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네오다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네오다다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활동한 미술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미술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명명했다.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예술 개념을 부정하고, 일상적인 재료나 폐물을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경향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이 네오다다 운동을 이끌었으며, 유럽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경향의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네오다다의 특징은 정크 아트, 콜라주, 아상블라주, 반예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팝 아트와 현대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현대 미술 - 아트 바젤
    아트 바젤은 1970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되어 마이애미 비치, 홍콩, 파리 등으로 확장된 국제적인 현대 미술 박람회로, 다양한 장르의 현대 미술 작품을 선보이며 세계 미술 시장을 선도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했지만 높은 작품 가격과 시장 과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현대 미술 - 해프닝
    해프닝은 1950년대 후반 뉴욕 예술가들이 시작한 즉흥적이고 참여적인 공연 예술 형식으로, 관객 참여를 통해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 예술 사조 -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미술 운동으로, 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인상을 담아내며 아카데미 미술에 반발,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등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회화 양식을 제시하여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예술 사조 - 추상 미술
    추상 미술은 20세기 초 사물의 재현을 벗어나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하는 미술 양식이며, 바실리 칸딘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어 다양한 운동을 거쳐 발전했고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적 추상으로 분류된다.
네오다다
기본 정보
구타이 미술 협회 로고
구타이 미술 협회 로고
종류미술 운동
영향플럭서스
비디오 아트
개념 미술
행위 예술
역사적 맥락
시기195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
장소일본
이전구타이 미술 협회
이후모노하
개념 미술
특징
특징반예술, 다다이즘 영향, 오브제 사용, 파괴 행위, 해프닝, 반미술
관련 용어반예술
주요 인물
주요 인물요시무라 마사무
시라가 가즈오
다나카 아쓰코
모토나가 사다마사
사이토 요시시게
구도 데쓰미
도미야마 가쓰야
기노시타 규
미카미 세이치
야마자키 쓰루코
오사카 에이지
간야마 아키라
마쓰자와 유타카
미즈사와 게이이치
무라이 고
나카니시 나쓰유키
요코오 다다노리
구사마 야요이
다카마쓰 지로
참고 문헌
참고 문헌"네오 다다: 일본, 1960-70년대" 요코하마 미술관, 1993년
"재건축: 일본 전위 예술, 1945-1965"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2011년
관련 정보
관련 정보구타이 미술 협회
모노하
개념 미술

2. 역사적 배경

1958년 아트 뉴즈지에 실린 특집 기사에서 미술 평론가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의 화가와 해프닝 (퍼포먼스 아트) 활동을 하던 앨런 카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짐 다인 등을 묶어 네오다다로 명명했다. 이는 네오다다의 시초로, 이후 "네오다다"라는 용어는 1960년대에 널리 퍼졌으며, 1950년대~1960년대에 이들 작가들에 의해 행해진 활동을 지칭한다.

네오다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다이즘과는 달리, 더 산업화되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진행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했다.[1] 개념이나 언어의 실험으로서 레디메이드 등을 제작했던 이전의 다다이즘과는 달리, 폐물을 선호하거나 새 제품을 폐물처럼 취급하는 등, 즉물성과 즉흥성이 더 강했다.[1] 이러한 작품은 '''정크 아트'''(쓰레기 예술, 폐물 예술)로도 불렸다.[1]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었던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네오다다 작가들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음악가, 시인, 사상가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존 케이지의 즉물적인 음향 사고와 우연성을 이용하는 활동은 네오다다에 큰 영향을 주었다.[1]

이 시기에는 폐물을 이용한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등 '반(反)예술'적인 흐름이 산업화된 유럽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1]

'''1960년 전후, 산업화된 여러 국가에서 나타난 반예술적 경향'''
국가내용
프랑스1960년 누보 레알리슴 그룹 결성. 산업 사회의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으려는 작가들이 활동.[1] (몇 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그 사상과 활동은 네오다다와 통하는 점이 있었음)[1]
독일1961년 플럭서스라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나타나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독일과 미국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1]
일본1960년 전후 반예술 운동 활발.[1]


