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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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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덕지는 신라 경순왕의 왕자로, 울산 김씨의 시조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신라를 양국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며 형 마의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승려가 되어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설이 있으며, 왕자의 신분으로 고려에 항복하려는 부왕의 결정에 반대하고 절개를 지킨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14세손 김환이 고려 시대에 학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은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울산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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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덕지
원래 이름김덕지(金德摯)
구분신라왕자
김덕지(金德摯)
별호범공(梵空)
군호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왕조신라
부왕신라 경순왕
어머니죽방부인
왕가신라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형제자매마의태자
종교불교
성별남성

2. 생애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자로 학성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별호이다.[1][2]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고려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1][2]

일설에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은 범공(梵空)이라 한다.[3][4][5]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부왕 경순왕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형 태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6]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재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의 별호인 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7]

2. 1. 가계와 출생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자로, 학성(울산의 별호)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935년 10월, 경순왕고려신라를 양국하려 하자, 김덕지는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형인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고, 법명은 범공(梵空)이라 하며, 법수사와 해인사를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넘기려는 부왕의 결정에 반대하고, 형 마의태자와 함께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후손인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오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은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 2. 고려 귀부 반대와 개골산 은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자로 학성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별호이다.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고려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은 범공(梵空)이라 한다.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부왕 경순왕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형 태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재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의 별호인 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 3. 승려 생활과 망국의 한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자로 학성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별호이다.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고려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은 범공(梵空)이라 한다.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부왕 경순왕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형 태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4. 울산 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왕자로 학성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별호이다.[1][2]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고려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1][2]

일설에는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은 범공(梵空)이라 한다.[3][4][5]

김덕지는 왕자의 신분으로 부왕 경순왕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려 할 때 불가함을 극력 간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형 태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6]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 시대에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재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의 별호인 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7]

3. 후세의 평가

김덕지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행동으로 인해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11][12] 《동사찬요》에서는 왕자신라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은 중국 촉한 멸망 시 북지왕 유심(劉諶)과 더불어 일월의 빛을 다툴 만한데, 이름이 동방의 문헌에 매몰되어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11]동사강목》에서는 "그 왕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니 그 간책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한때 남면하여 임금 노릇한 영광과 비교되겠는가?"라고 평가하였다.[12]

3. 1. 긍정적 평가

김덕지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행동으로 인해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11][12] 《동사찬요》에서는 왕자신라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은 중국 촉한 멸망 시 북지왕 유심(劉諶)과 더불어 일월의 빛을 다툴 만한데, 이름이 동방의 문헌에 매몰되어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11]동사강목》에서는 "그 왕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니 그 간책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한때 남면하여 임금 노릇한 영광과 비교되겠는가?"라고 평가하였다.[12]

3. 2. 부정적 평가

김덕지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행동은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11][12] 《동사찬요》는 왕자신라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은 중국 촉한 멸망 시 북지왕 유심(劉諶)과 더불어 일월의 빛을 다툴 만한데, 이름이 동방의 문헌에 매몰되어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고 평가했다.[11]동사강목》에서는 “그 왕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니 그 간책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한때 남면하여 임금 노릇한 영광과 비교되겠는가?”라고 평가하였다.[12]

4. 야사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의 장녀 덕주 공주(德周公主)는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도중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부근에 정착하게 되었고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절을 세웠으니 공주의 이름을 따 덕주사(德周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전설의 주인공이 '덕주 공주'가 아니라 '덕지 왕자'라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전해져 오는 김신대(金信臺) 설화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자 경순왕의 둘째아들은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이라는 승려가 된 뒤, 만년에 문수산 남쪽 자락 남암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 절의 이름이 '김신암'이다. 또 암자 근처에 ‘김신대라는 돈대를 만들어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지금은 암자의 흔적과 왕자가 사용했다는 석조만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13][14]

동고사876년(헌강왕 2)에 도선국사가 전주 지역에 창건한 네 곳의 사찰중 하나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동고사(東固寺)라 칭했다고 한다.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둘째 아들 덕지(德摯)왕자가 그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출가하여 범공(梵空)이란 승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부모 형제 다섯 사람의 모습을 나무로 새겨 이곳에 봉안했다고 하여 ‘김부대왕(金傅大王)절’, ‘진불대왕(眞佛大王)절'이라 했다고도 한다.

4. 1.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전설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의 장녀 덕주 공주(德周公主)는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도중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부근에 정착하게 되었고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절을 세웠으니 공주의 이름을 따 덕주사(德周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전설의 주인공이 '덕주 공주'가 아니라 '덕지 왕자'라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전해져 오는 김신대(金信臺) 설화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자 경순왕의 둘째아들은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이라는 승려가 된 뒤, 만년에 문수산 남쪽 자락 남암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 절의 이름이 '김신암'이다. 또 암자 근처에 ‘김신대라는 돈대를 만들어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지금은 암자의 흔적과 왕자가 사용했다는 석조만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13][14]

동고사876년(헌강왕 2)에 도선국사가 전주 지역에 창건한 네 곳의 사찰중 하나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동고사(東固寺)라 칭했다고 한다.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둘째 아들 덕지(德摯)왕자가 그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출가하여 범공(梵空)이란 승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부모 형제 다섯 사람의 모습을 나무로 새겨 이곳에 봉안했다고 하여 ‘김부대왕(金傅大王)절’, ‘진불대왕(眞佛大王)절'이라 했다고도 한다.

