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테 클라르스펠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1939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계 나치 전범 추적자이다. 1960년 파리에서 홀로코스트의 현실을 접한 후, 1963년 변호사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결혼하여 나치 전범에 대한 비판과 추적 활동을 시작했다.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의 나치 부역 전력을 폭로하고, 나치 전범 쿠르트 리슈카 납치 시도, 에른스트 아헨바흐의 나치 연루 사실 폭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201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클라우스 바르비, 알로이스 브루너 등 나치 전범 추적에 기여했으며,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베를린 출신 정치인 - 쿠르트 아이스너
쿠르트 아이스너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정치인, 혁명가로서 제1차 세계 대전 반전 운동을 주도하고 바이에른 혁명을 통해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암살당했으며, 독일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평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 베를린 출신 정치인 - 귄터 기욤
귄터 기욤은 동독 슈타지 소속 스파이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로 활동하며 기욤 사건을 일으켰고, 간첩 혐의로 체포된 후 동서독 스파이 교환으로 동독으로 돌아가 영웅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사건은 브란트 총리 사임으로 이어져 냉전 시대 중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 나치 사냥꾼 -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역사학자, 나치 전범 추적가로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아내와 함께 나치 독일 및 비시 프랑스 관리들의 전쟁 범죄를 밝히고 법정에 세우는 데 헌신했으며, 프랑스 유대인 강제 이주민의 아들과 딸들 협회 창설을 통해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및 연구에 기여했으나, 슈타지 협력 의혹 및 프랑스 극우 정당 지지 논란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나치 사냥꾼 - 에프라임 주로프
에프라임 주로프는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나치 전범 추적에 헌신하며 '마지막 기회 작전'을 통해 나치 전범 색출에 기여하고 홀로코스트 관련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펼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자 나치 사냥꾼이지만, 스레브레니차 학살과 홀로도모르에 대한 입장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명 | 베아테 아우구스테 퀸젤 |
출생일 | 1939년 2월 13일 |
출생지 | 베를린, 나치 독일 |
국적 |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
배우자 |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1963년 결혼) |
자녀 | 2명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좌파당 |
수상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8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200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2013년) 독일 연방 공로 훈장 (2015년) 국가 공로 훈장 그랑크루아 (2018년) |
2. 초기 생애 및 가족
베아테 아우구스테 큔젤은 1939년 베를린의 복음주의 루터교 가정에서 보험 사무원인 쿠르트 큔젤과 그의 아내 헬렌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클라르스펠트에 따르면 그녀의 부모는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아돌프 히틀러에게 투표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39년 여름 보병으로 징집되어 1940년 여름부터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고, 1941년에는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해 겨울 이중 폐렴에 걸려 독일로 돌아온 후에는 회계사로 일했다. 베아테는 어린 시절 나치 관리였던 대부와 함께 폴란드의 우치에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의 아파트가 폭격을 당하자, 베아테와 어머니는 산다우에 있는 친척 집으로 피난했다. 1945년 아버지가 그곳으로 합류했지만, 산다우의 집과 재산은 폴란드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고 가족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14세 무렵부터 베아테는 부모와 자주 다투었는데, 부모가 나치 시대의 책임보다는 자신들이 겪은 부당함과 물질적 손실에만 집중하며 러시아를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1960년, 21세의 베아테는 오페어로 일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그녀는 훗날 독일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던 전통적인 역할, 이른바 '3K'(아이 Kinder, 부엌 Küche, 교회 Kirche)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고 밝혔다.[64] 당시 정치나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파리 생활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참상과 그 결과를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11일, 파리 포르트 드 생클루 지하철역에서 파리 정치 대학에서 국제 관계학 학위를 막 취득한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를 만났다. 이 날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연행된 날이기도 했다. 세르주는 베아테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의 나타남이었을까"라고 말했다.[65] 세르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는 사실과,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해 살아남은 나치 전범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일의 나치 전범 문제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63년 11월 7일에 결혼했다. 세르주는 프랑스 변호사이자 역사가였다. 이들의 결혼은 프랑스-독일 협력 조약이 체결된 해에 이루어졌으며, 베아테는 당시 세르주가 "모범적인 부부가 되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66] 베아테는 남편 세르주가 자신이 "양심과 자각을 가진 독일인"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2] 부부는 슬하에 아들 아르노 클라르스펠트(1965년생)와 딸 리다 미르암(1973년생)을 두었다.[3]
1964년, 베아테는 새로 설립된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파리에 거주하는 독일인 오페어 소녀들을 위한 가이드북을 출판하기도 했다. 아들을 낳고 1년간 무급 휴가를 보내는 동안 페미니즘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독일 여성의 해방 문제에 점차 관여하게 되었다. 1966년 말에는 시어머니, 시누이 가족과 함께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4]