2. 1. 다다이즘의 영향

로버트 머더웰의 ''다다 화가와 시인들''(1951)과 같은 다큐멘터리 출판물과, 1957년 이후 일부 전직 다다이스트들이 기고한 독일어 출판물은 네오다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4][5] 그러나 몇몇 원조 다다이스트들은 네오다다라는 명칭을 비난했는데, 특히 미국의 경우 작품이 새로운 발견보다는 파생적인 경향을 보이며, 원래 부르주아 미학 개념에 대한 항의였던 것에서 미적 즐거움을 찾았고, 상업주의에 굴복한다는 이유에서였다.[6]

이 흐름과 동일시되었던 많은 예술가들은 이후 다른 전문 분야로 옮겨가거나 다른 예술 운동과 동일시되었으며, 많은 경우 그들의 초기 작품의 특정 측면만이 네오다다와 관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에로 만초니의 ''Consacrazione dell'arte dell'uovo sodo'' (삶은 달걀의 예술적 축성, 1959)는 그의 엄지 지문으로 서명되었고, 그의 똥 통조림(1961)은 금의 무게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어 예술가의 개인적 창작물과 예술을 상품으로 보는 개념을 풍자했다.[7]

장 팅겔리 분수, 바젤


이와 유사한 접근 방식은 미국의 리처드 스탠키비츠의 쓰레기 조각과 같이 콜라주와 어셈블라주 제작에서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스크랩으로 만들어졌으며 슈비터스의 작업과 비교되었다. 이러한 오브제는 "버려지는 것보다 발견되는 것, 즉 ''오브제 트루베''와 같도록 처리된다."[8] 장 팅겔리의 환상적인 기계, 특히 자기 파괴적인 ''뉴욕에 대한 오마주''(1960)는 기계의 전복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콜라주와 어셈블라주와 같은 기술이 영감을 주었을지라도,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제작된 오브제에 대해 다른 용어가 사용되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액자로 된 퀼트와 페인트로 덮인 베개로 구성되어 벽에 부착된 "Bed"(1955)와 같은 작품을 "컴바인"이라고 칭했다. 아르망은 주사위와 병뚜껑의 컬렉션을 "축적"이라고 칭했고,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플라스틱으로 감싼 것을 "''푸벨''"이라고 칭했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함정 그림"(''tableaux piège'')을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초기의 작품은 "키치카의 아침 식사"(1960)였으며, 식사의 잔해를 천에 붙여 벽에 부착된 탁상에 붙였다.[9]

네덜란드에서 '텍스트 잡지'인 ''바바르베르''(1958–71)와 관련된 시인들, 특히 J. 베른레프와 K. 시퍼스는 레디메이드의 개념을 시로 확장하여, 잃어버린 거북이에 대한 신문 광고나 타자기 테스트 시트와 같은 일상적인 물건에서 시적인 함축성을 발견했다.[10] 다른 네덜란드 시인 그룹은 벨기에의 실험적인 잡지 ''가르 시빅''에 침투하여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 조각과 언어적 절차의 시연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 작가들에는 C.B. 반드라거, 한스 페르하겐, 그리고 예술가 아르만도가 포함되었다. 평론가 휴고 브렘스는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 "이러한 종류의 시에서 시인의 역할은 현실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시적이라고 인식되는 특정 조각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시인들은 예술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였다."라고 언급했다.[11]

이러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비개인성은 네덜란드 널 그룹 예술가들의 이론가인 얀 스호온호벤(1914–94)에 의해 가장 잘 표현되었다. 아르만도 또한 널 그룹에 속해 있었다. "제로(Zero)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예술가의 개인적인 역할은 최소한으로 유지된다. 제로 예술가는 현실의 일부(재료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를 선택하고 고립시켜 가장 중립적인 방식으로 전시한다. 개인적인 감정을 피하는 것이 제로에 필수적이다."[12] 이는 다시 팝 아트(Pop Art)와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te)의 일부 측면과 연결되며, 표현주의의 거부를 강조한다.

