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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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로(일본사)는 메이지 유신에 공헌한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일본 제국에서 총리대신 추천 등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로 제도는 1889년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원훈 우대 조칙'이 내려지면서 형성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쓰라·사이온지 시대에 이르러 원로의 역할은 형식적으로 변화했고, 다이쇼 시대에는 정변과 함께 원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사망으로 1940년 원로 제도는 소멸했다. 원로는 천황의 자문에 응해 내각총리대신을 추천하는 등의 권한을 가졌으며, 법적 자격은 없었지만 칙명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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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일본사) | |
---|---|
개요 | |
명칭 | 원로 (元老) |
별칭 | 원훈 (元勳), 중신 (重臣) |
로마자 표기 | Genrō |
역할 및 기능 | |
역할 | 메이지 천황의 자문 후계 천황에 대한 조언 총리 후보 추천 및 임명 동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 |
기능 | 정부 자문 후계자 선정 총리 추천 정치적 중재 |
구성 | |
선임 방식 | 공식적인 법적 근거 없이 운영 특정 인물 임명 기준 없음 메이지 유신 주역 중심 |
주요 구성원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가쓰라 다로 (桂太郎) 오야마 이와오 (大山巌)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内正毅) |
역사 | |
기원 | 메이지 유신 이후 권력 구조 형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 |
전개 | 메이지 시대 동안 막강한 영향력 행사 다이쇼 시대 거쳐 쇼와 시대 초반까지 존속 |
주요 활동 | 메이지 헌법 제정 및 운영에 관여 러일 전쟁 등 주요 외교 정책 결정에 영향력 행사 총리 임명 및 정권 교체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 수행 |
종말 |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사망 (1940년) 이후 원로 제도 자연스럽게 소멸 |
비판 및 논쟁 | |
비판 | 비공식적인 권력 집단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 존재 특정 가문 중심의 권력 세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제기 폐쇄적인 의사 결정 구조로 인해 국민 여론 수렴에 소홀하다는 지적 |
옹호 |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기여했다는 옹호론 존재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긍정적인 역할 수행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평가 |
기타 | |
참고 | 일본의 정치 메이지 유신 내각총리대신 |
2. 역사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운 인물은 "원훈"이라 불렸지만,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서 장기간에 걸쳐 사실상 정치를 이끌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언론에서 "원로"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18] "원훈제로"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19]
최초로 원훈 대우 조칙을 받은 정치가는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20] 제1차 가쓰라 내각 이후 원훈이나 원로가 총리대신이 된 경우는 없었으며, "원훈" 대신 "원로"라는 호칭이 통례가 되었다.[22]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의 수는 줄어들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후 원로는 사이온지 긴모치만 남게 되었고, 정계에서는 원로를 다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마쓰카타도 생전에 "새로운 원로의 보충이 필요함"을 언급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야마모토 곤베에나 기요우라 게이고 등 유력 후보들의 원로 호칭 수여에 난색을 표했고, 중신회의가 별도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결국 보충되지 않은 채 1940년 사이온지의 사망으로 원로 제도는 소멸했다.
원로의 출신, 출생, 사망 정보는 아래 표와 같다.
