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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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희의 송가는 프리드리히 실러가 1785년에 쓴 시로, 1808년에 출판된 개정판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의 가사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시는 환희를 통해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고 신의 섭리 아래 하나가 됨을 노래하며, 자유와 저항, 화합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1985년에는 유럽 연합의 찬가로 채택되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톈안먼 민주화 시위 등 역사적인 사건에서 자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곡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주화 운동 시기 등 고난의 시대를 거치며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곡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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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 에그몬트 (베토벤)
에그몬트는 베토벤이 괴테의 희곡을 위해 작곡한 부수 음악으로, 스페인 압제에 맞선 에그몬트 백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서곡과 아홉 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서곡이 널리 알려져 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 피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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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송가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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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환희에 부쳐 |
원제 | An die Freude |
원제 (로마자 표기) | An di Freude |
작가 | 프리드리히 실러 |
국가 | 독일 |
언어 | 독일어 |
형태 | 송가 |
발표 | 1785년 |
출판 | 탈리아 |
출판일 | 1786년, 1808년 |
음악적 적용 | |
작곡가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작품 | 교향곡 9번 4악장 |
기타 | 찬송가로도 사용됨 |
2. 실러의 원시
프리드리히 실러는 1785년 5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라이프치히의 고리스에 있는 실러하우스에서 그의 작품 발행인 게오르크 요아힘 괴센과 함께 머물며 희곡 "돈 카를로스"와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 초고를 썼다.[26] 이 시는 프랑스 혁명 직후 라 마르세예즈의 멜로디로 독일 학생들에게 불려지기도 했다.[21]
1803년 실러는 시를 일부 수정했고, 이 개정판은 1808년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824년에 완성한 교향곡 9번 4악장에 이 개정판을 가사로 사용했다.[28]
실러는 만년에 이 시를 실패작으로 여겼다. 1800년, 친구이자 후원자인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우리 둘에게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이나 시의 예술에는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3]
실러가 원래 "자유의 송가"(''An die Freiheit'')를 썼다가 "환희의 송가"로 변경했는 지는 학계에서 여전히 추측으로 남아있다.[6][7] 테이어는 베토벤의 전기에 "'환희'가 아닌 '자유의 송가'였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썼다.[8] 음악학자 알렉산더 레딩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1989년 공연에서 "Freiheit"를 사용했지만, 실러가 "자유"를 "환희"의 암호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이며, 학자들의 의견은 이 신화에 사실적 근거가 없다는 데 일치한다고 지적한다.[9]
2. 1. 초판 (1785년)
2. 2. 개정판 (1808년)
실러는 이후 이 시를 수정했고, 이 개정판은 1808년에 사후에 재출판되었으며, 이 후기 버전이 베토벤의 작곡의 기초가 되었다.[3] 개정판에서는 8절이 삭제되고 1절이 수정되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92년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초고를 접하고 감명을 받아 작곡을 결심했고, 1824년 완성된 교향곡 9번 4악장에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사용했다.[28]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애독했지만, 교향곡 9번에는 1808년 개정판을 사용했으며, 시의 내용을 3분의 1 정도로 축약하고,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라는 구절을 직접 추가했다.
원래 마지막 연은 삭제되었다.
베토벤은 1792년에 이 시의 초고를 접하고 감동하여 곡을 붙이려고 했지만, 실제로 교향곡 9번으로 1824년에 완성했을 때는 1803년 개고판의 시를 사용했다. 베토벤은 실러의 시집을 평생 애독했지만,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작품 125의 4악장의 가사에 포함하면서 3분의 1 정도의 길이로 번안했다. 처음에 바리톤 가수가 독창으로 부르는 "오 친구여, 이런 소리가 아니라…"는 베토벤이 직접 생각한 것으로, 실러의 원시에는 없다.
3. 베토벤의 교향곡 9번
3. 1. 베토벤의 가사 수정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822년-1824년에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인용하여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로 사용했다. 베토벤은 1792년에 이 시의 초고를 접하고 감동하여 곡을 붙이려 했으나, 완성된 교향곡 9번 4악장에서는 1808년 개고판을 사용했다.[28] 그는 실러의 시를 3분의 1 정도로 축약하고, 시작 부분에서 바리톤 가수가 독창으로 노래하는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라는 구절을 직접 추가하여, 환희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했다.