3. 나치 헌터로서의 활동
1960년대 초 파리에서 오페어로 지내던 베아테 퀸젤은 정치와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나,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접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1963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아버지를 잃은 프랑스 변호사이자 역사가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결혼한 것은 그녀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베아테는 남편의 도움으로 "양심과 자각을 가진 독일인"으로 거듭났다고 회고했으며[2], 이는 이후 나치 전범을 추적하고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나치 헌터'로서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나치 전범 추적 활동은 1960년대 후반 본격화되었다. 특히 서독 총리로 선출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의 나치당 활동 전력을 폭로하고 그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한 것은 초기 활동의 핵심이었다.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기고, 시위, 그리고 1968년 CDU 당 대회장에서 키징거의 뺨을 때리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나치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와 국제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평가받는다.[65][67]
이후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추방과 학살에 책임이 있는 주요 나치 전범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쾰른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전직 SS 간부 쿠르트 리슈카를 프랑스 법정에 세우기 위해 납치를 시도했으며(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결국 리슈카가 1980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또한, '리옹의 학살자'로 불리던 클라우스 바르비의 볼리비아 은신처를 찾아내고 그의 프랑스 송환 및 처벌(1987년 종신형 선고)을 이끌어낸 것은 클라르스펠트 부부 활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33] 이 외에도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관이었던 알로이스 브루너 등 여러 나치 전범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그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력했다.
클라르스펠트의 활동은 독일과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칠레와 파라과이 등 남미 군사 독재 정권 하에 숨어든 나치 전범 용의자 발터 라우프와 요제프 멩겔레를 추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나치 전력 의혹이 제기된 전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의 오스트리아 대통령 당선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32]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단순한 폭로를 넘어 시위, 직접적인 항의 행동, 법적 투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나치 과거사 청산과 정의 구현을 위해 헌신해왔다. 그녀의 활동은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잊혀가는 나치 범죄의 책임을 묻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1.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총리 비판
1966년 서독에서 정부 위기 이후 CDU와 SPD의 연립으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CDU)가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당시 프랑스-독일 청소년국(OFAJ)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의 총리직 수행에 반대했다. 키징거는 나치 독일 시절 외무성 선전부 관료를 지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이 그의 과거를 언급했지만, 당시 독일 사회는 나치 전범 재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상태였다.
클라르스펠트는 역사학자인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의 도움을 받아 키징거의 나치 전력을 폭로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1967년 1월 14일, 프랑스 일간지 ''콩바''에 "독일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키징거의 과거를 비판하고 빌리 브란트를 지지했다. 그녀는 키징거가 "브라운 셔츠의 일원"이었으며 CDU 내에서 "좋은 평판"을 쌓았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녀는 1967년 8월 말 프랑스-독일 청소년국에서 해고되었다.[4] 해고 후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키징거에 대한 언론 캠페인을 더욱 강화했다.[5]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가 1933년 2월 말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1940년까지 외무부 정치 방송 부서의 부국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부서는 해외 방송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했고, 키징거는 제국 선전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가 선전 목적으로 외국 라디오 방송국을 사들인 Inter Radio AG의 이사였으며, 반유대주의 및 전쟁 선전을 포함한 독일 국제 방송 내용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키징거가 SS 간부 게르하르트 륄레 및 동유럽에서의 대량 학살 책임자였던 프란츠 알프레트 식스와 긴밀히 협력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인지한 후에도 반유대주의 선전을 계속했다고 비판했다.[6] 이러한 주장의 일부는 동독의 선전 자료인 ''Braunbuch''에 근거한 것이었다.[7]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의 나치 과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여러 공개적인 행동에 나섰다. 1968년 4월 2일, 본 분데스하우스(독일 의회) 방청석에서 키징거를 향해 "나치 키징거, 사퇴하라!"고 외쳤고, 이로 인해 잠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4월 말, 그녀는 동베를린을 방문하여 키징거에 대한 추가 행동을 준비하며 국가 전선의 국가 평의회와 접촉하여 지원을 논의했다. 이 결과로 키징거 비판 브로셔 30,000부 출판 지원을 받았으나, 재정적 지원은 받지 못했다.[8][9]
1968년 5월 9일, 클라르스펠트는 서베를린에서 귄터 그라스, 요하네스 아뇰리, 에케하르트 크리펜도르프, 야콥 타우베스 등과 함께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키징거를 독일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그의 뺨을 때리겠다고 예고했다. 이는 청중 일부, 특히 SDS 회원들 사이에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10] 토론회는 키징거의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3/4의 다수로 채택하며 마무리되었다.[11][12]
