, 장안에 있던 소종을 낙양으로 데려와 8월에 살해하고 13세 된 이축(즉위 전 원래 이름은 이조(李祚))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애제이다.

907년 6월 1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였다. 국호는 '''대량'''(大梁), 연호개평이라 하였다.[1] 후량의 영토는 중원의 5개 왕조 중 가장 작아 지금의 하남성·산동성 전역과 섬서성·호북성의 대부분 지역, 하북성·영하성·산서성·강소성·안휘성 등지의 각 일부 지역들에 걸쳐 있었다.[1]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이극용 등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벌(절도사)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찾아왔다.[2]

2. 2. 후량 건국

주온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당나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선무군(宣武軍) 절도사가 되어 선무군 군부 변주를 다스렸고, 선무군은 당나라 말기 최대의 번진(藩鎭)이 되어 왕에 봉해졌다. 904년 4월, 장안에 있던 소종을 낙양으로 데려와 8월에 살해하고 13세 된 이축(즉위 전 원래 이름은 이조(李祚))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애제이다.

907년 6월 1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였다. 국호는 '''대량'''(大梁), 연호개평이라 하였다. 후량의 영토는 중원의 5개 왕조 중 가장 작아 지금의 하남성·산동성 전역과 섬서성·호북성의 대부분 지역, 하북성·영하성·산서성·강소성·안휘성 등지의 각 일부 지역들에 걸쳐 있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이극용 등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벌(절도사)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찾아왔다.

2. 3. 후량의 통치와 멸망

주온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907년 당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대량'''(大梁), 연호개평이라 하여 후량을 건국하였다. 후량의 영토는 중원의 5개 왕조 중 가장 작았으며, 하남성, 산동성 전역과 섬서성, 호북성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하북성, 영하성, 산서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의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후량 건국 당시, 이극용 등 지방 군벌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하여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량은 건국 후에도 이극용과 격렬한 전투를 계속 벌였으며, 910년에는 후량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왕 이존욱이 이를 구원하면서 911년 백향(柏鄕)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후량은 크게 패하고 주력군에 큰 피해를 입어 세력이 쇠퇴하였다.

912년, 태조 주전충은 양자 주우문을 후계자로 세우려다 친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했다. 주우규는 동생 주우정에게 살해당하고 제위를 빼앗겼다.

915년부터 후량군은 이존욱의 진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연패하였다. 918년 호류파(胡柳陂) 전투에서는 진군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921년 진주(鎭州) 전투에서 후량군이 승리하기도 했다.

923년,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당'''(唐)으로 바꾸면서(후당) 후량은 위기에 몰렸다. 같은 해 이사원이 이끄는 기병대가 후량의 운주를 기습했고, 왕언장이 이끄는 후량군이 후당군에 격파당했다. 결국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후량의 수도 개봉부를 함락시키면서 후량은 멸망했고, 주우정은 자결하였다. 이로써 후량은 3대 16년의 짧은 통치를 마쳤다.

3. 정치

주전충황소의 난에 가담했으나, 황소군이 백성들의 지지를 잃자 에 투항하여 황소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선무절도사가 되어 각지의 군벌과 싸우면서 당의 지배 영역을 넓혔다. 그의 군대는 군기가 엄격하고 정예였으며, 농민들에게 무리한 수탈을 하지 않고 황무지를 개척했고, 당나라에서 불우했던 하급 관료들을 등용했다.

주전충장안에서 낙양으로 의 수도를 옮기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뒤 건물들을 해체하여 옮기고 완전히 파괴했다. 비주를 동도, 낙양을 서도로 삼았다가, 이후 비주(비경)를 개봉으로 개칭하고 개봉부 동도를 국의 수도로 삼았다.

건국 후의 후량군은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의 "진국"(후의 '''후당''')과 전쟁을 벌여 패배했고, 이후는 기세를 잃고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또한 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912년, 주전충은 양자인 박왕 주우문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지만, 친자인 영왕 주우규에게 살해되었다. 주우규는 즉위 과정 때문에 인망을 얻지 못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동생인 균왕 주우정에게 살해되어 황위를 빼앗겼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혼란은 국가의 약화와 불안정을 초래하여, 결국 후량은 진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주우정이존욱의 "진국"과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후량의 황제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후량은 3대 16년 만에 멸망했다.

