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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오카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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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일본의 평론가, 사회운동가로, 1945년 도쿄에서 태어나 2009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에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하였으며, 이후 '범죄자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1964년 평론가로 데뷔한 후, '궁민혁명론'을 주창하며 신좌파 문화계에 영향을 미쳤다. 재즈,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펼쳤으며, 1990년 대중문학연구상, 1993년 사이토 료쿠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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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오카 마사아키
기본 정보
출생 이름히라오카 마사아키
출생일1941년 1월 31일
출생지일본 도쿄시 혼고구
사망일2009년 7월 9일 (68세)
직업문필가
국적일본
모교와세다대학교 제2문학부노문과 중퇴
경력
활동 기간1964년 - 2009년
장르재즈 평론
예능 평론
논픽션
수필
주제재즈
야마구치 모모에
쓰쓰이 야스타카
라쿠고
주요 작품『낭만적』
수상사이토 료쿠상(『낭만적』)
데뷔 작품『韃靼人宣言|달단인선언』

2. 생애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1945년 도쿄 대공습을 피해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사카와정(현재의 오다와라시)으로 피난하여, 도쿄시 혼고구 유시마신하나정(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유시마2정목)에서 태어났다.[14] 사카와소학교에 진학했다가 1949년 7월 동경으로 돌아와 분쿄구립 시오미소학교로 전학갔다. 부친이 욱광학 사장의 운전수가 되어서 소학교 6학년 여름방할 때 이타바시구 시무라마에노정의 욱광학 사택으로 이사했다.

케이카중학교를 거쳐 1959년 7월 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치다 쿠이치에게 한문을, 타케모리 텐유에게 고전문학을, 후루바야시 타카시・코우노 토시로에게 현대문학을 배웠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르던 중 커닝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교사가 보는 앞에서 답안지를 찢고 졸업보류 처분을 받았다. 원래 탁구 특기생으로 니혼대학에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로 인해 추천이 취소되었다.

1960년, 후루바야시의 권유로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노문과와 제2문학부 노문과에 각각 러시아어로 응시해서 후자에 합격했다. 와세다 제2문 노문과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일원이 되어 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

이후 분트에서 탈퇴하고, 1961년 11월 미야하라 야스하루 등과 정치결사체 “범죄자동맹”을 결성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타니가와 간・요시모토 타카아키 등이 강사로 있던 “자립학교” 사무국에 참가하여, 강사였던 모리 히데토에게 미야하라와 함께 사사받았다.[15]

1963년, 동맹 기관지 단행본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赤い風船あるいは牝狼の夜)을 간행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요시오카 야스히로의 무수정 누드사진이 문제가 되어 음화반포죄로 경시청 지명수배를 받았다. 이윽고 토츠카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다. 모리 히데토가 히라오카 등의 신원인수인이 되어 주었다. 이 “『붉은 풍선』 사건”은 와세다대 교수회에서도 의제로 오르내렸다. “범죄자동맹은 『붉은 풍선』 사건 때문에 퇴학당했다”고 알려졌던 때도 있지만, 히라오카가 나중에 제적당한 것은 학비 미납이 원인으로, 이 사건과는 무관했다.[17] 한편, 『붉은 풍선』에 게재된 자립학교 학생 아카세바와 겐페이의 「천 엔권을 사진촬영한 작품」은 천 엔권 재판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4년, 『달단인 선언』(현대사조사)으로 평론가 데뷔를 하였다. 1966년 4월, 이시이 쿄우지의 소개로 주식회사 텍크 개발부 잡지편집부문에 입사했다. 이때 회사 전무이사가 타니가와 간이었다. 1967년 『재즈 선언』(이자라서방)으로 재즈평론 분야에도 진출했다. 1969년 2월에는 강담사의 여성지 『영 레이디』의 앵커맨이 된다. 같은 해 2월, 코우 요시오의 권유로 천성출판에 입사했고, 시부사와 타츠히코의 후임자로 『피와 장미』 제4호(천성출판)을 편집했다.

범죄자동맹 이후로 히라오카는 아나키한 행동과 저작으로 “협객적 혁명가”, “무뢰한”이라 불리며 신좌파 문화업계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었다. 1970년에는 마츠다 마사오・아다치 마사오・사사키 마모루・아이쿠라 히사토와 “비평전선”을 결성해 잡지 『제2차 영화비평』을 창간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수호전』을 실마리로 착안하여, 전후 암시장에서 일본인 야쿠자와 “일제에 강제연행되었으나 전후에는 일제에 대한 진주군으로서 머물렀던” 3국인 간의 항쟁 같은 것을 같다붙여,[18] 오오타 류・타케나카 로 등과 소위 궁민혁명론을 주창해 “신좌파 3바보 트리오”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궁민혁명론은 연합적군 사건 이후 충격과 침체에 빠져 있던 전공투 세대 일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19] 이와 관련해서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 『일본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 등의 르포 작품도 저술했다. 이 르포 조사에 협력했던 사람 중 하나가 사이토 노도카였다.[20]

