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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육십사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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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동육십사둔은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할양된 아무르강 북쪽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러시아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을 학살했고, 이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1년 러시아와 국경을 획정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으나, 중화민국은 여전히 영유권을 주장하며 대만에서 발행되는 지도에 중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2013년에는 중국이 2020년부터 2060년까지 '육장 전쟁'을 통해 강동육십사둔을 포함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는 계획이 보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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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육십사둔
지도 정보
강동육십사둔 지도
강동육십사둔은 지도에서 오른쪽 음영 처리된 지역 옆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헤이허와 블라고베셴스크 맞은편에 위치한다.
기본 정보
중국어 (정체자)江東六十四屯
중국어 (간체자)江东六十四屯
중국어 병음Jiāngdōng Liùshísì Tún
러시아어Шестьдесят четыре деревни к востоку от реки Амур (아무르 강 동쪽 64개 마을) 또는 Зазейский район (제야 강 지역)
지리
위치아무르 강 (흑룡강) 동쪽
면적3600 km²
역사적 배경
사건청나라가 러시아 제국에 할양

2. 역사

중국 국민당 지도에 표시된 "강동육십사둔" 경계가 포함된 지역 지도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청나라 군은 7월 16일부터 아무르강에서 러시아 선박의 통행을 차단하려 했고, 중국 홍호자 강도들과 함께 블라고베셴스크를 공격했다.[10] 이에 대응하여 아무르 지역 군사 총독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그리브스키 중장은 강 북쪽에 남아있는 모든 청나라 백성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1] 여기에는 마을 주민과 블라고베셴스크에 살던 중국인 상인 및 노동자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블라고베셴스크 현지 인구의 1/6에서 1/2에 달했다.[1][2]

러시아군은 청나라 사람들을 현지 경찰에 의해 붙잡아 강으로 몰아 익사시켰다.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군에 의해 총살되었으며 그 결과 수천 명이 사망했다.[1][12]

이 학살은 중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미래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홍호자는 러시아 점령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보복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했다. 루이스 리빙스턴 시먼은 이 학살이 중국 홍호자가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 이유라고 언급했다.[11]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강동육십사둔에서 청나라 거류민은 일소되었고, 청나라의 지배는 상실되었다.

2. 1. 조약 체결과 주민 거주

1858년 아이훈 조약에서 청나라아무르강 북쪽 둑을 러시아 제국에 할양했다.[2] 그러나 아무르강 북쪽에 거주하는 청나라 백성은 "만주 정부의 권한 하에 영구적으로 거주지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

러시아 제국은 1857년 여름, 해당 지역에서 원주민을 몰아내는 대가로 청나라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4]

1859년의 초기 러시아 추정에 따르면 "자야횡단 지구"의 청나라 백성 인구는 3,000명이었다. 이후 1870년에는 10,646명(한족 5,400명, 만주족 4,500명, 다우르족 1,000명)으로 증가했다.[5] 1870년대 후반과 1890년대 초반 사이에는 12,000명에서 16,000명 사이로 추정되었고, 1894년에는 16,102명(한족 9,119명, 만주족 5,783명, 다우르족 1,20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5] 이후 보고된 숫자는 감소하여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매년 7,000~7,500명의 거주자가 보고되었다.[5] 그러나 당시 자야횡단 마을 사람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소수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1898년 통계에는 자야횡단 마을 사람들 외에도 아무르주에 12,199명의 중국인 이주 노동자와[6] 5,400명의 중국인 광부가 있었으며,[8] 블라고베셴스크에는 4,008명의 중국인 도시 거주자가 있었다.[9]

2. 2. 의화단 운동과 러시아의 학살

1857년 여름, 러시아 제국은 해당 지역 원주민을 몰아내는 대가로 청나라에 금전적 보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4]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청나라는 아무르강 북쪽 둑을 러시아에 할양했다.[2] 그러나 아무르강 북쪽에 거주하는 청나라 백성은 "만주 정부의 권한 하에 영구적으로 거주지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

