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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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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춘금은 189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1917년 나고야조선인 회장을 지냈다. 1920년 노동단체 '상구회'를 조직하고, 1921년 폭력 조직인 '상애회'로 개편하여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다. 1932년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3번의 임기를 역임했으며, 친일 행위와 폭력 활동으로 비판받았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반민특위의 체포령으로 다시 일본으로 출국하여, 1973년 사망했다.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송덕비가 철거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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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기본 정보
박춘금의 초상
한글박춘금
한자朴春琴
히라가나ぼく しゅんきん
가타카나パク チュングム
구별

2. 생애

중의원 의원 당선을 축하하는 박춘금


박춘금은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 박씨이다.[3] 밀양 한문서숙과 일본어학교에서 수학하고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토목 작업원으로 시작해 시미즈건설(清水建設, Shimizu Corporation) 등 여러 건설 회사의 일을 맡았다. 1920년 재일 한국·조선인의 상호부조와 지위 향상을 위해 이기동 등과 함께 상구회(相救会)를 결성했다. 1921년 상구회는 친일 융화 단체인 상애회(相愛会)로 개편되었고, 박춘금은 부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법에 따르면, 조선인이라도 일본 내지에 거주하는 일본 제국 국적 남성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4] 1930년 1월 내무성 법령심의회는 한글 투표를 유효로 인정하고, 한글 투표가 예상되는 지역에는 한글 투표 용지를 배포했다.[6]

박춘금은 1932년 도쿄부 제4구에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4] 1932년1937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2번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4][6] 현지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사퇴 압력과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인 참정권과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청원했다. 1942년 총선거에서는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8]

1945년 직전에는 이광수, 주요한 등과 함께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구미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했다.[9]

광복 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1951년에 해제되었다.[10]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지명되었으나, 한국 정부를 지지했다. 일본에서 한일문화협회를 결성하여 한국인 유학생 지원에 힘썼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활동하며 한국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았다.[11]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조국통일촉진협의회에서도 활동했다. 1973년 3월 31일, 도쿄의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2. 1. 생애 초기

1891년 4월 17일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천자문을 읽었을 뿐 무학이다.[3] 1905년 경상북도 대구의 병영에서 급사로 일했다.

2. 2. 일본으로 이주

1908년경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베 등지에서 고용살이, 자전거 직공, 탄광 갱부, 토목 노무자 등 육체노동을 하며 일본말을 익혔다.[15] 나고야에서 조선인삼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1917년 5월 나고야 조선인 회장에 취임했다. 이 당시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두목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일본어)와 친분을 맺었다. 1920년 도쿄에서 이기동 등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애(相愛)·공존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노동단체 '상구회'(相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21년에는 상구회를 사회사업단체(실제로는 폭력 조직)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15] 상애회는 재일 조선인 노무자의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경보(警保) 당국과 총독부 등이 지원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구제를 위해 직업소개, 인사 상담, 공동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노무자를 학대, 압박한 폭력 착취단체였다.

2. 3. 정치 깡패 활동

1922년 5월 이기동이 설립한 '일선기업 주식회사'의 상무취체역에 선임되었다.[1]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 사건이 가라앉을 무렵, 그는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赤池濃)와의 연락하에 시체 처리와 조선인 노무자 색출 및 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1] 이로 인해 일본 당국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1928년에는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며 전일본적 조직 확대 기반을 잡았다.[1]

한편, 그는 조직을 조선에까지 확대하여 1924년 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였다.[1]동아일보》가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각파유지연맹, 폭력조직 등을 비난하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각각 납치, 구타하였으며, 1924년 7월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상애회원으로 하여금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게 하였다.[1] 1928년 2월에는 지주인 도쿠다의 요청으로 하의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게 했다.[1] 이처럼 그는 일본과 국내를 오가며 노동쟁의, 소작쟁의, 반일운동 등 집회가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하여 탄압하는 데 크게 앞장섰다.[1] 1926년 8월 1일 일본 나가사키시에서 열린 아세아민족대회(전아세아민족협회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열린 행사)에 이기동, 홍준표, 이동우 등과 함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1]

2. 4. 제국 의회 의원

1932년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간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36년 총선거에는 낙선했다. 1940년 4월과 1942년 총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일본 제국의회의 중의원을 역임하였다. 박춘금은 일본 중의원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느냐",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하는 등 중의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던 조선인은 박춘금 단 한 명뿐이다.[3]

1945년 2월, '미영격멸', '내선단결', '생전필승'을 구호로 내걸고 대의당을 조직했다. 대의당 조직에는 군, 관료와 친일 세력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 정권이었던 중국 난징 괴뢰정부와 만주국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석했다.

