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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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재박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및 감독으로, 유격수로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대광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에서 활약했으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 MBC 청룡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 LG 트윈스, 태평양 돌핀스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도루왕 1회, 골든글러브 5회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을 맡아 한국시리즈 우승 4회를 달성했으며, LG 트윈스 감독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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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은 아마추어 시절 뛰어난 투수로서 국제대회에서 활약하고 삼성 라이온즈에서 111승을 기록하며 KBO 리그 최초 개인 통산 100승 및 골든글러브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한 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서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이끄는 등 야구 행정 분야에서도 활동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 대구광역시 출신 야구 선수 - 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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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김재박 |
한자 | 金在博 |
로마자 표기 | Gim Jaebak |
출생일 | 1954년 5월 23일 |
출생지 | 대구광역시 중구 |
신장 | 174cm |
체중 | 77kg |
포지션 | 유격수 / 2루수 / 감독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대광고등학교 |
대학교 | 영남대학교 |
실업 | 한국화장품, 성무 야구단 |
프로 입단 년도 | 1982년 |
드래프트 순위 | 원년 멤버 (MBC 청룡) |
데뷔 리그 | KBO 리그 |
데뷔팀 | MBC 청룡 |
첫 출장 | KBO / 1982년 10월 2일, 대구 삼성전 |
최종 팀 | 태평양 돌핀스 |
마지막 출장 | KBO / 1992년 |
선수 활동 팀 | MBC 청룡/LG 트윈스 (1982년–1991년) 태평양 돌핀스 (1992년) |
주요 기록 | |
통산 타율 | .273 |
홈런 | 28 |
타점 | 321 |
도루 | 284 |
수상 | 5x 골든글러브 (1983, 1984, 1985, 1986, 1989) 1985년 도루왕 1986년 득점왕 |
감독/코치 경력 | |
코치 | LG 트윈스 (1987년 -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수석코치 (1993년~1995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타격코치 (2006년) 연천 미라클 자문위원 (2015년~ ) |
감독 | 현대 유니콘스 (1996년–2006년) LG 트윈스 (2007년–2009년)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4년)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년) |
우승 | 5x 한국시리즈 우승 (1990, 1998, 2000, 2003, 2004)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1975 서울 금메달 |
야구 월드컵 | 1982 서울 금메달 |
월드 게임 | 1981 산호세 은메달 |
2. 선수 시절
서울특별시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체격이 작아 스카우트의 눈에 띄지 않아 서울 시내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의 영남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교 시절부터 전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후에는 일본의 사회인 야구에 해당하는 실업팀 야구에서 공군과 한국화장품에서 활약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주루, 타격, 수비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한국 야구계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다. 뛰어난 야구 감각을 소유자로, 결승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경기 후반, 스퀴즈 작전을 읽히고 피치아웃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석에서 몸을 날려 배트에 공을 맞춰 스퀴즈를 성공시키는 플레이를 선보여 역전극의 계기가 되었다. 이 플레이는 한국에서 "개구리 번트"라고 불리며 지금도 전설적인 플레이의 한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그의 재주 덕분에 벤치 선수를 모두 소진했을 때 투수나 포수로 긴급 투입되기도 했다. 투수로서 통산 1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MBC 청룡 입단이 내정되었으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참가 때문에 입단을 대회 후로 미뤄 프로 데뷔는 같은 해 10월 정규시즌 종료 후였다. 28세라는, 선수로서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에 프로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에서도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1983년부터 해당 팀의 공수 양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팀이 LG에 매각되어도 40세 가까이까지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1990년 프로 데뷔 후 첫 우승을 경험했지만, 선수 생활 후반에는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가 눈에 띄게 나타나 1991년 시즌 종료 후 LG 구단은 은퇴 및 코치 취임을 권고했다.
