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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라 준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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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라 준이치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지도자, 프런트이다. 사회인 야구팀과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86년 신인왕 경쟁, 1988년 월간 MVP, 베스트 나인 선정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은퇴 후에는 오릭스, 닛폰햄 등에서 코치, 2군 감독, 1군 감독을 역임했고, 2019년부터는 오릭스 버펄로스의 육성 총괄 및 단장으로 활동했다. 견실한 수비와 준족, 작은 기술에 능한 교타자로 평가받았으며, 2루수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 일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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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라 준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후쿠라 준이치
출생일1960년 6월 28일 ()
출생지미야자키현 히가시우스키군 기타우라정(현: 노베오카시)
신장177cm
체중73kg
포지션내야수 / 감독
투타우투우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1984년 (드래프트 6순위)
소속 구단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1985–1997)
데뷔1985년 4월 23일
마지막 경기1997년 10월 10일
주요 기록
타율0.279
홈런50개
안타1116개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오릭스 버펄로스 (2016–2018)
코치오릭스 블루웨이브/오릭스 버펄로스 (1998–2000, 2013–2015)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5–2012)
기타
현재 직책오릭스 버펄로스 제네럴 매니저(GM) 겸 팀 편성 부장

2. 선수 경력

;사회인 시대


  • 오이타 철도 관리국


;프로팀 경력

== 프로 입단 전 ==

후쿠라 준이치는 중학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노베오카 공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가을에 열린 추계 규슈 대회의 준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사세보 공업고등학교의 시라타케 요시히사에게 막혀 팀은 패했다. 재학 중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일본국유철도에 입사했고 사회인 야구팀인 오이타 철도 관리국(현: 큐슈여객철도 오이타 지사, 팀으로서는 현재의 JR 큐슈)에 소속되면서 6년간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2루수를 맡으면서 1번이나 3번 타자를 번갈아 맡았다. 1984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신일본제철 오이타에 보강 선수로서 출전했고 2차전인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와의 맞대결에서는 니시무라 모토후미(신일철 히로하타로부터 보강)로부터 홈런을 날리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팀은 준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 대회에 우승한 닛산 자동차에게 석패를 당했다.[3] 이때 당시 팀 동료였던 야마시타 가즈히코가 있었다.

198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는데 연봉은 360만 엔(추정치)으로, 당시 주전이었던 후쿠하라 미네오의 예비 타자로서 기대를 받았다.

==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1985~1988) ==

프로 1년차인 1985년에는 감독 우에다 도시하루가 선수들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켰는데, 후쿠라 자신은 연습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때는 입단한 지 3일 만에 그만두려고 생각했지만, 4월 23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1군 첫 출전을 이뤘다. 이 경기에서는 9회부터 마쓰나가 히로미를 대신해서 3루 수비를 맡았지만 파울 플라이를 처리하지 못한 바람에 한 달간 기용되지 못했다. 1985년 시즌에는 16타수 4안타의 성적으로 끝났고, 신쇼지에서 열린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오하시 유타카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아 수비를 중심으로 강도높은 연습을 했다.

2년차인 1986년에는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맹연습을 거듭한 끝에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주전 2루수였던 이와모토 요시히로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적도 있어 후쿠하라 미네오를 포함해서 세 사람에 의한 포지션 경쟁 끝에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에는 12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할 9리를 기록했고 한때는 신인왕 경쟁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세이부 라이온스)의 대항마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됐다. 시즌 종료 후에는 120%가 증가된 연봉 960만 엔(추정치)으로 재계약을 맺었다.[31] 이듬해 1987년에는 시즌 130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8홈런, 40타점, 2할 6푼 3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미노다 고지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등번호는 1번으로 변경됐다. 그해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했고,[32] 같은 해 7월 30일 세이부전에서는 상대 투수 야마네 가즈오로부터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려냈고 같은 달에는 타율 3할 2푼 8리, 5타점을 기록하면서도 이 만루 홈런을 기록한 것을 인정받아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했다.[33] 더 나아가 시즌 종반에는 9월 초순에 3할 전후였던 타율을 약 2주 동안 3할 2푼대까지 끌어올려 다카자와 히데아키와 마쓰나가 히로미의 수위 타자 경쟁에 들어가는 활약을 보였다. 10월 초순인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왼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리그 3위에 해당되는 3할 2리의 시즌 타율을 기록하여 자신의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러한 활약이 평가되면서 시즌 종료 후에 가진 계약 협상에서는 연봉이 3,000만 엔을 넘어섰고 동시에 첫 아이도 같은 해에 태어나는 등 공과 사 모두 충실했던 1년을 보냈다.[34]

==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 시절 (1989~1997) ==

연말에 유후인에서 오버홀을 하고 맞이한 1989년에는 개막전 4회 초에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을 쳐, 모회사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바뀐 팀 원년에 오릭스 제1호 홈런을 기록했다. 올스타 게임까지 팀은 선두 경쟁을 벌였지만, 7월 16일 킨테츠와의 경기에서 홈 쇄도 시 야마시타 가즈히코와 충돌하여 다시 왼쪽 어깨를 탈구하여 한 달 정도 전선에서 이탈했다.[7] 그 해에는 세이부를 포함한 데드히트 끝에 킨테츠가 우승했기 때문에, 후쿠라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한 해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1990년에는 오픈전에서 사구를 맞고 오른 손목을 골절당하여 회복을 서둘러 조기에 깁스를 풀고 경기에 출전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같은 부위를 또 한 번 골절당했다. 이 때문에 그 해에는 출전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고, 오프에는 손목 수술을 했다.

