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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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과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김재규와 차지철 간의 갈등이 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 등을 암살 동기로 주장했다. 사건 이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출범했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으로 이어졌다. 김재규는 사형되었고, 사건 관련자들은 처벌받았으며,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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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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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제목 | 박정희 암살 사건 |
다른 명칭 | 10·26 사건, 십이륙 사건, 궁정동 사건 |
로마자 표기 | sibiyuk sageon |
한글 표기 | 10·26사건 |
한자 표기 | 10·26事件 |
사건 정보 | |
발생 날짜 | 1979년 10월 26일 |
시간 | 오후 7시 41분 (한국 표준시)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현 청운효자동 무궁화동산) |
피해자 | |
사망자 | 박정희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경호처장) 안재송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운전기사) |
생존자 | 김계원 (비서실장) 박상범 (대통령경호실 수행계장) 심수봉 (가수) 신재순 (가수) |
가해자 | |
주범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공범 |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흥주 대령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유성옥 이기주 서영준 김태원 |
사용 무기 | |
무기 | Smith & Wesson Model 36 권총, Walther PPK 권총 |
결과 | |
결과 |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등 사망 김재규 체포 계엄령 발령 |
관련 정보 | |
참고 자료 | Yi In-im, the last traitor of Goryeo... The more flexible the waist and knees of a traitor, the better (매일경제) |
관련 웹사이트 | 10·26사태 (네이버) |
도서 | 박근혜 문재인 기득권 국제정치 |
관련 페이스북 | Designersparty |
관련 뉴스 | 고 박정희대통령서거 제39주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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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배경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18년 동안 장기 집권하며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3] 중앙정보부(KCIA)는 1961년 설립되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야당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 공작에 깊이 관여했다.[4]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패할 뻔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영구 집권을 꾀했다.[5]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 의석 3분의 1을 할당하고, 대통령 임기 제한을 폐지하며, 긴급 명령 발령 및 국회 해산 권한을 부여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6]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가 거세지자 박정희는 긴급 명령을 발동하여 반대 행위를 처벌했다.[6]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는 계속되었고, 1978년 대한민국 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민주공화당을 앞서는 결과가 나타났다. 1979년에는 법원이 김영삼의 신민당 당직을 무효화하고,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자, 미국은 주한 미국 대사를 소환하며 항의했다.[7]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의 고향인 부산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여 30개 이상의 경찰서가 공격받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8] 이승만 대통령 시대 이후 최대 규모였던 이 시위는 마산 등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고, 학생과 시민들은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했다.[8]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시위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와 같다고 판단하고, 박정희에게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9] 그러나 박정희는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6]
2. 1. 박정희의 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과 안보를 명분으로 장기 집권을 추진했으며,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했다.[5]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할당하고 대통령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6]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응하여 박정희는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했다.[93] 1970년 6월 15일, 박정희는 주한미군 감축에 반대하며, 한국군 강화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92] 1972년 7월 4일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 위협을 막는 시간을 벌면서, 자주국방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88][93][94]
그러나 이러한 박정희의 정책은 김재규를 비롯한 측근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1978년 대한민국 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승리하고, 1979년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직을 법원이 무효화하면서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다.[7]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하자, 김재규는 시위가 단순한 학생들의 폭동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민중봉기"와 같다고 판단했다.[9] 그는 박정희에게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박정희는 강경 진압 의사를 밝혔다.[6]
2. 2. 정책에 대한 비판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0.26 암살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을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며 박정희의 정책을 비판하였다.[97][95]자주국방이 이상일는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독 같은 나라도 집단안보를 강조하고 있는 터에 우리나라가 자주 국방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발상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한국어[97][88]