3. 2. 다양한 버전의 가사
프리드리히 실러는 라이프치히의 고리스에 머물던 1785년 5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의 첫 번째 버전을 썼다. 1803년 실러는 시를 일부 수정하여 1808년에 다시 출판했는데, 베토벤은 이 수정본을 바탕으로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를 썼다.[26]
베토벤은 1822년-1824년에 실러의 이 시를 인용, 1824년에 완성한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로 사용했다. 베토벤은 1792년에 이 시의 초고를 접하고 감동해서 곡을 붙이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완성된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에서는 1808년 개고판의 시를 이용하고 있다.[28]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3분의 1정도의 길이로 번안했으며, 시작 부분의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부분은 베토벤이 직접 쓴 것이다.
환희의 송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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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가사 | 한국어 번역 |
실러의 1785년 초판 | |
실러의 1808년 개정판 &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가사 | |
다음은 1808년 사후 출판본에서 수정된 구절이다.
4. 환희의 송가의 역사적, 사회적 영향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단순한 음악 작품을 넘어 항의와 축하, 그리고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85년 유럽 연합은 이 곡을 유럽가로 채택했으며,[29] 비공식 라틴어 가사가 붙여졌다. 유럽가 제안자는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백작으로, '유럽 연합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30]
실러가 원래 "자유의 송가"를 썼다가 "환희의 송가"로 변경했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추측으로 남아 있다.[28] 알렉산더 세이어는 베토벤 전기에서 "'자유의 송가'가 베토벤의 마음에 처음으로 열광적인 찬사를 불러일으킨 시"라고 추측했다. 음악학자 알렉산더 레딩은 레너드 번스타인조차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의 암호로 사용했는지에 대해 추측만 할 뿐,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이 신화에 대한 사실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환희의 송가"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 후반 칠레에서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이 곡을 불렀고, 중국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에서 이 곡을 방송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벨벳 혁명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1989년 12월 14일 프라하에서 바츨라프 노이만 지휘, 체코 필하모니 관현악단에 의해 열렸다. "환희의 송가"는 동유럽 혁명의 테마곡이 되었고, 연주 후 20분 넘게 박수가 이어졌으며,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V자를 그리며 혁명 승리를 축하했다.
1989년 12월 25일, 레너드 번스타인은 동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당시) 6개국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공연을 열었다. 나루토 교육대학 교수 코로야스 토시히데가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합창단원으로 참여했다.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에서 9번 교향곡을 연주하며 동서독 융화를 축하했고, "Freude"(환희)를 "Freiheit"(자유)로 바꿔 부른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 공연은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1990년 10월 14일 급서한 번스타인은 독일어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8년 2월 7일,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오자와 세이지 지휘 아래 세계 5대륙 6개국 7개 장소에서 동시에 "환희의 송가"가 불려졌고, 호리우치 겐 안무의 발레 영상이 중계되었다.
장소 | 설명 |
---|---|
나가노현 현민 문화회관 | 오자와 세이지 지휘 |
중국 베이징 자금성 |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 |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 |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봉 | 흑인과 백인 혼성 합창단, 해돋이와 겹쳐 밝아짐 |
미국 뉴욕 유엔 본부 | |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 | 개회식 장소 |
나가노 현민 문화회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진행되었고, 각 합창단 위치로 동시에 연주를 전달했다. 가장 먼 희망봉을 기준으로 지연 시간을 보정하여 중계했다. 오전 11시 개회식에서 성화 점화 후 "환희의 송가"와 함께 80명의 무용수가 발레를 선보였다. 나가노현은 흐린 날씨, 베이징은 영하의 기온, 시드니는 한여름, 베를린은 한밤중 등 다양한 환경에서 동시에 노래가 불려졌다.
그 외 "환희의 송가" 사용 예:
- 서독 국가, 올림픽 독일 연합 선수단 시상식 연주
- 남로디지아(짐바브웨) 국가
- 200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국가
- 1996-1998년 WWE 송가
- 페글 게임 찬송가
- 1907년 미국 시인 헨리 반 다이크 “기뻐하며 경배하세"(The Hymn of Joy) 작사
- 프란츠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베르트) 4악장에 유사 프레이즈 (인용 추정)
- 요하네스 브람스 교향곡 1번 (브람스) 4악장 주부 주제와 유사성 (베토벤 존경 표현으로 해석)
4. 1. 자유와 저항의 상징
실러가 처음에 "자유의 송가"를 썼다가 "환희의 송가"로 제목을 바꿨다는 학계의 추측이 있을 정도로,[28] 이 곡은 자유와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노래로 여겨져 왔다. 음악학자 알렉산더 레딩은 레너드 번스타인 조차도 실러가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의 암호로 사용했는지에 관해서 추측으로 남기고 있으며,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이 신화에 대한 사실적 근거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1980년대 후반 칠레에서는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이 곡을 불렀고, 중국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이 곡을 방송했다.[10]
1989년 12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벨벳 혁명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회가 바츨라프 노이만 지휘, 체코 필하모니 관현악단에 의해 행해졌고, 여기서 불렸던 "환희의 송가"는 동유럽 혁명의 테마곡이 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20분 넘게 박수가 울렸고, 새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V자를 치켜세우며 함께 혁명의 승리를 반겼다.