1991년에 도이 쇼조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도이의 신뢰를 받아 경기 도중에 교체되는 일이 감소했고 이듬해 1992년에는 9할 9푼 2리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1993년 4월 28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부터 1994년 7월 31일 세이부전까지 836차례(척살 334, 보살 502)의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이라는 일본 기록을 수립했다.[29] 1994년 4월 13일 닛폰햄전에서 시노즈카 가즈노리와 시라이 가즈유키가 갖고 있던 550차례라는 당시 일본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때는 의식하고 있었으나 그 후에는 중압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이 중단된 것은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세이부전에서의 7회말에 강우로 인한 경기 중단 이후에 투수 호시노 노부유키가 던진 공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1·2루 사이에 적시타를 때려내면서 이것을 후쿠라가 글러브 한가운데에서 처리했다. 그 후 1사 만루 상황에서 이치로에게서 실책이 나와 일거에 6점을 빼앗겨 역전당했지만 8회에 1번·이치로, 2번·후쿠라의 연타로 동점을 만들어 내면서 팀 역전 승리의 발판을 이루었다. 훗날 이 경기에서 자신의 기록보다 팀이 이겼다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해 8월 20일에는 개인 통산 100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했고 피로성 요통이 만성화된 것 외에도 타구와 몸에 맞는 볼에 의한 타박을 입어 진통제를 많이 복용하고 있었지만[29] 6년 만에 타율이 3할 대를 넘는 등 공수에 걸친 활약으로 통산 두 번째의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고 연봉도 1억 엔을 돌파했다. 이듬해 1995년 6월 8일 닛폰햄전에서 홈으로 돌입했을 때에 포수와 충돌하여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9월 중순에는 1군에 복귀했지만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은 벤치에서 맞이해야만 했다. 하지만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2번·2루수로서 선발 출전했고 시즌 종료 후에는 FA권을 취득했지만 다음 시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해서 그대로 팀에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FA로 선언한 이후 재계약금 3,000만 엔과 현상유지 수준의 연봉 1억 2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37]

이듬해 1996년에는 무릎 보호대를 장착한 상태에서의 플레이가 계속됐고 그해 긴테쓰에서 이적해 온 오시마 고이치와 병용되는 형태가 됐는데 이 해부터 3루수로 기용되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3루수와 대타로서 기용돼 그토록 염원해오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95년과 1996년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던 것이 현역 시절 최고의 추억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에는 봄부터 무릎 상태는 좋았으나 팀의 미래를 위해 젊은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겠다는 팀의 방침도 있어서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0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다이에전이 후쿠라에게 있어서는 현역 생활 마지막 출장이 되면서 대타로서의 안타를 날렸다. 또한 나카지마 사토시와 고바야시 히로시가 볼배합을 고려하여 배터리의 목적대로 3루 땅볼을 후쿠라가 처리하면서 경기는 그대로 종료됐다.

덧붙여 선수 시절 응원가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꽃의 루루』의 주제가의 개사였다.

2. 1. 프로 입단 전

후쿠라 준이치는 중학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노베오카 공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가을에 열린 추계 규슈 대회의 준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사세보 공업고등학교의 시라타케 요시히사에게 막혀 팀은 패했다. 재학 중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일본국유철도에 입사했고 사회인 야구팀인 오이타 철도 관리국(현: 큐슈여객철도 오이타 지사, 팀으로서는 현재의 JR 큐슈)에 소속되면서 6년간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2루수를 맡으면서 1번이나 3번 타자를 번갈아 맡았다. 1984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신일본제철 오이타에 보강 선수로서 출전했고 2차전인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와의 맞대결에서는 니시무라 모토후미(신일철 히로하타로부터 보강)로부터 홈런을 날리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팀은 준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 대회에 우승한 닛산 자동차에게 석패를 당했다.[3] 이때 당시 팀 동료였던 야마시타 가즈히코가 있었다.

198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는데 연봉은 360만 엔(추정치)으로, 당시 주전이었던 후쿠하라 미네오의 예비 타자로서 기대를 받았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프로 1년차인 1985년에는 감독 우에다 도시하루가 선수들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켰는데, 후쿠라 자신은 연습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때는 입단한 지 3일 만에 그만두려고 생각했지만, 4월 23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1군 첫 출전을 이뤘다. 이 경기에서는 9회부터 마쓰나가 히로미를 대신해서 3루 수비를 맡았지만 파울 플라이를 처리하지 못한 바람에 한 달간 기용되지 못했다. 1985년 시즌에는 16타수 4안타의 성적으로 끝났고, 신쇼지에서 열린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오하시 유타카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아 수비를 중심으로 강도높은 연습을 했다.