1971년, 히라오카와 타니가와의 결렬은, 히라오카를 지원하는 문화인들, 히라오카와 마찬가지로 타니가와 등 경영진과 대립했던 타카하시 마사루가 이끌던 노동조합, 그리고 타카하시 마사루가 소속되어 있던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21][22](현대사조사에서 일어난 동경행동전선의 후신)에 참여하던 젊은이들이 결합하여 “텍크 투쟁”이라 불리는 소동으로 발전했다.[23]

1972년에는 대만인 군속 양명웅(楊明雄)의 전후보상 투쟁에 관여하고 대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미크로네사아 포나페섬의 군속 대니얼 로페스가 전후보상을 요구하며 내일했을 때 그를 지원했고, 이 운동을 계기로 아사쿠라 쿄우지・후나도 요이치・후나가와 테츠로 등과 함께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24] 1975년, 텍크 투쟁 및 로페스 투쟁 등에 참여한 사이토 노도카에키다 유키코・오오타 류 등과의 연결점으로 인하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배후가 아니냐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25][24] 이 때문에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도 일본적군의 별동대로서의 활동이 아니냐고 한동안 시끄러웠다.[26]

1970년대 후반 신좌파가 퇴조한 이후에는 카나가와현 하야마정으로 이주해서 문학이나 예능의 평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논평 대상은 츠츠이 야스타카・이츠키 히로유키・야마다 후타로・야마구치 모모에・카와치 온도・미나미 하루오오오야마 마스타츠 등이었다. 특히 츠츠이와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맺어 츠츠이론을 다수 집필했다. 1975년 야마시타 요스케전일본냉중화면애호회를 결성하자 우에스기 세이분・오쿠나리 마츠 등과 함께 주요 논객으로 참여했다. 오오야마 마스타츠의 극진공수도에도 입문해서 유단자가 되었다.

1990년대에는 3000쪽에 이르는 대장편소설 『황제원무곡』(皇帝円舞曲)을 집필했다. 이 소설은 히라오카 자신과 지인들을 모델로 해서, 미우라반도의 독립과 일본과의 전쟁을 그린 현대판 수호전인데, 여성은 성노예나 식량으로 취급되는 등 황당한 괴작이다. 1994년 4월 1일, 나카노선플라자에서 개최된 「츠츠이 야스타카 절필제」에 참가했다. 그 절필제를 비판한 코바야시 요시노리에 대하여, 저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절필을 둘러싼 싸움질 논집』에 수록된 『“고마니즘”의 얄팍한 정의」에서 반론했다. 또한 요코하마의 변두리 노게정을 거점으로 한 미니컴 『하마노게』(ハマ野毛)를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편집・간행했다. 이 매체에는 오기노 안나・타나카 유코・야마자키 요코 등 요코하마를 근거지로 하는 문학자들이 많이 참여했다.

2007년 간행된 『와카마츠 프로, 밤의 삼총사』에서 1970년대에 썼던 “범죄적 혁명과 혁명적 범죄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재수록했고, 한국에 귀국한 뒤 문제를 일으켜 평판이 떨어진 김희로를 “우뚝 솟은 남근”이라고 옹호하거나, “문화대혁명은 세계동시혁명의 일환이었다. 나는 지금도 문혁 동조자(シンパ)”라고 기술했다. 2005년 간행된 『쇼와 재즈다방 전설』에서는 “좌익은 야스쿠니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전사한 병사들의 진혼을 우익과 체제측에 독점시킬 셈이냐”라는 소리도 했다.

2009년 7월 9일 오전 2시 50분 뇌경색으로 사망. 향년 68세. 사망 후에도 저서가 간행되고 있다. 대량의 저서를 냈지만, 저작이 거의 문고화되어 있지 않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도쿄시 혼고구 유시마신하나정(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유시마2정목)에서 태어났다.[14] 1945년 6월, 도쿄 대공습을 피해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사카와정(현재의 오다와라시)으로 피신했다.[14] 사카와소학교에 진학했다가 1949년 7월 동경으로 돌아와 분쿄구립 시오미소학교로 전학갔다.[14] 부친이 욱광학 사장의 운전수가 되어서 소학교 6학년 여름방할 때 이타바시구 시무라마에노정의 욱광학 사택으로 이사했다.[14]

