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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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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반대에도 고려에 신라를 양위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김덕지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 시대 김환을 중시조로 하여 울산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의 후손들이 장성에 정착하며 가문을 번성시켰다. 조선 시대에 김인후, 김성수, 김병로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현대에도 정치, 경제, 언론,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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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김씨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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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인은 5선 국회의원과 장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며 경제민주화를 추진했으나 뇌물수수 전력과 국보위 참여 경력 등으로 논란이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이다.
울산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울산 김씨 정보
성씨울산 김씨
한자 표기蔚山金氏
나라한국
관향울산광역시
원시조김알지
시조김덕지
중시조김환
집성촌
지역전라남도 장성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함경남도 문천군
주요 인물
인물김계흥
김황
김온
김인후
김경수
김남중
김기하
김시서
김희서
김녹휴
김익중
김경중
김성수
김병로
김연수
김상협
김녹영
김종인
통계
년도2000
인구36,225명
순위163

2. 역사

시조 김덕지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 태자[1]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도를 닦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14세 김환(金環)은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때 삼중대광 광록대부 영도첨의사에 이르고 문숙의 시호를 하사받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2]

17세 김온(金穩)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흥려군에 봉해지고 양주 목사로 재임하다 1413년(태종 13) 졸하였다.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는 한성판윤 민량(閔亮)의 딸로 조선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와 사촌간인데,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친가가 화를 입자 세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면서부터 장성을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이후 가문은 산림에서 명리를 멀리하고 학문과 존심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어려운 고비에 처하면 분기하여 의를 지키고 충절을 다하였으니, 단종의 참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국난에 의인 열사가 무리지어 나왔다. 문·무과 급제자 및 음사, 은일로 출사한 인사도 다수 나왔다. 장성에 터를 잡은 지 5대에 문묘 종향의 대현, 문정공 하서 김인후가 나왔다. 호남 지방에서는 하서 김인후의 집안을 명족으로 꼽으며, 『울김』이라 부른다.

2. 1. 시조 및 기원

시조 김덕지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 태자[1]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도를 닦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14세 김환(金環)은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때 삼중대광 광록대부 영도첨의사에 이르고 문숙의 시호를 하사받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2]

17세 김온(金穩)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흥려군에 봉해지고 양주 목사로 재임하다 1413년(태종 13) 졸하였다.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는 한성판윤 민량(閔亮)의 딸로 조선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와 사촌간인데,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친가가 화를 입자 세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면서부터 장성을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이후 가문은 산림에서 명리를 멀리하고 학문과 존심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어려운 고비에 처하면 분기하여 의를 지키고 충절을 다하였으니, 단종의 참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국난에 의인 열사가 무리지어 나왔다. 문·무과 급제자 및 음사, 은일로 출사한 인사도 다수 나왔다. 장성에 터를 잡은 지 5대에 문묘 종향의 대현, 문정공 하서 김인후가 나왔다. 호남 지방에서는 하서 김인후의 집안을 명족으로 꼽으며, 『울김』이라 부른다.

2. 2. 고려 시대

김환(金環)은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 영도첨의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충숙왕 때 전택을 특사받았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부인 남양 홍씨는 문하시중 홍승찬의 딸이다.[3] 김계흥은 봉익대부 판도판서 또는 자헌대부 진현관대제학, 학성군을 지냈다. 김황(金貺)은 봉상대부 전공총랑을 지냈으며, 부인 경주 김씨는 계림부원군 강의공 김득겸의 딸이다.

2. 3. 조선 시대

울산 김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김온(金穩)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불천위에 올랐다.[4] 그의 부인 여흥 민씨는 조선 태종의 왕권 강화 정쟁 때 외척 세력으로 친가가 피화를 당하자[5] 멸문지화를 피해 아들 3형제를 이끌고 장성으로 낙향하여, 이후 장성이 울산 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김온의 장자 김달근(金達根)은 수의부위 좌군 부사정을 지냈고,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었다. 김율(金律)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 두 군의 수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신덕(金愼德)은 호가 손암으로, 송화현감, 청암 찰방을 지냈으며, 단종 절신으로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에 배향되었다. 김성길(金成吉)은 호가 맥로로, 승사랑, 진원훈도를 지냈으며, 그의 부인 연안 김씨는 임진왜란 때 투신하여 절개를 지켰다. 김대명(金大鳴)은 호가 백암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사천・괴산・풍기・봉산군수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 대각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천록(金天祿)은 여주판관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김명겸(金命兼)은 호가 삼함재로, 겸재 하홍도의 문인이며, 종천서원에 배향되었고, 《삼함재집》을 남겼다.