2년차인 1986년에는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맹연습을 거듭한 끝에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주전 2루수였던 이와모토 요시히로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적도 있어 후쿠하라 미네오를 포함해서 세 사람에 의한 포지션 경쟁 끝에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에는 12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할 9리를 기록했고 한때는 신인왕 경쟁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세이부 라이온스)의 대항마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됐다. 시즌 종료 후에는 120%가 증가된 연봉 960만 엔(추정치)으로 재계약을 맺었다.[31]

1988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미노다 고지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등번호는 1번으로 변경됐다. 그해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했고,[32] 같은 해 7월 30일 세이부전에서는 상대 투수 야마네 가즈오로부터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려냈고 같은 달에는 타율 3할 2푼 8리, 5타점을 기록하면서도 이 만루 홈런을 기록한 것을 인정받아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했다.[33] 더 나아가 시즌 종반에는 9월 초순에 3할 전후였던 타율을 약 2주 동안 3할 2푼대까지 끌어올려 다카자와 히데아키와 마쓰나가 히로미의 수위 타자 경쟁에 들어가는 활약을 보였다. 10월 초순인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왼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리그 3위에 해당되는 3할 2리의 시즌 타율을 기록하여 자신의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러한 활약이 평가되면서 시즌 종료 후에 가진 계약 협상에서는 연봉이 3,000만 엔을 넘어섰고 동시에 첫 아이도 같은 해에 태어나는 등 공과 사 모두 충실했던 1년을 보냈다.[34]

연말에 유후인에서 오버홀을 하고 맞이한 1989년에는 개막전 4회 초에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을 쳐, 모회사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바뀐 팀 원년에 오릭스 제1호 홈런을 기록했다. 올스타 게임까지 팀은 선두 경쟁을 벌였지만, 7월 16일 킨테츠와의 경기에서 홈 쇄도 시 야마시타 가즈히코와 충돌하여 다시 왼쪽 어깨를 탈구하여 한 달 정도 전선에서 이탈했다.[7] 그 해에는 세이부를 포함한 데드히트 끝에 킨테츠가 우승했기 때문에, 후쿠라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한 해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1990년에는 오픈전에서 사구를 맞고 오른 손목을 골절당하여 회복을 서둘러 조기에 깁스를 풀고 경기에 출전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같은 부위를 또 한 번 골절당했다. 이 때문에 그 해에는 출전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고, 오프에는 손목 수술을 했다.

1991년에 도이 쇼조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도이의 신뢰도 있어 경기 도중 교체되는 경우가 줄어들었고, 다음 해 1992년에는 수비율.992를 기록했다. 게다가 1993년 4월 28일 다이에와의 경기부터 1994년 7월 31일 세이부와의 경기까지,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 836(자살 334, 보살 502)의 일본 기록을 수립했다.[29] 1994년 4월 13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시노즈카 가즈노리와 시라이 가즈유키가 가진 당시 일본 기록 550에 육박했을 때는 의식했지만, 그 후에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이 끊어진 것은 세이부 구장에서 세이부와의 경기 7회말, 강우 중단 후에 호시노 노부유키의 투구를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1・2루 사이에 날려, 이를 후쿠라가 글러브 정중앙으로 튕겨냈다. 그 후 1사 만루가 된 상황에서 이치로에게도 에러가 나와 일거에 6점을 빼앗겨 역전당했지만, 8회에는 1번 이치로와 2번 후쿠라의 연타로 동점을 만들어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후쿠라는 기록보다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나중에 말했다. 8월 20일에 1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피로성 허리 통증이 만성화된 데다, 타구와 사구에 의한 타박도 많아 진통제를 상용했다.[29] 6년 만에 타율이 3할을 넘는 등 공수 양면에 걸친 활약으로 2번째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고, 연봉도 1억 엔을 돌파했다. 다음 해 1995년에는 6월 8일 니혼햄과의 경기에서 홈으로 쇄도할 때 포수와 충돌하여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9월 중순에 1군에 복귀했지만, 무릎이 완전하지 않아 본인 첫 리그 우승은 벤치에서 맞이했다. 그러나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2번・2루수'로 선발 출전했고, 오프에는 FA권을 획득했지만, 다음 해 일본 제일을 목표로 망설임 없이 잔류를 결정했고, FA를 선언한 후 재계약금 3000만 엔, 현상 유지를 위한 연봉 1억 200만 엔으로 재계약했다.[8]

1996년에는 무릎에 브레이스를 착용한 채로 경기를 계속했고, 이적해 온 오시마 고이치와 병용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 해부터 3루수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3루수나 대타로 기용되어, 염원하던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전년도와 2번의 일본 시리즈가 현역 시절 최고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초봄부터 무릎 상태가 좋았지만, 젊은 선수 육성을 목표로 하는 팀의 방침도 있어 출전 기회가 감소. 10월 10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 최종전이었던 다이에와의 경기가 후쿠라에게 현역 마지막 출전이 되었고, 대타로 안타를 쳤다. 또한 나카지마 사토시와 고바야시 히로시가 배려하여 타자는 고교 후배인 야나기다 세이토였고, 나카지마 사토시가 "선배에게 쳐라"라고 말했고, 그대로 쳐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덧붙여 선수 시절 응원가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꽃의 루루』의 주제가의 개사였다.