콘크리트 시와 텍스트 몽타주의 시작은 비너 그룹에서 라울 하우스만의 편지 시의 예시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13] 이러한 기법은 또한 1945년에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었던 H.N. 베르크만의 네덜란드에서의 인쇄술 실험에 빚을 지고 있을 수 있다.[14]

1958년 아트 뉴스지에 실린, 당시 폐물이나 대중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회화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와 같은 화가, '''해프닝''' 등의 퍼포먼스 아트 활동을 하던 앨런 카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짐 다인 등의 작가들을 한데 묶어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미술 평론가가 이들을 네오다다로 명명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평론가에 의해 "네오다다"라는 용어는 1960년대에 널리 퍼졌으며, 대략 1950년대~1960년대에 이들 작가들에 의해 행해진 활동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네오다다 작품의 예로는, 기성품의 사용(레디메이드)이나 대중적인 도상의 유용(아상블라주, 콜라주), 그리고 그 부조리성 등이 있다. 또한 전통적인 예술이나 미학의 개념을 부정하는 '''반예술'''적인 면도 있다. 이러한 수법과 반예술성이 새로운 다다이즘으로 간주된 요인이다. 확실히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기성품을 조합하여(combine하여) 그 위에 물감을 칠한 컴바인 페인팅 등은 레디메이드나 아상블라주 등과 형식상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네오다다는 개념이나 언어의 실험으로서의 레디메이드 등을 제작했던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다다이즘과는 시대 배경이 다르며, 보다 산업화와 대량 생산·대량 소비가 진전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 제품보다는 폐물을 선호하거나 새 제품을 폐물과 같이 취급하는 등, 보다 즉물성과 즉흥성이 강하다. 이러한 작품은 '''정크 아트'''(쓰레기 예술, 폐물 예술) 등으로도 불렸다. 반예술이면서, 환경을 가득 채웠던 폐품을 새로운 자연으로 보고, 거기에 를 찾으려 했던 네오다다를 "산업화 사회의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시각도 있다.

네오다다에 속하는 작가들 중,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존재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마운틴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학업을 이수했다. 여기에서는 미술가뿐만 아니라 음악가, 시인, 사상가 등이 가르쳤으며, 그 중에서도 교편을 잡았던 음악가 존 케이지의, 음향을 즉물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우연성을 이용하는 등의 활동으로부터 강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원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는 발상은 케이지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에르빈 슐호프의 "다섯 개의 피토레스크"에서 처음 악보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것을 케이지가 "4분 33초"로 만든 것 자체가 네오 다다의 발단이었다. 유럽에서 발안된 것이 미국식으로 개량되어, 이론화된 것이 네오다다인 것이다.

2. 2. 미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다이즘과는 달리, 네오다다는 더 산업화되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진행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했다.[1] 개념이나 언어의 실험으로서 레디메이드 등을 제작했던 이전의 다다이즘과는 달리, 네오다다는 새 제품보다는 폐물을 선호하거나 새 제품을 폐물처럼 취급하는 등, 즉물성과 즉흥성이 더 강했다.[1] 이러한 작품은 '''정크 아트'''(쓰레기 예술, 폐물 예술)로도 불렸다.[1]

네오다다 작가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었던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1] 이 학교에서는 미술가뿐만 아니라 음악가, 시인, 사상가 등이 가르쳤으며, 특히 존 케이지의 즉물적인 음향 사고와 우연성을 이용하는 활동은 네오다다에 큰 영향을 주었다.[1]

이 시기에는 폐물을 이용한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등 '반(反)예술'적인 흐름이 산업화된 유럽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1]

  • 프랑스에서는 1960년 누보 레알리슴이라는 그룹이 결성되어, 산업 사회의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으려는 작가들이 활동했다.[1] 이 그룹은 몇 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그 사상과 활동은 네오다다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1]
  • 독일에서는 1961년 플럭서스라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나타나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독일과 미국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1]
  • 일본에서도 1960년 전후로 반예술 운동이 활발해졌다.[1]
  • 1954년부터 구체 미술 협회가 액션 페인팅이나 야외 설치 미술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1]
  • 1950년대 후반부터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린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폐물 등을 이용한 작품이 많이 출품되었다.[1]
  • 1960년 아라카와 슈사쿠, 요시무라 마스노부 등 젊은 작가들이 네오 다다이즘 오르가나이저스를 결성했다.[1] 이들은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일본 전위 미술의 한 경향을 보여주었다.[1]

3. 주요 특징

1958년 아트 뉴즈지에 실린 특집 기사에서 미술 평론가 할롤드 로젠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와 같은 화가, 해프닝 등의 퍼포먼스 아트 활동을 하던 앨런 카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짐 다인 등의 작가들을 '네오다다'로 명명했다. 이후 평론가 바바라 로즈에 의해 "네오다다"라는 용어는 1960년대에 널리 퍼졌다.