케이카중학교를 거쳐 1959년 7월 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4] 고등학교 시절 치다 쿠이치에게 한문을, 타케모리 텐유에게 고전문학을, 후루바야시 타카시・코우노 토시로에게 현대문학을 배웠다.[14]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르던 중 커닝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교사가 보는 앞에서 답안지를 찢고 졸업보류 처분을 받았다.[14] 원래 탁구 특기생으로 니혼대학에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로 인해 추천이 취소되었다.[14]

1960년, 후루바야시의 권유로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노문과와 제2문학부 노문과에 각각 러시아어로 응시해서 후자에 합격했다.[14] 와세다 제2문 노문과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일원이 되어 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14]

이후 분트에서 탈퇴하고, 1961년 11월 미야하라 야스하루 등과 정치결사체 “범죄자동맹”을 결성했다.[15]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타니가와 간・요시모토 타카아키 등이 강사로 있던 “자립학교” 사무국에 참가하여, 강사였던 모리 히데토에게 미야하라와 함께 사사받았다.[15]

1963년, 동맹 기관지 단행본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赤い風船あるいは牝狼の夜)을 간행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요시오카 야스히로의 무수정 누드사진이 문제가 되어 음화반포죄로 경시청 지명수배를 받았다.[16] 이윽고 토츠카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다.[16] 모리 히데토가 히라오카 등의 신원인수인이 되어 주었다.[16] 이 “『붉은 풍선』 사건”은 와세다대 교수회에서도 의제로 오르내렸다.[17] “범죄자동맹은 『붉은 풍선』 사건 때문에 퇴학당했다”고 알려졌던 때도 있지만, 히라오카가 나중에 제적당한 것은 학비 미납이 원인으로, 이 사건과는 무관했다.[17] 한편, 『붉은 풍선』에 게재된 자립학교 학생 아카세바와 겐페이의 「천 엔권을 사진촬영한 작품」은 천 엔권 재판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17]

2. 2. 학생 운동과 좌파 활동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 노문과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분트)에 참여하여 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2] 이후 분트에서 탈퇴하고, 1961년 11월 미야하라 야스하루 등과 정치결사체 “범죄자동맹”을 결성했다.[3] 1962년에는 타니가와 간・요시모토 타카아키 등이 강사로 있던 “자립학교” 사무국에 참가하여, 강사였던 모리 히데토에게 미야하라와 함께 사사받았다.[15]

1963년, 동맹 기관지 단행본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赤い風船あるいは牝狼の夜)을 간행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요시오카 야스히로의 무수정 누드사진이 문제가 되어 음화반포죄로 경시청 지명수배를 받았다. 토츠카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고, 모리 히데토가 히라오카 등의 신원인수인이 되어 주었다.[16] 이 사건은 와세다대 교수회에서도 의제로 오르내렸으나, 히라오카가 나중에 제적당한 것은 학비 미납이 원인으로, 이 사건과는 무관했다.[17] 한편, 『붉은 풍선』에 게재된 자립학교 학생 아카세바와 겐페이의 「천 엔권을 사진촬영한 작품」은 천 엔권 재판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4년, 『달단인 선언』(韃靼人宣言, 현대사조사)으로 평론가 데뷔를 하였다.[5] 범죄자동맹 이후 히라오카는 아나키한 행동과 저작으로 “협객적 혁명가”, “무뢰한”이라 불리며 신좌파 문화업계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었다. 1970년에는 마츠다 마사오・아다치 마사오・사사키 마모루・아이쿠라 히사토와 “비평전선”을 결성해 잡지 『제2차 영화비평』을 창간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수호전』을 실마리로 착안하여, 전후 암시장에서 일본인 야쿠자와 “일제에 강제연행되었으나 전후에는 일제에 대한 진주군으로서 머물렀던” 3국인 간의 항쟁을 다루고,[18] 오오타 류・타케나카 로 등과 소위 궁민혁명론을 주창해 “신좌파 3바보 트리오”라고 불리기도 했다.[19] 이 궁민혁명론은 연합적군 사건 이후 충격과 침체에 빠져 있던 전공투 세대 일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6] 이와 관련해서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 『일본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 등의 르포 작품도 저술했다. 이 르포 조사에 협력했던 사람 중 하나가 사이토 노도카였다.[20]

1971년, 히라오카와 타니가와의 결렬은, 히라오카를 지원하는 문화인들, 히라오카와 마찬가지로 타니가와 등 경영진과 대립했던 타카하시 마사루가 이끌던 노동조합, 그리고 타카하시 마사루가 소속되어 있던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21][22](현대사조사에서 일어난 동경행동전선의 후신)에 참여하던 젊은이들이 결합하여 “텍크 투쟁”이라 불리는 소동으로 발전했다.[23]