이름 | 출신 | 초상 | 출생 | 사망 |
---|---|---|---|---|
이노우에 가오루 | 조슈 번 | ![]() | 1836년 1월 16일 | 1915년 9월 1일 |
이토 히로부미 | 조슈 | ![]() |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 |
가쓰라 타로 | 조슈 | ![]() | 1848년 1월 4일 | 1913년 10월 10일 |
구로다 기요타카 | 사쓰마 번 | ![]() | 1840년 10월 16일 | 1900년 8월 23일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사쓰마 | ![]() | 1835년 2월 25일 | 1924년 7월 2일 |
오야마 이와오 | 사쓰마 | ![]() | 1842년 11월 12일 | 1916년 12월 10일 |
사이 go 쓰구미치 | 사쓰마 | ![]() | 1843년 6월 1일 | 1902년 7월 18일 |
사이온지 긴모치 | 쿠게 | ![]() | 1849년 10월 23일 | 1940년 11월 24일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조슈 | ![]() |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 |
2. 1. 원로 제도의 형성 (메이지 시대)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은 "원훈"이라고 불렸지만,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서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정치를 이끌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언론에서 "원로"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8] "원훈제로"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19]최초로 원훈 대우 조칙을 받은 정치가는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20] 이토 히로부미가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자 메이지 천황이 조칙을 내렸지만, 삿초 번벌 내에서 사쓰마 출신이 불리했기 때문에 형평성을 위해 구로다 기요타카도 지명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원훈"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언론은 이들을 묶어 "원훈 회의"라고 보도했다. 이후 "원훈"과 "원로"라는 용어가 혼용되었다.[21]
헌법 제정 이전의 메이지 정부에서는 번벌 출신 유력자나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원로''''들에 의해 정치와 인사가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여 대신·참의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때 참의의 과반수가 훗날 원로가 되었다.
내각 제도가 발족하고 제1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대신 6명이 훗날 원로가 되었다. 이토 내각 다음의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은 각각 전임 총리의 추천으로 성립되었다.
1889년(메이지 22년) 11월 21일,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대신의 예로 원훈 우대 의사를 표한다"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것은 통상 "원훈 우대의 조칙"이라고 불리며, 다이쇼 시대부터 원로의 법적 근거로 여겨졌지만, 이 조칙으로 두 사람이 원로가 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이후 같은 취지의 조칙을 4번, 마쓰카타는 3번 받았지만, 이 조칙을 받지 않은 단계에서도 이노우에 가오루와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후임 총리의 자문을 받았다. 이 조칙으로 인해 이토나 더 젊은 세대인 마쓰카타 등을 "원훈"이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1891년(메이지 24년),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야마가타는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으로 이토를 추천했지만, 이토는 이를 고사했다. 이토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사이고 주도를 추천했다. 같은 해 5월,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성립되었다.
1892년,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난관에 부딪히자, 6월 29일, 원로 회의가 열려 이토, 구로다, 야마가타, 마쓰카타가 참석했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야마구치현으로 귀향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 제2차 이토 내각의 성립이 사실상 결정되었고, "원훈 회의"를 통해 후임 총리가 결정되는 선례가 되었다. 히지카타 히사모토 전 궁내대신이 이토에게 "정부 내에 없더라도 원훈의 신분으로 천황의 자문을 받고 봉답하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다"는 서신을 보낸 것처럼, 이러한 원훈들이 국정에 대한 조언과 지도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7월 30일에 마쓰카타가 사표를 제출하자, 메이지 천황은 이토, 야마가타, 구로다에게 선후 처리를 자문했고, 이틀 뒤에는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후임 총리의 의향을 물었다. 이토의 자택에서 이토, 야마가타, 구로다, 이노우에, 야마다 아키요시, 오야마 이와오가 회의를 열었고, 이토를 후임 총리로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1895년(메이지 28년)에 이토가 사직 의사를 밝히고 후임 총리로 마쓰카타를 추천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사표를 반려했다. 1896년(메이지 29년)에 다시 이토가 사표를 제출하자, 이토가 후임을 지정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천황은 야마가타, 구로다, 이노우에, 마쓰카타에게 자문을 구할 의향을 보였다. 참내한 구로다와 마쓰카타에게 천황은 야마가타를 총리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야마가타가 병을 이유로 사퇴했기 때문에,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무렵 기요우라 게이고와 시라네 센이치는 천황이 "원로를 소환한다"는 서간을 냈고, 도쿄일일신문에서도 9월 1일에 "구로다 백작을 비롯한 원로 제 공"이 상담한다고 보도했으며, 9월 3일에는 "소위 원로 회의"라는 기사를 게재했고, 오사카 아사히 신문도 4명의 "원로"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쿄일일신문은 "원로라는 글자로부터 해석"하면, 가와무라 스미요시, 소에지마 타네오미, 사사키 다카유키, 에다 노부요시, 후쿠오카 다카치카도 원로이지만, 이번 회의는 "일종의 원로를 한정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1892년부터 1895년 무렵까지는 "원훈", "원훈 회의"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1896년 8월 말 이후는 "원로", "원로 회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제도로서 공공연하게 되어 갔다. 다만 천황은 내각의 존속 등에 관한 문제를 모두 원로에게 묻지는 않았다.