1979년 당시 김재규는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및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와 자주 만나 미국인들 시각에서 본 한국 경제와 국내정치에 대한 의견을 들으며 미국 측과 긴밀하게 교류하였다.[97]
2. 3. 파벌 싸움
박정희 체제 당시 청와대에서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 보안사령관 김재규 같은 인물들을 축으로 하는 권력자들이 존재했다. 김재규의 라이벌인 육군방첩대장 윤필용 또한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이들 4명 측근을 적당히 경쟁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권력을 관리했다.[99]1972년 10월 유신 선언 이후 파벌 싸움은 더욱 과열되었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한 박정희 주변의 핵심 측근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었다. 특히 1973년 ‘윤필용 사건’은 청와대 권력구도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윤필용과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처벌받고, 윤필용과 가깝게 지내던 민간인들도 피해를 입었다.[88]
박정희 정권 때 윤필용 사건 수사를 담당하며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적발했던 강창성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체포되어 고문 수사를 당하고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103][104]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임하고 차지철이 후임자가 되었고, 1976년 김재규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며 청와대 최측근 세력으로 복귀하게 된다.[88]
당시 김재규에 대한 장교들의 여론은 부정적이었으나, 주변에 인재가 없어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보았다.[88]
중앙정보부(KCIA)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내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다. KCIA는 야당을 약화시키기 위한 많은 배후 정치 공작에 깊이 관여했다.[5]
박정희의 독재에 대한 반대가 청와대 외부에서 거세지는 가운데, 청와대 내부에서는 김재규[11]와 차지철[12]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13] 이러한 경쟁은 주로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의 영역을 침범하고 공개적으로 김재규를 무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거의 만인의 혐오를 받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차지철은 박정희의 측근으로 그의 총애를 받는 가장 신임하는 조언자가 되었다.[14]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경쟁은 1979년 말 일련의 정치적 위기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두 라이벌은 증가하는 정권 반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충돌했다. 김영삼이 신민당 대표로 당선되자 차지철은 그 책임을 중앙정보부에 돌렸고, 이는 김재규를 격분시켰다.[15]
이후 김영삼이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 지원 중단을 촉구하자, 차지철은 김영삼의 국회 제명을 압박했다.[16] 김재규는 이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17] 차지철은 그의 강경한 태도가 박정희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쉽게 김재규를 제압했고, 악화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김재규의 무능한 중앙정보부 지휘를 비난했다.[18]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으며 측근이었다. 그러나 KCIA 부장 취임 후에는 여러 반체제파 탄압 정책에 관여하는 한편 민주화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였고, 박 대통령에게 "학생 운동 탄압이 너무 미온적이다"라며 자주 질책받는 등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김재규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차지철은 거만한 행동으로 정권 안팎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측근 중 한 명이었고, 김재규와는 라이벌 관계였다. 차지철은 김재규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80] 김재규가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이를 방해하거나, 때로는 먼저 같은 보고를 하거나, 보고 중에 의견을 끼어들기도 했다. 김재규에게 직접 연락할 때는 직원에게 전화를 시켜 김재규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전화를 받는 등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81]
게다가 차지철은 김재규와의 투쟁의 일환으로 사설 정보대를 운영하는 등 KCIA의 직무를 침해하는 행동을 보였고, 김재규가 이끄는 KCIA가 야당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 취임 저지 공작을 벌이자 경호실장의 위치를 이용하여 방해하였다.[82] 김재규는 공작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차지철에게 책임을 떠넘겨야 했다. 더욱이 부마 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에서 온건책이 아닌 차지철이 주장한 강경책이 박 대통령에게 채택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재규가 두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살해를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2. 4. 장준하의 쿠데타 기획 (설)
10월 유신 이후, 김재규가 장준하 등 재야 인사들과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87][106]장준하는 1975년 광복 30주년에 맞춰 '8월 거사'를 계획했으며, 여기에는 김대중, 함석헌, 홍남순 등 재야인사들과 군부 동조 세력이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107] 2006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가 재야세력을 규합해 거사를 치르기로 합의한 사실이 밝혀졌다.[108] 그러나 김대중은 쿠데타나 대통령 암살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09]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은 김재규가 '민주화 일을 같이 할 애국군인'이라며 장준하와 의기투합했다고 증언했다.[110] 이부영 전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또한 김재규의 암살 동기가 장준하와 교감했던 유신정권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11] 이부영은 장준하가 김재규를 건설부장관 시절부터 괜찮은 군 출신 인사로 여겼으며, 유신체제에 대해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고 회고했다.[88]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 역시 김재규가 장준하를 회유하려다 오히려 장준하에게 감화되었다고 증언했다.[88]
김재규는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주장했으나,[110][112] 1978년 김종필과의 대화 내용과는 상반된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1978년 2월 김재규는 김종필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임무에 모든 기능과 자원을 집중하기로 하였다"고 말했다.[113]
3. 사건의 진행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과 함께 만찬을 가졌다.[9][23]
만찬 도중 김재규는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단하고 경호원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8]
