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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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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시마국은 1869년 8월 15일에 홋카이도에 설치된 옛 행정 구역으로, 7개의 군으로 시작하여 1881년에는 6개의 군으로 조정되었으며, 1882년에 폐지되었다. 아스카 시대부터 홋카이도와 교류가 있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화인들의 거점이 세워졌다.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이 설치되어 아이누와의 무역을 독점했으며, 에도 시대 후기에는 하코다테 봉행이 설치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하코다테 전쟁이 벌어졌으며, 1869년 9월 20일에는 오시마국 7군이 제정되었고, 이후 홋카이도 개척사의 소관이 되었다. 오시마국은 가메다, 가야베, 가미이소, 히야마, 니시, 후쿠시마, 쓰가루 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쓰마에 번을 중심으로 조코쿠지 등 사찰과 우바가미다이진구 등 신사가 있었다.

2. 역사

1869년 8월 15일 7개의 군으로 오시마국이 설립되었다.[1] 187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오시마국의 인구는 75,830명이었다.[2] 1881년 7월 쓰가루 군과 후쿠시마 군이 합쳐져 마쓰마에군이 되면서 군의 수가 6개로 줄었다. 1882년 홋카이도에서 국이 폐지되었다.

2. 1. 오시마국 성립 이전

일본서기에 따르면, 에미시 정벌이 활발했던 아스카 시대 사이메이 천황 때 아베노 히라후가 원정을 자주 왔고, 히구마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어, 오시마국 지역에도 방문했다는 설이 있다. 이때 이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후엽에 걸쳐 오시마 반도 동해안에서는 삿몬 문화와 혼슈의 하지기 문화가 혼합된 아오나에 문화가 발달했다. 아오나에 문화인들은 삿몬인과 마찬가지로 수렵, 채집을 했을 뿐만 아니라, 철기를 생산하거나 삿몬 사회와 도호쿠 북부와의 상품 교환을 중개하고, 혼슈인과 혼인하기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마쿠라 말기인 14세기 초에는 에조의 한 부류인 와타리토라는 집단이 도난과 쓰가루 사이를 왕래하며 거래를 했다고 한다.(『스와 대명신 그림말』에 기록) 와타리토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와타리토를 도난의 주민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오시마 반도의 마쓰마에를 하나의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에조 통괄을 현지에서 대행했던 안도씨는 도난의 와타리토와 관계를 맺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지 원년에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가신 아라키 대학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시리우치 온천이 개발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무렵에는 오시마국 지역에 도난 12관을 비롯한 화인의 거점이 세워졌다.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코쇼 3년, 쵸로쿠 원년에 코샤마인의 봉기가 일어나 화인이 궁지에 몰렸지만, 타케다 노부히로가 코샤마인 부자를 쳐서 위기를 벗어났다.

그 후에도 에이쇼 9년에 쇼야, 코지 형제가 이끄는 에조가 봉기하는 등 전투가 산발했지만, 카키자키 미츠히로와 그의 아들 요시히로가 평정했다. 화인 호족의 통일도 진행되어, 카키자키씨가 지배권을 확립해 갔다. 분로쿠 원년, 카키자키 요시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에조도 주로 인정받아 안도씨로부터 독립, 이후 '''마쓰마에씨'''를 칭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가자 마쓰마에 번이 성립되었다. 이 무렵, 마쓰마에 성의 기반인 후쿠야마관이 축조되었다. 마쓰마에 번은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아, 에조치 각지에 설치한 '''바쇼'''라고 불리는 지행지에서 마쓰마에 번 가신은 에조(아이누)와 무역을 행했다.

쿄호 16년 (1731년), 쿠나시리 및 에토로후의 수장들이 마쓰마에 번주를 방문하여 헌상품을 증정했다. 타누마 오키츠구 시대의 텐메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카미카와군 지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하면, 화인은 볍씨·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기록했다.[4]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오시마국의 육상 교통[5]오슈 가도의 옆길인 마쓰마에 길이 센다이에서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쓰마에를 거쳐 하코다테까지 연결되었다. 또한 마쓰마에에서 카미노쿠니, 에사시 방면으로는 코사고(치이사고) 산도가, 키코나이에서 카미노쿠니까지는 키코나이 산도가 있었다.