1897년(메이지 30년) 12월,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붕괴되자, 메이지 천황은 구로다 기요타카 한 명에게 후임 총리를 물었다. 구로다는 이토 또는 야마가타가 적절하다고 답했고, 천황은 이토에게 조각을 명했다. 망설이는 이토를 구로다와 야마가타가 설득하여 출마시켰다. 제3차 이토 내각 성립 전, 이토는 "원로"를 소집하여 내외 정세에 대응하는 회의 개최를 주청했다. 이 회의 참석 예정자는 이토·야마가타·구로다·이노우에·마쓰카타에 더해, 오야마 이와오·사이고 주도도 포함되었다. 1898년(메이지 31년) 1월 10일에 열린 회의에는 사직 직후인 마쓰카타는 불참했지만, 내대신 도쿠다이지 사네쓰네가 "원로가 참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천황을 비롯한 궁중도 원로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사실상의 제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토는 추밀원을 강화하여, 구성원이기도 한 원로가 그 안에서 총리의 주천을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1896년에도 그 뜻을 수기에 적었다. 그러나 추밀원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번벌 실력자 사이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원로 중에서는 특히 이토와 야마가타가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는 입헌정우회 결성으로 원로 내, 관료 내에서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야마가타는 추밀원, 육군, 관료를 통해 이토와 대등한 강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노우에는 이토의 보좌적인 역할을 했지만, 강직한 성격의 그에게는 총리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굴절도 있었다. 마쓰카타는 재정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쳤고, 재계뿐만 아니라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이후 영향력을 약화시켜간 구로다의 후계가 되는 사쓰마 벌의 대표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쓰카타는 성격이 약하고, 이토에게 협력적이었기 때문에 사쓰마 벌의 실망을 샀다. 사이고는 해군, 오야마는 육군을 대표하는 존재였지만, 오야마는 육군 내의 의향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고, 구로다·사이고 사후에는 회의 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원로 회의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2. 2. 가쓰라·사이온지 시대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는 러일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대가로 입헌정우회에 정권을 넘겨준다는 밀약이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밀약을 알고 있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몰랐다.[18] 가쓰라는 형식적으로 각 원로의 양해를 얻어 정우회 총재 사이온지 긴모치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이 끝날 때에도 사이온지는 가쓰라를 추천했고, 메이지 천황은 이토, 야마가타,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노우에의 동의를 확인한 후 가쓰라에게 대명(大命)을 내렸다. 가쓰라가 러일 전쟁의 승리로 권세를 강화하고, 정우회의 영향력도 강대해짐에 따라, 가쓰라·사이온지 시대의 수상 지명에 관해서는 원로는 형식적인 존재가 되어갔다.[18] 이토의 사망 후, 가쓰라는 "원로는 노쇠했다"고 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 꾀했고, 1911년 8월에는 "원훈 우대의 조칙"을 받았다.[18] 또한 언론에서도 원로가 비입헌적이라고 비판을 받게 되었다.[18]2. 3. 다이쇼 시대의 정변과 원로
1912년(메이지 45년) 7월,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야마가타는 이를 기회로 가쓰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18] 그러나 가쓰라는 2개 사단 증설 문제를 계기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을 무너뜨렸다.[19] 후임 내각 선정에 있어서는 야마가타, 마쓰카타, 이노우에, 오야마에게 어명이 내려졌고, 1912년(다이쇼 원년) 12월 6일의 원로 회의에 가쓰라가 "원로의 자격"으로 참가했다.[20] 후임 총리에는 가쓰라가 선임되었지만, 이는 "원로 야마가타의 심복인 가쓰라가 총리가 되었다"라고 여겨져, 원로 제도, 특히 야마가타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었다.[21] 결국 제3차 가쓰라 내각은 제1차 호헌 운동의 고조로 인해 허무하게 붕괴되었다. 야마가타는 이 기회에 원로 제도를 바로잡으려 하여, 사이온지를 원로 회의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이온지는 12월 21일에 "찬익할 바가 있을 것이다"라는 조칙을 받았으며, 야마가타는 이 조칙을 근거로 사이온지가 원로가 될 자격자라고 했다.[22]2. 4. 제2차 오쿠마 내각과 원로