2. 2. 1.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1985~1988)

프로 1년차인 1985년에는 감독 우에다 도시하루가 선수들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켰는데, 후쿠라 자신은 연습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때는 입단한 지 3일 만에 그만두려고 생각했지만, 4월 23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1군 첫 출전을 이뤘다. 이 경기에서는 9회부터 마쓰나가 히로미를 대신해서 3루 수비를 맡았지만 파울 플라이를 처리하지 못한 바람에 한 달간 기용되지 못했다. 1985년 시즌에는 16타수 4안타의 성적으로 끝났고, 신쇼지에서 열린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오하시 유타카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아 수비를 중심으로 강도높은 연습을 했다.

2년차인 1986년에는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맹연습을 거듭한 끝에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주전 2루수였던 이와모토 요시히로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적도 있어 후쿠하라 미네오를 포함해서 세 사람에 의한 포지션 경쟁 끝에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에는 12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할 9리를 기록했고 한때는 신인왕 경쟁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세이부 라이온스)의 대항마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됐다. 시즌 종료 후에는 120%가 증가된 연봉 960만 엔(추정치)으로 재계약을 맺었다.[31] 이듬해 1987년에는 시즌 130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8홈런, 40타점, 2할 6푼 3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미노다 고지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등번호는 1번으로 변경됐다. 그해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했고,[32] 같은 해 7월 30일 세이부전에서는 상대 투수 야마네 가즈오로부터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려냈고 같은 달에는 타율 3할 2푼 8리, 5타점을 기록하면서도 이 만루 홈런을 기록한 것을 인정받아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했다.[33] 더 나아가 시즌 종반에는 9월 초순에 3할 전후였던 타율을 약 2주 동안 3할 2푼대까지 끌어올려 다카자와 히데아키와 마쓰나가 히로미의 수위 타자 경쟁에 들어가는 활약을 보였다. 10월 초순인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왼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리그 3위에 해당되는 3할 2리의 시즌 타율을 기록하여 자신의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러한 활약이 평가되면서 시즌 종료 후에 가진 계약 협상에서는 연봉이 3,000만 엔을 넘어섰고 동시에 첫 아이도 같은 해에 태어나는 등 공과 사 모두 충실했던 1년을 보냈다.[34]

2. 2. 2.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 시절 (1989~1997)

1991년에 도이 쇼조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도이의 신뢰를 받아 경기 도중에 교체되는 일이 감소했고 이듬해 1992년에는 9할 9푼 2리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1993년 4월 28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부터 1994년 7월 31일 세이부전까지 836차례(척살 334, 보살 502)의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이라는 일본 기록을 수립했다.[29] 1994년 4월 13일 닛폰햄전에서 시노즈카 가즈노리와 시라이 가즈유키가 갖고 있던 550차례라는 당시 일본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때는 의식하고 있었으나 그 후에는 중압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이 중단된 것은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세이부전에서의 7회말에 강우로 인한 경기 중단 이후에 투수 호시노 노부유키가 던진 공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1·2루 사이에 적시타를 때려내면서 이것을 후쿠라가 글러브 한가운데에서 처리했다. 그 후 1사 만루 상황에서 이치로에게서 실책이 나와 일거에 6점을 빼앗겨 역전당했지만 8회에 1번·이치로, 2번·후쿠라의 연타로 동점을 만들어 내면서 팀 역전 승리의 발판을 이루었다. 훗날 이 경기에서 자신의 기록보다 팀이 이겼다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해 8월 20일에는 개인 통산 100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했고 피로성 요통이 만성화된 것 외에도 타구와 몸에 맞는 볼에 의한 타박을 입어 진통제를 많이 복용하고 있었지만[29] 6년 만에 타율이 3할 대를 넘는 등 공수에 걸친 활약으로 통산 두 번째의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고 연봉도 1억 엔을 돌파했다. 이듬해 1995년 6월 8일 닛폰햄전에서 홈으로 돌입했을 때에 포수와 충돌하여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9월 중순에는 1군에 복귀했지만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은 벤치에서 맞이해야만 했다. 하지만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2번·2루수로서 선발 출전했고 시즌 종료 후에는 FA권을 취득했지만 다음 시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해서 그대로 팀에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FA로 선언한 이후 재계약금 3,000만 엔과 현상유지 수준의 연봉 1억 2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37]