1968년 11월 7일, 서베를린의 베를린 의회 홀에서 열린 CDU 당 대회에서 클라르스펠트는 『슈테른』지 카메라맨의 취재 허가증을 이용해 연단으로 올라가 키징거의 뺨을 때리며 "나치, 나치, 나치"라고 외쳤다.[14] 며칠 후 ''Der Spiegel''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행동이 이미 5월 9일에 계획된 것이었으며, 나치가 연방 정부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 특히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15] 베를린을 행동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프랑스 시민으로서 도시의 4개국 지위 하에서 가벼운 처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2]
이 사건으로 클라르스펠트는 당일 가속 심리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녀의 변호는 호르스트 말러가 맡았다. 판사는 정치적 신념을 폭력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며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으며, 피해자가 총리라는 사실은 양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밝혔다.[15] 그러나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 국적 덕분에 실제로 수감되지는 않았다.[16][17][68] 이후 항소를 통해 1969년 말, 4개월 징역형에 집행유예로 감형받았다.[15]
클라르스펠트의 "뺨 때리기"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그녀를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그녀에게 지지의 의미로 파리로 붉은 장미를 보냈다.[18][19] 반면, 귄터 그라스는 그녀의 행동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다.[20] 이 사건 이후 학생 운동 진영에서는 판결에 항의하며 판사의 집에 돌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SDS는 이를 "전례 없는 테러 판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평가했다.[20]
클라르스펠트는 1968년 11월 23일에 녹음한 시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녀는 자신의 뺨 때리기가 제2차 세계 대전의 5천만 희생자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었으며, "1천만 나치"의 "역겨운 얼굴"에 대한 일격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21][22] 그녀는 "과거 나치가 당수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뺨을 때린 것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전 세계에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하는 독일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라고 설명했다.[65][67]
뺨 때리기 사건 이후에도 클라르스펠트의 항의는 계속되었다. 1968년 11월 13일, 키징거가 브뤼셀에서 연설할 예정이었으나, 클라르스펠트가 항의 시위를 계획하자 벨기에 경찰의 권고로 출국해야 했다.[18][23] 키징거가 브뤼셀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의에서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 연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66] 1969년 총선에서는 좌파 정당인 ''Aktion Demokratischer Fortschritt''의 후보로 발트스후트 선거구에 출마하여 키징거 총리와 직접 대결했으나, 644표를 얻는 데 그쳐 60,373표를 얻은 키징거에게 크게 패했다.[24]
이후 1969년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클라르스펠트를 사면했다.[66] 클라르스펠트가 키징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담은 사진은 현재 독일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66] 이 "뺨 때리기" 사건은 나치 전범 추적 및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클라르스펠트 부부 활동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3. 2. 기타 활동
1970년 3월, 자유민주당(FDP) 소속 정치인 에른스트 아헨바흐가 유럽 공동체 위원회 독일 대표 후보로 지명되자, 클라르스펠트는 그의 나치 활동 전력을 폭로하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아헨바흐는 과거 프랑스 점령 시절 유대인 추방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클라르스펠트는 프랑스와 독일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고 시위를 조직했으며, 결국 1970년 5월 독일 정부는 아헨바흐 지명을 철회했다.[70][65] 이후 1970년대 내내 클라르스펠트는 아헨바흐의 나치 전력을 지속적으로 비판했으며, 1976년에는 그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클라르스펠트 부부의 노력으로 아헨바흐가 추진하던 독일-프랑스 간 조약의 비준이 1974년까지 저지되기도 했다.[29][30][31]
1971년 2월, 클라르스펠트는 프라하의 찰스 대학교 앞에서 "스탈린화, 박해,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동독 입국이 금지되었다.[25] 같은 해, 그녀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약 76,000명의 유대인을 추방한 책임이 있는 전 나치 간부 쿠르트 리슈카를 납치하여 프랑스 법정에 세우려 시도했다. 당시 리슈카는 쾰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납치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클라르스펠트는 독일 당국에 자수했다.[26] 1974년, 그녀는 납치 미수 혐의로 2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인 항의로 형 집행이 유예되었다.[27][28] 리슈카는 1980년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26]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현대 유대 자료 센터(CDJC)의 자료 분석 등을 통해, 1947년과 1954년 프랑스에서 결석 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SS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가 '클라우스 알트만'이라는 가명으로 볼리비아에 거주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1971년 7월, 뮌헨 법원이 바르비의 신원을 인지하고도 공개 심문을 기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독일과 프랑스 정부 및 EU에 그의 신병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녀는 1972년 바르비의 볼리비아 내 소재지를 파악하는 데 기여했으며[33], 끈질긴 노력 끝에 1983년 바르비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침내 1987년 7월 4일, '리옹의 학살자'로 알려진 바르비는 리옹 법정에서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클라르스펠트는 이 사건 해결을 자신들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성과로 평가했다. 또한 이들의 헌신 덕분에 바르비가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제유의 집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칠레와 파라과이를 방문하여 나치 전범으로 의심받던 발터 라우프와 요제프 멩겔레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힘썼다.
