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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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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득황은 일제강점기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으나, 해방 후 광복군 활동, 친일 문학 비판, 만주사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니혼 대학 졸업 후 만주국 관료로 근무했으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 내무부차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복지 분야와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며 반공주의 사상 보급에 기여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항일 운동 참여 경력이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그는 만주 관련 저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광복군 활동, 미군정 재판 등 다양한 경험을 겪었다.

2. 생애

김득황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만주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다.[1]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사회복지 분야와 함께 간도와 만주 연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며 반공주의 사상 보급을 주도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해외 부문에 김득황을 포함시켰으나, 김득황의 지인들이 그의 항일운동 참여 경력과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 정정 신청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오류를 인정하고 정식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제외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데, 현재 이 앱에서도 김득황은 제외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만주국 관료 경력

평안북도 의주군의 무관 집안 출신으로 일본 니혼 대학을 졸업했다. 1942년 대학 졸업과 함께 만주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퉁화에서 관방 사무관으로 재직하며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다.[1]

2. 2. 해방 이후 공직 생활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귀국하여 참의원 법제조사국장과 대한민국 제3공화국 내무부차관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일했다.[1] 1970년대부터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면서 간도와 만주 연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재야 역사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무렵 정책적 배려 하에 장려되던 반공주의 사상 보급을 주도하였다.

2. 3. 사회복지 및 재야 역사학 활동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귀국하여 참의원 법제조사국장과 제3공화국 내무부차관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일했다.[1] 1970년대부터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면서 간도와 만주 연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재야 역사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무렵 정책적 배려 하에 장려되던 반공주의 사상 보급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역사학자인 김득황이 만주국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해외 부문에 이 경력을 근거로 김득황을 포함시켰다.

이에 대하여 김득황의 지인들이 그의 항일운동참여 경력과 그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 정정신청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오류를 인정하고 정식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그 이름을 제외시켰다. 친일인명사전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데, 현재 이 앱에서도 김득황은 제외되어 있다.

3. 친일 논란과 해명

김득황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 대학을 졸업했다. 1942년 만주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퉁화에서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다.[1]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귀국하여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사회복지 분야와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며 반공주의 사상 보급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김득황이 만주국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 경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 정정신청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 김득황은 1958년 출간된 『한국사상사』에서 이광수 등 저명인사들의 친일행적을 비판하였다.
  • 김득황은 만주국 관리 시절 항일조직 태극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에는 임시정부 북경비밀기관장 김승학의 지시로 일본군의 동향을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해방 후 김득황은 광복군 국내 제2지대의 간부로 활동했다. 미군정 포고령 28호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과정에서 체포되기도 했으나,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인 안미정 선생의 변호로 풀려났다.
  • 조동진 목사는 2001년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김득황이 한일협정 반대 운동 당시 자신을 보호해줬다고 언급했다.
  • 김득황은 만주와 관련된 저술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청나라와 조선의 영토 경계선이 압록강두만강이 아니라 더 북쪽임을 보여주는 당빌의 『새중국지도』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3. 1.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과 논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해외 부문에 김득황이 만주국 관리로 근무한 경력을 근거로 포함되었다.[1]

이에 김득황의 지인들은 그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증빙자료를 민족문제연구소에 제출하여 정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류를 인정하고 정식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김득황의 이름을 제외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데, 현재 이 앱에서도 김득황은 제외되어 있다.

3. 2. 항일 활동 주장과 자료 제출

이에 대하여 김득황의 지인들이 그의 항일운동 참여 경력과 그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 정정신청을 요구했다.[1]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오류를 인정하고 정식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그 이름을 제외시켰다. 친일인명사전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데, 현재 이 앱에서도 김득황은 제외되어 있다.

3. 3. 민족문제연구소의 오류 인정과 제외

김득황의 지인들은 김득황이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 정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류를 인정하고 정식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김득황의 이름을 제외했다.[1] 친일인명사전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데, 현재 이 앱에서도 김득황은 제외되어 있다.

4. 항일 활동 상세

김득황은 친일 문학을 비판하고,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군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종국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저술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면서 김득황과 여러 차례 교류했다. 김득황은 해방 이후 공개적으로 친일문학가들을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었다.[1]

김득황은 만주국 관리 시절 만주 통화시를 중심으로 재만 한인들과 함께 비밀 항일 조직 태극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에는 김승학의 지시를 받아 일본군의 동향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해방 후에는 광복군 국내 제2지대 부관처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 포고령에 의해 광복군이 강제 해산되면서 김득황은 동료들을 피신시키다 미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때 김구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김구의 맏며느리인 안미정이 변호를 맡아 김득황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조동진 목사는 자신의 수기에서 김득황이 박정희 정권 시절 자신의 아버지 조상항의 부하이자 광복군 출신으로, 자신에게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더 이상 가담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중앙정보부가 자신을 체포하려 하자 김득황이 독립운동가답게 "조 목사를 체포하려거든 내 사표부터 받고 하십시오"라며 맞섰다고 증언했다.