저녁 7시 41분경,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는 '건방져'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를 꺼내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을 쏘았다.[121] 총이 고장 나자 김재규는 박선호에게서 스미스 앤 웨슨 M36 리볼버를 받아 차지철과 박정희를 다시 쏴 사살했다.[9][21]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안재송과 정인형을 사살했고, 박흥주는 주방에서 경호원들을 제거했다.[34]
이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본부로 향한다.[88]
3. 1. 사건 당일의 행적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보강공사 준공식에 참석했다.[114][115] 오후에는 도고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청와대로 돌아왔다.[88]한편,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오후 6시에 궁정동 청와대 안가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118]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 박선호와 함께 안가로 이동하여 총을 준비했다.[88][119][120]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도 연락하여 같은 장소에서 오후 6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88] 이는 대통령과의 만찬 시간과 겹치게 한 의도적인 조치였다.[88]
오후 5시 10분경,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도착하여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었다.[88] 저녁 6시 5분경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김재규는 총을 숨긴 채 이들을 맞이했다.[121]
박선호는 신재순과[122] 심수봉을 만찬 장소로 데려와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123]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은 전통 한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단하고 경호원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8]
3. 2. 오후 2시 밀담 (설)
1979년 10월 26일(사건 당일) 오후 2시경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앞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먼저 만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124]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125]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는 당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김재규를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3. 3. 엇갈리는 증언들
김계원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오전 회의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가기 위해 당시 '권력의 제2인자'로 불리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에게 헬기에 동승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때 차지철이 대통령이 탄 헬기에는 자리가 없다고 거절하며 2호기를 타라고 했고, 기분이 상한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건너뛰고 KBS 당진송신소 보강공사 준공식에 승용차로 뒤늦게 합류했다고 증언한다.[88]그러나 김재규와 박흥주의 증언에는 헬리콥터 갈등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김재규가 당진송신소 준공식까지 승용차로 가서 합류했다는 내용도 없다. 이들은 김재규가 남산 정보부장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다가 차지철의 전화를 받고 궁정동으로 출발했다고만 증언한다. 또한 김재규가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나타났다는 김계원의 증언은, 행사 전날 경호실로부터 "대통령은 예정대로 참석하지만 정보부장이 빠지게 되었으니 방송사 측도 참석인원을 줄이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최서영 전 코리아헤럴드 사장의 회고와 상반된다.[127]
김계원이 김재규의 PPK 권총을 쳐서 고장 냈다는 주장 역시 다른 증인들의 조서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사건 이후 제출된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연회장에서 정치·경제 문제로 인한 민중 소요에 자신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박 대통령에게 질타당했다고 주장한다.[128] 신재순 또한 최초 진술조서에서 차지철이 김재규를 자극하고 막말을 했었다고 증언하였다.[88]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역정을 냈으며, 이에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호응했다고 주장한다.[88]
다른 자료에 따르면, 신민당과 학생 시위, 노동자 파업을 강경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차지철이 연회 자리에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확산됐다고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고, 이에 박정희가 동의하며 4.19 혁명은 곽영주가 임의로 발포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번에는 발포권자인 본인이 국가원수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게 없다고 답변했다고 주장한다.[129]
그러나 훗날 신재순과 심수봉은 전두환이 계엄사 합수부 본부장 자격으로 발표한 내용 중 연회 자리에서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에 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은 창작이며, 합수부 측에서 거짓 진술을 강요했다고 주장한다.[88][130][131][132]
심수봉은 차지철과 김재규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했다거나, 연회 자리에서 박정희가 화를 내며 학생 시위를 더 확실하게 탄압하라는 요구를 했다던지 김영삼을 구속기소 하라는 대화는 없었으며, 연회 분위기는 좋았고 경호원들도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고 밝히며 1979년 기록된 자신의 진술조서 내용들[122] 중 일부를 번복한다.[133]
그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연회 자리에서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론을 제기하며 말다툼을 벌였다는 내용은 합수부와 언론이 김재규의 증언만을 정설로 받아들이면서 생성된 왜곡된 내용들이며, 합수부 조사 과정에서 신재순과 함께 그 내용이 틀렸다는 사실을 몇 차례 지적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88][134][135]
3. 4.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밖에서 돌아온 김재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 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를 꺼내 두 발을 쏘았다. 첫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맞았으며 두 번째는 박정희의 가슴에 맞았다.[121]김재규가 일어서며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이 격발 불량을 일으키며 고장이 나자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차지철은 '저 사람 왜 저래'하며 손에서 피를 흘리며 화장실 쪽으로 나갔고 그 순간 방안 조명이 모두 꺼졌다. 신재순은 박 대통령에게 괜찮냐고 재차 확인했고 박정희는 괜찮다고 똑똑히 대답하였다.[136]
한편 처음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을 죽였다.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나 김재규의 고장 난 발터를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와 맞바꿔주고 주변 탐색을 계속하였다.
