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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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사냥꾼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고 처벌하기 위해 활동한 개인 또는 단체를 지칭한다. 냉전 시기, 서방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등을 통해 전직 나치 과학자들을 확보하는 한편, 나치 사냥꾼들은 도망간 전범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정보 수집, 탐정 활동, 국제 공조 요청 등을 통해 전범들을 추적했으며, 시몬 비젠탈,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부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치 사냥꾼의 활동은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에도 전범 처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0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으나 나치 지도부 세대의 사망으로 인해 점차 감소했다. 주요 추적 대상으로는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등이 있으며, 나치 사냥꾼의 활동은 현재까지도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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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사냥꾼 | |
---|---|
기본 정보 | |
유형 | 개인 |
설명 | 나치와 나치 협력자를 추적하는 사람 |
인물 | |
주요 인물 | 시몬 비젠탈 투비아 프리드먼(가칭) 이안 세이어(가칭) 야론 스보레이(가칭) 엘리엇 웰스(가칭) 에프라임 주로프(가칭) |
관련 정보 | |
관련 단체 | 시몬 비젠탈 센터 |
관련 프로젝트 | 마지막 기회 작전(가칭) |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 (1945~1946) 및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1946~1949)에서 많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당원이나 친위대 대원들이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페이퍼클립 작전 등으로 미국에 연행된 베르너 폰 브라운 등 독일인 과학자나, 미국군정보 기관에 협력하여 전범 추격을 면제받은 라인하르트 겔렌 등은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오데사 등의 도망 지원 조직이나 랫라인 등의 도망 경로를 통해 남아메리카나 중동으로 도망친 전 나치 당원도 많았다.
이러한 전 나치 당원 및 친위대 대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 범죄를 추적한 활동가들이 나치 사냥꾼이다.
2. 1. 나치 헌터의 등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의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으며,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수십 년 후,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및 이스라엘과의 더 큰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까지, 전직 나치에 대한 추적은 감소했는데, 이는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7]
3. 주요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직 나치 과학자와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 제공을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로,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
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수십 년 후,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및 이스라엘과의 더 큰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까지 전직 나치 추적은 감소했는데, 이는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7]
나치 사냥꾼은 전 나치 당원·전 친위대 대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 범죄를 추구한 활동가이다. "역사학자"로서의 활동, 전범자의 소재를 찾아내는 "탐정"으로서의 활동,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사법 당국에 신병 인도 요구를 하도록 촉구하는 "로비스트"로서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10] 나치 전범 재판은 구미 각국에서 행해졌고, 그 외에도 다수의 뛰어난 검사가 활약했다. 직업상의 활동으로서의 나치 전범 추구는 "역사학자·탐정·로비스트"로서의 나치 사냥꾼의 개인적인 활동과는 성질을 달리하므로, 검사 등의 사법 관계자는 좁은 의미의 "나치 사냥꾼"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치 사냥꾼은 또한, 나치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면서 전후에도 정계 등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체포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그 과거를 폭로하고 요직 취임을 저지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10]
3. 1. 정보 수집 및 분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의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으며,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전 나치 당원 및 전 친위대 대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 범죄를 추구한 활동가가 나치 사냥꾼이며, 그 활동은 주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역사학자로서의 활동(홀로코스트 등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는 자료고 등의 설립을 포함), 전범자의 소재를 찾아내는 탐정으로서의 활동, 더 나아가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사법 당국에 신병 인도 요구를 하도록 촉구하는 등, 전쟁 범죄·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죄를 추구하고, 재판에 의한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로비스트로서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10]