1986년에는 서베이루트에서 한 달간 머물며, 이스라엘 인질과의 교환을 위해 자신을 구금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같은 해, 전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이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그의 나치 국방군 복무 시절 전쟁 범죄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당선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그녀는 발트하임의 선거 유세에 참여해 항의했으며, 그의 당선 이후에도 이스탄불과 암만 등지에서 열린 그의 공식 행사를 방해했다. 이 활동은 세계 유대인 회의의 지원을 받았다.[32]
1991년, 클라르스펠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관으로 약 13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는 알로이스 브루너가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의 신병 인도를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01년, 브루너는 프랑스 법원에서 ''부재 중''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7월에는 베를린에서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국빈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를 촉구하기도 했다.[34]
4. 2012년 독일 대통령 선거 출마
2012년 2월 27일, Die Linke의 이사회는 루크 요킴센[39]과 크리스토프 부터베게 등이 거론된 후,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를 2012년 독일 대통령 선거 후보로 만장일치로 지명했다.[40][41]
클라르스펠트는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데 있어 좌파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좌파당이 자신의 이스라엘에 대한 헌신을 알고 있음에도 후보로 지명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해 당과 의견을 같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당선될 경우 구체적인 행정 계획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다른 유럽 국가에 사회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도덕적인 독일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42] 그녀는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니콜라 사르코지를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CDU나 SPD의 지명을 받는 것을 선호했을 수 있지만 "좌파당의 후보가 된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덧붙였다.[43] 클라르스펠트는 독일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이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일 것이라고 말했다.[42]
그러나 후보 지명 직후, 클라르스펠트의 과거 동독 국가보안부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2012년 2월 말, 작센주 슈타지 자료 담당관 루츠 라테노우는 ''타게스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클라르스펠트가 슈타지로부터 자료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다만 그녀가 직접 보고서를 제공하거나 주요 정보원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라테노우는 "슈타지가 나치 범죄 해명에 기여한 부분과 해를 끼친 부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44] 이미 1991년, 전 슈타지 요원 귄터 본작과 헤르베르트 브레머는 ''슈피겔'' 기고를 통해 클라르스펠트가 동독으로부터 "전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 대한 증거"를 받았으며, 이 협력 관계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45] 본작은 키징거 뺨 때리기 사건은 클라르스펠트가 "자신이 꾸민" 것이며, 자신은 사전에 몰랐다고 말했다.[46]
이에 대해 클라르스펠트는 자신이 정보원이 아니었으며, 독일 민주 공화국(GDR)이 포츠담의 나치 범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녀는 70년대 초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의 반유대주의 활동 이후 GDR이 협조를 중단했으며, 당시 만났던 동독 인사들의 슈타지 배경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저는 GDR의 국가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역사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라고 말했다.[46]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2012년 3월 5일, 클라르스펠트는 작센 자유주 의회에서 좌파 그룹의 추천으로 제15차 연방회의에 참여할 선거인단 33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47]
하지만 2012년 3월 7일, ''Welt online''은 "유명한 독일 뺨에 2000 D-Mark"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과거 SED 정치국 멤버였던 알베르트 노르덴이 키징거 뺨 때리기 사건 일주일 후 클라르스펠트에게 "추가 활동을 위해" 2000 D-Mark를 제공하라고 지시한 내부 문건을 공개했다. 공식적으로는 동독 잡지 기고료 명목이었다.[48]
이 보도 이후 CDU 사무총장 헤르만 괴에는 클라르스펠트가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고 비판했으며,[49] 베를린-호엔쇤하우젠 기념관 관장 후베르투스 크나베 역시 그녀에게 "민주주의 의식"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49] 클라르스펠트는 동독의 지원을 이유로 자신의 키징거 반대 활동을 폄하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며, 동독이 아닌 자신을 위해 일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해당 자금이 1968년 11월 13일 브뤼셀에서 열린 반키징거 캠페인 지지자들의 항공료 지불에 사용되었으며, 이는 이미 1972년 자서전에서 밝혔던 내용이라고 설명했다.[50]