초기 러시아 측 추정(1859년)에 따르면 "자야횡단 지구"의 청나라 백성 인구는 3,000명이었다. 이후 1870년에는 10,646명( 한족 5,400명, 만주족 4,500명, 다우르족 1,000명)으로 증가했다.[5] 1870년대 후반과 1890년대 초반 사이에는 12,000명에서 16,000명 사이로 추산되었고, 1894년에는 16,102명(한족 9,119명, 만주족 5,783명, 다우르족 1,20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5] 이후 보고된 숫자는 감소했지만(1895년부터 1899년까지 매년 7,000~7,500명),[5] 당시 자야횡단 마을 사람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소수였다. 예를 들어, 1898년 통계에는 자야횡단 마을 사람들 외에도 아무르주에 12,199명의 중국인 ''오트호드니키''(이주 노동자)[6]와 5,400명의 중국인 광부,[7] 블라고베셴스크에는 4,008명의 중국인 도시 거주자가 있었다.[9]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청나라 군은 7월 16일부터 아무르강에서 러시아 선박의 통행을 차단하려 했고, 중국 홍호자 강도들과 함께 블라고베셴스크를 공격했다.[10] 이에 대응하여 아무르 지역 군사 총독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그리브스키 중장은 강 북쪽에 남아있는 모든 청나라 백성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1] 여기에는 마을 주민과 블라고베셴스크에 살던 중국인 상인 및 노동자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블라고베셴스크 현지 인구의 1/6에서 1/2에 달했다.[1][2] 이들은 현지 경찰에 의해 붙잡혀 강으로 몰려 익사했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이 사망했다.[1][12]

1900년 (메이지 33년), 의화단 운동(중국 측 호칭: 경자권란)이 발생했을 때, 의화단의 일부가 흑룡강 맞은편의 블라고베셴스크(해란포) (현 러시아 아무르주 주도)를 점령했다. 이전부터 만주 전역으로 진출을 계획하고 있던 러시아는, 의화단과 열강을 상대하고 있는 청나라 측은 만주 정세에 관여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1900년 7월 13일, 러시아의 군함 미하일(Михаил)호가 강 위에서 총격을 시작하며 전단이 열렸다. 7월 16일블라고베셴스크(해란포) 사건에서 코사크 병사들이 혼재하는 청나라 주민 약 3,000명을 그곳에서 제거하기 위해 학살하여 탈환했다. 8월 2일부터 8월 3일에 걸쳐 발생한 흑룡강·아이후이 사건에서는, 의화단에 대한 보복으로 파병된 러시아 병사 약 2,000명이 헤이허진에 도하 상륙하여 청나라 주민을 학살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청나라 주민 약 2만 5천 명이 러시아 병사에게 학살되어 아무르강에 던져졌고, 시체가 뗏목처럼 강을 따라 내려갔다고 한다.

이 학살은 중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미래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홍호자는 러시아 점령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보복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했다. 루이스 리빙스턴 시먼은 이 학살이 중국 홍호자가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 이유라고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인은 홍호자든 농민이든, 만주에 대한 러시아 점령 이후 그에게 가해진 끔찍한 대우를 잊지 않았다. 그는 블라고베셴스크 학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서 8,000명에 가까운 무장하지 않은 남녀노소가 총검에 의해 격렬한 아무르강으로 몰려들어, 당시 러시아 장교 중 한 명이 1900년 친왕타오에서 나에게 말했듯이, '내 명령을 집행하는 것은 나를 거의 병들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떠다니는 시체 위로 강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중국인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선두 외국 상인이 각각 천 루블에 그들의 생명을 구한 40명은 예외였다. 이러한 잔혹 행위, 그리고 훨씬 더 심한 행위들이 기억되고 있으며, 이제 그들에게 보복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특히 지금처럼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면서 이 사람들의 동정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일본 장교가 이끄는 200~300명 규모의 부대로 나뉜 10,000명 이상의 강도들이 현재 일본의 고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1]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강동육십사둔에서 청나라 거류민은 일소되었고, 청나라의 지배는 상실되었다.