네오다다 작품은 기성품(레디메이드)이나 대중적인 도상의 유용(아상블라주, 콜라주)과 그 부조리성이 특징이며, 전통적인 예술이나 미학의 개념을 부정하는 '''반예술'''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네오다다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다다이즘과는 시대적 배경이 달랐다. 산업화와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진행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무대로 하기에, 새 제품보다는 폐물을 선호하는 등 즉물성과 즉흥성이 강했다.

3. 1. 기성품과 폐품의 활용 (정크 아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기성품을 조합하여(combine하여) 그 위에 물감을 칠한 컴바인 페인팅 등은 레디메이드나 아상블라주 등과 형식상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수법과 반예술성이 새로운 다다이즘으로 간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네오다다는 개념이나 언어의 실험으로서의 레디메이드 등을 제작했던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다다이즘과는 시대적 배경이 달랐다. 산업화와 대량 생산·대량 소비가 진전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 제품보다는 폐물을 선호하거나 새 제품을 폐물과 같이 취급하는 등, 보다 즉물성과 즉흥성이 강했다. 이러한 작품은 '''정크 아트'''(쓰레기 예술, 폐물 예술) 등으로도 불렸다. 반예술이면서, 환경을 가득 채웠던 폐품을 새로운 자연으로 보고, 거기에 를 찾으려 했던 네오다다를 "산업화 사회의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시각도 있다.[9]

이와 유사한 접근 방식은 미국의 리처드 스탠키비츠의 쓰레기 조각과 같이 콜라주와 어셈블라주 제작에서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스크랩으로 만들어졌으며 슈비터스의 작업과 비교되었다. 이러한 오브제는 "버려지는 것보다 발견되는 것, 즉 ''오브제 트루베''와 같도록 처리된다."[8] 장 팅겔리의 환상적인 기계, 특히 자기 파괴적인 ''뉴욕에 대한 오마주''(1960)는 기계의 전복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3. 2. 콜라주와 아상블라주

콜라주와 어셈블라주 제작에서 리처드 스탠키비츠의 쓰레기 조각과 유사한 접근 방식이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스크랩으로 만들어졌으며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업과 비교되었다. 이러한 오브제는 "버려지는 것보다 발견되는 것, 즉 ''오브제 트루베''와 같도록 처리된다."[8] 장 팅겔리의 환상적인 기계, 특히 자기 파괴적인 ''뉴욕에 대한 오마주''(1960)는 기계의 전복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콜라주와 어셈블라주와 같은 기술이 영감을 주었을지라도,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제작된 오브제에 대해 다른 용어가 사용되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액자로 된 퀼트와 페인트로 덮인 베개로 구성되어 벽에 부착된 "Bed"(1955)와 같은 작품을 "컴바인"이라고 칭했다. 아르망은 주사위와 병뚜껑의 컬렉션을 "축적"이라고 칭했고,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플라스틱으로 감싼 것을 "''푸벨''"이라고 칭했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함정 그림"(''tableaux piège'')을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초기의 작품은 "키치카의 아침 식사"(1960)였으며, 식사의 잔해를 천에 붙여 벽에 부착된 탁상에 붙였다.[9]

3. 3. 반예술과 부조리

1958년,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와 같은 화가들이 당시 폐물이나 대중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회화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해프닝 등의 퍼포먼스 아트 활동을 하던 앨런 카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짐 다인 등의 작가들을 미술 평론가가 '네오다다'로 명명하면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네오다다"라는 용어는 1960년대에 널리 퍼졌다.

네오다다 작품은 기성품(레디메이드)이나 대중적인 도상의 유용(아상블라주, 콜라주)과 그 부조리성이 특징이며, 전통적인 예술이나 미학의 개념을 부정하는 '''반예술'''적인 면도 있다. 이러한 수법과 반예술성이 새로운 다다이즘으로 간주된 요인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컴바인 페인팅 등은 레디메이드나 아상블라주와 형식상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네오다다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다다이즘과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산업화와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진전되어 폐물이 넘쳐나던 시대의 미국을 무대로 하기에, 새 제품보다는 폐물을 선호하거나 새 제품을 폐물과 같이 취급하는 등, 보다 즉물성과 즉흥성이 강하다. 이러한 작품은 '''정크 아트'''(쓰레기 예술, 폐물 예술) 등으로도 불렸다. 반예술이면서, 환경을 가득 채웠던 폐품을 새로운 자연으로 보고, 거기에 를 찾으려 했던 네오다다를 "산업화 사회의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시각도 있다.

