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르 후스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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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시르 후스라우는 11세기의 페르시아 출신 이스마일파 학자이자 시인, 여행가이다. 그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이스마일파로 개종하기 전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으며, 1045년 메카 순례를 목표로 7년간의 여행을 시작하여 《사파르나마》를 저술했다. 호라산에서 이스마일파 포교 활동을 하던 중 박해를 피해 얌간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저술 활동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는 페르시아어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사파르나마》는 11세기 중동 지역의 문화와 생활상을 담아 역사적, 지리학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시르 후스라우는 중앙아시아 이스마일파 확산에 기여했으며, 그의 삶과 사상은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과 포용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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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함 | 다이(선교사), 학자, 철학자, 시인 |
종교 | 이스마일파 시아파 이슬람 |
칭호 | 쿠라산의 증거 (ḥujja) |
출생 | 1004년 |
출생지 | 쿠보디욘, 호라산, 가즈나 왕조(현재의 타지키스탄) |
사망 | 1072년–1088년 |
사망지 | 얌간 지구, 바다흐샨(현재의 아프가니스탄) |
묻힌 곳 | 나시르 쿠스라우 발키의 무덤, 발흐, 아프가니스탄 |
학문적 정보 | |
영향 | 알무아이야드 휠딘 알시라지, 아부 야쿠브 알시지스타니 |
영향을 준 인물 | 바다흐샨의 이스마일파 |
스승 | 알무아이야드 휠딘 알시라지 |
주요 작품 | |
작품 | 사파르나마, 디완 (나시르 쿠스라우) |
2. 생애
나시르 후스라우(1004년~1088년경)는 페르시아의 시인, 철학자, 이스마일파 학자이자 여행가였다. 그의 전체 이름은 아부 무인 하미드 알딘 나시르 이븐 후스라우 이븐 하리트 알쿠바디야니 알마르와지였으며, 그의 유명한 여행기 ''사파르나마''에서는 자신을 주로 "나시르"라고 칭했고, 시에서는 카이로에서 받은 필명인 "후자트"(증거)를 사용했다.
1004년 호라산 지역 발흐 인근 쿠바디안의 부유한 페르시아계[1][2][3]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초기에는 수니파 또는 12이맘 시아파 신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가즈니 왕조와 셀주크 제국 아래에서 관료로 일했다.
41세가 되던 해(약 1045년), 그는 꿈을 통해 깊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10] 1045년부터 7년간 메카 순례를 포함한 긴 여행을 떠나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파티마 칼리파조의 이스마일파 사상을 접하고 개종했다. 그는 저명한 학자 알 무아야드 피 알 딘 알 시라지의 지도를 받았으며, '후자트-이 호라산'(호라산의 입증자)이라는 칭호를 받고 고향 지역에서의 포교 임무를 맡게 되었다.
1052년 대 호라산으로 돌아온 나시르는 이스마일파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수니파 셀주크 제국의 강한 반대와 박해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대 호라산에서 추방되어 여러 지역을 떠돌다가, 약 1060년 바다흐샨 산맥의 외딴 얌간 계곡에 정착했다.[4] 그는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 약 20년을 보내며 은둔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저작을 남기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이스마일파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나시르 후스라우는 계시(탄질)를 통해 드러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의적 해석(타윌)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이맘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5] 그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얌간에서 사망했으며,[6] 사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088년경으로 추정된다. 그의 영묘는 하드라트-이 사이드 마을에 남아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004-1045)