김온의 차남 김달원(金達源)은 충좌위 중령사정을 지냈고,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었다. 김의강(金義剛)은 사온서 직장을 지냈다. 김환(金丸)은 연산군 때 단상법이 엄했는데도 삼년 복상을 하였으며, 행의가 있었다. 김령(金齡)은 행의가 있었고, 의릉참봉을 지냈다. 김인후(金麟厚)는 호가 하서・담재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하였고,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기묘사화 제현의 신원 복원을 최초로 개진하였으며, 을사사화 때 고향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가로, 10여 권의 시문집과 1,6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종호(金從虎)는 자가 계의, 호가 백화당으로, 남부・선릉참봉, 자여찰방을 지냈으며, 시인이었다. 김남중(金南重)은 호가 취옹으로, 광국원종공신, 선교랑을 지냈으며, 장성 회계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부인 행주 기씨는 정유재란 때 왜놈들에게 팔을 잡히자 잘라 버리고 강물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켰으며, 열녀 정려를 받았다. 김형지(金亨祉)는 호가 맥촌으로, 우암 송시열・현석 박세채・문곡 김수항 등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고, 선조 하서 김인후의 천양 사업에 매진하였으며, 《맥촌유적》을 남겼고,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김명하(金鳴夏)는 호가 간옹으로, 세칭 화산처사로 불렸으며, 장성군 서삼면 연호사에 배향되었다. 김기하(金器夏)는 호가 각재로, 세칭 각재선생으로 불렸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유학 뿐 아니라 역사·의학·지리·천문 등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문곡 김수항 등과 교유하고, 그의 자제들인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 등 거유 석학들과 깊이 사귀었다. 선조 하서 김인후의 학문 연구와 업적을 정리하였으며, 스승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되자 인근 선비들을 모아 장례를 주관하고 서원을 세웠다. 학행으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소 하서라 칭해졌다. 《각재유고》를 남겼고, 장성군 서삼면 연호사에 배향되었다. 김시서(金時瑞)는 호가 자연당으로, 송시열의 문인이었으며, 순창군 쌍치에 은거하며 하서 김인후의 강학 공간인 훈몽재를 수축하고, 초당 자연당(自然堂)을 지어 하서의 유업을 계승하였고, 순창군 어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희서(金羲瑞)는 호가 환암으로, 삼연 김창흡의 문인이었으며, 학문이 독실하고 효도가 후순 지행하며 향리의 화목을 도모하여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격물치지설》과 《향약》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고, 《환암유고》를 남겼으며,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김우서(金禹瑞)는 학문과 행실이 돈독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호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참판공유고》를 남겼다. 김수조(金壽祖)는 호가 맥호로, 미호 김원행의 문인이었으며,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익휴(金益休)는 호가 청수루로, 미호 김원행의 문인이었으며, 휘릉참봉을 지냈고,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에 배향되었다. 김우휴(金羽休)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김녹휴(金祿休)는 호가 신호로, 조선 후기 유학자였으며, 노사 기정진의 문하생으로, 선공감 가감역을 지냈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신호집》을 남겼고, 장성군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익중(金翼中)은 호가 녹동으로, 한말 의병장으로 정미년에 순절하였으며, 전북 진안군 이산묘에 배향되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기중(金祺中)은 호가 원파로, 진사를 지냈으며, 용담・동복군수를 지냈고, 김경중과 육영사업을 하여 보성전문학교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 김노수(金魯洙)는 호가 경암으로, 일제강점기 한학자·역사학자였으며, 연재 송병선의 문인으로, 《경암집》을 남겼다.