그러나 프로 통산 1000안타에 미련이 남았던 그는 이를 거절하고,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역 생활 연장을 시도했다. 구단의 간판 스타였기에 은퇴 후에는 팀 간부 코스가 내정되었고, 감독 후보로 가장 유력했지만, 현역 연장을 둘러싸고 일어난 LG 구단과의 불화로 모교에 감독으로 복귀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그렇게 연장한 현역 생활도 1년 만에 끝나, 1992년 시즌 종료 후 태평양에서 현역 은퇴하고 같은 구단 코치에 취임했다. 현역 시절에는 도루왕 1회, 유격수로 골든 글러브 5회 수상했다.
2. 1. 고교, 대학 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65년 야구를 처음 접하여 시작했다. 경운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경북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대구 지역의 고등학교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체가 작았던 김재박은 경북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자 서울에 있는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대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배성서 감독을 필두로 한 신생 팀 영남대학교에서 타격과 주루, 야구 센스 및 수비력을 겸비한 주목받는 내야수로 자리잡았다.김재박은 고교 시절부터 전설적인 아마추어 선수였다. 1971년 대광고등학교 시절, 창설된 봉황기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 1977년에는 타율,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등 7개의 공격 부문에서 대한민국 아마추어 리그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1981 세계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대표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2년, 김재박은 그의 조국에서 열린 1982 아마추어 세계 시리즈 (현재 야구 월드컵의 전신)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김재박은 한국 대표팀을 이 대회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유격수 부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2. 2. 아마추어 & 실업 야구 시절
1977년 실업 야구 타격 7관왕을 차지했으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놓고 벌어진 일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캥거루 번트(또는 개구리 번트)’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5]1-2로 지고 있던 8회 말 1사 3루의 상황에서, 일본 팀의 니시무라 투수는 공을 밖으로 뺐는데, 김재박은 어우홍 감독의 사인을 스퀴즈 사인 인 줄 잘 못 알고 피치 아웃한 공에 번트를 가져다 댔다. 당시 3루 주자인 김정수는 미리 스타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safety squeeze 플레이가 됐다. 김재박이 이 공에 번트를 대기 위해 바깥쪽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훗날 이 번트는 '''캥거루 번트''' 또는 '''개구리 번트'''라 불리게 되었다. 번트 타구는 3루 쪽 내야 안타가 되었으며, 이 번트로 대한민국은 일본과 극적으로 2-2 동점을 만들었고, 이것을 시작으로 결국 한대화의 3점 홈런으로 게임을 역전승으로 이끈다.[5]
김재박은 고교 시절부터 전설적인 아마추어 선수였다. 1971년 대광고등학교 시절, 창설된 봉황기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 1977년에는 타율,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등 7개의 공격 부문에서 대한민국 아마추어 리그를 이끌었다. 1981년 1981 세계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대표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2년, 김재박은 그의 조국에서 열린 1982 아마추어 세계 시리즈 (현재 야구 월드컵의 전신)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김재박은 한국 대표팀을 이 대회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유격수 부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2. 3. KBO 리그 활동
1982년 MBC 청룡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30세 무렵의 늦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격, 수비, 주루 플레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1] 1985년에는 도루왕을 차지하는 등 빠른 발을 자랑했으며, 특히 다른 선수들보다 한 루를 더 가는 능력이 뛰어났다.[1] 유격수로서 상대 타구를 예측하여 수비 위치를 조정하는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유격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5회 수상하였다.[1]1990년 MBC를 인수한 LG 트윈스에서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1] LG 트윈스에서 2년간 활약 후 은퇴 권유를 받았으나, 현역 연장 의지를 밝혀 1992년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1] 태평양 돌핀스에서는 주로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92년 시즌 후 은퇴했다.[1]
KBO 리그가 출범한 1982년 당시 이미 28세였던 김재박은 MBC 청룡의 리드오프 타자이자 최고의 유격수였다.[3] 1983년부터 1986년까지, 그리고 1989년까지 5번의 KBO 리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3] 1985년 50도루로 도루 1위, 1986년 67득점으로 득점 1위를 기록했다.[3]
1990년 LG 트윈스에서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1990년과 1991년 부진한 시즌을 보낸 후 은퇴 권유를 받았다.[3]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1992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었으나, 1992년 시즌 후 은퇴했다.[3] 선수통산 284개의 도루를 기록했다.[3]
3. 지도자 생활
김재박은 은퇴 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현대 유니콘스(당시 현대 도핀스)의 수석 코치로 활동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첫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했다.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 KBO 리그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총 4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야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역임했으며,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타격 코치로 4강 진출에 기여했다.[2] 200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동메달에 그쳤다.
