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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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 하지메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투수로서 1971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199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은퇴할 때까지 19년간 선수 생활을 했다. 니시테쓰 시절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요미우리 이적 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SK 와이번스에서 투수 코치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2016년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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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하지메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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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명 | 가토 하지메 |
| 원어명 | Hajime Kato |
| 일본어 표기 | ja |
| 로마자 표기 | Hajime Kato |
| 가나 표기 | かとう はじめ |
| 한자 표기 | 加藤 初 |
| 한국어 표기 (로마자) | Gato Hajime |
| 한국어 표기 (한국어) | 카토우 하지메 |
| 출생지 | 시즈오카현 후지시 |
| 생년월일 | 1949년 12월 20일 |
| 사망일 | 2016년 12월 11일 |
| 신장 | 175 |
| 체중 | 72 |
| 利き腕 | 오른손 |
| 타석 | 오른쪽 |
| 수비 위치 | 투수 |
| 프로 입단 년도 | 1971년 |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번외 |
| 첫 출장 | 1972년 4월 25일 |
| 마지막 출장 | 1990년 8월 7일 |
| 선수 경력 | |
| 선수 경력 | 吉原市立商業高等学校 아세아 대학 (중퇴) 다이쇼와 제지 니시테쓰 라이온스 / 태평양 클럽 라이온스 (1972 - 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 - 1990) |
| 코치 경력 | |
| 코치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9 - 1990) 세이부 라이온스 (1995 - 1999, 2001) LG트윈스 (2002, 2006) 라뉴 베어스 (2004) SK 와이번스 (2005, 2007 - 2011) |
2. 선수 시절
후지 시립 요시와라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대학에 진학했으나, 입학 직후 무릎 부상과 대학 내 괴롭힘 등으로 1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사회인 야구 다이쇼와 제지에서 4년간 에이스로 활약하며 제42회 도시대항야구대회 출전,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 우승 등에 기여했다. 1971년 드래프트 번외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 제의도 있었지만 등판 기회를 고려하여 니시테쓰를 선택했다.[1]
1972년 프로 데뷔 후,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축 선수들이 이탈하면서 전력이 약화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히가시오 오사무와 함께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1976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올스타전에 6회 출전했고, 1989년부터는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다가 1990년 은퇴했다.[1]
2. 1. 니시테쓰·다이헤이요 시절 (1972~1975)
아시아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인 야구팀 다이쇼와 제지를 거쳐 1971년 드래프트 번외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당시 약팀이었던 니시테쓰에서 등판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선택했다.[1]당시 니시테쓰는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력 투수들이 잇따라 팀을 떠나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나오 가즈히사 감독은 신인이었던 가토를 히가시오 오사무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기용했다. 가토는 입단 첫 해인 1972년 시즌 17승(15선발승)을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1] 구단 매각 등 경영난을 겪고 있던 라이온스에서 히가시오와 함께 '투수 2인방'으로 활약했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6~1990)
1976년 세키모토 시토시, 다마이 노부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이하라 하루키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1976년 시즌 요미우리 전력 보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1] 같은 해 4월 1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역대 51번째(62번째)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그 해 15승(7선발승) 4패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정식 타이틀은 아님)을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이후 요미우리의 중심 투수로 오랫동안 활약하며(1986년 14선발승으로 1974년(10선발승)에 이어 3번째 10선발승 이상) 올스타전에 6차례 출전했다.[1] 1989년부터는 요미우리의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고, 1990년에 19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1]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감독은 "1976년 트레이드로 입단하여 15승을 올리고 노히트노런도 달성했습니다. 제가 감독 1년 차였던 1975년 최하위에서 다음 해 첫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핫짱'(初っちゃん)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무엇보다 공이 빨랐고, 저는 '철면피'라고 불렀는데, 위기 상황에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발, 구원으로 잘 활약해주었고, 믿음직한 투수였습니다."라고 가토 하지메를 회상했다.[10]
3. 지도자 시절
가토 하지메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지만, 언변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세이부에서 2군 투수 코치(1995~1997), 1군 투수 코치(1998~1999)를 맡았다. 2000년에는 세이부 구단 프런트에서 근무했고, 2001년 다시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12]
세이부에서 퇴단한 후 2004년에는 대만 프로 야구 라뉴 베어스 코치, 2005년에는 KBO 리그 SK 와이번스 코치를 역임했고, 2002년과 2006년에는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았다.[13]
2007년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여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아시아 시리즈에 참가했다. 2008년과 2010년에도 SK의 정규 페넌트레이스 및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 시즌 중에는 치질 수술로 조웅천이 잠시 코치를 대행했고,[14] 시즌 후 SK와 재계약에 실패했다.[15]
3. 1. 일본 프로 야구 (1991~2001)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동안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지만, 언변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훗날 밝혔다. 1995년부터는 세이부의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고, 1998년 시즌 도중부터는 모리 시게카즈의 뒤를 이어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00년에는 세이부 구단 프런트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에 다시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12]3. 2. 한국 프로 야구 (2001~2011)
2004년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코치를 역임했고, 2002년과 2006년에는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았다.[13]2007년부터 다시 SK 와이번스의 1군 투수코치로 발탁되면서 같은 해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11월에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코치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이듬해 2008년에 SK는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정규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2년 뒤인 2010년에도 정규 페넌트레이스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이끌었다. 2011년에는 시즌 중 치질 수술로 인해 잠시 조웅천이 대신 코치를 맡기도 했다.[14] 2011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SK를 퇴단했다.[15]
3. 3. 대만 프로 야구 (2004)
2004년 현역 시절 동료였던 오타 다쿠지가 감독을 맡았던[13] 대만 프로 야구 라뉴 베어스 코치를 역임했다.4. 상세 정보
가토 하지메는 요시와라 상업고등학교(1학년은 요시와라 시립, 2학년부터 후지 시립)를 졸업하고 아시아대학에 진학했으나, 무릎 부상과 대학 내 괴롭힘 등으로 입학 3개월 만에 중퇴했다.[1] 이후 사회인 야구 다이쇼와제지에 입사하여 4년 차에 에이스로 활약하며 제42회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출전했고,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에서는 우승 후보였던 쿠마가야구미를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1]
이러한 활약으로 여러 프로 구단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소속팀의 사정으로 197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받지 못했다.[1] 프로 진출을 원했던 가토는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결국 퇴사 후 세이테츠에 입단했다.[1]
선수 시절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11''' (1972년 ~ 1975년)
- '''21''' (1976년 ~ 1990년)
은퇴 후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84''' (1995년 ~ 1999년, 2001년)
- '''71''' (2004년)
통산 19시즌 동안 신인왕을 차지한 1972년에는 17승(15선발승), 1976년에는 15승(7선발승), 1986년에는 16승(14선발승)을 기록했다.
다음은 가토 하지메의 연도별 투수 성적이다.
| 연도 | 소속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 | 패 | 세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
|---|---|---|---|---|---|---|---|---|---|---|---|---|---|---|---|---|---|---|---|---|---|---|---|---|---|---|---|---|---|---|---|---|---|---|---|---|---|---|---|---|---|---|---|---|---|---|---|---|---|---|---|
| 1972 | 니시테쓰 | 49 | 29 | 14 | 2 | 1 | 17 | 16 | - | - | .515 | 1124 | 265{{cvt|1/3|} | } || 215 || 24 || 104 || -
| 연도 | 소속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 | 패 | 세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
| 1972 | 니시테쓰 | 49 | 29 | 14 | 2 | 1 | 17 | 16 | - | - | .515 | 1124 | 265{{cvt|1/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