김온의 삼남 김달지(金達枝)는 성균진사를 지냈고, 수의부위 우군 부사정을 지냈으며,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었다. 김처리(金處离)는 호가 도암・남강으로, 성균생원을 지냈고, 장례원사평을 지냈으며, 단종 절신으로 장성 회계사에 배향되었다. 김걸(金傑)은 성균진사를 지냈고, 건원릉참봉, 장례원판결사를 지냈으며,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김응두(金應斗)는 호가 서수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부응교, 고부군수, 밀양 순천부사, 광주목사를 지냈으며, 장성 학림사에 배향되었다. 김백균(金百鈞)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 부제학, 대사간, 평안감사를 지냈다. 김경수(金景壽)는 호가 오천으로, 건원릉참봉, 내첨시참봉,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를 주도하여[6] 난이 평정될 때까지 7년간 3차에 걸쳐 의병 항전을 이끌었고, 군자감정, 동지중추부사, 동지의금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오천집》을 남겼고, 장성 회계사・오산사 양사에 배향되었다. 김신남(金信男)은 호가 오암으로, 판관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용인 운봉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장성 오산사에 배향되었다. 김극후(金克厚)는 참봉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김극순(金克純)은 승사랑, 교관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서 순국하였고, 그의 부인 하동 정씨는 투신하여 절개를 지켰다. 김진호(金鎭祜)는 호가 금초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사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금초집》을 남겼다.

2. 4. 근대

김성수(金性洙)는 호가 인촌으로, 근·현대 사업가·언론인·교육자·정치가였다. 고려대학교와 경성방직, 동아일보를 창설했으며,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근대사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김병로(金炳魯)는 호가 가인으로, 일제강점기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로 불린다.

김연수(金䄵洙)는 호가 수당으로, 삼양사 그룹을 창설하고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김상만(金相万)은 호가 일민으로,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고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자유의 금펜상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상홍(金相鴻)은 삼양그룹 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태규(金兌奎)는 대한민국의 법학자로 전남대 법대 교수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녹영(金祿永)은 호가 백우로, 대한민국 제8・9・10・12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2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힘썼다.

김상협(金相浹)은 호가 남재로, 정치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지성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김병관(金炳琯)은 호가 일민으로,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며 민족 전통문화예술에 기여했다.

김종인(金鍾仁)은 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경제민주화를 제창했다.[7][8] 11·12·14·17·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김병철(金炳哲)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김재진(金載軫)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김재호(金載昊)는 동아일보·채널 A 대표이사이다. 김재열(金載烈)은 기업인으로,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둘째사위이다.

2. 5. 현대

김성수(金性洙)는 호가 인촌으로, 근·현대 사업가·언론인·교육자·정치가였다. 고려대학교와 경성방직, 동아일보를 창설했으며,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근대사의 거목으로 평가받는다. 김병로(金炳魯)는 호가 가인으로, 일제강점기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로 불린다. 김연수(金䄵洙)는 호가 수당이며, 삼양사 그룹의 창설자이자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김상만(金相万)은 호가 일민이며,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고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자유의 금펜상을 수상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상홍(金相鴻)은 삼양그룹 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태규(金兌奎)는 대한민국의 법학자로 전남대 법대 교수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녹영(金祿永)은 호가 백우이며, 대한민국 제8・9・10・12회 국회의원과 12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힘썼다. 김상협(金相浹)은 호가 남재로, 정치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지성의 거목으로 불린다. 김병관(金炳琯)은 호가 일민이며,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고 민족 전통문화예술에 기여했다.

김종인(金鍾仁)은 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경제민주화 제창자이다.[7][8] 11·12·14·17·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김병철(金炳哲)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김재진(金載軫)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김재호(金載昊)는 동아일보·채널 A 대표이사이다. 김재열(金載烈)은 기업인으로,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둘째사위이다.

3. 본관

울산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신라 때는 굴아화촌이다. 901년 효공왕때 한 쌍의 학이 금으로 된 신상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에서 울어 고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신학성이라 불렀다. 고려 태조때 고을 사람 호족 박윤웅이 공을 세워 동진과 우풍의 두 고을을 합쳐 흥려부로 승격되었다가, 995년 (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공화현으로 강등되고 별호로 「학성」이라 하였다. 1018년 (현종 9)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을 합쳐 울주로 개칭하고 방어사를 두었다.