1972년에는 대만인 군속 양명웅(楊明雄)의 전후보상 투쟁에 관여하고 대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미크로네사아 포나페섬의 군속 대니얼 로페스가 전후보상을 요구하며 내일했을 때 그를 지원했고, 이 운동을 계기로 아사쿠라 쿄우지・후나도 요이치・후나가와 테츠로 등과 함께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24] 1975년, 텍크 투쟁 및 로페스 투쟁 등에 참여한 사이토 노도카에키다 유키코・오오타 류 등과의 연결점으로 인하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배후가 아니냐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25][11] 이 때문에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도 일본적군의 별동대로서의 활동이 아니냐고 한동안 시끄러웠다.[13]

2007년 간행된 『와카마츠 프로, 밤의 삼총사』에서 1970년대에 썼던 “범죄적 혁명과 혁명적 범죄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재수록했고, 한국에 귀국한 뒤 문제를 일으켜 평판이 떨어진 김희로를 “우뚝 솟은 남근”이라고 옹호하거나, “문화대혁명은 세계동시혁명의 일환이었다. 나는 지금도 문혁 동조자(シンパ)”라고 기술했다. 2005년 간행된 『쇼와 재즈다방 전설』에서는 “좌익은 야스쿠니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전사한 병사들의 진혼을 우익과 체제측에 독점시킬 셈이냐”라는 소리도 했다.

2. 3. 평론가 데뷔와 초기 활동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도쿄시 혼고구 유시마신하나정(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유시마2정목)에서 태어났다.[2] 1945년 6월, 도쿄 대공습을 피해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사카와정(현재의 오다와라시)로 피난하여 사카와소학교에 진학했다.[2] 1949년 7월 동경으로 돌아와 분쿄구립 시오미소학교로 전학갔으며, 욱광학 사장의 운전수가 된 부친 덕에 소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이타바시구 시무라마에노정의 욱광학 사택으로 이사했다.[2] 케이카중학교를 거쳐 1959년 7월 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2] 고등학교 시절 치다 쿠이치에게 한문을, 타케모리 텐유에게 고전문학을, 후루바야시 타카시・코우노 토시로에게 현대문학을 배웠다.[2]

고등학교 졸업시험 도중 커닝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교사가 보는 앞에서 답안지를 찢어 졸업보류 처분을 받았다.[14][2] 이로 인해 탁구 특기생으로 내정되었던 니혼대학 진학이 취소되었고, 1960년 후루바야시의 권유로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 노문과에 러시아어로 응시하여 합격했다.[14][2] 와세다 제2문 노문과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일원이 되어 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14][2]

이후 분트에서 탈퇴하고, 1961년 11월 미야하라 야스하루 등과 정치결사체 “범죄자동맹”을 결성했다.[14][3]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 타니가와 간・요시모토 타카아키 등이 강사로 있던 “자립학교” 사무국에 참가하여, 강사였던 모리 히데토에게 미야하라와 함께 사사받았다.[15][3]

1963년, 범죄자동맹의 기관지 단행본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赤い風船あるいは牝狼の夜)을 간행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요시오카 야스히로의 무수정 누드사진이 문제가 되어 음화반포죄로 경시청 지명수배를 받았다.[16] 이윽고 토츠카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고, 모리 히데토가 히라오카 등의 신원인수인이 되어 주었다.[16] “『붉은 풍선』 사건”은 와세다대 교수회에서도 의제로 오르내렸으나, 히라오카가 나중에 제적당한 것은 학비 미납이 원인으로, 이 사건과는 무관했다.[17][4] 한편, 『붉은 풍선』에 게재된 자립학교 학생 아카세바와 겐페이의 「천 엔권을 사진촬영한 작품」은 천 엔권 재판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4년, 『달단인 선언』(韃靼人宣言, 현대사조사)으로 평론가로 데뷔했다.[5] 1966년 4월 이시이 쿄우지의 소개로 주식회사 텍크 개발부 잡지편집부문에 입사했는데, 이때 회사 전무이사가 타니가와 간이었다.[5] 1967년 『재즈 선언』(ジャズ宣言, 이자라서방)으로 재즈평론 분야에도 진출했다.[5] 1969년 2월에는 강담사의 여성지 『영 레이디』의 앵커맨이 되었고, 같은 해 2월, 코우 요시오의 권유로 천성출판에 입사해 시부사와 타츠히코의 후임자로 『피와 장미』 제4호(천성출판)을 편집했다.[5]

범죄자동맹 이후 히라오카는 아나키한 행동과 저작으로 “협객적 혁명가”, “무뢰한”이라 불리며 신좌파 문화업계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었다.[5]