이듬해 1996년에는 무릎 보호대를 장착한 상태에서의 플레이가 계속됐고 그해 긴테쓰에서 이적해 온 오시마 고이치와 병용되는 형태가 됐는데 이 해부터 3루수로 기용되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3루수와 대타로서 기용돼 그토록 염원해오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95년과 1996년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던 것이 현역 시절 최고의 추억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에는 봄부터 무릎 상태는 좋았으나 팀의 미래를 위해 젊은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겠다는 팀의 방침도 있어서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0일,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열린 다이에전이 후쿠라에게 있어서는 현역 생활 마지막 출장이 되면서 대타로서의 안타를 날렸다. 또한 나카지마 사토시와 고바야시 히로시가 볼배합을 고려하여 배터리의 목적대로 3루 땅볼을 후쿠라가 처리하면서 경기는 그대로 종료됐다.

3. 지도자 경력

에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타격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취임하여, 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다.[9]

닛폰햄 1군 헤드 겸 타격 코치 시대 (2010년 5월 13일)


부터 닛폰햄 2군 내야 수비 코치로 취임하여, 에는 2군 감독을 맡았다. 후쿠라는 1군에서 통용되는 선수의 육성을 제1 목표로 삼고, 개별 선수 지도는 코치의 재량에 맡기면서 부족한 야수의 성장을 목표로 했다[9]。에는 1군 헤드 코치가 되었고, 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 닛폰햄의 2009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은 헤드 코치에 전념했지만,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닛폰햄을 퇴단했다.

부터 다시 오릭스에 복귀하여 1군 헤드 코치를 맡았지만, 에는 팀이 개막부터 최하위로 침체되어, 자력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가능성이 소멸된 6월 2일에 1군 감독 모리와키 코지가 휴양, 1군 감독 대행으로 시즌 종료까지 지휘를 맡았다[10]。모리와키의 감독 퇴임(8월 31일) 및 시니어 어드바이저 취임(9월 1일)[11]을 받아, 시즌 막바지인 10월 1일에는 다음 해부터 1군 감독으로 승격하는 것이 구단에서 발표되었다[12]。한큐 OB가 오릭스 감독에 취임한 것은 첫 번째 사건이다. 또한, 동 구단의 자체 육성 선수 감독 취임은 카지모토 타카오 이후 약 35년 만이었다. 1군 감독 대행 기간 중 팀 성적은 89경기 42승 46패 1무로 정규 시즌을 5위로 마쳤다. 은 같은 국철 직원이기 때문에 현역 시절부터 친교가 있던 동향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헤드 코치로 초빙[13], 성적은 4년 만의 최하위로 끝났다. 은 4위.

같은 해 10월 26일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합 끝에 타지마 다이키의 교섭권을 추첨으로 뽑아 구단의 추첨 연패를 11에서 멈췄다[14]

도 전년과 마찬가지로 4위로 끝나, 시즌을 끝으로 퇴임하는 것이 결정되어, 10월 5일의 시즌 최종전(교세라 돔 오사카) 경기 전에 시즌 총괄 기자 회견을 열었다[15]

3. 1. 오릭스 블루웨이브 코치 (1998~2000)

1998년에 오릭스의 2군 타격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발탁됐고 이듬해 1999년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 2000년에 스카우트로 부임했다.[38]

3. 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코치·감독 (2005~2012)

1998년 오릭스의 2군 타격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발탁됐고 이듬해 1999년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 2000년에 스카우트로 부임했다.[9]

2005년부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코치로 부임했고, 2007년에는 2군 감독을 맡았다. 1군에 통용되는 선수 육성을 제1차적인 목표로 삼고, 개별 선수 지도는 코치의 재량에 맡기면서 부족한 야수의 성장을 목표로 했다.[9] 2008년에는 1군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2009년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하면서 2009년에 팀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9] 2012년에는 수석 코치에만 전념했지만 그 해 시즌 종료 후에 닛폰햄을 퇴단했다.[9]

3. 3. 오릭스 버펄로스 코치·감독 (2013~2018)

1998년 오릭스의 2군 타격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발탁됐고 이듬해 1999년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 2000년에 스카우트로 부임했다.[38] 2005년부터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코치로 부임했고 2007년에는 2군 감독을 맡았다. 1군에 통용되는 선수의 육성을 제1차적인 목표로서 개개인의 선수 지도는 코치의 재량에 맡기면서 미흡했던 야수진의 성장 등을 목표로 했다.[38] 2008년에는 1군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2009년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하면서 2009년에 팀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2012년에는 수석 코치에만 전념했지만 그 해 시즌 종료 후에 닛폰햄을 퇴단했다.