1989년 12월 25일,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공연이 열렸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모체로 동서독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당시)의 6개국으로부터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혼성 관현악단을 임시 편성했으며, 일본인 중에는 당시 뮌헨 방송 합창단원이었던 나루토 교육대학의 음악 교수 코로야스 토시히데가 합창단의 중앙에서 노래를 불렀다. 베를린에서도 전통 있는 연주회장인 샤우슈필하우스에서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 동서 독일의 융화를 축하했다. 이때 "Freude"(환희)를 "Freiheit"(자유)로 대체하여 부른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재통일은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얼마 후, 도이체 그라모폰 회사를 통해 이 크리스마스 공연의 라이브 녹음이 CD와 레이저 디스크(LD)로 발매되었다. 번스타인은 1년도 지나지 않아 1990년 10월 14일에 급서했지만, 이 미국인 지휘자는 본 연주회에서 독일어권 사람들에게도 잊기 어려운 인상을 남겼다.
4. 2. 유럽 통합의 상징
1985년 유럽 연합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유럽가로 채택했다.[29] 유럽가를 제안한 사람은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백작으로, 그는 '유럽 연합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30] 이는 유럽의 통합과 평화를 상징한다.4. 3. 일본에서의 수용과 변용
1918년 (다이쇼 7년) 6월 1일, 도쿠시마현 반도정 (현 나루토시)의 반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독일 병사들이 교향곡 9번 전곡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합창과 함께 연주했다.[24] 당시 중국의 칭다오는 독일의 조차지였으며,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연합군 측에 서서 참전하면서 이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포로로 수용했다. 독일인 포로들은 수용소장 마츠에 도요히사 대령의 인도적인 대우에 의해 자유롭게 음악을 즐겼다. 이 에피소드는 2006년에 데메 마사노부에 의해 『발트의 낙원』으로 영화화되었으며, 그 이전에도 NHK의 연속 텔레비전 소설 「낫짱의 사진관」(1980년 방송) 등에서 다루어졌다."환희의 노래" 부분만의 연주는 이보다 빠른 1916년 (다이쇼 5년) 8월 20일, 도쿠시마 포로 수용소 (도쿠시마시)의 독일 병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환희의 주제가 멜로디로 일본인에게 알려진 것은 더 오래되어, 1912년 (메이지 45년)의 『일요학교 찬미가』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즐겁다"는 가사를 붙여 소개되었다. 1917년 (다이쇼 6년)의 제1고등학교 료카 「토코요노 사카에니」[24] 역시 환희의 주제를 사용한 것이다.
일본인으로서의 초연은 1924년에 규슈 제국대학의 학생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회" (현 큐다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섭정궁 전하 어성혼 봉축 음악회에서 연주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으며, 가사는 독일어 및 그 일본어 번역이 아닌, 당시 문부성 제정에 의한 "황태자 전하 어결혼 봉축가"가 사용되었다.
"환희의 송가"는 일본어 번역 가사로 불리기도 하며, 독자적인 가사가 붙기도 한다. 일본어 번역으로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오자키 기하치가 번역한 것[23]과, 이와사 토이치로가 작사한 것이 있다.
1998년 2월 7일, 나가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 아래 세계 5대륙, 6개국, 7개 장소에서 동시에 불려졌으며, 이에 맞춰 호리우치 하지메 안무의 발레 영상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노래가 불려진 장소는 다음과 같다.
장소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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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현 현민 문화회관 | 오자와 세이지 지휘 |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 |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 |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봉 | 흑인과 백인의 혼성 합창단, 해돋이와 겹쳐 일대가 밝아지는 모습 |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 |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 | 개회식 장소 |
오케스트라 연주는 나가노현 현민 문화회관에서 이루어졌지만, 합창단이 있는 각 지역으로 동시에 연주를 송출하면 오케스트라와의 음향 엇갈림이 발생하고, 합창단의 노래도 늦게 나가노까지 전달되기 때문에, 가장 거리가 먼 희망봉을 기준으로 지연을 보정하여 중계되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개회식에서는 성화가 성화대에 점화된 후, 피날레로 환희의 송가가 불려지고, 80명의 무용수에 의한 발레가 펼쳐졌다. 흐린 하늘의 나가노, 기온이 영하인 베이징, 한여름의 시드니, 한밤중의 베를린 등, 시각과 계절이 제각각인 가운데 동시에 불려졌다.