3. 2. 탐정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의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으며,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수십 년 후,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및 이스라엘과의 더 큰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까지 전직 나치에 대한 추적은 감소했는데, 이는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7] 시몬 비젠탈 센터는 매년 나치 전범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8]
나치 사냥꾼들의 주요 표적과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물 | 상세 내용 | 결과 | |
---|---|---|---|
알로이스 브루너 | 아돌프 아이히만의 조수이자 드랑시 수용소의 사령관. 최종 해결을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 | 이스라엘 정보국인 모사드에 의해 시리아에서 추적, 2001년경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체포를 피함. | |
헤르베르츠 쿠르쿠르스 | "리가의 학살자" | 1965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모사드 요원에게 암살됨. | |
아돌프 아이히만 | 시몬 비젠탈에 의해 추적됨. | 1960년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및 밀수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 후 1962년 처형됨. | |
볼레슬라프 마이코프스키스 | 라트비아 나치 협력자. | 웰레스에 의해 미네올라 (뉴욕)까지 추적됨. 1987년 서독으로 이민, 나이가 들어 재판 불가능 판명. | |
요제프 멩겔레 | "죽음의 천사". | 모사드, 비젠탈, 클라르스펠트에 의해 남아메리카에서 수색됨. 1979년 브라질에서 사고로 사망, 1985년 유해 확인. | |
에리히 프리에브케 | 이탈리아 민간인 대량 학살 책임 SS 장교. | 1994년 ABC 프라임타임 라이브 진행자 샘 도널드슨과의 인터뷰를 아르헨티나에서 공개. 이후 이탈리아로 인도, 1998년 종신 가택 연금형. 2013년 로마에서 100세로 사망, 감옥 묘지에 묻힘.[9] | |
에두아르트 로슈만 | 비젠탈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수색됨. |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도 계획으로 파라과이로 도망. 같은 해 사망 추정, 비젠탈은 시신에 의문 제기. | |
딩코 샤키치 | 주로프에 의해 아르헨티나까지 추적됨. | 1998년 크로아티아로 인도, 20년 형 선고, 2008년 사망. | |
요제프 슈밤베르거 | 시몬 비젠탈 센터와 웰레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추적됨. | 1990년 서독으로 인도, 1992년 종신형, 2004년 감옥에서 사망. | |
프란츠 슈탕글 |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의 사령관. | 1967년 상파울루에서 비젠탈에 의해 체포. 1970년 독일로 인도, 종신형, 이듬해 사망. | |
구스타프 바그너 | "늑대". | 1978년 브라질에서 비젠탈에 의해 폭로. 체포되었지만 브라질은 서독으로 인도 거부. 1980년 상파울루에서 자살 추정. | |
클라우스 바르비 | "리옹의 학살자". | 세르주와 베아트 클라르스펠트가 추적. | 1983년 볼리비아에서 프랑스로 인도. 볼리비아 민주화 전까지 미국과 독일 정보 기관 보호, 가명으로 볼리비아 군대 고용. 1987년 종신형, 1991년 사망.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한 전쟁 범죄를 재판하는 뉘른베르크 재판(1945~1946) 및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1946~1949)에서 많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당원이나 친위대 대원들이 사형이나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페이퍼클립 작전 등의 일환으로 미국에 연행된 베르너 폰 브라운 등의 독일인 과학자와, 미국군정보 기관에 협력하는 대가로 전범 추격을 면제받은 라인하르트 겔렌 등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또한, 연합군·소련군의 대규모 수색에도 불구하고, 오데사 등 도망 지원 조직, 랫라인 등의 도망 경로를 통해 남아메리카나 중동으로 도망친 전 나치 당원도 많았다.
나치 사냥꾼은 이러한 전 나치 당원·전 친위대 대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 범죄를 추적한 활동가이다. 그 활동은 주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역사학자"로서의 활동(홀로코스트 등에 관한 기록 보존), 전범자의 소재를 찾아내는 "탐정"으로서의 활동, 나아가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사법 당국에 신병 인도 요구를 하도록 촉구하는 "로비스트"로서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10]
나치 전범 재판은 구미 각국에서 행해졌고, 그 외에도 다수의 뛰어난 검사가 활약했다. 직업상의 활동으로서의 나치 전범 추구는 "역사학자·탐정·로비스트"로서의 나치 사냥꾼의 개인적인 활동과는 성질을 달리하므로, 검사 등의 사법 관계자는 좁은 의미의 "나치 사냥꾼"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치 사냥꾼은 또한, 나치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면서 전후에도 정계 등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체포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그 과거를 폭로하고 요직 취임을 저지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10]
3. 3. 국제 공조 요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 제공을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Bundesnachrichtendienst)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로,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통해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수십 년 후,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및 이스라엘과의 더 큰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까지 전직 나치 추적은 감소했는데, 이는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7]