2. 4. 궁민혁명론과 사회운동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분트)에 참여하여 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14] 이후 분트에서 탈퇴하고 1961년 미야하라 야스하루 등과 정치결사체 "범죄자동맹"을 결성했다.[15] 1963년에는 동맹 기관지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에 수록된 요시오카 야스히로의 무수정 누드사진이 음화반포죄에 해당되어 경시청 지명수배를 받았다.[16] 토츠카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고, 모리 히데토가 신원인수인이 되었다.[16]

1964년 『달단인 선언』으로 평론가로 데뷔한 히라오카는, "범죄자동맹" 이후 아나키한 행동과 저작으로 "협객적 혁명가", "무뢰한"이라 불리며 신좌파 문화계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었다.[17] 1970년에는 마츠다 마사오, 아다치 마사오 등과 "비평전선"을 결성하고 잡지 『제2차 영화비평』을 창간했다.

1970년대에는 오오타 류, 타케나카 로 등과 소위 궁민혁명론을 주창하며 "신좌파 3바보 트리오"라고 불리기도 했다.[18] 궁민혁명론은 연합적군 사건 이후 침체되어 있던 전공투 세대 일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19] 히라오카는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 『일본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 등의 르포 작품을 저술하며, 사이토 노도카 등의 협력을 받았다.[20]

1971년, 히라오카는 주식회사 텍크에서 타니가와 간과 결렬하고, "텍크 투쟁"이라 불리는 소동으로 발전했다.[23] 1972년에는 대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미크로네시아 포나페섬 군속의 전후보상 요구를 지원하며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24] 1975년에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배후라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25][24] 미크로네시아 독립운동도 일본적군의 별동대 활동으로 의심받았다.[26]

1970년대 후반 신좌파 퇴조 이후에는 문학, 예능 평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2007년에는 과거 자신의 글을 재수록하고 김희로를 옹호하거나 문화대혁명 동조자임을 밝히는 등, "혁명/범죄" 사상이 여전함을 드러냈다.[18] 2005년에는 좌익도 야스쿠니에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18]

2. 5. 후기 활동과 사망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1970년대 신좌파 퇴조 이후 가나가와현 하야마정으로 이주하여 문학과 예능 평론 활동을 했다.[12][11] 논평 대상은 쓰쓰이 야스타카, 이쓰키 히로유키, 야마다 후타로, 야마구치 모모에, 가와치 온도, 미나미 하루오, 오오야마 마스다츠 등이었다.[12][11] 특히 쓰쓰이 야스타카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쓰쓰이론을 다수 집필했다. 1975년 야마시타 요스케전일본냉중화면애호회를 결성하자 우에스기 세이분, 오쿠나리 마쓰 등과 함께 주요 논객으로 참여했다. 오오야마 마스다츠의 극진공수도에 입문하여 유단자가 되기도 했다.[12][11]

1990년대에는 3000쪽에 이르는 대장편 소설 『황제원무곡』(皇帝円舞曲)을 집필했다.[12][11] 이 소설은 히라오카 자신과 지인들을 모델로 미우라반도의 독립과 일본과의 전쟁을 그린 현대판 수호전이었다.[12][11] 1994년 4월 1일, 나카노 선플라자에서 개최된 「쓰쓰이 야스타카 절필제」에 참가했다.[12] 그 절필제를 비판한 고바야시 요시노리에 대하여, 저서 『쓰쓰이 야스타카의 절필을 둘러싼 싸움질 논집』에 수록된 『“고마니즘”의 얄팍한 정의』에서 반론했다.[12] 또한 요코하마의 노게정을 거점으로 한 미니컴 『하마노게』(ハマ野毛)를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편집・간행했다.[12]

2007년 간행된 『와카마츠 프로, 밤의 삼총사』에서 1970년대에 썼던 “범죄적 혁명과 혁명적 범죄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재수록했고, 김희로를 옹호하거나, “문화대혁명은 세계동시혁명의 일환이었다. 나는 지금도 문혁 동조자(シンパ)”라고 기술했다.[12][11] 2005년 간행된 『쇼와 재즈다방 전설』에서는 “좌익은 야스쿠니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전사한 병사들의 진혼을 우익과 체제측에 독점시킬 셈이냐”라는 소리도 했다.[12][11]

2009년 7월 9일 오전 2시 50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12][11] 향년 68세.[12][11]

