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준
1. 개요
김제준은 1796년 충청도 면천에서 태어난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조부와 백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용인에서 농부로 살면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아들 김대건이 사제 수업을 위해 마카오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으로 배교했지만, 뉘우치고 신앙을 다시 고백하여 9월 26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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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출신 -
인명진
인명진은 대한민국의 목사, 시민운동가, 정치인으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새누리당 및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당진시 출신 -
김원기 (1924년)
김원기는 1924년 충남 당진 출생으로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김제준은 1796년 충청도 면천의 솔뫼 마을에서 태어나 조부 김진후와 백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후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하여 농부로 살면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는 용인에서 천주교 공동체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아들 김대건이 15세 되던 해,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사제 수업을 받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당시 조선의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가족이 겪을 수 있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제준은 8월에 사위 곽씨의 고발과 배신자 김여상이 이끄는 포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점과 더불어 아들을 국법을 어기고 마카오로 보냈다는 이유로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국사범으로 다루어졌다.
혹독한 고문 끝에 잠시 신앙을 부정하기도 했으나,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기에 석방되지 못했다. 감옥에서 동료 천주교인들의 권유와 스스로의 뉘우침으로 배교를 철회하고 순교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다가 회개한 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는 형조로 이송된 후 자신의 배교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결국 김제준은 1839년 9월 26일, 다른 교우 8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2.1. 출생과 입교
김제준은 1796년 충청도 면천의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 김진후와 백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후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농부로 살던 중,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2.2. 아들 김대건의 사제 수업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이 15세 되던 해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선발되어 사제 수업을 받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조선의 국법이 이를 금지하고 있었으며, 외국에 가족을 보낸 집안으로서 겪게 될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제준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점 외에도 국법을 어기고 아들 김대건을 마카오로 보냈다는 이유로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국사범으로 취급받았다. 심한 고문 끝에 잠시 신앙을 부정하기도 했으나,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기에 석방되지 못했다. 이는 그가 결국 순교의 길을 택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2.3. 기해박해와 체포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8월 김제준은 그의 사위 곽씨에게 고발되었고, 배신자 김여상이 이끄는 포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여러 명의 남성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힘이 강했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체포되었다고 한다.
김제준은 천주교 신자라는 점 외에도, 아들 김대건을 국법에 반하여 마카오로 보내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국사범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 신앙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석방되지 못했다.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천주교인들은 김제준에게 배교하더라도 결코 석방될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마음을 돌려 배교를 철회하고 다시 신앙을 고백하도록 설득했다. 사도 베드로가 세 차례 주님을 부인했지만 결국 회개했던 것처럼, 김제준 역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형조로 이송된 후 관리들 앞에서 자신의 배교를 철회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국 김제준은 1839년 9월 26일, 다른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2.4. 투옥과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제준은 8월에 그의 사위 곽씨에게 고발당했다. 배신자 김여상이 이끄는 포도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여러 남성을 제압할 만큼 힘이 강했지만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아들 김대건을 국법을 어기고 마카오로 유학 보낸 일 때문에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국사범으로 취급받았다.
김제준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 신앙을 부정했다. 그러나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기에 석방되지 못했다. 감옥에 함께 갇힌 천주교인들은 그에게 배교해도 풀려날 수 없음을 알려주며 마음을 돌이키도록 설득했다. 사도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지만 회개했던 것처럼, 김제준 역시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형조로 이송된 후 관리들 앞에서 배교를 철회하고 다시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김제준은 1839년 9월 26일, 다른 교우 8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