''Welt online''은 클라르스펠트의 답변을 2000 D-Mark 수수 사실을 처음으로 간접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자유민주당(FDP) 사무총장 파트릭 뒄링은 "1968년에 클라르스펠트 부인이 돈을 받고 SED PR 캠페인의 공범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최고 국가 기관 후보 지명은 모든 민주주의자들에게 뺨을 때리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고, CSU 사무총장 알렉산더 도브린트는 그녀를 "SED 꼭두각시"라고 불렀다.[51]
반면, 좌파당의 전무 이사 카렌 레이는 클라르스펠트의 활동을 "GDR의 의뢰를 받았다"고 폄하하는 것을 "터무니없는 혐의"라고 일축했다.[50] 의회 원내 부대표 디트마르 바르치는 클라르스펠트가 키징거 뺨 때리기로 신호를 보내려 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평가하며, GDR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클라르스펠트가 "나치와의 싸움"에서 프랑스, 이스라엘, 그리고 동독의 지원을 받은 것은 정당하다고 옹호했다.[52]
한편, Die Welt는 클라르스펠트의 생일을 3년 전에 축하하는 기사를 냈었지만,[5] 이 시기에는 클라우스 바르비 재판이 "클라르스펠트와 관련이 거의 없었다"거나,[53] 키징거 뺨 때리기는 그가 "나치 정권의 동조자"였기 때문에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비판적인 논평을 게재하기도 했다.[54]
2012년 3월 18일 연방회의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 투표 결과, 클라르스펠트는 126표를 얻었다. 이는 좌파당 소속 선거인단 수보다 3표 많은 수치이다. 그러나 CDU/CSU, SPD, FDP, 녹색당의 공동 후보였던 요아힘 가우크가 991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55]
5. 슈타지 협력 논란
1991년, 전 슈타지 요원이었던 귄터 본작과 헤르베르트 브레머는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클라르스펠트가 동독으로부터 "전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 대한 증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45] 본작에 따르면 이러한 협력 관계는 1966년에 시작되어 1989년까지 이어졌으며, 키징거의 뺨을 때린 계획은 클라르스펠트가 "스스로 꾸민 것"으로 자신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덧붙였다.[46]
2012년 2월 27일, 클라르스펠트가 Die Linke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40][41] 슈타지 연루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2월 말, 작센주의 슈타지 자료 담당관인 루츠 라테노우는 언론 인터뷰에서 클라르스펠트가 동독 국가보안부와 접촉했으며 자료를 받았다고 언급하며, "슈타지의 나치 범죄 해명에 대한 기여가 어느 정도였고, 어디에 해를 끼쳤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44]
이에 대해 클라르스펠트는 자신이 정보원은 아니었으며, 동독 당국이 포츠담에 보관된 나치 범죄자 관련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녀는 1970년대 초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 반유대주의 활동을 벌인 이후 동독의 자료 접근이 차단되었으며, 당시 만났던 동독 관계자들이 슈타지 소속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저는 GDR의 국가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역사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라고 말했다.[44][46]
논란은 2012년 3월 7일, 독일 언론 ''Welt online''이 SED 정치국 위원이었던 알베르트 노르덴의 내부 성명을 보도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이 성명에 따르면 노르덴은 키징거 뺨 때리기 사건 일주일 후, 클라르스펠트에게 "추가 활동을 위해" 2000DEM을 제공하라고 지시했으며, 공식적으로는 동독 잡지 기고료 명목으로 처리되었다.[48]
이 보도 이후 CDU 사무총장 헤르만 괴에는 클라르스펠트가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고 비판했으며[49], CSU 사무총장 알렉산더 도브린트는 그녀를 "SED 꼭두각시"라고 비난했다.[51] FDP 사무총장 파트릭 뒄링 역시 "돈을 받고 SED PR 캠페인의 공범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후보 지명은 모든 민주주의자들에게 뺨을 때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51] 베를린-호엔쇤하우젠 기념관 관장 후베르투스 크나베도 클라르스펠트에게 "민주주의 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49]
클라르스펠트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동독의 지원을 빌미로 자신의 활동을 폄훼하려는 시도라고 반박하며, 자신은 동독을 위해 일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해당 자금이 1968년 11월 브뤼셀에서 열린 반키징거 캠페인 지지자들의 항공료 지불에 사용되었으며, 이 사실은 이미 1972년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다고 해명했다.[50] 그러나 ''Welt online''은 클라르스펠트의 답변을 그녀가 실제로 2000DEM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간접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51]
한편, 클라르스펠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Die Linke는 이러한 비판에 맞섰다. 당 전무 이사 카렌 레이는 클라르스펠트의 활동을 "GDR의 의뢰를 받았다"고 폄하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혐의"라고 비판했으며[50], 원내 부대표 디트마르 바르치는 클라르스펠트가 프랑스, 이스라엘, 그리고 동독의 지원을 받아 "나치와의 싸움"을 벌인 것은 정당하다고 옹호하며 GDR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했다.[52]