후량은 후세 왕조들에게 정당한 왕조로 인정받지 못했고, 현대 중국에서도 주전충은 농민 반란군의 배신자로 여겨져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1. 중앙 정치

주전충황소의 난에 가담했으나, 황소군이 백성들의 지지를 잃자 에 투항하여 황소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주전충은 선무절도사가 되어 각지의 군벌과 싸우면서 당의 지배 영역을 넓혔다. 그의 군대는 군기가 엄격하고 정예였으며, 농민들에게 무리한 수탈을 하지 않고 황무지를 개척했고, 당나라에서 불우했던 하급 관료들을 등용했다.

당나라에서는 재상파와 환관들이 끊임없이 다투었지만, 주전충은 재상파에 가담하여 환관들을 제거했다. 이후 주전충은 재상들과 고급 관료들도 숙청하고, 당나라 황제 소종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901년, 주전충은 양왕에 봉해졌고, 곧 의 황제 소종은 살해되었다. 907년, 주전충은 다음 황제인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황제가 되어 '''후량'''을 건국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 전 황제와 일족들은 독살되었다.

후량은 당나라 시대에 해악이었던 환관과 문벌 귀족을 제거하고, 수도 이전, 농민 생활의 안정에 힘쓰며 하급 관료들에게 지지받는 합리적인 혁신 정권이었다. 700년 동안 지속된 귀족제를 종식시킨 후량에서는, 한동안 실력 있는 무장들이 활개치는 시대가 되었다.

후량의 재상 직함동중서문하평장사(약칭 동평장사)였다.[1]

재상 이름재임 기간
장문울907년 ~ 908년
양섭907년 ~ 908년, 908년 ~ 909년, 915년 ~ 916년
한건907년 ~ 909년
설이구907년 ~ 912년
장책908년
우긍908년 ~ 914년
왕경인908년 ~ 911년
조광봉909년 ~ 915년, 916년 ~ 918년
두효909년 ~ 913년
경상912년 ~ 923년
요계913년 ~ ?
정각916년 ~ 923년
소경918년 ~ 923년
이기920년



후량은 당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그때까지 환관이 맡아왔던 추밀사를 관료 중 한 사람이 맡게 하고, 추밀원을 숭정원(崇政院)으로, 추밀사를 숭정사(崇政使)로 개칭하였다. 이 숭정사는 태조의 모사 경상(907년 ~ 912년)과 이진(912년 ~ 923년) 두 사람만이 역임하였다.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한 후, 숭정원은 추밀원으로, 숭정사는 추밀사로 각각 명칭이 원상복구되었다.[1]

3. 2. 지방 통치

주전충을 멸망시켰을 때, 이극용 등은 당 말의 혼란을 틈타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 즉 군벌(절도사)을 형성했다.[1] 이들은 후량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주전충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이로 인해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시작되었다.[1]

후량은 인구가 많고 문화가 발달한 지역을 통치했고, 수도 개봉은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다.[2] 개봉은 황하와 대운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물류의 거점 역할도 수행했다.[2] 그러나 후량의 영토는 당나라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2]

4. 군사

주온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선무군 절도사가 된 그는 선무군 군부 변주를 다스렸고, 이는 당나라 말기 최대 번진이 되어 왕에 봉해졌다. 907년 6월 1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량', 연호를 개평이라 하였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이극용 등 지방 군벌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도래했다. 후량을 건국한 후에도 주전충은 이극용과 격렬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주전충은 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주를 반년간 포위했다. 다음 해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진왕이 되어 반격에 나서자 포위를 풀었다.

다음 해 주전충은 이존욱을 공격하기 위해 약 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하지만 이존욱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군을 후퇴시켰다.