1413년 (태종 13) 울산군으로 개칭하고 1598년 (선조 31)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 울산군으로 개편되고, 1962년 울산시로 통합되었다가 1997년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

4. 분파

5. 주요 인물

5. 1. 고려

김환(金環)은 삼중대광 광록대부 학성군 영도첨의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충숙왕 때 전택을 특사받았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부인 남양 홍씨는 문하시중 홍승찬의 딸이다.[3] 김계흥은 봉익대부 판도판서 또는 자헌대부 진현관대제학, 학성군을 지냈다. 김황(金貺)은 봉상대부 전공총랑을 지냈으며, 부인 경주 김씨는 계림부원군 강의공 김득겸의 딸이다.

5. 2. 조선

김온(金穩)은 호가 학천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단양군사, 함안군사, 밀양부사,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흥려군에 봉해졌으며, 가선대부 흥려군으로서 불천위에 올랐다.[4]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에 주향되었다.

김온의 부인 정부인 여흥 민씨는 한성판윤 민량(閔亮)의 딸이자, 조선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의 사촌 언니이다. 아호는 하소부인(荷沼夫人)이다. 조선 태종의 왕권 강화 정쟁 때 외척 세력으로 친가인 민무구·민무질 형제 등이 피화를 당하자,[5] 멸문지화를 피해 아들 3형제(달근, 달원, 달지)를 이끌고 호남 땅 장성 맥동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장성은 울산 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하소부인은 우리나라 여류 3현으로 일컬어지며, 풍수이론서 《하소결》을 남겼다.

김온의 장자 김달근(金達根)은 수의부위 좌군 부사정을 지냈으며,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다. 김달근의 후손으로는 김율(金律, 성균관사예), 김신덕(金愼德, 송화현감, 청암 찰방, 단종 절신), 김성길(金成吉, 승사랑, 진원훈도), 김대명(金大鳴, 예조정랑, 사천・괴산・풍기・봉산군수, 임진왜란 거의), 김천록(金天祿, 여주판관,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순절, 선무원종공신), 김명겸(金命兼, 겸재 하홍도 문인) 등이 있다.

김온의 차자 김달원(金達源)은 충좌위 중령사정을 지냈으며,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다. 김달원의 후손으로는 김의강(金義剛, 사온서 직장), 김환(金丸, 금구훈도), 김령(金齡, 의릉참봉), 김인후(金麟厚, 문과, 홍문관 부수찬, 성리학자), 김종호(金從虎, 남부・선릉참봉, 자여찰방), 김남중(金南重, 광국원종공신, 선교랑), 김형지(金亨祉, 우암 송시열・현석 박세채・문곡 김수항등과 교유), 김명하(金鳴夏, 화산처사), 김기하(金器夏, 우암 송시열의 문인, 문곡 김수항 등과 교유), 김시서(金時瑞, 송시열의 문인), 김희서(金羲瑞, 삼연 김창흡 문인), 김우서(金禹瑞), 김수조(金壽祖, 사헌부장령), 김익휴(金益休, 휘릉참봉), 김우휴(金羽休,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승정원동부승지), 김녹휴(金祿休, 노사 기정진 문하생), 김익중(金翼中, 한말 의병장), 김기중(金祺中, 용담・동복군수), 김노수(金魯洙, 연재 송병선 문인) 등이 있다. 특히, 김인후는 기묘사화 제현의 신원 복원을 최초로 개진하였고, 을사사화 때 고향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매진,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가로 자리 잡았다.

김온의 삼자 김달지(金達枝)는 성균진사를 지냈으며, 수의부위 우군 부사정을 지냈고, 세종대왕의 내·외족 육촌계원이다. 김달지의 후손으로는 김처리(金處离, 성균생원, 장례원사평, 단종 절신), 김걸(金傑, 성균진사, 건원릉참봉, 장례원판결사), 김응두(金應斗, 홍문관교리, 부응교, 고부군수, 밀양 순천부사, 광주목사), 김백균(金百鈞, 홍문관직제학 부제학, 대사간, 평안감사), 김경수(金景壽, 건원릉참봉, 예조좌랑,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6]), 김신남(金信男, 판관, 임진왜란 의병), 김극후(金克厚, 참봉, 임진왜란 진주성 순국), 김극순(金克純, 승사랑, 교관, 임진왜란 거병 진주성 순국), 김진호(金鎭祜, 사간원사간, 홍문관교리) 등이 있다.