독일 언론 Die Welt는 과거 클라르스펠트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사를 실었으나[5], 논란이 불거진 후에는 클라우스 바르비 재판이 "클라르스펠트와 관련이 거의 없었다"거나[53] 키징거가 단순 나치 정권의 동조자였기 때문에 뺨을 때린 행동이 의심스럽다는 비판적인 논평을 게재하기도 했다.[54]
이러한 논란 속에서 2012년 3월 18일 실시된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클라르스펠트는 연방 의회 의원 126표를 얻었다. 이는 좌파당 소속 대의원 수보다 3표 많은 수치였다. 경쟁 후보였던 요아힘 가우크는 991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55]
6. 수상 및 서훈
wikitext
연도 | 훈장/상 이름 | 수여 주체 / 비고 |
---|---|---|
1974년 | 이스라엘 "게토 투사 용맹 훈장" | 이스라엘 |
1984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Chevalier) |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
2007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Officier) |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 |
2009년 | 게오르크 엘저 상 | |
2011년 | 국가 공로 훈장 |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
2014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Commandeur) | 프랑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
2015년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1등급 | 독일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공동 수상) |
2016년 | 이스라엘 명예 시민권 | 유대인을 위해 헌신한 나치 헌터로서의 활동을 기려 수여받음[74] |
2018년 | 전미 유대교 도서상 올해의 도서 부문 | 진실을 쫓는 사냥: 베아테와 세르주 클라르스펠드의 회고록 |
2024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Grand Officier) |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
7. 저서
- ''파리의 독일인 소녀 오페어'', Voggenreiter, Bad Godesberg 1965.
- [https://nrw-archiv.vvn-bda.de/bilder/klarsfeld_die_wahrheit_ueber_kiesinger_elan_1968_juli_august_neu.pdf ''키징거에 대한 진실''], ''elan'', 1968년 7/8월호.
- ''PG 2 633 930 키징거의 이야기: 하인리히 뵐의 서문이 있는 문서''. Melzer, Darmstadt 1969.
- ''K 또는 미묘한 파시즘'': 요제프 빌리그와 하인리히 뵐의 서문과 함께. Extra-Dienst-GmbH, Jüdischen Aktionskreis (JAK)와 연계, 베를린, 1969. 독일 국립 도서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서명: ''D 69/23806'' 및 라이프치히: ''SA 22217 - 2''.
- ''그들이 어디에 있든!'' Vanguard Press, 뉴욕 1972.
- * 프랑스 원본: ''Partout où ils seront'', 1972.
-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함께: ''이쥐의 아이들. 유대인 비극''. Ed. Hentrich, 베를린 1991 (Reihe deutsche Vergangenheit, No. 51) (프랑스어 및 영어로도 출판).
-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함께: ''아우슈비츠 종착역: 프랑스에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 유대인 어린이의 추방; 추모의 책''. Böhlau, 쾰른 2008.
-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함께: ''추억''. Piper, 뮌헨/베를린 2015.
- 편집자로서: ''죽음을 향한 대기실에서의 연애 편지; 1942년 1월부터 8월까지 프랑스의 구르 및 브렌스 수용소에서 연인 루돌프 레반도프스키에게 샬롯 미나 로젠탈이 쓴 편지'', Stiftung Demokratie Saarland, 자르브뤼켄, 2013. 독일 국립 도서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서명: ''2013 A 81226'' 및 라이프치히: ''2013 A 99942''.
8. 영화
- ''나치 사냥꾼: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이야기''(Nazi Hunter: The Beate Klarsfeld Story영어): 1986년 미국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TV 영화이다. 상영 시간은 약 100분이며, 감독은 마이클 린지-호그이다. 패라 포셋이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역을, 톰 콘티가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역을 맡았다.
- ''사냥''(La Traque프랑스어): 2008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제작된 TV 영화로, 상영 시간은 108분이다. 감독은 로랑 자우이이며, WDR, ARTE, AT-Production, Elzévir Films, RTL-TVI, TERZ Film 등이 제작에 참여했다. 아르테 내용 요약 및 페터 핑켈그룬의 영화 인터뷰 자료가 있다. 출연진으로는 한스 지슐러가 클라우스 바르비 역을, 프란카 포텐테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역을, 이반 아탈이 세르주 클라르스펠트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간행물
Wherever they may be
http://www.holocaust[...]
holocaust-history.org
1972
[2]
문서
Spiegel-Gespräch, a.a.
[3]
문서
Vgl.
[4]
간행물
Wherever they may be
http://www.holocaust[...]
holocaust-history.org
1972
[5]
학술지
Beate Klarsfeld – Nazis jagen, Kanzler ohrfeigen
https://www.welt.de
2009-02-13
[6]
웹사이트
Transcript of oral history interview
https://collections.[...]
Beate Klarsfeld
1972
[7]
뉴스
Unwiderstehliche Kraft
http://www.spiegel.d[...]
