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니시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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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니시 레이는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귀국한 작사가, 작가, 번역가이다.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샹송 번역을 시작했으며, 작사가로 데뷔하여 '오늘로 이별', '북쪽의 술집'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작사 외에도 소설, 수필, 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소설 《형제》로 나오키상 후보, 《나가사키 브라브라절》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또한,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과 평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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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38년 만주국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릿쿄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대학 시절 샹송 번역을 시작으로 작사가, 작가, 방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대학 재학 중 샹송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1962년 10월 자신이 번역한 《안녕, 연인이여》(チャオ・ペラ일본어)가 정식 발매되었다. 이후 약 4,000곡의 노래를 작사했으며, 그 중 3곡이 일본 레코드 대상 대상을, 2곡이 작사상을 수상했다. 1998년부터 소설 《형제》(兄弟일본어)를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 2000년에는 《나가사키 어슬렁어슬렁 타령》(長崎ぶらぶら節일본어)으로 제122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번역 시집, 오페라 작품을 쓰고 콘서트 구성 및 연출을 맡기도 했다.
1963년 결혼했으나 1968년 이혼했고, 1971년 이시다 유리(石田ゆり일본어)와 재혼했다. 심장병, 이혼, 형의 빚 등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중국, 한국과의 화해를 희망했으며, 이는 그의 글과 연설에 나타난다.
2020년 12월 23일 심근경색으로 향년 82세에 사망했다.[33]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1938년 9월 2일 만주국 무단장성 무단장시에서 나카니시 세이타로(中西政太郎)와 요키(よき)의 아들로 태어났다.[5] 1945년 4월 무단장 시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8월 종전 4일 전에 하얼빈시로 이동하였고, 같은 해 12월 아버지 세이타로가 사망했다.[5] 이듬해 10월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를 통해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홋카이도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5] 이후 도쿄, 아오모리 등을 전전했고, 도쿄도립 쿠단 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5] 이후 자퇴와 재입학을 거듭한 후, 최종적으로 불문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5]2. 2. 작사가 데뷔와 활동
나카니시 레이는 처음에는 프랑스 샹송 번역 작업을 했지만, 신혼여행 중 이시하라 유지로와 인연을 맺고 일본 유행가(가요곡(歌謡曲)) 작사가가 되었다.[1] 그는 약 4,000곡을 작사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요곡계의 주요 작사가로서 방대한 작품 활동을 보여준다. 1969년 그의 총 판매량은 1,000만 장을 넘었다.다음은 나카니시 레이의 홈페이지 연보에 언급된 작품을 중심으로 나열한 것이다.
그는 "きょうでわかれ"(오늘로써 이별)와 "北酒場"(북쪽의 술집)과 같이 큰 히트를 친 노래들을 비롯해 다수의 독특한 노래들을 발표했다.
2. 3. 작가로서의 활동
나카니시 레이는 릿쿄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초기에는 프랑스 샹송 번역 작업을 했다. 이시하라 유지로와의 인연을 계기로 일본 유행가(가요곡(歌謡曲)) 작사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는 "きょうでわかれ", "北酒場"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하며 전후 가요곡계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자리매김했다. 1969년에는 그의 총 음반 판매량이 1,000만 장을 넘어서기도 했다.[2]나카니시 레이는 작사뿐만 아니라 콘서트 및 무대 제작, 영화 출연, 노래, 작곡, 번역, 소설 및 수필 집필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쇼와 시대 말기에는 작사 활동을 중단하고 오페라 제작 및 공연, 소설 및 수필 집필에 전념했다.
1998년 소설 『형제(兄弟)』로 제11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며, 2000년에는 『나가사키 어슬렁어슬렁 타령(長崎ぶらぶら節)』로 제122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1] 2002년작 『테루테루보즈의 테루코씨(てるてる坊主の照子さん)』는 2003년 NHK 드라마 《테루테루 가족》의 원작이 되었다.[34]
그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모차르트 가곡집 등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니시무라 아키라의 합창곡 「그리고 밤이 밝아온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천국과 지옥」[25], 미키 미노루의 오페라 「와카히메」[26]와 「정과 의경」[27], 미에다 시게아키의 오라토리오 「야마토타케루」[28], 코로쿠 레이지로의 세계극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했다.
2. 4. 평화 운동과 사회 참여
나카니시 레이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중국 및 한국과의 화해를 희망했다. 이는 그의 글쓰기 스타일과 연설에 나타난다.[1]2. 5. 투병과 사망
1971년, 주간 포스트 (7월 9일자)에 배우와 가수 등의 문란한 관계를 폭로하는 "연예인 상애도"를 게재했지만, 나중에 주간 포스트 기자로부터 강요당해서 쓰게 된 것이라고 고소했다. 기자 2명이 체포되는 사건으로 발전했지만,[8] 나중에 합의했다. 1974년 9월에는 형 정일과 함께 중역을 맡고 있던 연예 기획사, 애드 프로모션과 후부키 준의 계약 문제로 트러블이 발생하여 후부키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했다. 결혼식의 증인은 고다마 요시오였다.[9]젊은 시절부터 여러 번 심장 질환[4]을 겪었고, 이혼과 더불어 1970년대 후반에는 특공대 출신으로 전후 청어잡이에 투자하여 전 재산을 잃는 등 파멸적인 삶을 보낸 형 정일의 막대한 빚을 대신 갚느라 고생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TV 아사히 계열에서 방송되는 와이드쇼 '와이드! 스크램블'의 코멘테이터를 맡았지만, 2012년 3월 5일 방송에서 식도암임을 보고하고, 치료를 위해 휴업할 것을 밝혔다.[10] 의사들로부터 항암제, 방사선 치료, 수술이라는 치료법 설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심장은 장시간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인터넷을 활용하여 양성자 치료를 알게 되었다. 2012년 2월부터 6월까지의 투병 과정은 저서 '사는 힘 마음으로 암을 극복하다'에 자세히 나와 있다. 투병 끝에 암을 극복하고, 같은 해 10월에 복귀했다. 집필, 코멘테이터 등의 일도 재개했고, '와이드! 스크램블'에는 2014년 3월 31일까지 출연했다.
2015년 3월, 자신의 라디오 방송 '나카니시 레이 "내일을 향한 바람"'에서 암이 재발하여 휴양할 것을 밝혔다.[15] 그 후, 해당 방송은 휴지될 것이 발표되었다.[16]
2016년 4월, 삽입형 제세동기(ICD)와 심장 박동기 수술을 받았다.[17]
2020년 가을에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요양 중이었으나, 같은 해 12월 23일 오전 4시 23분 심근경색으로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18][19]
3. 사생활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거주했다.[1] 화려한 삶 뒤에는 심장병, 이혼, 형의 막대한 빚을 갚아야 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형제(兄弟)』와 『사쿠라의 전설(桜の伝説)』과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중국, 한국과의 화해를 희망했고, 이는 그의 글쓰기 스타일과 연설에 나타난다.[1]
4. 주요 작품
나카니시 레이는 작사가, 작가, 번역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4. 1. 작사
1975년 도쿄음악대상 작사상1982년 JASRAC 대상
1989년 일본작사대상 대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