나시르 후스라우의 전체 이름은 아부 무인 하미드 알딘 나시르 이븐 후스라우 이븐 하리트 알쿠바디야니 알마르와지였으며, 산문 철학 저작에서 주로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저서 ''사파르나마''에서는 자신을 주로 "나시르"라고 칭했고, 시에서는 카이로의 이스마일파 선교 조직으로부터 받은 필명 "후자트"(증거)를 주로 사용했다. 시에서 때때로 "나시르"와 페르시아 이름인 "후스라우"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문화와 언어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은 나시르-이 후스라우 또는 나세르-에 호스로우로도 표기된다.페르시아 출신[1][2][3]인 나시르는 1004년 호라산 지역 마르브 주의 발흐 인근 쿠바디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정부 관료이자 지주 집안이었다. 당시 호라산 지역은 문화적으로 페르시아화된 투르크 노예 출신 왕조인 가즈니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이스마일파로 개종하기 전에는 수니파 하나피파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전해지며,[9] 일각에서는 12이맘 시아파를 따랐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청년 시절 나시르는 쿠란, 이슬람 신학, 문학, 수학, 음악, 천문학, 의학 등 광범위한 학문을 공부했으며, 특히 그리스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9] 또한 학업과 병행하여 인도,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9] 그는 필사자로 경력을 시작하여 이후 발흐에서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와 마수드 아래에서 재정 관리자로 일했다.[9]
1040년, 셀주크가 호라산을 정복하고 발흐를 함락시키자, 나시르는 메르브로 거처를 옮겼다.[9] 그는 셀주크 왕조 아래에서도 관직을 유지하며, 호라산을 통치하던 셀주크의 공동 창립자 차으리 베그 다우드를 섬기며 세무 관리로 일했다.[9]
41세가 되던 해(약 1045년), 나시르는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영적 변화를 경험했다. 나시르 자신에 따르면 이 사건은 꿈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 달 가까이 음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언제까지 지혜를 쇠퇴시키는 음주를 계속할 것인가? 정신을 차려라"라고 꾸짖었다. 나시르가 세상의 슬픔을 잊기 위함이라고 답하자, 그 사람은 "무감각 속에는 휴식이 없다. 지성와 지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구하라"고 말하며 기브라(메카의 방향)를 가리켰다고 한다. 꿈에서 깬 나시르는 "40년 동안의 꿈에서도 깨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모든 행동을 바꾸기로 결심했다.[10] 이 사건 이후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이스마일파로 개종하게 된다.
1045년 12월, 진실된 길을 찾기로 결심한 나시르는 메카 순례를 목표로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10] 이로써 그의 초기 생애와 관료로서의 경력은 마무리되고 새로운 삶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2. 2. 전환기 (1045-1052)
1040년 셀주크 제국이 호라산을 정복하자 나시르는 메르브로 거처를 옮겨 셀주크 제국의 관리로 일했다. 당시 호라산은 셀주크의 공동 창립자인 차으리 베그가 통치하고 있었다.1045년경, 41세의 나시르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꿈을 통해 영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스스로 기록했다. 그의 여행기 서두에 따르면, 어느 날 밤 꿈에서 한 인물이 나타나 "사람의 지혜를 쇠퇴시키는 음주를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성, 지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시르가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묻자, 그는 "구하는 자가 찾을 것이다"라고 답하며 기브라 방향을 가리켰다.[10] 꿈에서 깬 나시르는 "어젯밤 꿈에서 깨어난 지금, 40년 동안의 꿈에서도 깨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며, 지난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10] 이후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1045년 12월, 나시르는 메카 순례를 목표로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046년 3월, 그는 동생 아부 사이드와 인도인 수행원과 함께 7년에 걸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호라산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며 이란 북부와 서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거쳤다. 이후 남쪽으로 내려가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순례를 마쳤다.
1047년 8월, 그는 당시 이스마일파 파티마 칼리파조의 수도였던 이집트의 카이로에 도착했다. 카이로에서 나시르는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이스마일파의 가르침과 법, 행정 등을 배웠다. 특히 그는 쉬라즈 출신의 저명한 이스마일파 학자이자 다이였던 알 무아야드 피 알 딘 알 시라지(1087년 사망)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심오한 이스마일파의 교리와 철학을 전수받았다.
나시르는 카이로에서 이스마일파로 개종했으며,[10] ''다이''(선교사)의 지위로 승격되어 ''후자트-이 호라산''(호라산의 입증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그에게 고향인 대 호라산 지역에서 이스마일파 교리를 전파하는 임무가 주어졌음을 의미한다.[4] 7년간의 긴 여행은 1052년 그가 대 호라산으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되었다.[4]
2. 3. 호라산에서의 포교와 박해 (1052-1060?)