4. 1. 친일 문학 비판

1958년 김득황은 저서 『한국사상사』의 "제7장 종전전의 말기적 사상"에서 대동민우회, 애국금전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야마도동맹 등 친일단체의 활동을 서술하며 이광수, 박흥식, 이성근, 윤치호, 박춘금, 박희도 등 주요 인사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1]

특히 이광수에 대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과거 민족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이광수는 더 많은 이성을 잃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우리는 천황의 신민이며 일본은 우리의 조국이다. 우리는 생명으로써 조국을 지킬 것이다’라고 담대히 피력함에 이르렀다. 이제 이광수는 계몽주의작가가 아니라 실성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라고 비판했다.[1] (『한국사상사』, 380쪽)

1966년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저술하면서 자료 조사를 위해 김득황과 여러 차례 교류했다. 김득황은 해방 후 공개적인 저술을 통해 친일문학가들을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

4. 2.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

김득황은 만주국 관리 시절, 만주 통화시를 중심으로 재만 한인들과 비밀 항일 조직인 태극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 이후, 당시 임시정부 북경 비밀 기관장이었던 김승학(독립신문사 사장, 참의부 대표)의 지시로 통화 지구 연락 책임을 맡아 일본군의 동향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태극회는 일제에 적발되어 동료들이 다수 희생되기도 하였다. 태극회의 당시 활동은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하권』(1989)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김득황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동향 집안 어른이자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김승학 선생의 영향이 컸다.

4. 3. 광복군 활동과 미군정 재판

해방 후 김득황은 1945년 11월부터 광복군 국내 제2지대 부관처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광복군 국내 제2지대를 비롯한 국내 무장단체들이 1946년 1월 미군정 포고령 제28호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면서, 김득황의 광복군 활동 경력은 짧게 끝났다. 김득황은 해방 전부터 임시정부 상관으로 모신 김승학 선생 등 동료들을 피신시키다가 미군에 체포되었고, 미군정 포고령 제28호 3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구금되었다.

이때 김득황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인 안미정 선생이었다. 김구 선생은 김승학 선생으로부터 동지가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다는 보고를 받고, 상해 중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해 영어에 능통한 며느리에게 직접 변호를 맡겼다. 안미정 선생의 변론 덕분에 김득황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김승학 선생의 저서 『망명객행적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망명객행적록』의 "조국 해방과 그 뒤 소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제1지대를 사퇴하고, 국내 제2지대 설립 책임을 지고 삼팔선 경계인 개성에 자리를 잡고 해외에서 입국하는 청년 백여 명과 국내 청년을 합하여 수백 명을 모아서 만월대에 임시 군영을 두고 훈련하면서 경비 일체는 개성실업계에서 담당하기로 하고, 일생 동안 적극 추진하던 중에 미 주둔군 군정영으로 강제 해산을 당하고, 훈련책임자 김○○은 미군 재판 하에서 오 년형을 구형받았다."

여기서 김○○은 김득황을 가리킨다. 김승학 선생의 자료에는 이름이 정확하게 기재되지 않아 김득황의 광복군 활동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미국 국가기록물보관소에 보관된 당시 재판자료를 통해 정확한 사실관계가 규명될 수 있다.

4. 4. 조동진 목사의 증언

조동진(1924년생)은 대한국군준비위원회 군수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조상항의 아들로, 서울 후암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반독재투쟁에 앞장선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동진은 2001년 9월 국민일보에 연재한 "나의 길, 나의 신앙"이라는 수기에서 김득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한일협정반대 기독교구국대책위원회의 영락교회 집회에 나가 반일강연을 했다 ..... 언론은 내 강연 중 반군사정권 발언부분만을 확대보도했다. 중앙정보부는 기독교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는 북한간첩이 스며들어 있다며 한경직, 강신명, 강원룡, 전경연 등을 옥죄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무차관인 김득황 장로가 찾아와 ‘위험하니 더 이상 가담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말했다. 김장로(김득황)는 광복군이었던 아버지(조상항)의 부하로 한 고향 사람이었다. ..... 중앙정보부는 나를 설득하는게 어렵자 구속방침을 정했다. 이 때 김득황 차관은 독립운동가답게 배수의 진을 치고 ‘조목사를 체포하려거든 내 사표부터 받고 하십시오’하고 맞섰다."