3. 주요 저작 및 활동

3. 1. 주요 저서


  • 타타르인 선언(현대사조사, 1964년)
  • 범죄 또는 혁명에 관한 여러 장(현대사조사, 1967년, 1973년 다이와쇼보에서 재출간)
  • 재즈 선언(이자라 서방, 1969년)
  • 지옥계 24 평岡正明 평론집(호가쇼텐, 1970년)
  • 영구 남근 16(이자라 서방, 1971년)
  • 재즈 외에 신은 없다(三一書房, 1971년, 1991년 재출간)
  •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호가쇼텐, 1971년)
  • 일본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조출판사→조문고, 1972년)
  • 모든 범죄는 혁명적이다(현대평론사, 1972년)
  •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당했는가(조출판사, 1973년)
  • 범죄·바다를 건너다(현대평론사, 1973년)
  • 사이고 다카모리에 있어서의 영구 혁명(신인물왕래사, 1973년)
  • 암시장수호전(제3문명사, 1973년)
  • 마릴린 먼로는 프로파간다이다(이자라 서방, 1973년)
  • 바다를 보고 있던 자토이치(이자라 서방, 1973년)
  • 수호전 궁민 혁명을 위한 서설 (다케나카 로와의 공저, 三一書房, 1973년)
  • 재즈 필링(아딘 서방, 1974년)
  • 노래가 들어간 수호전(음악지우사, 1974년)
  • 히틀러학 입문 혁명을 지향하는 여러분에게(조출판사, 1975년)
  • 남방 침략론(아딘 서방, 1975년)
  • 슬랩스틱 쾌인전(백천서원, 1976년)
  • *유이 쇼이치, 오모리 타다시, 사사키 마모루, 손코 마주, 오쿠나리 타츠, 오야마 마스타츠, 누노카와 테츠로, 우에스기 기요후미, 신주쿠 "버드랜드" 주인, 우루우 료스케, 아카츠카 후지오, 이케다 케이, 하뉴 미치오, 가미 아키라를 논하고 있다.
  • 만찬의 사상 (시라이시 카즈코, 오쿠나리 토오루와의 공저, 주택신보사, 1976년)
  • 마계전생 크로스오버 작가론(TB 디자인, 1977년 3월)
  • 전후 일본 재즈사(아딘 서방, 1977년 4월)
  • 일본 재즈전 사가판 모칸보 세션부터 냉면 축제까지 (시미즈 토시히코, 오쿠나리 토오루와의 공저, 에이프릴 뮤직, 1977년 7월)
  • 이시하라 간지 시론(백천서원, 1977년 5월)
  • 첫 번째 전차까지(브론즈사, 1977년 6월)
  • 노래의 정세는 훌륭하다(동우사, 1978년 8월)
  • 야마구치 모모에는 보살이다(고단샤→고단샤 문고, 1979년 10월)
  • *완전판 야마구치 모모에는 보살이다(시호다 이누히코 (편집), 고단샤, 2015년 6월)
  • 보살의 은퇴(수영서방, 1980년 8월)
  • 일본의 노래가 변한다(수영서방, 1980년 11월)
  • 타타르인풍의 고환 쥐는 법(가면사, 1980년 10월)
  • 도모 스미마셍 히라오카 마사아키・우에스기 키요후미 대담집 (백야서방, 1981년 12월)
  • 바디 & 소울(수영서방, 1981년 1월)
  • 쓰쓰이 야스타카는 이렇게 읽어라(CBS 소니 출판, 1981년 3월)
  • 과도기야, 아빠 part3(약간 좌익편)(수영서방, 1981년 4월)
  • 타인의 구멍 속에서(수영서방, 1981년 5월)
  • 과도기야 아빠 part 1(미학편)(수영서방, 1981년 9월)
  • 과도기야 아빠 part 2(싸움 논집·격투기편)(수영서방, 1981년 6월)
  • 타모리야! (CBS 소니 출판, 1981년 12월)
  • 속물 도감의 책 전 세계 대략 40억 명의 속물에게 바침 (군웅사 출판, 1982년 1월)
  • 단 오니로쿠・암흑 문학의 세계 (오카니와 노보루와의 공저, 三一書房, 1982년 10월)
  • 가요곡 보였다(뮤직 매거진, 1982년 4월)
  • 형이라고 불러줘 뻣뻣한 아저씨, 1년간의 야상곡(정보센터출판국, 1983년 6월)
  • 이봐, 친구(PHP 연구소, 1983년 11월)
  • 쓰쓰이 야스타카는 이렇게 읽어라의 역습(CBS 소니 출판, 1983년 12월)
  • 천람 사상 오오스모 히라오카 마사아키, 우에스기 키요후미 대담집 확대 차○별 편 (수영서방, 1983년 8월)
  • 고급 예술 선언 부・종합 상사 HAND-JOE의 발자취 고급 예술 협회 저 (미나미 신보, 스에이 아키라, 마키가미 코이치, 아카세가와 겐페이, 이토이 시게사토 외) (JICC 출판국, 1985년 5월)
  • 전격 프랭크 치킨스 (요모다 이누히코와의 공저, 아사히 출판사, 1985년 8월)
  • 가와치 오토(河内音頭)·흔들리다(아사히 출판사, 1984년 11월)
  • 시리즈 민간 일본 학자 하세가와 신 메리켄 부두의 구쓰카케 도키지로(리브로포트, 1987년 4월, 그 후, 채류사, 2011년 12월)
  • 맥아더가 돌아온 날 텔레비전은 미국 점령군이 묻은 지뢰인가(청표서방, 1987년 9월 10일)
  • 홍콩 희극 대서설 홍콩 중국인에 의한 또 하나의 문화 대혁명(정계왕래사, 1987년 12월)
  • 삼칠전 남가몽(곡정마금 작을 현대어 역)(창수사, 1987년 12월)