차지철이 화장실에서 돌아와 박 대통령의 안부를 묻자 그때도 박정희는 괜찮다고 또박또박 대꾸하였다. 차지철이 경호원을 부르려고 다시 나가자마자 박정희의 상체가 쓰러졌고 심수봉이 쓰러진 대통령을 부축하려 하자 크르륵하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137]
갑자기 방의 불이 켜지고 차지철이 뒷걸음질치며 연회장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바로 코앞에는 김재규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차지철은 방 한쪽에 놓여있던 가구를 집어 들고 김재규에게 돌진했고 김재규는 뒤로 물러서면서 연달아 총을 쏘았다 (약 4발). 차지철은 폐와 복부에 총알이 박히며 퉁기듯 뒤로 나자빠졌다.
차지철을 쓰러뜨린 김재규는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다가와 신재순의 무릎에 있던 박정희 후두부에 총을 대고 50cm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고서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 박혔다. 머리 총상은 치명상이었다. 이어 박 대통령을 부축하던 심수봉을 향해서도 총을 겨누었으나[88] 총알이 떨어져 쏠 수 없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제각기 다른 방으로 도망쳤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몇 시간 뒤 심수봉과 다시 재회한 신재순은 자신이 화장실에 숨어 있었으며 차지철이 살아있길래 남효주와 같이 부축하려다 심수봉이 있는 방으로 보내졌다고 하였다. 공포에 질려있던 심수봉과는 달리 신재순은 '누구누구와 짠 모양이다', '누구누구가 사이가 좋지 않아 사건이 터졌다'며 그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력을 펼치며 대화를 걸었다고 한다. 두 여성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총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며(약 7발) 확인사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약 20분 뒤인 10시 30분경 남효주와 박선호가 나타나 둘을 별채로 안내한 뒤 20만원씩 건네주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비밀로 하고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일이 잘되면 상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 뒤 남효주가 내자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88]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본부로 향한다.[88]
4.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142]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과 함께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자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142] 박흥주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1980년 3월 6일 총살형에 처해졌다.[9][62]
김재규는 1심 도중 변호사 선임을 거부했는데, 이는 사건 조사관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면 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140] 이에 국선 변호사가 선임되었고, 변호사 없이 재판이 진행되었다.[141]
대법원에서는 김재규의 내란목적 인정 여부를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 전원합의체에서 판단을 했다. 1980년 5월 20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내란목적을 인정하지 않아 원심판결을 파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6인)보다, 김재규의 행위가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하며 저항권은 실정법에 근거가 없다는 다수의견(8인)을 받아들여 상고를 기각했다.[142]
김재규의 비서이자 전 부관이었던 박흥주는 1980년 3월 6일 사형(총살)당했다. 그는 암살 당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9][62]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를 포함한 다섯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9]
이름 | 역할 |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 대통령 암살자 |
박선호 | 중앙정보부 고위 요원이자 김재규가 중학교 교사였을 당시 제자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안가 운전사 |
이기주 | 안가 경비 책임자 |
김태원 | 안가 경비 요원 |
김계원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2년에 석방되었다.[9][15] 안가 경비 요원 서영준(徐榮俊)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7년 복역 후 석방되었다.[9]
5. 김재규의 변론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26 사건의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는데, 자유민주주의 회복, 국민의 희생 방지, 대한민국의 적화 방지, 미국과의 관계 회복, 독재 국가라는 국제적 이미지 개선이었다.[143]
김재규는 부마 민주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될 경우 4·19 혁명보다 더 큰 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이승만과 달리 박정희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재규에 따르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말했으며, 박정희 또한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암살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143]
김재규의 암살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충동적인 행위였다는 설, 차지철과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는 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설에 따르면, 김재규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마지막 임기를 약속한 것을 어기고 유신 헌법을 공포하자 크게 실망했으며, 미국의 외교 전문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했고, 장준하 등 야당 지도자들과도 비밀리에 접촉했다.[56] 김수환 추기경에게 유신헌법 개정 방안을 건의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49][58]
반면,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59]
5. 1. 암살 후 집권 계획
김재규는 대통령 제거 이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고,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출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88]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김재규는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같은 조사에서 대통령 시해 후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했냐는 질문에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다"고 기록된다.[88]
6. 미국 배후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 직전 김재규가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124]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125] 사건 당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김재규를 만난 이유와 대화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비밀 전문들이 부분 공개되면서, 사건 며칠 전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국 배후설이 제기되었다.[144] 재미언론인 안치용이 추가로 발견한 비밀 문서에서 글라이스틴 대사가 사건 당일 김재규를 만난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이 커졌다.[138] 논란 이후 미국 정부는 해당 문서들을 다시 비공개 처리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악화된 한미 관계 개선을 거사 이유 중 하나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44]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했고,[145] 조사 과정에서 수사관에게 미국 측의 연락 여부를 거듭 물었다고 한다.[146][147]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미국 측과 모종의 묵계를 체결했다는 의혹도 있다. 1993년 말 미국이 공개했다가 삭제한 비밀 문서 전문 11항에는 전두환이 미국을 경고하고, 미국이 박정희 시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138]