5. 만주사 연구와 민족의식 고취

김득황은 만주국 관리 시절 만주 통화시를 중심으로 재만 한인들과 비밀리에 항일조직 태극회를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했다.[1]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 이후, 임시정부 북경비밀기관장인 희산 김승학 선생 (\[\[독립신문 (1896년)|독립신문]]사 사장, 참의부 대표)의 지시로 통화지구 연락책임을 맡아 일본군의 동향을 임정에 보고하는 비밀임무를 수행했다.[1] 이후 태극회는 일제에 적발되어 동료들이 다수 희생되기도 했다.[1] 태극회의 당시 활동은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하권』(1989)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1]

김득황은 1950년대부터 한국전통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대사 관련 저서를 여러 권 저술했으며, 1970년대에는 임승국, 안호상과 함께 국사편찬위원회를 상대로 역사적 단군을 인정하라는 소송을 벌이는 등 민족정신 찾기에 앞장섰다.[1]

5. 1. 만주사 연구 업적

김득황은 만주와 관련된 저술 활동을 통해 고대사와 관련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만주를 우리 민족의 고토(古土)로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주요 저서를 저술했다.

제목출판사출판년도
『잊혀진 고토 만주의 역사』삶과 꿈2003
『우리 민족 우리 역사』삶과 꿈2003
『만주의 역사와 간도 문제』남강기획2005
『백두산과 북방강계』사사연1988
『기초만한사전』대지문화1995



김득황은 청나라와 조선의 영토 경계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레지선(Regis Line)임을 보여주는 당빌(D'Anville)의 『새중국지도』(Nouvel Atlas de la Chine)를 동경 고서점에서 찾아내어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청나라 강희제의 명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Regis), 부베(Bouvet), 자르뚜(Jartoux)가 10년 동안 측량과 제작을 거쳐 1718년 완성한 것이다. 이 원본 지도를 프랑스의 왕실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수정 및 번역을 거쳐 파리에서 발간한 것이 당빌 지도라고 불리는 새중국지도이다.

최근 몇 년 전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시키려 할 때, 국내에서 만주는 우리 조상의 땅이고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주장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나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김득황이 저술한 만주 관련 서적들이다. 김득황은 만주를 재인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9월 간도되찾기운동본부의 간도의 날 선포 1주년 기념일을 맞아 공로패를 받았다.

그가 펴낸 만주어 서적, 북방 고토 관련 서적 등의 원 자료들은 대부분 그가 만주국 관리 시절 비밀리에 만주 일대를 탐사하며 수집한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일찍부터 여진족, 거란족 등 북방 민족 사료들의 역사적 가치를 주목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5. 2. 주요 저서

제목발행년도출판사비고
韓國思想의 展開중국어
韓國思想史중국어
韓國宗敎史중국어
韓國古代道德의 硏究중국어
白頭山과 北方 疆界중국어1988년사사연
滿洲의 歷史와 間島問題중국어남강기획
基礎滿韓辭典중국어1995년대지문화
滿洲族의 言語중국어
滿洲史話중국어
잊혀진 古土 滿洲의 歷史중국어2003년삶과 꿈
우리 民族 우리 歷史중국어2003년삶과 꿈



김득황은 만주국 관리 시절 비밀리에 만주 일대를 탐사하며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만주와 관련된 다양한 저서를 저술했다.[1] 특히, 청나라 강희제의 명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제작하고 당빌(D'Anville)이 발간한 Nouvel Atlas de la Chine프랑스어 (새중국지도)를 통해 청국과 조선의 영토 경계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레지선(Regis Line)임을 밝혀냈다.[1]

5. 3. 당빌의 '새중국지도' 소개

김득황은 청나라와 조선의 영토 경계선이 압록강두만강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레지선(Regis Line)임을 보여주는 당빌(D'Anville)의 『새중국지도』(Nouvel Atlas de la Chine)를 동경 고서점에서 찾아내어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그 지도의 원본은 청나라 강희제의 명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Regis), 부베(Bouvet), 자르뚜(Jartoux)가 무려 10년 동안의 측량과 제작기간을 거쳐 1718년 완성한 것이다. 이 원본지도를 프랑스의 왕실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약간의 수정과 번역을 거쳐 파리에서 발간한 것이 당빌지도라고 일컬어지는 새중국지도이다.

6. 학력

1942년니혼 대학 법과 졸업
1975년건국대학교 문학박사


7. 약력

연도내용
1942년만주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만주국 퉁화 관방 사무관
1956년보건사회부 원호국장
1958년대한주택영단 이사
1960년참의원 법제조사국장
1963년대한지방행정협회 회장
1964년내무부 차관
1967년숙명학원 이사
1968년기독교반공연맹 이사장
1969년한국아세아반공연맹 이사장
1970년대한사상연구소 소장
1971년한국십자군연맹 회장, 동방사회복지회 설립
1974년한국해외개발공사 사장
1975년한국인도네시아협회 회장
1978년동방사상연구원 원장
1987년대륙문화연구회 회장


8. 저서

제목
《한국사상의 전개》
《한국사상사》
《한국종교사》
《한국고대도덕의 연구》
《백두산과 북방 강계》
《만주의 역사와 간도문제》
《기초만주어사전》
《만주족의 언어》
《만주사화》
《만한사전》


9.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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