1914년 (다이쇼 3년) 4월, 지멘스 사건으로 야마모토 내각이 무너지자, 원로들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사이온지 긴모치도 소집되었으나, '위척'(違勅, 천황의 칙령에 어긋남)을 구실로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로들이 추천한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사퇴하고, 기요우라 게이고의 조각(組閣)도 실패하면서, 회의는 7번이나 열리게 되었다.[18]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최종적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수상으로 제안하여, 제2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다.[18]1914년 8월, 오쿠마 내각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야마가타는 중대한 안건 결정에 원로가 참여하지 못한 것에 분개했으나, 원로 회의는 이에 동의했다.[19]
이 무렵 야마가타 이외의 원로들은 나이가 들어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야마가타 자신의 영향력도 저하되어 갔다. 오쿠마와 가토 다카아키 외상, 입헌동지회 총리도 원로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대중국 21개조 요구의 교섭 과정에서도 야마가타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20] 그러나 21개조 요구의 외교적 실패가 분명해지자, 언론의 비판은 원로 회의에도 쏠렸다.[21] 1915년 이노우에 가오루의 사망으로, 야마가타의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1916년 (다이쇼 5년), 야마가타는 오쿠마를 원로에 추가하려는 구상을 가졌지만, 오쿠마는 가토에게 정권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구상하고 있던 야마가타와 오쿠마의 회담 결과, 오쿠마는 가토와 데라우치를 후임으로 건의했다.[22]
2. 5. 하라 내각과 원로
데라우치 내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사이온지는 하라와 회담을 갖고 하라를 총리로 추천했다. 데라우치가 총리직을 사임하자 야마가타의 책략으로 사이온지에게 대명이 내려졌으나, 사이온지는 이를 사퇴하고 하라를 추천했다. 야마가타와 마쓰카타도 이에 동의하여 하라 내각이 탄생했다. 하라는 내정과 외교 모두에서 신중한 노선을 취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싫어하는 야마가타의 신뢰를 얻었다.그러나 궁중 모 중대 사건에서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약혼 취소를 추진한 야마가타와 마쓰카타는 여론과 우익의 맹공격을 받아 관직 및 은전을 모두 반납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몰렸다. 하라는 야마가타와 마쓰카타가 원로로서의 지위를 반납하는 사태를 바라지 않았고, 천황에게 두 사람의 사직 제안을 받지 않도록 요청했다. 하라는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유럽 방문과 섭정 설치 문제에서도 야마가타와 협력하여 야마가타를 하라 내각의 열렬한 지원자로 만들었다.
2. 6. 원로 1인 체제
1921년 하라가 암살당한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오쿠마 시게노부가 잇따라 사망하고,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고령으로 쇠약해지면서 사이온지 긴모치가 사실상 원로를 주도하게 되었다.[5] 사이온지는 "모든 책임을 지고 궁중 및 정치 관련 일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1924년 마쓰카타가 사망하면서 사이온지는 유일한 원로가 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단독으로 원로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원로"는 사이온지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5]
사이온지는 새로운 원로를 추가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이는 요시노 사쿠조에 의해 원로 제도 폐지를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지적받았으며, 이토 타카시 등 여러 연구자들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사이온지가 원로를 추가하지 않은 것은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라는 생전에 사이온지와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사이온지가 원로가 된 후에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만약 생존했다면 원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게 평가된다.