4. 2. 울산 김신대 설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는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자, 경순왕의 둘째 아들이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이라는 승려가 된 뒤, 만년에 문수산 남쪽 자락 남암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살았다는 김신대(金信臺) 설화가 전해져 온다.[13][14] '김신암'이라 불린 이 절 암자 근처에는 김신대라는 돈대를 만들어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지금은 암자의 흔적과 왕자가 사용했다는 석조만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13][14]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둘째 아들 덕지(德摯)왕자가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하여 범공이란 승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부모 형제 다섯 사람의 모습을 나무로 새겨 동고사에 봉안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김부대왕(金傅大王)절’, ‘진불대왕(眞佛大王)절'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4. 3. 전주 동고사 유래

876년(헌강왕 2)에 도선국사가 전주 지역에 창건한 네 곳의 사찰 중 하나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동고사(東固寺)라 칭했다고 한다.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둘째 아들 덕지(德摯)왕자가 그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출가하여 범공(梵空)이란 승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부모 형제 다섯 사람의 모습을 나무로 새겨 이곳에 봉안했다고 하여 ‘김부대왕(金傅大王)절’, ‘진불대왕(眞佛大王)절'이라 했다고도 한다.[13][14]

5. 주요 후손


  • 김환 : 고려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 문숙공
  • 김온 : 조선 개국원종공신, 좌명공신, 여산군・흥려군, 양주목사, 장성 학림사 배향.
  • 김인후 : 조선의 성리학자, 하서선생, 문정공, 문묘 종사, 장성 필암서원 배향.
  • 김기하 : 조선 후기 문신, 각재선생, 우암 송시열 제자, 후릉참봉, 증좌승지, 장성 연호사 배향.
  • 김성수 : 호 인촌,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창립.
  • 김병로 : 호 가인,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5. 1. 고려

김환은 고려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숙공이다. 김온은 조선 개국원종공신, 좌명공신으로 여산군·흥려군에 봉해졌고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장성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5. 2. 조선

김환은 고려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 문숙공이다. 김온은 조선 개국원종공신, 좌명공신, 여산군・흥려군, 양주목사였으며 장성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김인후는 조선의 성리학자로 호는 하서선생, 시호는 문정공이며, 문묘에 종사되었고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기하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호는 각재선생, 송시열의 제자였으며 후릉참봉, 증좌승지를 지냈고 장성 연호사에 배향되었다. 김성수는 호가 인촌이며,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고 고려대학교동아일보를 창립하였다. 김병로는 호가 가인이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5. 3. 근현대

김환은 고려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김온은 조선 개국원종공신, 좌명공신으로 여산군・흥려군에 봉해졌고,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장성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김인후는 조선의 성리학자로 호는 하서선생,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고,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기하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호는 각재선생, 송시열의 제자이며, 후릉참봉, 증좌승지를 지냈고, 장성 연호사에 배향되었다. 김성수는 호가 인촌이며,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고, 고려대학교동아일보를 창립하였다. 김병로는 호가 가인이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참조

[1] 뉴스 "[정복규의 성씨순례] 새전북신문 2013년 9월 24일" http://www.sjbnews.c[...] 2013-09-24
[2] 서적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사편찬위원회
[3]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덕지(金德摯" https://terms.naver.[...]
[4] 서적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해인사지 국사편찬위원회
[5] 웹사이트 "[대전 중구청 효월드] 울산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 https://www.djjunggu[...]
[6] 뉴스 "[정복규의 성씨순례] - 인촌과 울산김씨 익산신문 2010년 5월 31일" http://iksannews.com[...] 2010-05-31
[7] 뉴스 "[장성 울산김씨 문정공 하서종가 / 필암서원] 남도일보 2020년 5월 21일" http://www.namdonews[...] 2020-05-21
[8] 웹사이트 삼국유사 권2 기이편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9] 문서 별자(別子) 종법:『예기』 대전(大傳)에 따르면 제후의 적장자는 부조(父祖)를 계승하여 제후가 되고, 중자(衆子)들은 경대부(卿大夫)의 작위를 받아 별도로 일가를 세우니 이것을 별자(別子)라 한다.
[10] 뉴스 "[相生의 땅 가야산] (34) - 나라 잃은 왕족들의 원한 매일신문 2008년 3월 3일" http://www.imaeil.co[...] 2008-03-03
[11] 서적 조선시대 문신 오운이 1606년에 저술한 역사서
[12] 서적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안정복이 1756년~1778년 사이에 완성한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통사적인 역사서
[13] 뉴스 "[울산의 설화] 6. 무거와 김신암 울산매일 2014년 10월 8일" http://www.iusm.co.k[...] 2014-10-08
[14] 문서 1786년(정조 10) 제작된 울산읍지(蔚山邑誌)에 “문수암(文殊庵) 남쪽 3리에 김신암(金信庵)이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消暢)이라 한다.”고 하였는바 그때까지 절이 실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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