  • 국제 염가주의(시사통신사, 1988년 4월)
  • 관능 무장론(신천사, 1989년 2월)
  • 시미즈 지로초의 메이지 유신 격동기에 맞서는 〈남자의 뜻〉이란(광문사, 1989년 7월)
  • 대가요론(지쿠마 서방, 1989년 8월)
  • 미소라 히바리의 예술(네스코, 1990년 6월)
  • 신내적(평론사, 1990년 12월)
  • 쓰쓰이 야스타카는 이렇게 읽어라의 보복(대륙서방, 1990년 11월)
  • 낭곡적(청토사, 1992년 7월)
  • 무도론 (오야마 마스 타츠와의 공저, 도쿠마 서점, 1992년 10월)
  • 후타로는 이렇게 읽어라 야마다 후타로 전체론(도서신문, 1992년 12월)
  • 평岡正明 온에어/귀의 쾌락(매일신문사, 1992년 12월)
  • 평민 예술(三一書房, 1993년 11월)
  • 요코하마적(1993년 12월)
  • 오야마 마스타츠를 믿어라 갓핸드 본기(수영서방, 1994년 9월)
  • 쓰쓰이 야스타카 단필을 둘러싼 싸움 논집(빌리지 센터 출판국, 1994년 9월)
  • 츠츠이 야스타카의 역습 언론의 자유를 압살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편저) (겐다이 서림, 1994년 2월)
  • *고모리 군야・우스이 유우지・하야카와 겐・량 세키지쓰・오카니와 노보루・오기노 안나・미나미 아멘보・야마시타 요스케
  • 요코하마 B급 담 타운지 『하마노게』 앤솔로지(편저)(빌리지 센터, 1995년 2월)
  • 대도예 및 변두리의 자유(해방출판사, 1995년 5월)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수수께끼 풀이(아사히신문사, 1995년 9월)
  • 양석일은 세계 문학이다(빌리지 센터 출판국, 1995년 12월)
  • 플렌티 플렌티 소울 평岡正明 재즈 논집(헤이본샤, 1995년 12월)
  • 중국 수호전・의협의 꿈 (황파와의 공저, 일본방송출판협회, 1996년 4월)
  • 시미즈 지로초전 제7재자서호조절(청토사, 1996년 3월)
  • 변태적(빌리지 센터 출판국, 1996년 7월)
  • 황제 원무곡 제1-5부(빌리지 센터 출판국, 1996-97년)
  • 나카모리 아키나/가요곡의 종막(작품사, 1996년 7월)
  • 미나미 하루오라는 영구 혁명(작품사, 1996년 11월)
  • 재즈적(매일신문사, 1997년 1월)
  • 노게적 요코하마 문예 부흥(해방출판사, 1997년 2월)
  • 자토이치가츠 신타로 전체론(카와데 서방 신사, 1998년 2월)
  • 마일스 데이비스의 예술(매일신문사, 1998년 10월)
  • 검은 신(매일신문사, 1999년 6월)
  • 에도마에 일본 근대 문예 속의 에도주의(빌리지 센터 출판국, 2000년 3월)
  • 찰리 파커의 예술 Music of Bird(매일신문사, 2000년 12월)
  • 키네마 삼국지(아톤, 2001년 4월)
  • 더 그레이티스트 히츠 오브 히라오카 마사아키(시호다 이누히코 편)(芳賀書店, 2001년 8월)
  • DJ (사쿠마 슌과의 공저, 아트온, 2001년 9월)
  • 『총특집・적군 1969→2001』아다치 마사오 부부, 야마모토 마리코, 나카야마 치나츠, 마츠다 마사오, 히라이 겐 외, 가와데 서방 신사, 2001년 - 『적색 잔협전』을 집필
  • 대혁명론(카와데 서방 신사, 2002년 3월)
  • 위 원트 마일스(카와데 서방 신사, 2002년 12월)
  • 쇼와재즈 찻집 전설(헤이본샤, 2005년 10월)
  • 대낙어(호세이 대학 출판국, 2005년 1월)
  • 철학적 낙어! (지쿠마 서방, 2005년 9월) - 가츠라 시자쿠 논
  • 전후 사건 파일 아카츠카 후지오, 안보, 미시마 유키오, 적군, 히바리의 죽음, 외(매거진 파이브, 2006년 4월) (히라오카 마사아키 컬렉션)
  • 신생적, 문락적(고단샤, 2006년 6월, 그 후 고단샤 문고, 2010년 3월)
  • 일본 재즈자 전설(헤이본샤, 2006년 7월)
  • 히라오카 마사아키의 DJ 석(아이이쿠샤, 2006년 10월)
  • 앙그라 기관설 어둠의 표현자 열전(매거진 파이브, 2007년 1월) (히라오카 마사아키 컬렉션)
  • 독혈과 장미 콜트레인에게 바치다(국서간행회, 2007년 7월)
  • 요코하마 정야(아이이쿠샤, 2007년 10월)
  • 쉬르리얼리즘 낙어 선언(백야서방, 2008년 2월)
  • 와카마츠 프로, 밤의 삼총사(아이이쿠샤, 2008년 2월)
  • 흑인 대통령 탄생을 새치모로 축복한다(아이이쿠샤, 2008년 11월)
  • 쇼와 만화가 전설(헤이본샤 신서, 2009년 3월)
  • 카이라쿠테이 블랙의 독낙어(채류사, 2009년 9월)
  • 문고는 이렇게 읽어라! 마차아키적 문학론(채류사, 2010년 1월)
  • 미소라 히바리 노래는 바다를 넘어(매일신문사, 2010년 2월)
  • 다테카와 단시와 낙어의 상상력(나나츠모리 서관, 2010년 3월)
  • 예능의 비적(나나츠모리 서관, 2010년 5월)
  • 인지초(사람의 시작) 히라오카 마사아키 자전(채류사, 2012년 7월)

