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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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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반석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형직의 아내이자 김일성의 어머니이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반일부녀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 운동에 헌신했다. 1926년에는 아들 김일성을 돕기 위해 반일부녀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의 혁명 활동을 지원했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시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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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반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강반석
한자康盤石
로마자 표기Gang Ban-seok
조선글강반석
가나こう・ばんせき
출생일1892년 4월 21일
사망일1932년 7월 31일
종교장로교
직업종교인, 사회운동가
배우자김형직
자녀아들 김일성
아들 김철주
아들 김영주
부모아버지 강돈욱
어머니 위돈신
활동
관련 활동독립운동

2. 생애

평안남도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현재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에서 교육자이자 기독교 장로교 목사였던 강돈욱의 딸로 태어났다. 1908년 김형직과 결혼하여 1912년 아들 김성주(후일 김일성)를 낳았다. 남편 김형직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0년 남편이 조국광복회 사건에 연루되자 아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에서도 남편과 아들의 항일 활동을 지원했으며, 1926년에는 반일부녀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1] 1932년 7월 31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결혼

평안남도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오늘날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에서 교육자이자 기독교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지 강돈욱과 어머니 위돈신 사이의 두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1] 아버지가 사도 베드로(磐)의 이름을 따서 여성에게는 드문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며 칠골교회를 다녔으나, 당시 여성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다.

1908년, 17세의 나이로 이웃 마을에 살던 김형직과 결혼하여 만경대로 이주했다. 그러나 남편 김형직과 처가인 강씨 집안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친정을 떠나 생활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아들 김성주(후일 김일성)를 낳았다.

강반석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남편 김형직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집에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돌보는 등 뒷바라지를 도맡았으며,[1] 1917년 3월부터는 남편이 활동하던 봉화리로 거처를 옮겨 남편의 활동을 내조했다. 특히 남편이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활동할 시기에는 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더욱 많아졌고,[1] 비밀 회합이 있을 때 밖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9년 남편 김형직의 활동 근거지가 중강, 림강, 8도구, 무송 등지로 옮겨감에 따라 함께 이동하며 활동을 지원했다. 때로는 비밀 연락을 위한 쪽지를 전달하거나, 오빠 강진석의 무기를 옮겨주는 위험한 일을 맡기도 했으며, 여성들을 대상으로 반일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도 벌였다.[1] 같은 해, 남편 김형직이 3.1 운동 직후 평안도 지역에서 결성된 지하 항일 조직인 조국광복회 사건에 연루되자,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1920년 아들 김일성을 데리고 만주(현재 중국 동북부)로 망명했다.

2. 2. 독립운동 지원

강반석은 독립운동에 가담한 남편 김형직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집에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1], 1917년 3월부터는 남편이 활동하던 봉화리로 이주하여 그의 활동을 직접 내조했다. 조선국민회가 결성되어 활동할 시기에는 집에 많은 손님들이 드나들었으며[1], 비밀 모임 시 밖에서 망을 보는 역할도 수행했다. 1919년 남편의 활동 근거지가 중강, 림강, 8도구, 무송 등으로 옮겨짐에 따라 함께 이동하며 활동을 지원했다. 때로는 통신 쪽지를 전달하는 연락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오빠 강진석의 무기를 옮겨주거나 여성들을 대상으로 반일 사상을 교육하는 일에도 참여했다.[1] 1924년 12월 김형직이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는 탈출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1926년 6월 5일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맏아들 김일성을 중학교까지 공부시키라는 유언을 받들어 학비 마련에 힘쓰며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시켰다.[1]

1919년 남편 김형직이 조국광복회 사건에 연루되자, 일본 경찰을 피해 만주로 피신했다. 아들 김일성이 등사기로 발행한 신문 《새날》을 배포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여 반일부녀회(현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전신)를 결성하기도 했다.

1926년 12월 26일, 아들 김일성의 활동을 돕기 위해 무송에서 반일부녀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는 북한에서 '첫 주체 형의 혁명적 여성대중조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무송 지역 농촌 마을을 다니며 여성들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여성 혁명 역량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1] 이후 조직의 요구에 따라 안도로 이동하여 그곳에서도 여성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김일성의 새날소년동맹과 반제청년동맹 사업을 도우면서, 김일성이 창간한 신문 《새날》을 무송과 주변 지역에 배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무기 운반과 비밀 연락을 돕는 활동에도 관여했다.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 이후 흥륭촌에서 김일성이 안도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부녀회원들을 동원하여 그의 석방을 돕는 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1]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을 때는 부녀회원들을 동원하여 유격대원들의 옷을 만드는 일을 지원했다. 먼 길을 떠나는 아들 김일성에게 모아둔 돈 20원을 주며 혁명 사업에 쓰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 돈은 훗날 김일성이 1936년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동단원들을 위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강반석은 몸이 아파 곁을 떠나지 못하는 김일성에게 어서 혁명의 길을 떠나라고 독려했으며, 동생 김철주 역시 혁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등을 떠밀었다.[1]