3. 4. 과거사 폭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의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3]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으며,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나치 사냥꾼들은 나치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면서도 전후에 정계 등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체포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그 과거를 폭로하고 요직 취임을 저지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10]
4. 주요 나치 헌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오소아비아킴 작전 등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정보나 서비스 제공 대가로 국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Bundesnachrichtendienst)의 국장이었으며,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운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통해 남아메리카 등으로 도피했다.[4][5]
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7]
시간이 지나면서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하면서 전직 나치 추적은 감소했다.[7] 시몬 비젠탈 센터는 매년 나치 전범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8]
나치 사냥꾼들의 주요 표적은 다음과 같다:
인물 | 내용 |
---|---|
알로이스 브루너 | 아돌프 아이히만의 조수이자 드랑시 수용소 사령관. 최종 해결 실행에 핵심적인 인물. 모사드에 의해 시리아에서 추적, 2001년경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체포를 피함. |
헤르베르츠 쿠르쿠르스 | "리가의 학살자". 1965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모사드 요원에게 암살됨. |
아돌프 아이히만 | 비젠탈에 의해 추적, 1960년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및 밀수, 이스라엘에서 재판 후 1962년 처형. |
볼레슬라프 마이코프스키스 | 라트비아 나치 협력자. 웰레스에 의해 미네올라 (뉴욕)까지 추적. 1987년 서독으로 이민, 재판 불능 상태로 판명. |
요제프 멩겔레 | "죽음의 천사". 모사드, 비젠탈, 클라르스펠트에 의해 남아메리카에서 수색. 1979년 브라질에서 사고사, 1985년 유해 확인. |
에리히 프리에브케 | 이탈리아 민간인 대량 학살 책임 SS 장교. 1994년 ABC 프라임타임 라이브 인터뷰 공개. 이탈리아 인도 후 1998년 종신 가택 연금, 2013년 로마에서 100세로 사망. |
에두아르트 로슈만 | 비젠탈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수색.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도 계획 공개로 파라과이로 도주, 같은 해 사망 추정. 비젠탈은 시신에 의문 제기. |
딩코 샤키치 | 주로프에 의해 아르헨티나까지 추적. 1998년 크로아티아로 인도, 20년 형 선고 후 2008년 사망. |
요제프 슈밤베르거 | 시몬 비젠탈 센터와 웰레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추적. 1990년 서독 인도, 1992년 종신형, 2004년 감옥에서 사망. |
프란츠 슈탕글 |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 사령관. 1967년 상파울루에서 비젠탈에 의해 체포. 1970년 독일 인도, 종신형, 이듬해 사망. |
구스타프 바그너 | "늑대". 1978년 브라질에서 비젠탈에 의해 폭로. 체포되었으나 브라질이 서독 인도 거부. 1980년 상파울루에서 자살 추정. |
클라우스 바르비 | "리옹의 학살자". 세르주와 베아트 클라르스펠트에 의해 추적. 1983년 볼리비아에서 프랑스로 인도. 반소련 정보 목적으로 미국과 독일 정보 기관 보호, 볼리비아 군대에 고용. 1987년 종신형, 1991년 사망. |
4. 1. 시몬 비젠탈
시몬 비젠탈(1908-2005)은 빈에 설립한 유대인 박해 기록 센터[12]의 자료를 바탕으로 활동했다. 특히 게슈타포의 유대인 이송 국장이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의 유대인 대량 이송에 관여한 전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정보를 수집하여 이스라엘 정보 특무청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61년, 사형 판결). 소비부르 절멸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전 친위대 대위 프란츠 슈탕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와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의 전 소장 헤르미네 브라운슈타이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인체 실험을 한 전 친위대 대위 요제프 멩겔레 등 전범 추적에도 힘썼다. 1970년대에는 전 나치 돌격대 장교 쿠르트 발트하임 등 나치 전범에 관여한 오스트리아인 관료의 과거를 폭로하기도 했다. 1977년 로스앤젤레스에 시몬 비젠탈 센터가 설립되었다. 비젠탈을 기려 이름 붙여진 이 센터에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록이 보관되어 있으며, 에프라임 주로프 소장을 중심으로 나치 전범 추격을 위한 정보 수집 및 제공 활동을 하고 있다.[13]4. 2. 클라르스펠트 부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1939년생)와 세르주 클라르스펠트(1935년생) 부부는 이삭 슈넬손 등이 전시 중부터 은밀히 수집한 쇼아 기념관의 현대 유대 자료 센터(CDJC)의 자료를 바탕으로 활동했다. 특히 프랑스 유대인 수천 명의 검거와 강제 이송을 주도한 전 친위대 중령 쿠르트 리슈카, 프랑스 보르도 및 파리 유대인 일제 검거를 주도한 전 친위대 소령 헤르베르트 하겐 등을 찾아내어 체포 및 재판에 이르게 했다.