3. 4. 퍼포먼스와 해프닝

1958년 아트 뉴즈지에 실린, 당시 폐물이나 대중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회화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와 같은 화가, '''해프닝''' 등의 퍼포먼스 아트 활동을 하던 앨런 카프로, 클래스 올덴버그, 짐 다인 등의 작가들을 한데 묶어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미술 평론가가 이들을 네오다다로 명명한 것이 시초이다.

4. 한국의 네오 다다이즘

한국에서는 1960년대 전후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전위예술 운동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폐물을 모아 만든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반(反)예술'적인 조류가 산업화된 유럽이나 일본 등 각국에서 나타났다.


  • 프랑스에서는 쓰레기를 이용한 작품을 만들거나 산업 사회의 폐기물을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아르망, 세자르, 크리스토 등이 활동했다. 1960년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러한 작가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고, 이브 클랭,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등이 참여하여 누보 레알리슴 그룹을 결성했다.[1]
  • 독일에서는 1961년 미술가, 음악가, 시인 등이 플럭서스라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독일과 미국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1]
  • 일본에서는 1954년 구체 미술 협회가 액션 페인팅과 설치 미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60년 요미우리 앙데팡당전 출품작들을 중심으로 '반예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반예술 붐이 일어났다. 같은 해 아라카와 슈사쿠, 요시무라 마스노부 등 젊은 작가들이 네오 다다이즘 오르가나이저스를 결성했으나, 1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다. 1963년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타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유키와 하이 레드 센터를 결성하여 활동했다.[1]

4. 1. 한국 전위예술의 등장

이 시기에는 폐물을 모아 만든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반(反)예술'적인 조류가 산업화된 유럽이나 일본 등 각국에 나타났다.

  • 프랑스에서는 수집한 생 쓰레기를 투명 케이스에 넣거나, 같은 종류의 기계나 도구의 잔해를 무수히 수집하여 조합한 아르망, 고철을 모아 용접한 '아말감 조각'이나 자동차를 프레스기에 넣어 직육면체로 압축하는 '압축 조각'을 행한 세자르, 일용품 등을 포장했던 크리스토 등, 산업 사회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작가들이 활약했다. 1960년에는 이러한 경향의 작가들을 모아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한 전시회가 열렸고, 여기에 다양한 퍼포먼스를 행하던 이브 클랭,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등이 모여 ''''누보 레알리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 독일에서는 미술가나 음악가, 시인 등을 멤버로 하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나타나, 1961년에 '플럭서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 일본에서도 반예술의 움직임이 1960년 전후로 활성화되었다.
  • 1954년부터 간사이 지방에 '구체 미술 협회'가 나타나, 1950년대 후반에 걸쳐 액션 페인팅이나 야외에서의 설치 미술 등 잇따라 활동을 했다.
  • 19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무심사 공모전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폐물 등을 이용한 작품이 다수 출품되었고, 1960년에 평론가 히가시노 요시아키가 이 전시회에 출품했던 쿠도 테츠미의 작품을 평하여 '반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해 일본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반예술 붐을 일으켰다.
  • 1960년, 아라카와 슈사쿠, 요시무라 마스노부, 시노하라 우시오, 카자쿠라 쇼사쿠 (카자쿠라 타쿠미), 아카세가와 겐페이 등,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젊은 작가들이 네오 다다이즘 오르가나이저스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그 후 '네오다다'로 명칭을 간략화하여 3차례의 전시회를 실시했지만, 아라카와 슈사쿠의 제명 문제나 요시무라 마스노부의 결혼으로 인한 활동 장소의 문제 등을 겪으며 불과 1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다.
  • 그 후 멤버의 대다수가 도미(渡美)했지만,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1963년에 타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유키와 '하이 레드 센터'를 결성하여 반예술적인 퍼포먼스를 개최했고, 시노하라 우시오 등은 새로운 미국의 동향이었던 팝 아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4. 2. 주요 단체 및 활동

이 시대에는 폐물을 모아 만든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반(反)예술'적인 조류가 산업화된 유럽이나 일본 등 각국에 나타났다.