2006 시즌 후 현대 유니콘스를 떠나 LG 트윈스로 돌아왔다. 당시 계약금 15.5억원은 감독 및 코치 계약 사상 최고액이었다.[3] 2007년부터 2009년까지 LG 트윈스 감독을 역임했으나 현대 유니콘스 시절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에서 대만에 패하며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고, 200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만과 프로 선수가 없던 일본에 패하며 동메달에 그쳐 비판을 받았다.
감독으로서는 희생번트와 도루를 많이 활용하는 스몰볼을 추구했다. SK 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과 함께 "이겨도 재미없는" 야구의 대명사로 비판받기도 했다.
KBO 리그(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부터 2009년까지 선수, 코치, 감독 생활을 하며 1년도 현장을 떠난 적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2010년부터는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경기 운영을 담당했다.
3. 1. 태평양 돌핀스 코치 시절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은퇴한 김재박은 태평양 돌핀스로부터 수석코치 제의를 받고 수석 코치를 맡아 정동진 감독을 보좌했다.[1]3. 2.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창단 첫 해에 팀을 정규 시즌 4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다. 이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해태 타이거즈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6] 이후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다. 현대 유니콘스 감독 재임 기간(1996년~2006년) 동안 1997년, 1999년, 2005년을 제외하고 매년 팀을 상위권 성적으로 이끌었다. 2004년 5월 초에는 감독으로서 통산 700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1999년에는 중반 이후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지자 8월 28일 정민태를 구원으로도 기용하는 등 무리한 투수 기용으로 비판을 받았다.[7][8][9][10] 결국 정민태는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여 20승 달성에는 성공했지만(1구원승 포함),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정규시즌 MVP도 이승엽에게 내주었다.
2000년에는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 등 소속 투수 3명을 공동 다승왕으로 만들기 위해[11] 승수를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민태는 3년 연속 최다 선발승을 기록하고도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지 못했고, 2003년에도 다승-승률 2관왕을 차지했지만 높은 방어율(3.31)로 인해 이승엽에게 MVP를 빼앗겼다.[12]
2006 시즌 후 현대 유니콘스를 떠나 LG 트윈스로 돌아갔다.
다음은 현대 유니콘스 감독 시절의 상세 기록이다.
연도 | 팀 | 순위 | 정규시즌 순위(※1) | 경기 | 승리 | 패전 | 무 | 승률 | 게임 차(※2) |
---|---|---|---|---|---|---|---|---|---|
1996 | 현대 | 2 | 4 | 126 | 67 | 54 | 5 | .552 | 4.5 |
1997 | 6 | 6 | 126 | 51 | 71 | 4 | .421 | 22.5 | |
1998 | 1 | 1 | 126 | 81 | 45 | 0 | .643 | - | |
1999 | 5 | 3 | 132 | 68 | 59 | 5 | .535 | 8.0 | |
2000 | 1 | 1 | 133 | 91 | 40 | 2 | .695 | - | |
2001 | 3 | 2 | 133 | 72 | 57 | 4 | .558 | 7.0 | |
2002 | 4 | 3 | 133 | 70 | 58 | 5 | .547 | 11.5 | |
2003 | 1 | 1 | 133 | 80 | 51 | 2 | .611 | - | |
2004 | 1 | 1 | 133 | 75 | 53 | 5 | .586 | - | |
2005 | 7 | 7 | 126 | 53 | 70 | 3 | .431 | 21.5 | |
2006 | 3 | 2 | 126 | 70 | 55 | 1 | .560 | 4.0 |
※1 1999년, 2000년은 2리그제에서 소속 리그 순위임. 현대는 드림리그 소속이었으므로, 여기서의 순위는 드림리그 순위임.
※2 정규시즌 1위 팀과의 게임 차.