4. 4. 한국에서의 특별한 의미
한국에서 "환희의 송가"는 단순한 노래를 넘어, 역사적인 아픔과 희망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온 독일군 병사들이 반도 포로 수용소에서 "환희의 송가"를 처음 연주한 것은,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인간애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의 칭다오는 독일의 조차지였으며,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연합군 측에 서서 참전하면서 이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포로로 수용했다. 독일인 포로들은 수용소장 마츠에 도요히사 대령의 인도적인 대우에 의해 자유롭게 음악을 즐겼다.[24] 이 사건은 2006년 데메 마사노부 감독의 영화 『발트의 낙원』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이전에도 NHK의 연속 텔레비전 소설 「낫짱의 사진관」 (1980년 방송) 등에서 다루어졌다.반도에서의 전곡 초연보다 앞서 1916년 8월 20일에는 도쿠시마 포로 수용소 (도쿠시마시)의 독일 병사들이 "환희의 노래" 부분만을 연주하기도 했다. "환희의 송가"의 멜로디는 이보다 더 오래전인 1912년 (메이지 45년) 『일요학교 찬미가』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즐겁다"는 가사로 일본인에게 소개되었다.
일본인의 "환희의 송가" 초연은 1924년 규슈 제국대학의 학생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회" (현 큐다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섭정궁 전하 어성혼 봉축 음악회에서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사용된 가사는 독일어 원문이나 일본어 번역이 아닌, 당시 문부성이 제정한 "황태자 전하 어결혼 봉축가"였다.
5. 그 외의 음악적 사용
-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 (1786)
-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 (1792), 합창과 반주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이후 다른 악기 편성을 위해 다시 쓰여졌다.
-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1796)
- 루트비히-빌헬름 테퍼 데 퍼거슨 (1796)
- 요한 프리드리히 후고 폰 달베르크 (1799)
- 요한 루돌프 줌슈테크 (1803)
- 프란츠 슈베르트의 노래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 An die Freude|안 디 프로이데de D 189, 성악, 유니슨 합창,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었다. 1815년 5월에 작곡되었으며, 슈베르트의 설정은 1829년 Op. post. 111 No. 1으로 처음 출판되었다.[19]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65),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솔로 가수,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다.
- 피에트로 마스카니 칸타타 "알라 조이아"(Alla gioia) (1882), 안드레아 마페이의 이탈리아어 텍스트
- "Seid umschlungen, Millionen!" (1892),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 Z. 래들 스투루프 (2002), 합창과 4핸드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었다.
- 빅토리아 폴레바 (2009), 소프라노, 혼성 합창, 교향악단을 위해 작곡되었다.
- 이 선율은 1795년의 "사랑받지 못한 자의 한숨과 사랑의 응답 Seufzer eines Ungeliebten und Gegenliebe" WoO.118, 1808년의 "합창 환상곡 작품 80"과 1810년의 가곡 "그림이 그려진 리본으로 Mit einem gemalten Band" 작품 83-3에 그 원형이 보인다.
-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다단조의 제4악장 주부 주제와의 유사성이 흔히 지적되었으며, 현재에는 브람스의 베토벤에 대한 오마주 (경의)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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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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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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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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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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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Glaube an die Freiheit – Wen darf ich töten?
https://www.theeu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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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of a "flash mob" – "Ode to Joy" sung at Leipzig railway station (8 Novembe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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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Joy: 50 String Instruments That Will Melt Your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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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s Flash Mobs
http://billmoyer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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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ron's victory march to Europe's anthem said more than words
https://www.theg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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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m 9: War & Peace
https://www.bbc.c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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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בּרידער | "Brothers" – Y.L. Peretz’s Sardonic Rejoinder to Friedrich Schiller''s Paean to Universal Enlightenment, An die Freude (Ode to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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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ie zum Frieden 平和の交響曲'
http://www.osaka-kyo[...]
'[[大阪教育大学]] [[亀井一|亀井]]研究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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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シラー学者の内藤克彦は«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を「天空の壮麗な平原を」と訳している。第3回愛環音楽祭「公演の部」事務局発行『 « An die Freude »の詩と真実-「第九」定訳への道』2001、47、6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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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制第一高等学校寮歌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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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正宗宗務院より創価学会宛ての第35回本部幹部会における[[池田大作|池田]][[名誉会長]]のスピーチについてのお尋ね(平成2年12月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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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 하우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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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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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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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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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Freimaurerei in Bonn| 영원한 하모니를 위한 베토벤 지부]]'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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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과 폴 레비 사이의 편지 교환 (1955년 8월 3일 ~ 1955년 9월 5일)
http://www.cvce.e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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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철학(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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