2. 7. 헌정의 상도
사이온지 긴모치는 의회 세력을 중시하여 중의원 제1당 또는 제2당의 당수를 총리로 추천하는 "헌정의 상도"를 확립했다.[6] 사이온지 자신은 "헌정의 상도"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적은 없었지만, 여론은 이를 받아들였고 원로에 대한 비판도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정당 내각은 쇼와 공황이나 쇼와 금융 공황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했고, 또한 의혹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신뢰를 잃어갔다.2. 8. 정당 내각의 붕괴
3월 사건이나 만주 사변 등 군의 독주에 대해 사이온지 긴모치는 반대했지만, 마키노 등 궁중과 와카쓰키 내각은 온당한 대응을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군부의 횡포를 초래했고, 원로와 궁중, 정당 내각의 영향력은 쇠퇴해 갔다.[18]1931년(쇼와 6년) 12월 11일, 와카쓰키 내각은 "협력 내각" 운동에 의해 사임했다. 협력 내각은 민정당과 정우회가 공동으로, 육군의 의향도 받아들이려는 것이었으며, 마키노와 이치키 궁상도 협력 내각의 성립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사이온지는 정우회의 이누카이 쓰요시를 추천했고, 마키노 등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우회 내각인 이누카이 내각이 성립했다.[18] 이누카이 수상은 만주국 승인 문제로 군부와 대립했고, 1932년(쇼와 7년) 5·15 사건으로 살해당했다. 육군은 정당 내각에 반대했고, 히라누마 내각의 성립을 원했다.[18] 사이온지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임시 수상,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신, 오가타 미네오 해군 대신과 같은 내각 멤버, 구라토미 추밀원 의장, 고노에 후미마로 귀족원 부의장, 기요우라 게이고 전 수상, 야마모토 곤베에 전 수상과 같은 중신, 우에하라 유사쿠 원수,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 등 육해군의 거물과 각 방면의 유력자들의 의견을 듣고, 게다가 마키노 내대신·이치키 궁상·스즈키 시종장과 회담한 후에, 해군 군인 사이토 마코토를 추천했다.[18] 사이온지가 각 방면에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사이토 내각은 정우회와 민정당, 그리고 관료로 구성된 거국 일치 내각이었지만, 히라누마 추밀원 부의장과 같은 우익은 사이온지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 정당성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18]
2. 9. 2·26 사건과 우가키 내각의 실패
2·26 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등이 사망하자, 사이온지 긴모치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 그러나 고노에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히로타 코키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18]1937년(쇼와 12년), 히로타 내각이 사임하자, 유아사 구라헤이 내대신 등은 사이온지 긴모치에게만 의견을 물어 후임 총리를 결정하는 기존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 사이온지는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이 육군을 억누를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추천했다.[18] 그러나 육군은 우가키에게 반발하여 육군대신을 내지 않았다. 우가키는 내각 성립에 실패하면 궁중에 대한 반발이 커질 것을 우려한 사이온지와 천황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결국 대명(大命)을 사퇴하게 되었다.[18]
우가키의 사퇴 후, 사이온지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 하야시 센주로 대장을 차례로 추천했고, 히라누마가 사퇴하면서 하야시가 수상이 되었다. 사이온지는 유아사 구라헤이 내대신에게 이후 총리 추천 과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18]
2. 10. 원로 제도의 소멸
1937년 6월 하야시 내각이 붕괴된 후, 유아사 내대신은 천황에게 고노에 후미마로를 수상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보고했다. 사이온지 긴모치도 이에 동의하여 수상 선정은 사실상 유아사 내대신 한 명에 의해 결정되었다.[18] 이후, 수상 선정은 내대신이 주관했으며, 1939년부터는 "자신의 책임"으로 추천했다.[19] 사이온지는 참고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로,[20] 히라누마 내각,[21] 아베 내각,[22] 요나이 내각 성립 시 유아사 내대신의 상담을 받았다.1940년 7월, 요나이 내각 붕괴 후, 기도 고이치 내대신은 전직 내각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으로 구성된 중신 회의를 부활시켰다. 이로써 원로는 내대신 또는 비서관장과 '상담하는' 형태로 격하되었다. 중신 회의에서 고노에 후미마로가 선출되었다는 보고에 사이온지는 "이 보고만은 사양하고 싶다"며 의견 제시를 거부했다. 요나이 내각 붕괴에 대한 실망과 고노에에 대한 불신이 겹친, 작은 저항이었다.