년도 | 팀 | 단계 | 상대팀 | 결과 | 승패 |
---|---|---|---|---|---|
1996 | 현대 | 준플레이오프 | 한화 | 2승 | ○○ |
플레이오프 | 쌍방울 | 3승 2패 | ●●○○○ | ||
한국시리즈 | 해태 | 2승 4패 | ●○●○●● | ||
1998 | 한국시리즈 | LG | 4승 2패 | ○○●○●○ | |
2000 | 플레이오프 | 삼성 | 4승 | ○○○○ | |
한국시리즈 | 두산 | 4승 3패 | ○○○●●●○ | ||
2001 | 플레이오프 | 1승 3패 | ○●●● | ||
2002 | 준플레이오프 | LG | 2패 | ●● | |
2003 | 한국시리즈 | SK | 4승 3패 | ○●●○○●○ | |
2004 | 삼성 | 4승 2패 3무 | ○△●△○●△○○ | ||
2006 | 플레이오프 | 한화 | 1승 3패 | ○●●● | |
3. 3. LG 트윈스 시절
2006년 10월 20일, 김재박은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5억 원, 연봉 3억 5,000만 원 등 총액 15.5억원에 LG 트윈스의 제7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는 KBO 리그 감독 계약 사상 최대 규모였다.[3] 현대 유니콘스 감독 시절 뛰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친정 팀 LG 트윈스 팬들의 큰 기대와 주목을 받았다.2007년 정규 시즌 5위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으나, 2008년에는 최하위로 떨어졌다. 2009년에는 7위를 기록하여, 재임 기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09년 5월 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감독 최연소 통산 900승을 달성하였다.[13]
2009년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현대 유니콘스에서 코치로 함께했던 박종훈에게 감독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김재박 감독의 LG 트윈스 재임 마지막 해에는 김상현 트레이드와 심수창, 서승화 등의 선수단 내 사건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어수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두 차례 선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과 일본에 패해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14] 2006년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으나, 대만과 사회인 야구 선수로 이루어진 일본에게 패하며 동메달에 그쳤다.[14]
5. 기타
2005년 시즌 초, 롯데 자이언츠는 상위권에 있었고, 전년도 우승팀 현대 유니콘스는 하위권이었다. 이때 김재박은 스포츠신문 인터뷰에서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고 말했다.[15] 그의 말대로 롯데는 여름 이후 순위가 하락했다.
LG 트윈스 감독 부임 후, LG는 상반기에는 상위권에 있다가 더워지면서 하위권으로 시즌을 마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의 예전 발언은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형태로 변형되어 유명해졌다.[16]
서울특별시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작은 체격 때문에 서울 시내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영남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 후 실업팀 야구에서 활약했다. 아마추어 시절 최고의 유격수였다.
1982년 IBAF 월드컵 우승 주역 중 한 명이다. 결승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개구리 번트"로 불리는 플레이는 한국에서 전설적인 장면으로 회자된다. 벤치 선수가 부족할 때는 투수나 포수로 긴급 투입되기도 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LG 트윈스(MBC 청룡) 입단이 내정되었으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참가로 프로 데뷔는 늦어졌다. 28세에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프로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90년 프로 데뷔 첫 우승을 경험했지만, 선수 생활 후반에는 체력 저하가 나타났다. 1991년 시즌 종료 후 LG 구단은 은퇴 및 코치 취임을 권고했다.
1000안타에 대한 미련으로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에서 현역 생활을 연장했지만, 1년 만에 은퇴하고 코치로 취임했다. 현역 시절 도루왕 1회, 유격수 골든글러브 5회를 수상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2006년까지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07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최하위였던 팀을 재건하려 했다. 2008년에는 감독 생활 13년 만에 처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했고, 2009년에도 하위권에 머물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국제 대회에서는 2003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탈락, 2006년 아시안 게임 동메달에 그쳐 비판을 받았다. 김인식 감독과 비교되며, 단기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감독으로서는 희생번트와 도루를 많이 활용하는 스몰볼을 추구했다. 김성근 감독과 함께 "이겨도 재미없는" 야구의 대명사로 비판받았다.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2009년까지 선수, 코치, 감독으로 활동한 유일한 인물이다.