5. 3. 현대


  • 김성수(金性洙) : 호는 인촌(仁村)이며, 근·현대 사업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가이다. 고려대학교와 경성방직, 동아일보를 창설하였고,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 김병로(金炳魯) : 호는 가인(街人)이며,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였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 김연수(金䄵洙) : 호는 수당(秀堂)이며, 삼양사 그룹 창설자,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이다.
  • 김상만(金相万) : 호는 일민(逸民)이며,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였고,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자유의 금펜상을 수상하였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였다.
  • 김상홍(金相鴻) : 삼양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 김태규(金兌奎) : 대한민국의 법학자로, 전남대 법대 교수, 제9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김녹영(金祿永) : 호는 백우(白愚)이며, 대한민국 제8・9・10・12회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1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힘썼다.
  • 김상협(金相浹) : 호는 남재(南齋)이며, 정치학자이다. 고려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 김병관(金炳琯) : 호는 일민(逸民)이며,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하였다.
  • 김종인(金鍾仁) : 전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민주화 제창자[7][8], 11·12·14·17·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5선)을 역임했다.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다.
  • 김병철(金炳哲) :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김재진(金載軫)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을 역임하였다.
  • 김재호(金載昊) : 동아일보·채널 A 대표이사이다.
  • 김재열(金載烈) : 기업인,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둘째사위이다.

6. 집성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일원, 서삼면 장산리, 금계리, 북하면 덕재리, 중평리, 북일면 성산리, 북이면 신평리, 진원면 산동리에 집성촌이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도 집성촌이 있으며,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함경남도 문천군 천내리에도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7. 항렬자

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43세44세45세46세47세48세
口현(賢)口조(祖)
경(敬)
방(邦)
지(志)
문(文)
口휴(休)口환(煥)
口경(景)
요(堯)
규(圭)
기(基)
口중(中)
口기(基)
종(鍾)
口수(洙)
口주(柱)
口영(永)
상(相)
용(容)
동(東)
병(炳)
형(炯)
口규(奎)
재(載)
재(在)
진(鎭)
口구(九)
종(鐘)
종(鍾)
치(治)口래(來)광(光)口표(杓)연(鍊)口홍(洪)병(秉)口희(熙)노(老)


8. 과거 급제자

울산 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2명, 무과 급제자 4명, 음관 13명, 사마시 급제자 45명을 배출했다.[9][10]

문과 급제자는 김응두, 김인후, 김백균, 김대명, 김종진, 김우휴, 김진호, 김동주, 김흥수, 김상호, 김헌수, 김상희이다. 무과 급제자는 김해룡, 김흥국, 김경택, 김형택이다.

음관은 김기하, 김시서, 김장환, 김경휴, 김도환, 김우휴, 김영수, 김경휴, 김칠환, 김도환, 김봉휴, 김종휴, 김정환이다.

사마시 급제자는 김준, 김응두, 김규, 김대명, 김진추, 김극진, 김의휴, 김시화, 김기휴, 김방유, 김응휴, 김경휴, 김기환, 김요언, 김연환, 김요익, 김흥환, 김봉수, 김영환, 김국노, 김인후, 김백균, 김홍균, 김석형, 김진휘, 김시서, 김곡, 김경집, 김익휴, 김문재, 김이조, 김방묵, 김방규, 김도환, 김종휴, 김만현, 김봉휴, 김상환, 김학수, 김기중, 김용중, 김헌수, 김학규, 김건중(金建中), 김용기이다.

참조

[1] 기타
[2] 서적 울산 김씨 기사보
[3] 족보 남양 홍씨 족보
[4] 기타
[5] 기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獄事)
[6] 기타
[7] 법률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제2항
[8] 뉴스 김종인 비대위원장,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란 http://www.nspna.com[...] NSP통신 2016-01-29
[9] 웹사이트 디지털향토문화대전 울산 김씨편 https://terms.naver.[...]
[10]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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