해상 교통은 키타마에 부네 항로가 열리고, 물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에도 시대 초기 간에이 17년, 고마가타케에서 산체 붕괴를 동반하는 분화가 발생하여 쓰나미가 발생, 우치우라만 맞은편의 이부리국 지역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분화는 간에이 대기근에도 영향을 미쳤다. 쇼오 2년에는 유노카와 온천이 발견되었다.

에도 시대 중기 칸포 원년, 오시마가 분화하여 쓰나미가 발생,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마쓰마에 번의 공식 기록에서는 1467명이 사망 및 행방불명되었고, 마을 전체가 소멸된 장소도 있기 때문에, 일설에는 2000명 - 3000명 이상이라고도 한다.

에도 시대 후기 쿄와 2년 2월, 에도 막부가 하코다테에 에조 봉행을 두었다. 분카 4년, 오시마국 지역이나 서에조지 등이 공의어료로 되었기 때문에 마쓰마에 번은 무츠국 다테군 료카와에 9천 석으로 전봉 (료카와 번)되었지만,[6] 분세이 4년 공의어료였던 오시마국 지역이나 에조지 등을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시켜 마쓰마에씨가 복귀했다.

무진 전쟁 무렵, 케이오 4년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하코다테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또한, 마쓰마에 번은 타테 성으로 이전하여 타테 번이 되었다. 타테 번은 하코다테 전쟁에서 구 막부군 (에조 공화국)과 싸웠다. 하코다테 전쟁 종결 후, 개척사가 하코다테에 설치되었다.

2. 2. 오시마국 성립 (1869년 이후)

1869년 8월 15일 오시마국이 7개의 군으로 설립되었다.[1] 187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오시마국의 인구는 75,830명이었다.[2] 1881년 7월 쓰가루 군과 후쿠시마 군이 합쳐져 마쓰마에군이 되면서 군의 수가 6개로 줄었다. 1882년 홋카이도에서 국이 폐지되었다.

3. 지역

1869년(메이지 2년) 오시마국이 설치되었으며, 현재의 홋카이도 오시마 종합진흥국·히야마 진흥국 관내에서 야마코시군 오샤만베정, 후타미군 야쿠모정의 일부, 구도군 세타나정, 세타나군 이마카네정, 오쿠시리군 오쿠시리정을 제외한 구역에 해당한다.

오시마 국에는 가메다, 가야베, 가미이소, 히야마, 니시 군이 있었으며, 1881년에 쓰가루군과 후쿠시마군이 합병하여 마쓰마에군이 되었다.

3. 1. 행정 구역

군명비고
가메다
가야베
가미이소
히야마
니시
쓰가루군1881년 후쿠시마군과 합병하여 마쓰마에군 형성, 소멸
후쿠시마군1881년 쓰가루군과 합병하여 마쓰마에군 형성, 소멸



1869년(메이지 2년) 제정 당시의 영역은 현재의 홋카이도 오시마 종합진흥국·히야마 진흥국 관내에서 다음 지역을 제외한 구역에 해당한다.

3. 2. 에도 시대의 번

에도 시대에 마쓰마에 번이 성립되었다. 이 무렵, 마쓰마에 성의 기반인 후쿠야마관이 축조되었다.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아, 에조치 각지에 설치한 '''바쇼'''라고 불리는 지행지에서 아이누와 무역을 했다. 운상옥에서는 육아 정책으로 옴샤 등도 행해졌다. 어장에 대해서는 홋카이도에서의 청어 어업사를 참조하면 된다. 화인지였던 오시마국 지역에는 후의 가야베군에 해당하는 지역에 간세이일본어 12년까지 하코다테 6개소가 개설되었다.

바쇼명위치
코야스 바쇼하코다테시 토이 코야스 지구 주변
토이 바쇼현 하코다테시 토이 지구 주변
시리시나이 바쇼현 하코다테시 에사시 지구 주변
오사츠베 바쇼현 하코다테시 미나미카야베 지구 주변
카야베 바쇼현 가야베군
노다오이 바쇼구 오치베무라, 현 후타미군야쿠모초 노다이 주변