1052년 카이로에서 대 호라산으로 돌아온 나시르 후스라우는 이스마일파 '후자트'(حجة, 입증자)로서 호라산 지역의 포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바로 이스마일파 신앙 전파 활동을 시작했으나, 당시 호라산 지역은 수니파 셀주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시작부터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셀주크 제국은 파티마 칼리파조의 이스마일파 선교 활동을 억압하고 아바스 칼리파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기에, 이스마일파였던 나시르의 포교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수니파의 강한 반발과 적대감에 부딪혔으며, 이는 점차 심화되었다. 결국 그는 셀주크 제국의 군주에 의해 대 호라산에서 추방당했다. 이 추방은 그의 저작을 통해 이슬람력 453년 (서기 1061년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확인된다.[11]
호라산에서 추방된 후에도 나시르는 은밀하게 포교 활동을 이어갔지만,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마잔다란으로 피신했다가 니샤푸르로 옮겨갔고, 최종적으로는 1060년경 바다흐샨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얌간 계곡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었다.[4] 이 시기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물크와 같은 인물들은 시아파 및 이스마일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나시르와 같은 이들의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2. 4. 윰간에서의 은둔 생활과 사망 (1060?-1088?)
수니파의 반대와 셀주크 왕조의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떠돌던 나시르 후스라우는 결국 바다흐샨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얌간으로 피신하여 여생을 보냈다(약 1060년).[4] 그는 이곳에서 약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저술 활동과 이스마일파 교리 전파에 힘썼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각지로 파견하며 포교 활동을 이어갔으며,[4] 이 과정에서 형성된 그의 추종자 공동체는 훗날 나시리야파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비록 윰간에서의 생활은 박해와 유랑 끝에 다다른 외딴 산골에서의 유배 생활이었기에 슬픔과 고독이 깊었으며, 이는 그의 시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나시르는 이러한 역경을 자신이 선택한 올바른 길을 따르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신념을 지켰다.
나시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얌간에서 사망했다.[6]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여러 설 중 이슬람력 481년(서기 1088년경)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그의 무덤은 아프가니스탄 콕샤 계곡 동쪽에 있는 하드라트-이 사이드 마을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영묘이며, 묘비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1697년에 개수되었다.
3. 작품
나시르 후스라우는 시, 철학, 종교,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페르시아어로 쓰여, 당시 아랍어가 주류였던 이스마일파 문학에서 페르시아어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산문 철학 저작에서는 본명인 '아부 무인 하미드 알딘 나시르 이븐 후스라우 이븐 하리트 알쿠바디야니 알마르와지'를 사용했으나,[3] 가장 유명한 저서인 ''사파르나마''에서는 주로 '나시르'로, 시에서는 카이로의 이스마일파 선교 조직에서 받은 칭호인 '후자트'(증거)라는 필명을 주로 사용했다.[3][5] 때로는 '나시르'나 페르시아 이름인 '후스라우'를 사용하기도 했다.[3]
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사파르나마''' (سفرنامه|사파르나메fa):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7년간의 이슬람 세계 여행 기록이다. 11세기 중동의 사회, 문화, 지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페르시아 기행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 '''디반''' (دیوان|디반fa): 윰간 은둔기에 쓰인 서정시 모음집이다. 알리와 그의 후손들, 특히 당시 파티마 왕조 칼리프이자 이스마일파 이맘이었던 알 무스탄시르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자신을 박해한 호라산의 통치자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철학적, 윤리적 성찰 등을 담았다.[4]
- '''구샤이쉬 바 라하이스''' (گشایش و رهایش|구샤이쉬 바 라하이스fa): "지식과 해방"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어 철학 작품이다. 창조, 영혼, 인식론 등 이스마일파 교리의 핵심적인 질문들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다룬다.