1966-11-28
[8]
뉴스
Die Ohrfeige war ein politischer Akt. Interview mit Beate Klarsfeld
http://www.spiegel.d[...]
1968-11-18
[9]
뉴스
Bundespräsidenten-Kandidatin Klarsfeld – Besuch der alten Dame
Frankfurter Allgemeine Sonntagszeitung
[10]
서적
Kurt Georg Kiesinger, 1904–1988
DVA
2006
[11]
간행물
Wherever they may be
http://www.holocaust[...]
1972
[12]
뉴스
Eine Ohrfeige und vierzig Jahre Arbeit
http://www.netzeitun[...]
2005-09-02
[13]
뉴스
Wie alle Deutschen
http://www.spiegel.d[...]
1968-07-08
[14]
뉴스
Beate Klarsfelds privater Feldzug
http://www.zeit.de/1[...]
Die Zeit
1969-05-25
[15]
웹사이트
Amtsgericht Tiergarten verurteilte Beate Klarsfeld wegen Ohrfeige auf Bundeskanzler Kurt Georg Kiesinger zu Freiheitsstrafe von 1 Jahr
http://www.kostenlos[...]
[16]
뉴스
Ganz hübsch
http://www.spiegel.d[...]
1968-09-13
[17]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Die "Nazi-Jägerin"
http://www.dw.de/dw/[...]
dw.de
2017-04-25
[18]
뉴스
Rote Rosen
http://www.spiegel.d[...]
1968-11-18
[19]
뉴스
Beate Klarsfeld
http://www.spiegel.d[...]
2006-09-04
[20]
뉴스
Wann und wie
http://www.spiegel.d[...]
1969-02-10
[21]
웹사이트
Die Geschichte einer Ohrfeige
http://www.neues-deu[...]
Neues Deutschland
[22]
웹사이트
Ohrfeige für Pg. 2633930
https://web.archive.[...]
elan
1968-12
[23]
뉴스
Nicht wundern
http://www.spiegel.d[...]
1968-12-09
[24]
서적
Geschichte Deutschlands seit 1945
[25]
웹사이트
Das Chaos bei der Kandidatenkür der Linken
https://www.welt.de/[...]
welt.de
[26]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jagte SS-Mann in Köln
https://www1.wdr.de/[...]
www1.wdr.de
2020-01-10
[27]
웹사이트
1. April 1971 – Beate Klarsfeld zeigt sich selbst an
https://www1.wdr.de/[...]
www1.wdr.de
2020-01-10
[28]
서적
Auf dem Weg zur Normalität: Konflikt und Verständigung in den deutsch-französischen Beziehungen der 1970er Jahre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14
[29]
웹사이트
Zeitungsartikel zur Bürobesetzung am 4.
http://www.essen-ste[...]
2016-07-20
[30]
웹사이트
1. April 1971 – Beate Klarsfeld zeigt sich selbst an
https://www1.wdr.de/[...]
Westdeutscher Rundfunk (WDR)
2011-04-01
[31]
서적
Frankreich und die deutschen Kriegsverbrecher : Politik und Praxis der Strafverfolgung nach dem Zweiten Weltkrieg
Wallstein Verlag
2013
[32]
뉴스
"Das ist eine Anerkennung meiner Arbeit"
http://www.n-tv.de/p[...]
N-tv
[33]
학술지
The Klaus Barbie Trial: Traces and Temporalities
https://www.jstor.or[...]
Comparative Literature Studies
2011
[34]
웹사이트
Damaskuserlebnis für Antiimperialisten
https://web.archive.[...]
jungle-world.com
2017-03-12
[35]
웹사이트
handelsblatt.com: Westerwelle stellt sich gegen "Nazi-Jägerin"
https://www.handelsb[...]
handelsblatt.com
2017-03-12
[36]
웹사이트
UNESCO Honours Beate and Serge Klarsfeld, for their work to preserve the history and teaching of the Holocaust
https://www.unesco.o[...]
2023-09-11
[37]
웹사이트
Unacceptable remembrance on Nazi-cemetery Ysselsteyn
https://archive.org/[...]
2023-01-05
[38]
웹사이트
Rote Rosen für eine Ohrfeige
http://www.arte.tv/d[...]
2015-09-23
[39]
뉴스
'Bundespräsidentenwahl: Linke sucht Ausweg aus Kandidaten-Dilemma'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40]
뉴스
'Präsidentschaftskandidatin: Linke schicken Klarsfeld gegen Gauck ins Rennen'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41]
뉴스
Linkspartei nominiert Klarsfeld als Kandidatin
https://www.faz.net/[...]