1940년 12월 24일, 사이온지의 사망으로 원로 제도는 소멸했다.
3. 원로의 권능
원로는 주권자인 천황의 자문에 응하여 내각총리대신 사직 시 후임 내각총리대신을 추천하고, 기타 중요 국사에 관여했다[18]. 원로의 주요 권능으로는 후임 수상 주천이 있지만, 이 회의에는 원로 전원이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고, 원로들의 요청에 따라 전임 수상이나 내대신 등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황은 원로가 추천한 후보자를 거부한 예가 없었고, 대명강하는 사실상 원로의 의견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외교나 내정의 중대 사항에 대해 협의하고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영일동맹 체결 시에는 원로회의에서 의견이 정리되었고[19], 러일 전쟁 개전 시의 어전회의에도 참가했다[20]. 개별 원로는 궁중이나 귀족원, 정당, 군 등에 관여하는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동은 원로 집단의 합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한 활동이었다.
원로는 내각에 긍정적, 부정적 양면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성립된 내각의 존속을 꾀하고 교체 시에는 원만하기를 바랐지만,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을 타도할 때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점도 지적된다[21].
4. 원로의 자격
원로는 공직이 아니며, 원로의 권능, 대우, 취임 자격을 명문화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00년경에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18] 이 때문에 다이쇼 시대부터는 칙명 또는 칙어에 의해 원로로 인정되는 관행이 확립되었다.[19]
나가이 와는 천황이 "지존광보의 칙어"를 수여하는 것이 원로가 되는 요건이라고 주장했다.[20] 그러나 주요 원로는 칙어를 받기 이전부터 원로로서 활동했으며, 받은 조칙도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다.
원로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는 조칙 중,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구로다 기요타카, 마쓰카타 마사요시, 가쓰라 다로가 받은 칙어는 "특별히 대신의 예로써 이에 원훈 우대의 뜻을 밝힌다"는 내용이었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받은 칙어는 총리대신 사임 당시인 1912년(다이쇼 원년) 12월 22일에 "장래 광보에 필요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짐의 뜻을 받들어 능히 그 힘을 다하여 찬양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1]는 내용으로, 이들 칙어의 내용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13일에 야마가타, 이노우에 가오루, 마쓰카타, 오야마 이와오, 가쓰라는 "나의 업을 돕도록 하라"는 칙어를 받았는데,[2] 이것도 원로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칙어에 '광보', '보업', '찬양'이라는 문구가 있으면 원로로 인정하는 칙어라고 보도했지만,[3] 이른바 "원훈 우대" 칙어에는 그러한 문구가 없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1916년(다이쇼 5년) 10월 9일에 "광보"하도록 칙어를 받았다고 기술했지만, 과거 업적에 대해 언급된 것으로 다른 원로와 오쿠마는 다르게 취급된다고 해석했다. 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쇼와 천황 즉위 시에 "짐의 지업을 보익필성"하도록 요구받은 칙어를 받았지만,[4] 원로로 간주되지 않았다.[21] 사이고 주도는 이런 종류의 칙어를 받지 않았지만 원로로 취급받았다. 또한 마쓰카타, 이노우에, 오야마는 칙어를 받기 이전부터 원로로 활동했다. 이토 유오는 메이지 천황이나 다른 원로의 승인이 원로 임명의 실질적인 조건이었다고 분석한다.[22]
황실의전령(1926년 다이쇼 15년 황실령 제7호) 제29조에 따르면, 원로는 "원훈 우대를 위해 대신의 예우를 받으신 자"로서 궁중 서열에서 제1계 제4의 서열(추밀원 의장 다음 순위, 원수 및 현직 대신, 내대신·궁내대신보다 상위)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원훈 우대" 칙어를 받은 사람은 황실의전령 공포 시점에는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5. 원로 일람
(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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