교호일본어 16년에는 쿠나시리 및 에토로후의 수장들이 마쓰마에 번주를 방문하여 헌상품을 증정했다. 이것이 '''우이맘'''[3] 무역이다. 다누마 오키쓰구 시대인 덴메이일본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가미카와군 지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하면 화인이 볍씨·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기록했다.[4] 산 속에서 를 재배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조쿄일본어 2년부터 수전이 있었던 가메다군 지역의 오노무라 주변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미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시마국 지역을 비롯한 마쓰마에 번의 소령에서는 당초 구라이리지 이외의 에조치 및 화인지에서 급지에 상당하는 것으로서 어장 및 에조와의 교역 지역인 상장(바쇼)을 설치하고, 그곳에서의 교역권을 지행으로서 가신에게 분여하는 상장(바쇼)지행제가 행해졌지만, 후에 교역권 자체를 "바쇼 우케오이닌"의 명목으로 상인에게 대행시켜 지행주는 일정의 운상금을 얻는 바쇼 우케오이제로 이행해 갔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오시마국의 육상 교통[5]에서는 오슈 가도의 옆길인 마쓰마에 길이 센다이에서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쓰마에를 거쳐 하코다테까지, 또한 마쓰마에에서 가미노쿠니·에사시 방면으로는 코사고(치이사고) 산도가, 기코나이에서 가미노쿠니까지는 기코나이 산도가, 하코다테에서 가야베 고개를 지나 와시노키 방면에 이르는 길 (국도 5호의 전신) 등이 있었다. 이 외에, 막부 말기에는 후쿠야마-가미노쿠니 간 산도, 에사시와 하코다테를 잇는 우즈라야마 산도 (오노고에), 기존의 카야베 고개보다 거리가 짧은 후지야마-군가와 간의 군가와 신도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오시마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번치현까지 17곳의 뱃터가 있어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기나이세토 내해 지역, 산인이나 호쿠리쿠, 오우와 같은 동해 측 지역 등과의 사이에 기타마에 부네의 항로가 열리고, 물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간에이일본어 17년에는 카메다군 지역과 카야베군 지역에 걸쳐 있는 고마가타케에서 산체 붕괴를 동반하는 분화가 발생하여 대쓰나미가 발생, 우치우라만 맞은편의 이부리국 지역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분화는 간에이 대기근에도 영향을 미쳤다. 쇼오일본어 2년에는 유노카와 온천이 발견되었다. 겐로쿠일본어 7년에도 고마가타케가 분화했는데, 이때는 화산쇄류를 동반했다. (사망자, 행방불명자는 700명 이상이라고 전해짐).

간포일본어 원년에는 오시마가 분화하여 쓰나미가 발생, 쿠마이시에서 마쓰마에에 걸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마쓰마에 번의 공식 기록에서는 1467명이 사망 및 행방불명되었고, 마을 전체가 소멸된 장소도 있기 때문에, 일설에는 2000명 - 3000명 이상이라고도 한다. 간세이일본어 원년의 쿠나시리·메나시의 싸움 (간세이 에조의 난) 이후, 난의 평정에 헌신한 아이누 을명 (오미카타 에조)들이 마쓰마에로 가서 번주에게 위맘했다. 이때 그들을 소재로 한 이슈 열상 (카키자키 하쿄·작)이 그려졌다.

교와일본어 2년 2월, 에도 막부가 하코다테에 에조 봉행을 두었다. 이것은 공의어료가 되어 있던 동에조지를 관할했다. 같은 해 5월 에조 봉행을 하코다테 봉행으로 개칭했다. 분카일본어 4년, 오시마국 지역이나 서에조지 등도 공의어료가 되었기 때문에 마쓰마에 번은 무쓰국 (후의 이와시로국) 다테군 료카와에 9천 석으로 전봉 (료카와 번), 하코다테 봉행을 마쓰마에 봉행으로 고쳐 마쓰마에에 두고, 도호쿠 여러 번도 경고에 임했다.[6] 그러나 분세이일본어 4년 공의어료가 되어 있던 오시마국 지역이나 에조지 등을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시켜 마쓰마에씨가 복귀했다. 이에 따라 마쓰마에 봉행을 폐지했다. 고카일본어 3년, 카메다군 지역 동단의 에산에서 수증기 폭발에 따른 토석류가 발생하여 희생자가 발생했다. 안세이일본어 원년에는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고를 위해 마쓰마에 번에 의해 가미이소군 지역에 토키리치 진야가 축조되었지만, 안세이일본어 2년 하코다테 개항 등의 영향으로, 오시마국 지역의 오토베무라 이북과 기코나이무라 이동은 다시 공의어료가 되어 하코다테에 하코다테 봉행이 설치되었다. 봉행 "어예소"의 경고는, 지시군의 오토베무라 이북은 쓰가루 번, 가미이소군과 가메다군 서부가 마쓰마에 번, 카메다군 동부와 가야베군은 난부 번이 행했다. 그 다음 해, 다시 고마가타케가 화산쇄류를 동반하는 분화가 발생했다. 에조마쓰마에 한정으로 통용되었던 하코다테 통보도 발행되었다. 또한, 안세이일본어 6 - 7년에는 미이치 온천이 발견되었다. 겐지일본어 원년, 하코다테 봉행소를 고료카쿠로 이전했다.