3. 2. 사회 운동

3. 3. 기타 활동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1969년 와카마츠 코지가 제작·기획하고 아다치 마사오가 감독한 영화 《여대생 게릴라》에 출연하였다. 1982년에는 츠츠이 야스타카 원작, 나이토 마코토 감독의 《속물도감》에 출연하였다. 1985년에는 단 키리쿠 원작, 니시무라 쇼고로 감독의 《꽃과 뱀 지옥편》에 출연하였다.

1974년에는 구 일본령 미크로네시아를 무대로 한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 초고》에 참여하였다. 1979년에는 누노카와 테츠로 감독의 《바람에 휩쓸린 시간 거꾸로》에 참여하였다. 1998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원작, 아라키 타쿠 감독의 《비밀 제사》에 참여하였다.

아카츠카 후지오의 만화 No.1 싱글즈 스페셜 에디션 부클릿에 글을 기고하였다. 조앙 카에타노 극장의 엘리제치 카르도주(신세이도・오마가토키) 부클릿에도 글을 기고하였다.

4. 수상


  • 1990년, 「대 가요론」으로 대중문학연구상 평론·전기 부문 수상.
  • 1993년, 『낭만적』으로 사이토 료쿠 상 수상.

5. 평가 및 영향

6. 각주

참조

[1] 문서 平岡の生前、特に1970年代頃は「ひらおか・せいめい」と音読みされるのが一般的だった。これは吉本隆明が「よしもと・りゅうめい」と呼ばれていたのと同じ当時の流行。
[2] 서적 人之初
[3] 서적 実録・我が草莽伝 東京白川書院
[4] 서적 人之初
[5] 서적 現在につづく昭和40年代激動文化 汎世書房 2012
[6]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7]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8]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9] 웹사이트 美学校アーカイブ https://web.archive.[...]
[10]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11] 뉴스 稀代のノンフィクション作家が逝く――朝倉喬司とその時代をふりかえる http://toshoshimbun.[...] 図書新聞 2011-01-01
[12] 뉴스 読売新聞 1975-05-23
[13] 서적 昭和ジャズ喫茶伝説 平凡社 2005
[14] 서적 人之初
[15] 서적 実録・我が草莽伝 東京白川書院
[16] 서적 実録・我が草莽伝 東京白川書院
[17] 서적 人之初
[18] 서적 現在につづく昭和40年代激動文化 汎世書房 2012
[19]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20]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21]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22] 웹사이트 美学校アーカイブ https://web.archive.[...]
[23]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風塵社 2004
[24] 뉴스 稀代のノンフィクション作家が逝く――朝倉喬司とその時代をふりかえる http://toshoshimbun.[...] 図書新聞 2011-01-01
[25] 뉴스 読売新聞 1975-05-23
[26] 서적 昭和ジャズ喫茶伝説 平凡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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