그가 당수로 있던 대의당은 광복 50일 전인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된 단체로, 항일·반전(反戰) 사상의 격파를 목적한 폭력단체로 전해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대의당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는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등 세 청년이 장치한 폭탄이 터져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3]

당시 중의원 의원 선거법(普通選挙法)에서는 내지인을 포함하여 조선·대만 거주자에게는 선거권·피선거권이 없었지만, 내지(内地) 거주 일본 제국 국적 남성이라면 조선인·대만인이라도 법적으로는 평등했으며, 지방 참정권은 물론 중의원 의원의 선거권·피선거권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4]한국 병합 1년 후인 1911년, 원경(原敬)은 이미 조선인의 제국 의회 참여를 검토하고, 이노우에 각고로(井上角五郎)와 협의하고 있었다. 실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원의 의지는 제2대 조선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이어졌다.|한국 병합 1년 후인 1911년, 하라 다카시(原敬)는 이미 조선인의 제국 의회 참여를 검토하고,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와 협의하고 있었다. 실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하라 다카시의 의지는 제2대 조선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이어졌다.일본어 따라서, 1932년에는 당시 도쿄부(東京府) 4구(本所区·深川区)에서 개명하지 않고,[7] 민족 이름 그대로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2월 21일 투표)에 마루야마 등의 지원을 얻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4] 1932년부터 1942년까지 10년간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4번 있었지만, 박춘금은 그중 1932년과 1937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을 2기 역임했다.[4][6] 현지에서는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으로부터도 인기가 있었지만,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사퇴를 종용당하거나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는, 조선인·재조선 일본인의 참정권과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청원했다. 1942년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翼賛選挙)에서는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의 추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8]

당시 조선반도 거주민에게는 선거권도 없고 징병 의무도 없었기에, 중의원 본회의(쇼와 8년 1월 26일)[13]에서 “조선인이 식민지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못마땅하다. 병역 의무를 다하고 참정권을 얻는 것이 같은 국민이 되는 길이다”라고 연설하였고, 이듬해 쇼와 10년에는 린 센주로(林銑十郎)에게 조선인 징병 제도를 청원하였다.[14]

2. 5. 광복 이후

광복 후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비밀리에 입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결성되자 체포령이 떨어져 그는 다시 일본으로 출국했다.[3] 같은 해 7월 반민특위가 그를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GHQ 사령부에 체포와 강제 국내송환을 요청했다.[3]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해산되어 박춘금은 일본에서 평생 동안 기거하게 된다.[3] 한때 그는 조총련 관련 활동을 하기도 했다.[3] 이후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으며[3] 1973년 3월 31일 도쿄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3]

3. 사후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 묘소 바로 밑에 묻혔다.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2002년 밀양 지역 시민 및 문화단체 관계자들의 요구로 철거되었다.[16][17]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평가

박춘금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인해 비판받는 인물이다. 특히 폭력 조직을 운영하고, 노동 쟁의를 탄압했으며, 일본 제국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점이 비판의 주요 대상이다.[9] 그의 정치 활동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권익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억압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이후 박춘금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지명했다.[11]

5. 의원 활동 (일본 제국의회)

1932년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간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36년 총선거에는 낙선했다. 1940년 4월과 1942년 총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을 역임하였다. 박춘금은 일본 중의원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느냐",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하는 등 중의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반도 거주민에게는 선거권도 없고 징병 의무도 없었기에, 중의원 본회의(1933년 1월 26일)[13]에서 “조선인이 식민지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못마땅하다. 병역 의무를 다하고 참정권을 얻는 것이 같은 국민이 되는 길이다”라고 연설하였고, 이듬해 1935년에는 린 센주로(林銑十郎)에게 조선인 징병 제도를 청원하였다.[14] 참고로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던 조선인은 박춘금 단 한 명뿐이다.

참조

[1] 간행물 第七十回帝国議会衆議院議員名簿 衆議院 1937
[2]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衆議院議員名鑑
[3] 웹사이트 밀양 영남루 마당에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 세워야 https://www.ohmynews[...] 2021-10-21
[4] 서적 松木 (2011)
[5] 서적 日韓併合の真実 (2011)
[6] 서적 有馬 (2002)
[7] 기타
[8] 뉴스 朝日新聞 1942-05-03
[9] 서적 黄 (1998)
[10] 뉴스 朝日新聞 1951-06-19
[11] 서적 黄 (1998)
[12] 뉴스 朝日新聞 1973-04-05
[13] 웹사이트 官報号外 https://teikokugikai[...]
[14] 웹사이트 公文雑纂・昭和十年・第三十一巻・帝国議会六・質問答弁 https://www.digital.[...]
[15] 서적 친일파99인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16]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17]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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