  • 프랑스에서는 이 무렵, 수집한 생 쓰레기를 투명 케이스에 넣거나, 같은 종류의 기계나 도구의 잔해를 무수히 수집하여 조합한 아르망, 고철을 모아 용접한 '아말감 조각'이나 자동차를 프레스기에 넣어 직육면체로 압축하는 '압축 조각'을 행한 세자르, 일용품 등을 포장했던 크리스토 등, 산업 사회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작가들이 활약했다. 1960년, 이러한 경향의 작가들을 모아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한 전시회가 열렸고, 여기에 다양한 퍼포먼스를 행하던 이브 클랭,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등이 모여 ''''누보 레알리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은 수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그 사상이나 활동은 네오다다와 통하는 점이 있다.
  • 독일에서는 미술가나 음악가, 시인 등을 멤버로 하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나타나, 1961년에 '플럭서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유전(流轉)·변전(變轉)하며,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퍼포먼스는 각국의 예술가를 끌어들여,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독일이나 미국 등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 일본에서도 반예술의 움직임이 1960년 전후로 활성화되었다.
  • 1954년부터 간사이 지방에 '구체 미술 협회'가 나타나, 1950년대 후반에 걸쳐 액션 페인팅이나 야외에서의 설치 미술 등 잇따라 활동을 했다. 여기에는 네오다다적인 친숙한 소재의 이용이나 해프닝, 반예술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 19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무심사 공모전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앙데팡당전 중 하나)에 폐물 등을 이용한 작품이 다수 출품되게 되었고, 1960년에 평론가 히가시노 요시아키가 이 전시회에 출품했던 쿠도 테츠미의 작품을 평하여 '반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해 일본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반예술 붐을 일으켰다.
  • 1960년, 아라카와 슈사쿠, 요시무라 마스노부, 시노하라 우시오, 카자쿠라 쇼사쿠 (카자쿠라 타쿠미), 아카세가와 겐페이 등,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젊은 작가들이 네오 다다이즘 오르가나이저스라는 조직을 결성. 그 후 '네오다다'로 명칭을 간략화하여 3차례의 전시회를 실시했지만, 아라카와 슈사쿠의 제명 문제나 요시무라 마스노부의 결혼으로 인한 활동 장소의 문제 등을 겪으며 불과 1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회 풍속 현상으로서 주간지 등 매스컴을 크게 떠들썩하게 했고, 일부 미술 평론가에게 주목받는 아나키즘적인 작품이나 구상을 많이 남겼으며, 스캔들리즘을 중시하는 일본의 전위 미술의 한 경향을 나타내는 전형이 되었다.
  • 그 후 멤버의 대다수가 도미(渡美)했지만,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1963년에 타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유키와 '하이 레드 센터'를 결성하여 반예술적인 퍼포먼스를 개최했고, 시노하라 우시오 등은 새로운 미국의 동향이었던 팝 아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5. 영향

이 시기에는 폐물을 모아 만든 예술 작품, 기존 미술의 범주를 벗어난 해프닝, 퍼포먼스, '반(反)예술'적인 조류가 산업화된 유럽이나 일본 등 각국에 나타났다.