- '''라쉬나-이-나마''' (روشنایینامه|라쉬나-이-나마fa): "광명의 서"라는 뜻의 마스나비 시이다. 형이상학과 윤리에 대해 논하며, 아비센나와 이크완 알-사파의 영향을 보여준다.[4]
- '''사아다트나마''' (سعادت نامه|사아다트나마fa): "행복의 서"라는 뜻의 마스나비 시이다. 실용적인 지혜와 덕을 쌓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시 사회와 권력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4]
- '''자드-알-무사피린''' (زادالمسافرین|자드-알-무사피린fa): "여행자의 양식"이라는 의미로, 이슬람력 453년(서기 1061년경)에 저술되었다. 이스마일파의 종교 및 철학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4]
- '''와지-딘''' (وجه دین|와지-딘fa): "종교의 얼굴"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마일파 교리, 특히 타윌(상징적, 비의적 해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입문서와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7]
- '''자미 알 히크마타인''' (جامع الحکمتین|자미 알-히크마타인fa): "두 지혜(철학과 종교)의 통합"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 철학과 이스마일파 신학 및 철학 사상의 조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 '''수학에 관한 책''' (غرایب الحساب و عجایب الحساب|아자입 알-히삽 와 아라입 알-히삽fa): 수학에 관한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 '''형제의 식탁''' (خوان الإخوان|콰완 알-이흐완fa): 이스마일파의 영성 및 교리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이 외에도 『이성의 서』(بستان العقول|부스탄 알-우쿨fa), 『열쇠와 등불의 서』, 『미혹된 자에게의 인도』(دلیل المتحرین|달릴 알-무타하리린fa) 등 여러 작품이 그의 저술로 언급되지만, 일부 작품이나 그의 자서전으로 알려진 글들은 후대에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
3. 1. 《사파르나마》(سفرنامه, 여행기)
'''''사파르나마''''' (سفرنامه|사파르나메fa, 여행기)는 나시르 후스라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046년 3월 6일부터 1052년 10월 23일까지 약 7년 동안 이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겪은 경험을 기록했다. 이 책에는 그가 방문했던 수십 개 도시의 대학, 대상 숙소, 모스크, 학자, 왕, 일반 대중의 생활 모습, 인구, 도시 면적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흥미로운 일화들이 담겨 있다.11세기 중동 지역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지리학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페르시아 문학사에서 동시대 인물인 니잠 알물크의 《정치의 서》, 카부스의 《카부스나메》와 함께 11세기 페르시아 산문 문학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기행 문학으로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유려하며, 종교적인 색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문체는 가즈니 왕조 초기 산문의 특징을 보여준다. 1881년 파리에서 프랑스어 번역본과 함께 처음 출판되었고, 이후 테헤란, 베를린, 봄베이 등지에서 원문으로도 출판되었다.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3. 2. 《디반》(دیوان, 시집)
《디반》( دیوان|디반fa)은 나시르 후스라우의 서정시를 모은 시집이다. 시집에 실린 시 대부분은 그가 윰간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쓰여졌다. 주요 내용은 알리와 그의 후손들, 특히 당시 이스마일파의 이맘이었던 알 무스탄시르에 대한 열정적인 찬양과 더불어, 자신을 고향에서 쫓아낸 호라산 지역과 그 통치자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다. 또한 윰간에서의 외로운 생활에 대한 만족감과 동시에, 과거 동료들에게 외면당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탐구한다. 이러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감정의 표현 속에는 도덕적 교훈과 세상의 속임수, 허영심,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의, 당시 사회와 궁정의 위선과 악덕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담겨 있다.[4]《디반》은 주로 카시다(송시) 형식으로 쓰여졌다. 카시다는 본래 왕족이나 귀족을 찬양하거나 풍자하는 데 사용되는 궁정 시의 형식이었으나, 나시르 후스라우는 이 형식을 빌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담았다. 그의 시는 이스마일파 교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어, 마치 '이스마일파 교리의 백과사전'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철학 사상은 이크완 알-사파, 이븐 시나, 파라비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시적인 측면에서는 키사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이 정통 이슬람의 관점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는 이스마일파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후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들에 의해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디반》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나시르 후스라우 사후 약 200년이 지난 이슬람력 714년에 필사된 것으로, 현재 런던에 소장되어 있다.
3. 3. 기타 작품
- '''구샤이쉬 바 라하이스''' (گشایش و رهایش|구샤이쉬 바 라하이스fas)
페르시아어로 쓰인 철학 작품으로, F.M. 훈자이가 "지식과 해방"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했다. 창조, 영혼, 인식론 등 이스마일파 교리와 관련된 질문들을 다루며, 질의응답 형식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초기 신 페르시아어로 쓰인 철학 저술의 좋은 예시이다.
- '''라쉬나-이-나마''' (روشنایینامه|라쉬나-이-나마fas)
"광명의 서" 또는 "쉬쉬 파슬"이라고도 불리는 마스나비 형식의 시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다루며, 주로 아비센나의 이론에 기반하지만 바스라의 철학 형제단인 이크완 알-사파의 사상과 시아파 또는 이스마일파의 아이디어가 섞여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윤리적인 내용으로, 선과 악, 어리석은 자를 피하는 법, 세상의 유혹과 야망의 위험 등에 대한 도덕적 가르침과 생각을 담고 있다. 시는 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신성한 지혜와 사랑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영혼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4] 나시르 후스라우의 다른 시집인 디반에 나오는 알-무스탄시르 찬양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카이로에서 그에게 이스마일파 신앙의 비밀을 알려준 인물들에 대한 암시로 해석될 수 있다.[4]
- '''사아다트나마''' (سعادت نامه|사아다트나마fas)
"행복의 서"라는 의미의 마스나비 형식의 시이다. 실용적인 지혜와 덕을 쌓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특히 왕과 귀족들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어, 나시르 후스라우가 윰간으로 추방당했을 당시 겪었던 박해와 비난에 대한 반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4] 3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 신의, 은혜, 이성, 만족 등에 관한 교훈적인 내용이 많다.