2. 3. 반일부녀회 활동과 김일성 지원

1919년 남편인 김형직이 조국광복회 사건에 연루되자, 일제 경찰을 피해 만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아들 김일성이 등사기로 발행한 신문 《새날》을 배포하며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도왔다. 또한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서 반일부녀회(현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전신)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6년 12월 26일, 강반석은 아들 김일성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무송에서 반일부녀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는 당시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중요한 항일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무송 지역의 농촌 마을을 직접 다니며 여성들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여성들의 항일 역량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1]

이후 조직의 결정에 따라 안도로 활동 무대를 옮겨 여성 조직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김일성이 주도한 <새날소년동맹>과 <반제청년동맹>의 활동을 도왔으며, 김일성이 창간한 신문 《새날》을 무송과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또한, 무기 운반이나 비밀 연락 임무에도 참여하며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 이후 <흥륭촌>에 돌아온 김일성이 안도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강반석은 부녀회원들을 동원하여 김일성의 석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1]

반일인민유격대가 창설되자 부녀회원들을 조직하여 유격대원들의 옷을 만들어 지원하는 활동도 펼쳤다. 당시 그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 김일성에게 힘들게 모은 돈 20원을 주며 혁명 사업에 사용하라고 격려했다. 김일성은 이 돈을 간직하다가 1936년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동단원들을 위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반석은 김일성에게 혁명 활동에 매진할 것을 독려했으며, 동생 김철주 역시 혁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1]

2. 4. 사망과 사후 추모

1932년 7월 31일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 강반석의 유골은 만주에 안장되었다가 1947년 6월 2일 평양 만경대로 이장되었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주체사상을 내세우며 개인숭배를 강화함에 따라, 그의 생모인 강반석 역시 "혁명가"이자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1960년대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주도로 강반석 여사 따라배우기 운동이 실시되었고, 그녀의 동상도 세워졌다. 1967년부터는 노동신문에 강반석의 회상록이 실렸는데, 여기에는 그녀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반일 저항 조직을 꾸렸으며 김일성의 교육에 힘썼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하며, 그 모습이 우표 그림에 등장하기도 한다. '강반석 혁명유자녀 학원'을 비롯하여 여러 학교와 탁아소에 강반석의 이름이 붙여졌다.

3. 사상과 신념

김일성주체사상을 내세우며 북한의 개인숭배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생모인 강반석 역시 "혁명가"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는 노동신문을 통해 그녀의 회상록이 연재되었는데, 이 회상록에서는 강반석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항일 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반일 저항 조직을 만들고 김일성의 교육을 담당했다고 묘사된다. 북한 내에서는 강반석을 김일성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조선의 어머니"로 여기며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우표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김형직과 결혼하여 세 아들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를 두었다. 시아버지는 김보현, 시어머니는 이보익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였던 강돈욱, 어머니는 위돈신이다. 오빠 강진석 역시 목사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는 사도 베드로(반석, 岩)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반석'으로 지었다. 강반석 본인도 기독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종숙인 강량욱은 해방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과 국가 부주석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4. 1. 시가

관계이름생몰년
시아버지김보현1871년 10월 3일 ~ 1955년 9월 2일
시어머니이보익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남편김형직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장남김일성1912년 ~ 1994년
차남김철주1916년 ~ 1935년
삼남김영주1920년 ~


4. 2. 친정

(재종숙 강량욱의 차남)강영섭 (康永燮)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역임


5. 평가와 영향

1932년 7월 31일에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자녀로는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 삼형제가 있다. 강반석의 유골은 만주에 안장되었다가 1947년 6월 2일 평양 만경대로 이장되었다.[2]

김일성주체사상을 내세우고 개인숭배 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의 생모인 강반석 역시 "혁명가"이자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는 노동신문을 통해 그녀의 회상록이 연재되는 등, 북한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5. 1. 긍정적 평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강반석을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한다. 1960년대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주도로 '''강반석 여사 따라배우기 운동'''이 실시되었고, 그녀의 동상도 세워졌다. 또한 '강반석 혁명유자녀 학원'을 비롯하여 학교와 탁아소 중에도 강반석의 이름이 붙은 곳이 많다.[2]

김일성주체사상을 내세우며 개인숭배를 강화함에 따라, 그의 생모인 강반석 역시 "혁명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1967년부터 노동신문에는 그녀의 회상록이 실렸는데, 이 회상록에 따르면 그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항일 의식을 가지고 반일 저항 조직을 꾸렸으며 김일성의 교육을 담당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강반석을 김일성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여기며, 그 모습이 우표 그림에 등장하기도 한다.

6. 강반석의 이름을 딴 기관/시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강반석을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하며, 1960년대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주도로 '''강반석 여사 따라배우기 운동'''을 벌이고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을 딴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는 혁명 유자녀를 위한 강반석혁명학원과 강반석정치대학이 있다.[2] 이 외에도 여러 학교와 탁아소에 강반석의 이름이 붙여졌다.

7.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minjoktim[...]
[2] 간행물 金日成 將軍 慈堂의 靈骨 異域萬里 無言의 還鄕, 哀悼裡에 移葬式 嚴肅執行 http://archive.histo[...]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 정보부 194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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