또한, "리옹의 도살자"라고 불린 전 친위대 대위 클라우스 바르비가 "클라우스 알트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볼리비아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독불 및 유럽 연합의 사법 당국에 신병 인도 요구를 하도록 활동했으며, 1987년 바르비는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부부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관으로, 프랑스에서 특히 1944년 7월 유대인 일제 검거의 일환으로 아이들의 명부 작성 및 검거를 주도한 전 친위대 대위 알로이스 브룬너를 찾아 여러 차례 시리아로 건너가 주소를 알아냈다. 프랑스 정부와 독일 정부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시리아 정부에 브룬너 인도를 요구했지만, 신병 구속에는 이르지 못했다.[14]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독일 정계 중요 인물의 나치 당원으로서의 과거를 폭로하기도 했다. 나아가 나치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 당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게 뺨을 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4. 3. 기타 나치 헌터
폴란드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인인 프리드먼(1922년 - 2011년)은 주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체포에 기여했으며, 하이파에 나치 전쟁 범죄 자료관을 설립했다.[16]역사학자 이안 세이어 (1945년 -)는 특히 나치 무장친위대 장교로서 제1SS 기갑사단(LSSAH) 등의 지휘를 맡았던 빌헬름 모케를 조사하여, 『히틀러의 마지막 장군 ― 빌헬름 모케에 대한 소송 (''Hitler's Last General: The Case Against Wilhelm Mohnke'')』을 출판했다. 또한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안 세이어 아카이브(자료 보관소)를 구축하고, 제국 전쟁 박물관이나 역사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에서 공수부대에 소속되었고, 이후 경찰 근무를 거쳐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스보레이(1954년 -)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학살에 관여한 전 친위대 대위 에리히 프리브케를 수색했다 (1998년 종신형 판결). 또한 독일의 네오 나치 조직에 잠입하여 그 실태를 폭로한 『히틀러의 그림자』[18] 및 『스너프 필름 추적』[19]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반명예훼손연맹의 태스크 포스를 이끌었던 웰즈(1927년-2006년)는 특히 독일 점령 하의 라트비아 레제크네의 경찰서장으로서 나치에 협력하여 라트비아인 체포 명령을 내린 (그 중 200명 살해) 보리스라프스 마이코프스키|Boļeslavs Maikovskislv에 관한 정보 수집 및 수색을 진행했다(마이코프스키는 1965년 소련에서 부재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에서 도피 생활을 계속했고, 1990년에 86세로 겨우 독일에서 법정에 섰지만 건강 악화로 1994년에 중단되었고, 2년 후에 사망했다). 또한, 전후 40년 이상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전 친위대 대원 겸 강제 수용소 소장 요제프 슈밤베르거|Josef Schwammbergerde의 정보를 수집하여 행방을 찾아냈다(1992년 종신형 판결).[20]
5. 주요 추적 대상
이름 | 설명 |
---|---|
알로이스 브루너 | 아돌프 아이히만의 조수이자 드랑시 수용소의 사령관. 최종 해결을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시리아에서 추적되었으며, 2001년경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체포를 피했다. |
헤르베르츠 쿠르쿠르스 | "리가의 학살자"로 불리며, 1965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모사드 요원에게 암살되었다. |
아돌프 아이히만 | 시몬 비젠탈에 의해 추적받다가 1960년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 재판 후 1962년 처형되었다. |
Bolleslavs Maikovskis|볼레슬라프 마이코프스키스영어 | 라트비아 나치 협력자로, 웰레스에 의해 미네올라 (뉴욕)까지 추적당했다. 1987년 서독으로 이민을 갔고, 거기에서 나이가 들어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판명되었다. |
요제프 멩겔레 | "죽음의 천사"로 불리며, 모사드, 시몬 비젠탈, 클라르스펠트에 의해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에서 수색되었다. 1979년 브라질에서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체포를 피했으며, 그의 유해는 1985년에 확인되었다. |
에리히 프리에브케 | 이탈리아 민간인 대량 학살에 책임이 있는 SS 장교. 1994년 ABC 프라임타임 라이브 진행자 샘 도널드슨과의 인터뷰를 아르헨티나에서 공개적으로 가졌다. 이후 이탈리아로 인도되어 1998년 종신 가택 연금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 로마에서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감옥 묘지에 묻혔다.[9] |
에두아르트 로슈만 | 시몬 비젠탈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수색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1977년에 그의 인도를 공개적으로 계획하여 그가 파라과이로 도망칠 수 있게 했다. 그는 같은 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비젠탈은 그 시신이 로슈만의 것이라는 데 의문을 품었다. |
Dinko Šakić|딩코 샤키치영어 | 주로프에 의해 아르헨티나까지 추적당했다. 숨기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여러 언론에 출연한 후 1998년 크로아티아로 인도되었으며, 그곳에서 20년 형을 선고받고 2008년에 사망했다. |
Josef Schwammberger|요제프 슈밤베르거de | 시몬 비젠탈 센터와 웰레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추적되었다. 1990년 서독으로 인도되어 1992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04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
프란츠 슈탕글 |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의 사령관. 1967년 상파울루에서 비젠탈에 의해 체포되었다. 1970년 독일로 인도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사망했다. |