이러한 사건과, 이에 이어진 러시아의 동삼성 점령은, 삼국 간섭 이후 높아지고 있던 일본에서의 대 러시아 경계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르강으로부터 남하할 기회를 노리는 것은, 세계 최대의 러시아 육군이었다. 일본의 여론은 긴장했고, 반 러시아 대집회가 일본 각지에서 열리게 되었다. 러시아는 다음에 한반도를 유린하고 일본을 침략해 올 것이라는 것이 여론의 시각이었다. 강동육십사둔의 붕괴는 『아무르강의 유혈(아무르강 피의 흐름)』이라는 제목의 구제제1고등학교의 기숙사 노래에도 불리게 되었다.

3. 영토 분쟁

1991년 중소 국경 협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강동육십사둔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지만, 중화민국은 러시아의 점령을 합법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현재도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2][12] 중화민국은 중화민국 헌법 및 중화민국 헌법 부칙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이 다른 국가와 체결한 어떠한 국경 협정도 인정하지 않는다.[2]

중화민국 성립 이후 북양군벌, 베이징 정부, 국민정부는 러시아의 강동육십사둔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러시아의 점령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나, 이 문제를 유예해 왔다. 1991년 장쩌민 총서기와 보리스 옐친 대통령 간의 조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동육십사둔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에서 강동육십사둔을 관리하고 있지만, 대만에서 발행되는 많은 중국 지도에는 여전히 중국 영토로 표시된다.[12][13]

3. 1. 중화민국의 입장

중화민국은 러시아의 강동육십사둔 점령을 합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2] 1991년 중소 국경 협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64개 촌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으나,[12] 대만에 기반을 둔 중화민국은 중화민국 헌법 제4조 및 중화민국 헌법 부칙 제4조 제5항에 따라 해당 지역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다른 국가와 체결한 어떠한 국경 협정도 인정하지 않는다.[2] 따라서 해당 지역은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에서 발행되는 많은 중국 지도에서 여전히 중국 영토로 표시된다.[12][13]

중화민국 성립 이후, 북양군벌, 베이징 정부, 국민정부 모두 러시아의 강동육십사둔 점령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에도 러시아의 점령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문제를 유예해 왔다. 1991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오랜 영토 분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아무르강(흑룡강) 연안의 국경을 획정했을 때, 장쩌민 총서기와 보리스 옐친 대통령 간의 조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식으로 이 땅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현재 중화민국은 법적으로 강동육십사둔에 대한 주권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며, 중화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지도에는 이 지역이 여전히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3. 2.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

1991년 중소 국경 협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장쩌민 총서기와 보리스 옐친 대통령 간의 조약을 통해 아무르강(흑룡강) 연안의 국경을 획정하면서 64개 촌에 대한 주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12]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전 시기에도 러시아의 점령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나, 이 문제를 유예해 왔다.

3. 3. 중화민국(대만)의 입장

중화민국은 러시아의 점령을 합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2] 1991년 중소 국경 협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64개 촌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지만,[12] 대만에 기반을 둔 중화민국은 해당 지역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2] 중화민국 헌법과 중화민국 헌법 부칙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다른 국가와 체결한 어떠한 국경 협정도 인정하지 않는다.[2] 따라서 해당 지역은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에서 발행되는 많은 중국 지도에서 여전히 중국 영토로 표시된다.[12][13]

중화민국 성립 이후, 북양군벌, 베이징 정부, 국민정부 모두 러시아의 강동육십사둔 점령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1년 장쩌민 총서기와 보리스 옐친 대통령 간의 조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땅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현재 중화민국은 법적으로 강동육십사둔에 대한 주권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며, 중화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지도에는 이 지역이 지금도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4. 중국의 영토 회복 주장

2013년 7월, 중국의 『중국신문망』, 『문회보』 등은 2020년부터 2060년까지 중국이 수행할 "육장 전쟁(여섯 개의 전쟁)" 계획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14][16][17][15] 이 계획에는 2055년부터 2060년까지 러시아 제국청나라로부터 빼앗은 160km2의 토지 (강동육십사둔, 외만주, 파미르 고원)를 되찾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4][16][15][17]

