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민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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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민주국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자, 대만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수립한 짧은 기간 존속한 국가이다. 청나라 관료 당경숭을 총통으로 추대하고 황호기를 국기로 제정했으며, 독립 선언과 함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략으로 5개월 만에 붕괴되었고, 이후 대만은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대만민주국은 대만 독립 운동과 항일 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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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민주국 - 당경숭
청나라 관료 당경숭은 진사 급제 후 청불 전쟁에 공을 세웠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대만 민주국을 세우고 초대 총통이 되었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여 망명하였다. - 대만민주국 - 류융푸
류융푸는 중국에서 태어나 흑기군을 조직하여 베트남에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청일 전쟁 이후에는 타이완에서 일본에 저항했으며, 타이난 지명과 초등학교에 이름이 사용될 정도로 존경받는 군인이다. - 1895년 대만 - 당경숭
청나라 관료 당경숭은 진사 급제 후 청불 전쟁에 공을 세웠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대만 민주국을 세우고 초대 총통이 되었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여 망명하였다. - 1895년 대만 - 류융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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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민주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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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한국어) | 대만 민주국 |
국명 (중국어 간체) | 台湾民主国 |
국명 (중국어 정체) | 臺灣民主國 |
국명 (표준 중국어) | Táiwān Mínzhǔguó |
국명 (대만어) | Tâi-oân Bîn-chú-kok |
국명 (하카어) | Thòi-vân Mìn-chú-koet |
국명 (영어) | Republic of Formosa |
위치 | 섬 타이완 |
존속 기간 | 1895년 |
지위 | 미승인 국가 |
시대 | 제국주의 시대 |
건국 사건 | 청나라로부터 독립 선언 |
건국 날짜 | 1895년 5월 23일 |
멸망 사건 | 일본 제국에 점령 |
멸망 날짜 | 1895년 10월 21일 |
수도 | 타이베이시(1895년 5월 ~ 6월) 타이난시(1895년 6월 ~ 10월) |
공용어 | 표준 중국어, 대만어, 하카어 |
정부 형태 |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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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및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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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
대통령 | 당경숭 (1895년) |
실질적인 지도자 | 류융푸 (1895년) |
통계 | |
연도 | 1895년 |
통화 | 청나라 냥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타이완 |
이후 국가 |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던 타이완 |
현재 | |
현재 국가 | 중화민국 (타이완) |
2. 역사
대만은 청나라에 병합된 후 복건성 관할이었다. 1884년 청불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대만 북부 석탄 광산에 주목, 대만을 거점으로 중국 화남 지방을 통제하려 하자, 청은 유명전을 파견했다. 1885년 복건대만성을 설치, 유명전을 순무로 임명해 대만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대만 주민들은 이에 항거했으나, 청은 당경숭에게 본토 철수를 명령했다.
1895년 5월 25일, 구봉갑 등은 당경숭에게 항일 지휘를 요청하며 '대만민주국'을 선포하고 당경숭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당경숭은 전직 관리들로 행정 조직을 구성하고, 유영복을 민주대장군, 구봉갑을 의용군통령으로 임명, 일본군 상륙에 대비했다.
5월 10일, 일본은 가바야마 스게노리를 대만 총독 겸 정벌 전권대표로 임명, 대만 접수를 시도했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무력 충돌 끝에 대만민주국은 진압되었고, 1945년까지 대만일치시기가 시작되었다.