2013년부터는 오릭스 버펄로스의 1군 수석 코치를 맡고 있었는데, 2015년에는 팀이 개막 이후부터 최하위로 떨어질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자력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그해 6월 2일에 1군 감독이던 모리와키 히로시가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휴양 생활에 들어간 것부터 1군 감독 대행으로서의 지휘를 시즌 종료 때까지 맡았다.[39] 모리와키의 감독 퇴임(8월 31일)과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부임(9월 1일)[40] 한 것에 의해서 시즌 종반이던 10월 1일에는 2016년 시즌부터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고 구단으로부터 공식 발표됐다.[29] 한큐의 선수로서 활약했던 인물이 오릭스의 감독이 된 것은 최초의 사례이며 더욱이 같은 구단(팀의 전신이던 한큐를 포함)의 토박이 감독은 가지모토 다카오 이래 35년 만의 일이다. 참고로 후쿠라의 1군 감독 대행을 맡은 기간 중의 팀 성적은 89경기에서 42승 1무 46패를 기록하여 2015년 정규 시즌을 5위로 마쳤다.

이듬해 2016년에는 같은 일본국유철도 직원 출신이자 현역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수석 코치로 초빙,[41] 팀 성적은 4년 만에 최하위(6위)로 끝났다. 2017년에는 4위를 기록했다. 2017년 10월 26일 드래프트 회의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합 끝에 다지마 다이키의 교섭권을 획득, 구단의 제비뽑기 연패 기록은 11에서 멈췄다.[42]

2018년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4위에 그쳤고 시즌이 끝나면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월 5일에는 시즌 최종전(교세라 돔 오사카)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43]

4. 프런트 경력



에 오릭스 2군 타격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취임하여, 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 에 스카우트로 전직했다.

부터 닛폰햄 2군 내야 수비 코치로 취임하여, 에는 2군 감독을 맡았다. 후쿠라는 1군에서 통용되는 선수의 육성을 제1 목표로 삼고, 개별 선수 지도는 코치의 재량에 맡기면서 부족한 야수의 성장을 목표로 했다[9]。에는 1군 헤드 코치가 되었고, 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 닛폰햄의 2009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은 헤드 코치에 전념했지만,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닛폰햄을 퇴단했다.

부터 다시 오릭스에 복귀하여 1군 헤드 코치를 맡았지만, 에는 팀이 개막부터 최하위로 침체되어, 자력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가능성이 소멸된 6월 2일에 1군 감독 모리와키 코지가 휴양, 1군 감독 대행으로 시즌 종료까지 지휘를 맡았다[10]。모리와키의 감독 퇴임(8월 31일) 및 시니어 어드바이저 취임(9월 1일)[11]을 받아, 시즌 막바지인 10월 1일에는 다음 해부터 1군 감독으로 승격하는 것이 구단에서 발표되었다[12]。한큐 OB가 오릭스 감독에 취임한 것은 첫 번째 사건이다. 또한 한큐 및 긴테쓰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오릭스 선수 출신 감독은 2021년 현재 탄생하지 않았다. 또한, 동 구단의 자체 육성 선수 감독 취임은 카지모토 타카오 이후 약 35년 만이었다. 1군 감독 대행 기간 중 팀 성적은 89경기 42승 46패 1무로 정규 시즌을 5위로 마쳤다. 은 같은 국철 직원이기 때문에 현역 시절부터 친교가 있던 동향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헤드 코치로 초빙[13], 성적은 4년 만의 최하위로 끝났다. 은 4위.

같은 해 10월 26일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합 끝에 타지마 다이키의 교섭권을 추첨으로 뽑아 구단의 추첨 연패를 11에서 멈췄다[14]

도 전년과 마찬가지로 4위로 끝나, 시즌을 끝으로 퇴임하는 것이 결정되어, 10월 5일의 시즌 최종전(교세라 돔 오사카) 경기 전에 시즌 총괄 기자 회견을 열었다[15]。10월 22일, 부터 프런트에 들어가 육성 총괄 제너럴 매니저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2019년 5월 28일, 신설되는 제너럴 매니저 직에 6월 1일자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또한 편성 부장도 겸임하여, 드래프트에서는 고졸 선수를 중심으로 지명하는 등 팀의 재건을 도모했다. 같은 해는 3년 만의 최하위로 끝났다. 같은 해 오프, 아담 존스를 영입했다[16]。도 전년에 이어 부진하여, 8월 20일의 세이부전에서 같은 해 4번째 4연패로 16승 33패 4무, 선두의 소프트뱅크 로테에서는 12게임 차, 5위의 세이부에서도 7게임 차로 최하위로 침체되었다. 경기 종료 후 감독 니시무라가 사임, 후쿠라는 같은 날 회견을 열어 "사임을 요청받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17]。GM 취임 3년 차가 되는 2021년에, 니시무라의 후임 감독이 된 나카지마 사토시 아래에서 오릭스는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여, 후쿠라의 수완과 공적에 대해서도 평가하는 보도가 있었다[18][19][20]

4. 1. 오릭스 버펄로스 육성 총괄·단장 (2019~)

1998년 오릭스 2군 타격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발탁됐고 1999년에는 2군 수비 주루 코치, 2000년에 스카우트로 부임했다.[38] 2005년부터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코치로 부임했고 2007년에는 2군 감독을 맡았다. 1군에 통용되는 선수의 육성을 제1차적인 목표로서 개개인의 선수 지도는 코치의 재량에 맡기면서 미흡했던 야수진의 성장 등을 목표로 했다.[38] 2008년에는 1군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2009년부터는 타격 코치를 겸임하면서 2009년에 팀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38] 2012년에는 수석 코치에만 전념했지만 그 해 시즌 종료 후에 닛폰햄을 퇴단했다.