2010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프로야구 경기 운영을 담당했다. 2016년 4월 3일 경기 운영 논란으로 KBO로부터 6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6. 출신 학교
7. 등번호
MBC영어 청룡, LG 트윈스, 태평양 돌핀스에서 선수 시절 등번호는 7번이었다. 현대 유니콘스와 LG 트윈스 감독 시절에는 등번호 70번을 달았다.
8. 통산 기록
김재박은 1985년 MBC 청룡에서 투수로 1경기에 등판하여 0.66이닝 동안 승리, 패전, 세이브 없이 평균자책점 0.00을 기록했다.
연도 | 소속 | 승리 | 패전 | 평균자책점 | 경기 | 세이브 | 이닝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
1985년 | MBC 청룡 | 1 | 0 | 0.00 | 1 | 0 | 0.66innings | 0 | 0 | 0 | 0 | 0 | 0 |
통산 | 1 | 0 | 0.00 | 1 | 0 | 0.66innings | 0 | 0 | 0 | 0 | 0 | 0 |
8. 1.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볼넷 | 삼진 | 병살타 | 실책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2 | MBC | 3 | 1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0 | 0 | .000 | .000 | .000 | .000 |
1983 | 97 | 373 | 53 | 108 | 22 | 2 | 5 | 46 | 34 | 12 | 52 | 23 | 7 | 19 | .290 | .376 | .399 | .775 | |
1984 | 91 | 343 | 53 | 103 | 11 | 5 | 7 | 37 | 26 | 11 | 41 | 33 | 6 | 14 | .300 | .375 | .423 | .798 | |
1985 | 100 | 377 | 54 | 118 | 15 | 3 | 3 | 36 | 50 | 17 | 44 | 29 | 3 | 12 | .313 | .385 | .393 | .778 | |
1986 | 102 | 386 | 67 | 102 | 18 | 4 | 4 | 43 | 38 | 14 | 43 | 36 | 6 | 12 | .264 | .338 | .363 | .701 | |
1987 | 100 | 399 | 53 | 113 | 23 | 5 | 1 | 24 | 33 | 18 | 44 | 26 | 7 | 21 | .283 | .354 | .373 | .727 | |
1988 | 99 | 409 | 49 | 109 | 18 | 1 | 2 | 26 | 25 | 12 | 29 | 23 | 3 | 13 | .267 | .315 | .330 | .645 | |
1989 | 101 | 357 | 64 | 102 | 8 | 2 | 3 | 27 | 39 | 14 | 57 | 33 | 6 | 11 | .286 | .384 | .345 | .729 | |
1990 | LG | 109 | 381 | 49 | 91 | 9 | 2 | 2 | 45 | 14 | 9 | 38 | 24 | 5 | 13 | .239 | .303 | .289 | .592 |
1991 | 82 | 247 | 34 | 65 | 13 | 2 | 0 | 18 | 15 | 7 | 30 | 23 | 7 | 12 | .263 | .300 | .332 | .632 | |
1992 | 태평양 | 82 | 276 | 36 | 61 | 11 | 0 | 1 | 19 | 10 | 5 | 31 | 26 | 3 | 7 | .221 | .343 | .272 | .615 |
통산: 11년 | 966 | 3561 | 512 | 972 | 148 | 26 | 28 | 321 | 284 | 119 | 409 | 279 | 53 | 134 | .273 | .348 | .353 | .701 |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8. 2.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승리 | 패전 | 평균자책점 | 경기 | 세이브 | 이닝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
1985년 | MBC 청룡 | 1 | 0 | 0.00 | 1 | 0 | 0.66innings | 0 | 0 | 0 | 0 | 0 | 0 |
통산 | 1 | 0 | 0.00 | 1 | 0 | 0.66innings | 0 | 0 | 0 | 0 | 0 | 0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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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젊음, 나의 사랑 프로야구 현대 감독 김재박 (10) 한국야구사 남은 '캥거루 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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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 현대, '이유가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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