2012-02-27
[42]
뉴스
'Linke-Kandidatin Klarsfeld bekundet Symphathie für Sarkozy'
https://www.faz.net/[...]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43]
뉴스
'Gauck-Rivalin Klarsfeld in Berlin: Die neue Liebe der Linken'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44]
뉴스
'DDR-Bürgerrechtler Rathenow hinterfragt Klarsfelds Stasikontakte'
http://www.tagesspie[...]
Der Tagesspiegel
[45]
뉴스
'Treffen auf der Parkbank – Die Ex-Stasi-Offiziere Günter Bohnsack und Herbert Brehmer über ihre Tricks gegen Geheimdienste und Medien (II)'
http://www.spiegel.d[...]
Der Spiegel
[46]
뉴스
'Klara und die Detektive'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12
[47]
뉴스
'Sachsens Wahlleute für Bundesversammlung stehen fest'
http://www.sz-online[...]
Sächsische Zeitung
[48]
뉴스
'2000 D-Mark für die berühmteste deutsche Ohrfeige'
https://www.welt.de/[...]
Welt online
[49]
뉴스
'CDU-General hält Klarsfeld für "völlig untragbar"'
https://www.welt.de/[...]
Die Welt
[50]
뉴스
'Klarsfeld findet Diskussion um Unterstützung durch die DDR unverschämt'
https://archive.toda[...]
[51]
뉴스
'Politbüro-Geld bringt Beate Klarsfeld in Bedrängnis'
https://www.welt.de/[...]
[52]
뉴스
'Beate Klarsfeld ist eine gute Kandidatin'
http://www.dradio.de[...]
Deutschlandfunk
[53]
뉴스
'Nazi-Jägerin Klarsfeld ist mehr Mythos als Wahrheit'
https://www.welt.de/[...]
Die Welt
[54]
뉴스
'Auch Ulbricht hätte Ohrfeige von Klarsfeld verdient'
https://www.welt.de/[...]
Die Welt
[55]
뉴스
'Entscheidung in Berlin – Joachim Gauck ist Bundespräsident'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56]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Nommee Commandeur de L'ordre National du Merite
https://web.archive.[...]
Association Zakhor Pour la Mémoire
2020-12-06
[57]
웹사이트
Georg-Elser-Preis 2009
https://web.archive.[...]
2016-07-20
[58]
뉴스
Légion d'honneur : 657 décorés, dont Michèle Morgan et Serge Klarsfeld
Le Monde
2014-01-01
[59]
뉴스
'Nazi-Jäger: Gauck zeichnet Beate und Serge Klarsfeld aus'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60]
뉴스
'Die berühmteste Ohrfeige der Nachkriegsgeschichte'
https://www.faz.net/[...]
FAZ.
[61]
뉴스
'Israel ehrt Nazijaegerin Beate Klarsfeld mit Staatsbuergerschaft'
https://www.welt.de/[...]
Die Welt
[62]
웹사이트
Past Winners
https://www.jewishbo[...]
2020-01-20
[63]
뉴스
'Macron honours Franco-German Nazi hunters Beate and Serge Klarsfeld'
https://www.yahoo.co[...]
[64]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75 ans - Combattante pour l’amour de Serge !'
https://www.parismat[...]
2018-12-21
[65]
웹사이트
'Beate et Serge Klarsfeld : les combats de la mémoire (1968-1978) (2017年12月7日から2018年10月28日までショア記念館で行われたベアテ&セルジュ・クラルスフェルト企画展)'
http://expo-klarsfel[...]
2018-12-21
[66]
웹사이트
'… J’ai giflé le chancelier allemand Kiesinger. Par Beate Klarsfeld'
https://www.parismat[...]
2018-12-22
[67]
간행물
セルジュ・クラルスフェルト作『フランスのショア』をめぐって
https://kusa.repo.ni[...]
加計学園倉敷芸術科学大学
2018-03-01
[68]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 "Le jour où j'ai giflé le chancelier allemand"'
https://www.parismat[...]
2018-12-22
[69]
웹사이트
Beate et Serge Klarsfeld : le parcours des combattants
https://www.liberati[...]
2017-12-25
[70]
웹사이트
Ce que sont devenus les criminels nazis
http://d-d.natanson.[...]
2018-12-22
[71]
웹사이트
Klarsfeld Foundation
http://www.klarsfeld[...]
2018-12-22
[72]
웹사이트
Beate Klarsfeld foundation
https://data.bnf.fr/[...]
2018-12-22
[73]
웹사이트
Entscheidung in Berlin – Joachim Gauck ist Bundespräsident
http://www.spiegel.d[...]
2018-12-22
[74]
뉴스
La chasseuse de nazis allemande Beate Klarsfeld reçoit la nationalité israélienne
https://www.lemonde.[...]
2018-12-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