2013년부터 오릭스 버펄로스의 1군 수석 코치를 맡고 있었는데, 2015년에는 팀이 개막 이후부터 최하위로 떨어질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자력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그해 6월 2일에 1군 감독이던 모리와키 히로시가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휴양 생활에 들어간 것부터 1군 감독 대행으로서의 지휘를 시즌 종료 때까지 맡았다.[39] 모리와키의 감독 퇴임(8월 31일)과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부임(9월 1일)[40] 한 것에 의해서 시즌 종반이던 10월 1일에는 2016년 시즌부터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고 구단으로부터 공식 발표됐다.[29] 한큐의 선수로서 활약했던 인물이 오릭스의 감독이 된 것은 최초의 사례이며 더욱이 같은 구단(팀의 전신이던 한큐를 포함)의 토박이 감독은 가지모토 다카오 이래 35년 만의 일이다. 1군 감독 대행을 맡은 기간 중의 팀 성적은 89경기에서 42승 1무 46패를 기록하여 2015년 정규 시즌을 5위로 마쳤다. 2016년에는 같은 일본국유철도 직원 출신이자 현역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수석 코치로 초빙,[41] 팀 성적은 4년 만에 최하위(6위)로 끝났다. 2017년에는 4위를 기록했다.

2017년 10월 26일 드래프트 회의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합 끝에 다지마 다이키의 교섭권을 획득, 구단의 제비뽑기 연패 기록은 11에서 멈췄다.[42]

2018년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4위에 그쳤고 시즌이 끝나면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월 5일에는 시즌 최종전(교세라 돔 오사카)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43] 같은 해 10월 22일, 2019년부터 구단 프런트에 입성하여 육성 총괄 담당으로 부임했다고 발표했다.[44]

2019년 5월 28일, 신설되는 단장직에 6월 1일자로 부임했고 또한 편성부장도 겸임하게 됐다.[45] 단장 취임 3년 차가 되는 2021년에, 니시무라 노리후미의 후임 감독이 된 나카지마 사토시 아래에서 오릭스는 25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여, 후쿠라의 수완과 공적에 대해서도 평가하는 보도가 있었다.[18][19][20]

5. 플레이 스타일

후쿠라 준이치는 견실한 수비와 작은 기술에 능한 준족 교타가 매력적인 내야수였다.[21]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의 일본 기록을 수립하는 등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지만, 쓰지 하쓰히코와 활약 시기가 겹쳐 골든 글러브상 수상에는 인연이 없었다. 빠른 발을 활용한 끈기 있는 타격도 돋보였으며, 규정 타석 이상에서 3할 타율을 넘긴 적이 세 차례나 있었다. 장타력은 부족했지만 볼넷을 많이 얻어냈고 득점권 타율도 높았다.

주로 2번 타자를 맡아 통산 희생타 224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18위(2010년 기준)에 해당한다. 1, 2번 타순을 함께 했던 이치로는 후쿠라를 존경하여 1994년에 "후쿠라 선배처럼 모든 경기에서 필요로 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쿠라가 어린이 요양 시설에 위문한 일은 이치로에게 야구 선수로서 환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됐다.[46] 또한 이치로는 1987년까지 후쿠라의 등번호였던 '''51'''번을 사용했다.[46]

인정이 많고 서민적인 모습으로 팀 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22] 오릭스 감독 시절에는 친정팀인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삿포로 돔을 방문했을 때, 후쿠라를 따르는 닛폰햄 선수들뿐만 아니라 구장 직원과 경비원까지 몰려들었다고 한다.

프로 입단 초기 등번호 '''51'''번은 자신의 애칭 "'''데코'''"와 증기 기관차 D51(통칭 데고이치)에서 따온 것이다.[23][24][25] 닛폰햄 2군 감독 대행 시절에는 공황 장애를 겪던 코야노 에이이치를 지원하여 현장 복귀를 도왔다.[26]

오릭스 감독 시절에는 벤치에서 녹차 '아야타카'를 마시는 모습이 중계에 자주 잡히면서 팬들 사이에서 후쿠라가 아야타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27] 일본 코카콜라는 후쿠라의 감독 퇴임이 결정되자 아야타카 공식 Twitter에 감사 메시지를 남겼고,[28] 후쿠라에게 아야타카 케이스를 증정하기도 했다.