무진 전쟁 무렵인 게이오일본어 4년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하코다테 봉행을 계승하는 하코다테 재판소 (후의 하코다테부)가 설치되었고, 또한, 마쓰마에 번은 다테 성으로 이전하여 다테 번이 되었다. 다테 번은 하코다테 만 해전 등이 벌어진 하코다테 전쟁에서 구 막부군 (에조 공화국)과 싸웠다. 에조 공화국은 외국과의 조약도 체결했기 때문에, 후의 갈트넬 개척 조약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하코다테 전쟁 종결 후, 하코다테현 (구 하코다테부)는 폐지되고 새로 개척사가 하코다테에 설치되었다.

3. 3. 국내 시설

가키 3년에 개산된 히야마 군의 조코쿠지에 있는 본당은 현존하는 건물 중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외에도, 무로마치 시대시리베시국 오쿠시리군에서 옮겨온 쓰가루 군의 호겐지, 에도 시대에 개산한 류운인이나 신슈 오타니 파 하코다테 별원 등이 있으며, 그 외에 니시 군의 몬쇼안·호조지·무료지 등이 있다.

오시마국으로의 일본인 진출은 오래되었으며,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인 우바가미다이진구와 후나다마 신사는 가마쿠라 시대 이전, 하코다테 하치만구와 이세 신궁의 영혼을 분사했다고 전해지는 야마가미다이진구는 무로마치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이세 신궁의 오마 (부적)을 모시고 있다고 전해지는 도쿠야마다이진구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존재했다.

  • 가메다 군 관음당 (현 후나다마 신사, 하코다테시)
  • 가메다 군 하코다테 신메이궁 (현 야마가미다이진구, 하코다테시)


; 소샤·이치노미야 이하

우바가미다이진구와 도쿠야마다이진구는 오시마국 이치노미야로 불렸으며, 하코다테 하치만구는 과거 에조치의 소샤였다.

4. 인물

오시마 국의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1456년 무렵부터 안동 가세이가 모베츠 관, 오다테, 하나자와 관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오시마 국을 다스린 수호는 다음과 같다.

시기성씨비고
1456년 ~ ?안동 가세이
1456년 ~ ?시모쿠니 사다토키
? ~ 1496년시모쿠니 쓰네토키
1496년 ~ 1513년아이하라 스에타네
1514년 ~ ?가키자키 미쓰히로가미노쿠니 수호 겸임
1456년 ~ ?가키자키 스에시게
? ~가키자키 미쓰히로


4. 1. 수호

1456년 무렵부터 안동 가세이가 모베츠 관, 오다테, 하나자와 관을 거점으로 삼았다.

시기성씨비고
1456년 ~ ?안동 가세이
1456년 ~ ?시모쿠니 사다토키
? ~ 1496년시모쿠니 쓰네토키
1496년 ~ 1513년아이하라 스에타네
1514년 ~ ?가키자키 미쓰히로가미노쿠니 수호 겸임
1456년 ~ ?가키자키 스에시게
? ~가키자키 미쓰히로


5. 오시마국의 전투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https://books.google[...] 1882
[3] 문서 ウイマムとは朝貢に似た交易儀礼で、アイヌ語で交易を意味する。松前藩では「御目見」といい、藩主や役人への謁見とともに行われた。
[4] 서적 千島列島をめぐる日本とロシア
[5] 간행물 北海道道路誌 北海道庁 1925-06-10
[6] 웹사이트 秋田県公文書館企画展 秋田藩の海防警備 https://www.pref.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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