- '''자드-알-무사피린''' (زادالمسافرین|자드-알-무사피린fas)
"여행자의 양식" 또는 "순례자의 여행 준비물"이라는 뜻이다. 이스마일파의 종교적, 철학적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담고 있으며, 이슬람력 453년(서기 1061년경)에 쓰였다.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이 작품과 아래의 '와지-딘'을 제외한 나시르 후스라우의 다른 여러 작품들이 위조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4]
- '''와지-딘''' (وجه دین|와지-딘fas)
"종교의 얼굴"이라는 의미로, 이스마일파 교리, 특히 타윌(비의적 해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다. 이스마일파 입문서로 여겨지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스마일파의 해석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6일간의 천지 창조 이야기를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일어난 일에 대한 상징적인 설명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한계 때문이며, 6일간의 창조와 7일째의 휴식은 실제로는 신이 여섯 명의 예언자를 보내 사람들에게 일하도록 명령하고, 일곱 번째 날에는 그들의 노고에 보상할 것임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7]
- '''자미 알 히크마타인''' (جامع الحکمتین|자미 알-히크마타인fas)
"두 현인의 집합의 서"라는 뜻으로, 그리스 철학과 이스마일파 사상의 조화를 논하는 작품이다. 바다흐샨의 아미르(군주)의 명으로 이스마일파 시인 아부 알-하이삼의 카시다(송시)에 주석을 단 것이다. 본문은 3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수학에 관한 책''' (غرایب الحساب و عجایب الحساب|아자입 알-히삽 와 아라입 알-히삽fas)
나시르 후스라우는 수학에 관한 책도 저술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 "호라산과 동부 땅 전체에서 이 문제(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학자는 나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고 언급하며,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쓰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꼈다고 밝혔다.
- '''형제의 식탁''' (خوان الإخوان|콰완 알-이흐완fas)
이스마일파의 접심론(영적인 교리)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테헤란 판본 기준으로 290페이지, 10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기타 작품'''
이 외에도 『이성의 서』(بستان العقول|부스탄 알-우쿨fas), 『열쇠와 등불의 서』, 『미혹된 자에게의 인도』(دلیل المتحرین|달릴 알-무타하리린fas), 『입증의 서』, 『예술의 불가사의』, 『학자의 말의 서』, 『이맘의 선정과 신앙의 선정』 등의 작품이 언급되지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일부는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
4. 유산과 평가
파티마 시대의 가장 저명한 이스마일파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 한 명이었지만, 나시르 후스라우는 일반 대중에게 페르시아어를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열렬히 지지한 시인이자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모든 철학적 이스마일파 작품은 페르시아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주로 아랍어를 사용했던 파티마 왕조 시대의 이스마일파 문학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나시르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스마일파의 확산에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바다흐샨(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으로 분할됨)의 이스마일파 공동체와 파키스탄 북부의 지부에서 پیر|피르fa 또는 شاه سید ناصر|샤 사이이 나시르fa로 존경받으며 불리는데, 이들 공동체는 모두 그를 자신들의 창시자로 여긴다. 나시르 후스라우의 영묘를 방문하는 신봉자들은 그를 "나시르 후스라우" 외에도 샤شاه|fa(왕), شاه بزرگوار|샤-이 부주르그바르fa(위대한 왕), مولا|마울라fa(수호자), شید یمگان|쉬드-이 윰간fa(얌간의 태양), عقاب یمگان|우캅-이 윰간fa(얌간의 독수리)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중 '우캅-이 윰간'은 도덕적 조언을 담은 그의 시 중 하나를 가리키는데, 고대 우화를 바탕으로 이기적인 독수리가 자신의 깃털이 박힌 화살에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از ماست که بر ماست|az māst ki bar māstfa("우리에게서 온 것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격언이 되어,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자신의 특성에서 비롯된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나시르 후스라우는 수니파의 적대와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학문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고,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스마일파 공동체 형성과 페르시아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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