910년, 후량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왕 이존욱이 구원하러 나섰기에 911년 초 백향(柏鄕, 지금의 하북성 형대시 백향현 서남)에서 진군과 후량군이 격전을 벌였다. 하루 동안 벌어진 격전에서 후량은 대패하였고, 진군은 150여 (里)나 추격하였다. 주전충은 이에 놀라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백향 전투에서 후량의 주력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후량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915년 봄, 후량군은 이존욱의 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태행산 황택령(黃澤嶺, 지금의 산서성 진중시 좌권현 동남쪽에 있는 고개)·덕주·전주에서 연패했다. 다음 해 봄, 왕단(王檀)이 명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했으나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918년 8월 이존욱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자 후량군은 이를 맞아 싸웠다. 12월 하순 호류파(胡柳陂,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 복양현 동남쪽에 있는 언덕)에서 양군은 격돌하여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진군의 명장 주덕위가 후량군 기병대장 왕언장에게 패해 전사했다. 위기에 빠진 진군을 구한 것은 진나라의 장군 이사소·왕건급이 이끄는 기병대로 후량의 보병대를 격파해 후량은 대패하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겼다. 하지만 진군도 다수의 사상자가 생겨 후량군과 진군의 전투는 일단 소강상태에 빠졌다. 921년 진주(鎭州)를 포위한 진군을 후량군이 공격해 격파하여 진군은 약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923년 진왕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 윤 4월 말, 이사원이 이끄는 명의 기병대가 후량의 운주를 기습했다. 후량은 왕언장을 총사령관으로 단응을 부사령관으로 한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후당을 공격했다. 장종 이존욱 또한 직접 군을 이끌고 양류(楊劉,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동아현 동북)에서 격전을 벌여 후량군을 격파했다. 왕언장은 중도현(中都縣,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 문상현)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후량의 수도 개봉부를 함락시키자, 후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주전충의 군대는 군기가 엄격하고 정예였으며, 농민들에게 무리한 수탈은 하지 않고 황무지를 개척했고, 당나라에서 불우했던 하급 사인을 등용했다.

5. 외교

후량은 오대십국 시대에 건국되었다. 각 지방의 군벌(절도사)은 후량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주전충에게 반대하며 각지에서 독립했다. 후량은 당나라에 비해 영토가 4분의 1에 불과했지만,[2] 인구가 조밀하고 문화가 발달한 지역을 지배했으며, 수도 개봉은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자 물류의 거점이었다.[1]

5. 1. 주변국과의 관계

주전충을 멸망시켰을 때, 이극용 등은 당 말의 혼란을 틈타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벌(절도사)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후량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주전충에게 반대하며 각지에서 독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량은 인구가 많고 문화가 발달한 지역을 지배했고, 수도 개봉은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자 황하와 대운하가 만나는 물류 거점이었다.[1] 그러나 후량의 영토는 당나라의 4분의 1에 불과했다.[2] 후량은 건국 후 이존욱의 "진국"(후의 후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세에 몰렸고, 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했다.[3]

6. 평가

송나라 역사가 학거정은 저서 『

후량은 시대에 해악이었던 환관과 문벌 귀족을 일소하고, 수도 이전, 농민 생활 안정에 힘쓰며 하급 사인에게 지지받는 합리적인 혁신 정권이었다. 역사가 있는 당 제국을 멸망시키고 700년 동안 지속된 귀족제를 종식시킨 후량에서는 한동안 실력 있는 무장들이 활개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건국 후 후량군은 이존욱의 "진국"(후의 '''후당''')과 전쟁을 벌여 패배했고, 이후 기세를 잃고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국내 정치의 내부 혼란은 국가의 약체화·불안정화를 초래하여, 마침내 후량은 진국에 침식당하게 되었다.

후량 황제들은 모두 비명횡사했고, 후량은 3대 16년의 단명으로 허무하게 멸망했다. 그 후 오대 왕조도 후량을 정당한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세의 평판도 좋지 않았다. 현대 중국에서도 주전충은 농민 반란군의 배신자로 여겨지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7. 역대 황제

건화(乾化) 911년 ~ 912년없음없음주유규 (朱友珪)912년 ~ 913년건화(乾化) 912년 ~ 913년
봉력(鳳曆) 913년없음말제(末帝)주전 (朱瑱)913년 ~ 923년건화(乾化) 913년 ~ 915년
정명(貞明) 915년 ~ 921년
용덕(龍德) 921년 ~ 923년


참조

[1] 논문
[2] 일반
[3] 논문
[4]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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