  • 프랑스에서는 이 무렵, 수집한 생 쓰레기를 투명 케이스에 넣거나, 같은 종류의 기계나 도구의 잔해를 무수히 수집하여 조합한 아르망, 고철을 모아 용접한 '아말감 조각'이나 자동차를 프레스기에 넣어 직육면체로 압축하는 '압축 조각'을 행한 세자르, 일용품 등을 포장했던 크리스토 등, 산업 사회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미를 찾으려 하는 작가들이 활약했다. 1960년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러한 경향의 작가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고, 여기에 다양한 퍼포먼스를 행하던 이브 클랭, 장 팅겔리, 니키 드 생팔 등이 모여 '''누보 레알리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은 수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그 사상이나 활동은 네오다다와 통하는 점이 있다.
  • 독일에서는 미술가, 음악가, 시인 등을 멤버로 하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나타나, 1961년 '플럭서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유전(流轉)·변전(變轉)하며,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퍼포먼스는 각국의 예술가를 끌어들여,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독일이나 미국 등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 일본에서도 반예술의 움직임이 1960년 전후로 활성화되었다.
  • 1954년부터 간사이 지방에 '구체 미술 협회'가 나타나, 1950년대 후반에 걸쳐 액션 페인팅이나 야외에서의 설치 미술 등 잇따라 활동을 했다. 여기에는 네오다다적인 친숙한 소재의 이용이나 해프닝, 반예술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 19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무심사 공모전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앙데팡당전 중 하나)에 폐물 등을 이용한 작품이 다수 출품되었고, 1960년 평론가 히가시노 요시아키가 이 전시회에 출품했던 쿠도 테츠미의 작품을 평하여 '반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해 일본의 젊은 미술가들에게 반예술 붐을 일으켰다.
  • 1960년 아라카와 슈사쿠, 요시무라 마스노부, 시노하라 우시오, 카자쿠라 쇼사쿠 (카자쿠라 타쿠미), 아카세가와 겐페이 등,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젊은 작가들이 네오 다다이즘 오르가나이저스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그 후 '네오다다'로 명칭을 간략화하여 3차례의 전시회를 실시했지만, 아라카와 슈사쿠의 제명 문제나 요시무라 마스노부의 결혼으로 인한 활동 장소의 문제 등을 겪으며 불과 1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사회 풍속 현상으로서 주간지 등 매스컴을 크게 떠들썩하게 했고, 일부 미술 평론가에게 주목받는 아나키즘적인 작품이나 구상을 많이 남겼으며, 스캔들리즘을 중시하는 일본의 전위 미술의 한 경향을 나타내는 전형이 되었다.
  • 그 후 멤버의 대다수가 도미(渡美)했지만, 아카세가와 겐페이1963년에 타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츠유키와 '하이 레드 센터'를 결성하여 반예술적인 퍼포먼스를 개최했고, 시노하라 우시오 등은 새로운 미국의 동향이었던 팝 아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네오다다와 반예술 운동은 현재까지 많은 퍼포먼스 아트와 예술 표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곧 등장하는 팝 아트에 기법적, 이론적인 영향을 주었다.

6. 대표적인 작가

작가
요제프 보이스
재스퍼 존스
앨런 캐프로
오노 요코
백남준
데이비드 우다드
아카세가와 겐페이
아르망
야프 블롱크
리 본테쿠
조지 브레히트
존 케이지
세자르
존 체임벌린
크리스토
머스 커닝햄
짐 다인
자크 알베르
딕 히긴스
코미사르 훌러
이브 클랭
앨리슨 놀스
조지 마키우나스
피에로 만초니
클래스 올덴버그
네오다다 조직자들
로빈 페이지
로버트 라우센버그
니키 드 생팔
시노하라 우시오
다니엘 스포에리
리처드 스탄키에비츠
장 팅겔리
자크 빌레글레
볼프 포스텔
요시무라 마사노부


참조

[1] 서적 Pop art : the independent group to Neo pop, 1952-90 Phaidon 2012
[2] 간행물 A Dictiona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3] 문서 Craft
[4] 서적 The Dada Painters and Poets: An Antholog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12-12
[5] 문서 Brill
[6] 서적 Dada and After: Extremist Modernism and English Literature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niversity 1983
[7] 뉴스 Merde d'artiste: not exactly what it says on the tin http://arts.guardian[...] 2007-06-13
[8] 간행물 A Dictionary of Modern Sculpture London 1962
[9] 서적 The Taste of Art: Cooking, Food, and Counterculture in Contemporary Practic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Arkansas 2017
[10] 간행물 The Conceptual Poetic of K. Schippers: the aesthetic implications of literary readymades
[11] 서적 Contemporary Poetry of the Low Countries Flemish Netherlands Foundation 1995
[12] 서적 Dutch Interior: Postwar Poetry of the Netherlands and Flander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1984
[13] 서적 Avant-garde/Neo-avant-garde https://books.google[...] Amsterdam 2005
[14] 웹사이트 Rediscovering the Lost Art of the Typewriter https://designobserv[...] 2014-05-28
[15] 간행물 A Dictiona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