이 기사에 대해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의 제프 웨이드(Geoff Wade) 연구원은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지만, 중국 국영 신문도 보도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의 높은 수준에서 승인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중국의 "잃어버린 국토 회복" 계획은 1938년부터 주장되어 왔다고 덧붙였다.[16]

인도의 싱크탱크인 Centre for Land Warfare Studies 연구원 P.K.차크라보르티(P.K.Chakravorty)는 이 기사에서 중국이 인도의 아삼 주나 시킴 주에서 독립 운동과 반란 활동을 선동하고, 파키스탄에 무기를 제공하여 카슈미르를 공략하는 등의 시나리오가 시사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시킴 주의 상황은 안정적이며, 중국이 미얀마를 통해 발생시킨 아삼 주의 폭동은 인도 정부와 미얀마 정부의 협상으로 진정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35년까지 인도군이 근대화를 통해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17]

4. 1. '육장 전쟁' 계획

2013년7월,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는 아니라고 하지만, 중국의 『중국신문망』이나 『문회보』 등에서 2020년부터 2060년까지 "육장 전쟁(여섯 개의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14][16][17][15]。 이 "육장 전쟁" 계획에는 2055년부터 2060년까지 러시아 제국청나라로부터 빼앗은 160km2의 토지(강동육십사둔, 외만주, 파미르 고원)를 되찾아 국토를 회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4][16][15][17]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의 Geoff Wade 연구원은 이 기사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중국의 국영 신문도 보도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의 매우 높은 수준에서 승인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잃어버린 국토 회복" 계획은 이미 1938년부터 주장되어 왔다고 지적했다[16]

4. 2. 전문가들의 견해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 연구원 제프 웨이드(Geoff Wade)는 2013년 7월 중국의 『중국신문망』이나 『문회보』 등에 게재된 "육장 전쟁(여섯 개의 전쟁)" 기사에 대해,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지만, 중국의 국영 신문도 보도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의 매우 높은 수준에서 승인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잃어버린 국토의 회복" 계획은 이미 1938년부터 주장되어 왔다고 지적했다[16]

인도싱크탱크인 연구원 P.K.차크라보르티(P.K.Chakravorty)는 이 기사에서 중국인도의 아삼 주나 시킴 주에서 독립 운동과 반란 활동을 선동하고,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 제공을 통한 카슈미르 공략 등이 시사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실패한 후에 인도와의 전면전이라는 단계가 예상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킴 주의 현 상황은 중국의 끈질긴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독립 운동을 선동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중국미얀마를 통해 발생시킨 아삼 주의 폭동은 인도 정부미얀마 정부의 협상으로 진정되었다고 하였다. P.K.차크라보르티는 2035년까지 인도군은 근대화를 추진하여 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17]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문서
[9] 서적
[10] 서적 China inside out: contemporary Chinese nationalism and transnationalism https://books.googl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12-03-18
[11] 서적 From Tokio through Manchuria with the Japanese https://archive.org/[...] S. Appleton 2012-03-18
[12] 서적
[13] 문서
[14] 뉴스 中國未來50年裡必打的六場戰爭 http://info.wenweipo[...] 2013-07-08
[14] 뉴스 China To Engage In 'Six Inevitable Wars' Involving U.S., Japan, India And More, According To Pro-Government Chinese Newspaper http://www.ibtimes.c[...] 2013-11-26
[14] 뉴스 中國公布新防空識別區 「六場戰爭」預言涵蓋美日俄 http://www.ibtimes.c[...] 2013-11-27
[15] 뉴스 中国 対日・対ロ戦争開始の時期を明らかに http://japanese.ruvr[...] 2014-01-06
[16] 뉴스 China’s six wars in the next 50 years http://www.aspistrat[...] オーストラリア戦略政策研究所 2013-11-26
[17] 뉴스 Responding to Chinese Article on the-Six Wars China is Sure to Fight in the next 50 Years http://www.claws.in/[...] Centre for Land Warfare Studies 201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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