기밀 해제된 미 대사관 문서에 따르면, 당시 비상계엄을 주도한 한국 군부 세력에 대해 "전두환이 중심적(central)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분석한 반면,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서는 "A helpless president"(무력한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48] 5.18 진상조사위원회는 이 문서를 통해 "한국에 전두환 개인뿐 아니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인 쿠데타 세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148]
삭제된 비밀 문서 마지막 12항에는 로버트 브루스터가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와의 만남에 동석했다는 내용이 있다.[138][149]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 글라이스틴 대사를 찾아와 "박 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150] 글라이스틴은 즉시 워싱턴에 이 사실을 알렸다.[150]
1979년 11월 초, 미국 하원에서 박정희 암살 관련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125]
7. 미국의 대응
10·26 사건 당시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을 접한 후, 한반도 안보 상황을 주시하며 대응책을 마련했다. 류병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은 10월 26일 자정 무렵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에게 "박 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고,[150] 글라이스틴 대사는 워싱턴에 이 사실을 긴급히 알렸다.[150]
한편, 미국 정부의 비밀 전문들이 공개되면서 10·26 사건 며칠 전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국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144] 글라이스틴 대사가 10·26 사건 당일 김재규를 만난 사실을 숨겨왔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138] 이후 미국 정부는 해당 문서들을 다시 비공개 처리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악화된 한미관계 개선을 거사 이유 중 하나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144]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의 주장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며 강하게 부인했다.[144] 그러나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하고,[145] 조사 과정에서 '혹시 미국 측에서 무슨 연락이 없느냐'고 수사관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146][147]
1979년 11월 초, 미국 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 개최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를 막아야 한다며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125] 그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암살에 공모했다는 의혹을 증폭시킬 것을 우려했다.[125]
일각에서는 미국 CIA가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암살 배후에 있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8. 사건의 여파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1979년 12월 6일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51]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부터 조기 헌법 개정과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민주화를 약속했고, 실제로 긴급조치 해제, 정치범 석방,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 등을 통해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편, 국군수도병원은 보안사를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소장의 보안사는 대통령 사망 2시간 만에 병원장을 통해 대통령 사망 사실을 가장 먼저 인지한 정보 기관이 되었다.[153]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12 사태를 일으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군의 중립성을 유지하려던 정승화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권세를 키워가는 전두환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 내부 비밀결사 "하나회"가 군 요직을 독점하는 것을 문제 삼아 해체하려 했기에 전두환과 대립했다. 이에 전두환 등 하나회 회원들은 12월 12일 밤, 노태우 등과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정승화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음에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점이 약점이 되어 대통령 암살 공범 혐의로 체포되었다. 군에 밝지 않고 비상사태 수습 능력이 부족했던 최규하는 이러한 움직임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80년 신군부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제4공화국이 끝나고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을 폐쇄하여 민주화 여론을 억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군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9. 처벌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 김재규가 체포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140]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등의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과 함께 서울구치소(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141] 박흥주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1980년 3월 6일 총살형에 처해졌다.[142]
김재규는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여 국선 변호사가 선임되었고, 변호사 없이 재판이 진행되었다.[141] 1, 2심에서 신속하게 사형 선고가 이루어졌지만, 대법원 형사3부에서 내란 목적 인정 여부를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여 사건 발생 207일 만인 1980년 5월 20일 선고 공판에서 다수의견(8인)이 소수의견(6인)을 누르고 상고 기각을 결정했다.[142]
대법원은 "내란죄는 목적범으로서 그 목적은 엄격한 증명사항에 속하고 직접적인 임을 요하나 결과 발생의 희망, 의욕임을 필요로 한다고는 볼 수 없고 또 확정적 인식임을 요하지 아니하며 다만 미필적 인식이 있으면 충분하다"라고 판시했다.[154]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직책 | 죄목 | 형량 | 비고 |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내란목적 살인, 내란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등 | 사형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 살인죄 | 무기징역 |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 사형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 |