6. 수상 및 기록

후쿠라 준이치는 베스트 나인에 2회(1988년, 1994년) 선정되었고, 월간 MVP를 1회(1988년 7월) 수상했다. 1988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1985년 4월 2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9회초에 마쓰나가 히로미를 대신해 3루수로 출장하며 첫 출장을 기록했다. 5월 13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5회말 야마우치 가즈히로로부터 첫 안타를 기록했고, 5월 15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는 9번·2루수로 첫 선발 출장했다. 5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2회말 스즈키 게이시로부터 첫 타점을 기록했고, 같은 이닝에 첫 도루도 성공했다. 첫 홈런은 1986년 4월 17일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9회말 야노 미노루로부터 기록한 2점 홈런이었다.

1994년 8월 20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2번·2루수로 선발 출장하며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고(역대 321번째), 1995년 7월 2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회초 신타니 히로시로부터 우전 선제 적시타를 기록하며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역대 180번째). 1996년 5월 3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9회초 후지이 마사오로부터 통산 200희생타를 기록했다(역대 17번째).

1993년 4월 28일부터 1994년 7월 31일까지 2루수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 804회를 기록하며 일본 기록을 세웠다.

참조

[1] 웹사이트 福良淳一育成統括ジェネラルマネージャー就任のお知らせ http://www.buffaloes[...] 2018-10-22
[2] 웹사이트 オリックスGMに福良淳一前監督「いいチーム作る」 https://www.nikkansp[...] 2019-05-28
[3]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毎日新聞社
[4] 뉴스 読売新聞 1986-12-02
[5] 뉴스 読売新聞 1988-08-07
[6]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7] 뉴스 読売新聞 1989-07-17
[8] 뉴스 読売新聞 1995-11-01
[9]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0] 웹사이트 森脇浩司監督休養のお知らせ http://www.buffaloes[...] 2015-11-09
[11] 웹사이트 オリックス森脇監督が退任、シニアアドバイザー就任 https://www.nikkansp[...] 2015-11-09
[12] 웹사이트 オリックス、福良代行が監督昇格 2軍監督に田口氏 https://www.nikkansp[...] 2015-11-09
[13] 웹사이트 オリックス来季スタッフ 西村ヘッドらロッテ色強く https://www.nikkansp[...] 2015-10-16
[14] 웹사이트 オリックス、社会人No.1左腕の田嶋を引き当てた!くじ引き連敗11でストップ http://www.daily.co.[...] 2017-11-05
[15] 웹사이트 2018年シーズン福良監督総括 https://www.buffaloe[...] 2018-10-06
[16] 웹사이트 福良GM「ちょっと興奮しています」ジョーンズ獲得 https://www.nikkansp[...] 2020-09-13
[17] 웹사이트 オリックス福良GM「辞任の要請です」/一問一答 https://www.nikkansp[...] 2020-08-21
[18] 웹사이트 オリ25年ぶりVは「“脱”宮内氏・フロント改革」の賜物…前回優勝時の球団代表、井箟重慶氏が看破! https://www.nikkan-g[...] 2021-10-30
[19] 웹사이트 忘れられないオリックス“改革初日” 歓喜につながったフロントの変革 https://www.nikkansp[...] 2021-10-30
[20] 웹사이트 オリックス・中嶋監督を支えた95、96年連覇組の絆 指揮官の要望を福良GMも全面的に受け入れ https://www.sponichi[...] 2021-10-30
[21] 웹사이트 "「1960年」勇者の記憶もよみがえる“阪急~オリックス世代”/プロ野球世代別ベストナイン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21-09-19
[22] 웹사이트 【球界ここだけの話(639)】オリックス・福良監督ってどんな人?page2 https://www.sanspo.c[...] 2021-09-19
[23] 웹사이트 【背番号物語】「#51」現在進行形のイチロー伝説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23-07-14
[24] 웹사이트 「SLの王者」D51形、日本全国を駆け巡った名場面 https://toyokeizai.n[...] 2023-07-14
[25] 웹사이트 かわさき宙(そら)と緑の科学館(川崎市青少年科学館)サイエンスプリン https://www.nature-k[...] 2023-07-14
[26] 뉴스 10年前の恩義を福良監督に返す時。小谷野栄一が乗り越えた引退危機。 https://number.bunsh[...]
[27] 웹사이트 綾鷹がオリックス・福良前監督に?「ありがとう」 https://www.sanspo.c[...] 2021-09-19
[28] 웹사이트 【球界ここだけの話(1619)】オリックスの育成統括GMに就任した福良前監督のいま https://www.sanspo.c[...] 2021-09-19
[29] 뉴스 オリックス、福良代行が監督昇格 2軍監督に田口氏 http://www.nikkanspo[...] 닛칸 스포츠 2015-10-01
[30] 서적 도시 대항 야구 대회 60년사 마이니치 신문사
[31]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6-12-02
[32] 문서
[33]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8-08-07
[34]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베이스볼 매거진사 1989-01-16
[35]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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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문서 후쿠라와 이치로 사이에는 [[야기 마사요시]]가 착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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