구스타프 바그너 | "늑대"로 불리며, 1978년 브라질에서 비젠탈에 의해 폭로되었다. 체포되었지만 브라질은 그를 서독으로 인도하는 것을 거부했다. 1980년 상파울루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상태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
클라우스 바르비 | "리옹의 학살자"로 불리며,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베아트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추적 끝에 1983년 볼리비아에서 프랑스로 인도되었다. 볼리비아가 민주주의로 전환되기 전까지 반소련 정보 목적으로 미국과 독일 정보 기관의 보호를 받았으며, 가명으로 볼리비아 군대에 고용되었다. 1987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91년에 사망했다. |
Hermine Braunsteiner|헤르미네 브라운슈타이너영어Hermine Braunsteiner-Ryan|헤르미네 브라운슈타이너-라이언de | |
카를 프렌첼 | |
쿠르트 리슈카 | |
헤르베르트 하겐 | |
폴 투비에 |
6. 현대적 의의 및 과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과 소련은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전직 나치 과학자 및 요원들을 찾았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라인하르트 겔렌과 같이 협조적인 전직 나치들은 귀중한 정보나 서비스의 대가로 때때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 겔렌은 독일 연방 정보국의 국장이었으며, ODESSA[3]의 실제 버전인 겔렌 조직의 창립자였으며, 이 조직은 나치들이 유럽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다른 나치들은 탈출 경로를 사용하여 종전 후 유럽에서 남아메리카와 같은 곳으로 탈출했다.[4][5]
이에 대응하여 나치 사냥꾼들은 스스로 도망자들을 찾거나 시몬 비젠탈 센터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나치 사냥꾼들이 사용한 방법에는 정보에 대한 보상 제공,[6] 이민 및 군사 기록 검토,[7] 민사 소송 제기 등이 있다.[7]
수십 년 후, 나치 사냥꾼들은 서방 및 남아메리카 정부 및 이스라엘과의 더 큰 협력을 얻었다. 20세기 말까지, 전직 나치에 대한 추적은 감소했는데, 이는 나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세대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이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 (1945 - 1946) 및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1946 - 1949)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를 재판하여, 많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당원이나 친위대 대원들이 사형이나 징역에 처해졌다. 한편, 페이퍼클립 작전 등의 일환으로, 미국에 연행된 베르너 폰 브라운 등의 독일인 과학자, 미국군정보 기관에 협력하는 대가로 전범 추격을 면제받은 라인하르트 겔렌 등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또한, 연합군・러시아군의 대규모 수색에도 불구하고, 오데사 등 도망 지원 조직, 랫라인 등의 도망 경로를 통해, 남아메리카나 중동으로 도망친 전 나치 당원도 많았다.
나치 사냥꾼은 이러한 전 나치 당원・전 친위대 대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 범죄를 추구한 활동가이며, 그 활동은 주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역사학자"로서의 활동 (홀로코스트 등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는 자료고 등의 설립을 포함), 전범자의 소재를 찾아내는 "탐정"으로서의 활동, 더 나아가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사법 당국에 신병 인도 요구를 하도록 촉구하는 등, 전쟁 범죄・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죄를 추구하고, 재판에 의한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로비스트"로서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10]
나치 전범 재판은 구미 각국에서 행해졌고, 그 외에도 다수의 뛰어난 검사가 활약했으며, 직업상의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나치 전범 추구는 "역사학자・탐정・로비스트"로서의 나치 사냥꾼의 개인적인 활동과는 성질을 달리하므로, 검사 등의 사법 관계자는 좁은 의미의 "나치 사냥꾼"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치 사냥꾼은 또한, 나치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면서 전후에도 정계 등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체포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그 과거를 폭로하고 요직에 취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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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des, Alfred. "Bosnia, Bohemia & Bilderberg: The Cold War Internationale." In Common Sense: Journal of the Edinburgh Conference, vol. 16, pp. 5–1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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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hasseur de nazis, à la fois historien et dét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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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の果てまで追われるナチス戦犯 (ドイツニュースダイジェ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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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e et Serge Klarsfeld : les combats de la mémoire (1968-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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