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사형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사형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
이기주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사형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
김태원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사형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
유석술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증거 은닉죄 | 징역 3년 | [155] |
서영준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징역형 |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유신 정권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고, 재판 기록 검토 결과 대법원 판사 6명이 "내란 목적 살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상고 기각 이후 5명이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 제출을 거부한 정태원은 강제 해임되었다. 이후 양병호는 1993년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저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뒤집을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56]
10. 평가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10.26 암살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며 박정희의 정책을 비판하였다.[97][95]
1979년 당시 김재규는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 등 미국 측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미국 측 시각에서 본 한국 경제와 국내 정치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97]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6월 26일 카터 전 대통령 방한 당시, 미국 측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45분간 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연설하는 등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96]
박정희 체제 당시 청와대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 보안사령관 김재규 등 여러 권력 파벌이 존재했다. 박정희는 이들을 경쟁, 견제시키며 권력을 관리했다.[99] 1971년 김재규는 윤필용의 부하들에게 도청을 당한 후 좌천되었고,[100] 1973년에는 '윤필용 모반사건'으로 이후락이 견제를 받았다.[88]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박종규가 사임하고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었다.[88] 김재규는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했다.[88]
당시 장교들 사이에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으나, 박정희는 1973년 '윤필용 사건'과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으로 인재가 부족하여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88]
10. 1. 긍정적 평가
10·26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명하기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어 종교계, 민주화 운동 인사 등 수백 명이 참여했다.[157] 재야 단체에서는 김재규를 단순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157]구명 운동에는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분야 | 참여 인사 |
---|---|
원로 | 윤보선, 함석헌 |
가톨릭 | 지학순, 김승훈, 함세웅, 김택암, 신현봉 |
개신교 | 문익환, 김정준, 박형규, 강희남, 안병주 |
언론계 | 천관우, 송건호, 임재경, 이병주, 정태기 |
문단 | 고은, 박태순, 양성우, 김병걸, 이호철 |
학계 | 김동길, 이문영, 백낙천, 이영희, 박천재 |
여성 | 공덕귀, 김옥실, 박영숙, 박순길, 조정하 |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10·26 사건 대법원 판결에서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여섯 명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 사직당한 것을 사법부 역사의 오욕이라고 평가했다.[158]
김삼웅 전 대한매일 주필은 3·1운동 61주년을 맞아 미국 뉴욕에서 재미 교포들이 김재규 구명위원회를 결성하여 구명 청원을 발표했다고 전했다.[159] 33명의 서명자 명단에는 안중식 (목사), 에드 베이커, 김순경 (교수),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 김상돈 (전 국회의원, 서울시장) 등이 포함되었다.[159]
김재규혁명기념사업회 김성태 회장은 김재규의 10·26 의거가 한국판 킬링필드를 막은 거사였으며, 부마항쟁을 기억하는 세대는 김재규의 민주화 회복 노력을 기념할 것이라고 말했다.[160]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의 결행 덕분에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며, 김재규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157]
김재규는 재판 최후 진술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밝혔다.[57]
1. 자유민주주의 회복
2. 더 이상의 국민 유혈 사태 방지
3. 북한의 남침 방지
4. 미국과의 관계 회복 및 국가 이익 증진
5.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명예 회복
김재규는 법정에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자신의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57]
김재규의 측근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마지막 임기를 약속했으나 유신헌법을 통해 종신 집권을 꾀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3군 사령관 시절 박정희를 체포, 사퇴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해제된 미국 외교 전문에 따르면, 김재규는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하고 박정희에게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특이한 중앙정보부장으로 여겨졌다.
김재규는 야당 지도자 장준하와도 비밀리에 접촉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노력을 모색했다. 장준하의 장남은 김재규가 장준하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장준하의 죽음에 정권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전했다고 증언했다.[56]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유신헌법 개정 방안인 "제3의 길"을 제안하기도 했다.[49] 김수환 추기경에 따르면,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만이 박정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고 "제3의 길"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대화가 결실을 맺지 못하자 실망했다.[49][58]
1979년 김재규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서예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중앙정보부의 주요 기능이 민주주의 운동 탄압이었고, 김재규 역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59]
10. 2. 부정적 평가
신군부는 김재규의 변론 보도를 통째로 금지했다.[157]11. 사건 관련자 명단
(궁정동 안가)
(체포 및 처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