2. 1. 대만민주국 성립 배경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했다. 이 소식이 대만에 전해지자, 주민들은 '청나라의 매국행위'에 항의하며 일본에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대만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것에 항거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기한 안에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기 위해 대만 순무 당경숭에게 철수하여 본토로 돌아오도록 명령했다.이에 신사(紳士) 구봉갑(丘逢甲)은 천여 명을 이끌고 순무 청사로 가 당경숭에게 항일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경숭도 이에 응하기로 하여, 구봉갑 등은 1895년 5월 25일 '대만민주국'을 선포하고 당경숭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6]

대만 민주국은 국기를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호랑이 문양으로 정하고, 은색 국새를 제작하고, 지폐와 우표를 발행했다.[10]
2. 2. 대만민주국의 성립과 활동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이 소식이 대만에 전해지자 주민들은 청나라 조정의 결정에 항의하며 일본에 대한 저항을 결의했다. 1895년 5월 25일, 구봉갑 등은 '대만민주국'을 선포하고 당경숭을 총통으로 추대하였다.[6]대만민주국은 당경숭을 총통, 구봉갑을 의용군 통령, 유영복을 민주대장군으로 추대하고, 청색 바탕에 황색 호랑이가 그려진 '황호기'를 국기로 제정하였다.[19] 또한, '영청'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행정 및 입법 기관을 설치하여 근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려 노력했다. 지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포고령을 섬 주민들에게 발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20]
다음은 대만민주국 성립 전후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날짜 | 사건 |
---|---|
5월 23일 | 대만 민주국 자주 선언 발표 |
5월 25일 | 당경숭이 대만 민주국 총통에 취임, 대만 민주국 정식 성립. 영청으로 개원 |
5월 29일 | 일본군, 아오디(현재의 신베이시 궁랴오 구)에 상륙 |
5월 30일 | 당경숭, 민주국 부대에 루이팡, 룽탄, 둬 및 지룽 스치우링 포대 방어 명령 |
6월 1일 | 청나라 대표 이경방과 일본 대표 가바야마에 의해 대만 할양 성립. 민주국 의장 임유원 샤먼으로 도망 |
6월 3일 | 스치우링 포대와 지룽 함락, 민주국 군 붕괴 |
6월 4일 | 당경숭, 구봉갑이 공금을 횡령하여 중국으로 도망.[21] 제1공화국 붕괴 |
6월 6일 | 민주국 군에 의해 타이베이 약탈. 고현영 등의 상인이 일본 통치를 승인 |
6월 11일 | 일본군 타이베이 점령 |
6월 17일 | 일본에 의한 시정 개시 |
6월 22일 | 일본군 신주 점령 |
6월 26일 | 유영복이 대만 민주국 총통 취임 |
2. 3. 일본의 침략과 대만민주국의 붕괴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이 소식에 대만 주민들은 청나라의 매국행위에 항의하며 일본과의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기한 내에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기 위해 대만 순무 당경숭에게 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이에 구봉갑 등은 1895년 5월 25일 '대만민주국'을 선포하고 당경숭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대만민주국은 각 부와 지방 관리를 대부분 전직 관리로 임명하고, 군사 조직을 재편하여 유영복을 민주대장군, 구봉갑을 의용군통령으로 임명하여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였다.
일본은 5월 10일 육군대장 가바야마 스게노리를 대만 초대 총독 겸 대만 정벌 전권대표로 임명하여 대만을 접수하려 하였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대만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대만민주국은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로써 대만섬은 1945년까지 대만일치시기를 맞게 되었다.[6]
일본군은 1895년 5월 29일 대만 북부 해안의 지룽 근처에 상륙하여 5개월에 걸친 작전 끝에 타이난에 도달했다. 6월 4일 밤, 일본군이 지룽을 점령하자 당경숭 총통과 추사오 총사령관은 단수이로 도주했고, 6월 6일 저녁 본토로 건너갔다. 일본군은 그 직후 타이베이에 입성했다.[13]
당경숭의 도주 후, 류융푸는 타이난에서 민주국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으나 총통직을 거부하고 일본군에 대한 저항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14] 10월 21일 타이난 함락으로 일본 점령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고, 대만의 50년 간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었다.[15]
3. 대만민주국의 대총통
No. | 사진 | 이름 | 출생지 | 재임 기간 | 날짜 | |
---|---|---|---|---|---|---|
1 | ![]() | 탕징쑹 | 구이린, 광시, 중국 | 1895년 5월 25일 | 1895년 6월 5일 | align=center | |
2 | ![]() | 류융푸 | 친저우, 광시, 중국 | 1895년 6월 5일 | 1895년 10월 21일 | align=center | |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1895년 5월 25일 독립 기념식을 실시하여 탕징쑹을 총통(일본어에서는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21]
5월 29일, 일본군이 신베이시 궁랴오 구에 상륙, 6월 3일에는 지룽을 점령당했다. 다음 날인 6월 4일, 탕징쑹은 독일 상선 아서(''Arthur'') 호를 타고 샤먼으로 도망쳤다.[21]
탕징쑹이 도망친 후, 타이난에서 대장군 류융푸가 제2대 대만민주국 총통으로 선임되었다. 류융푸는 취임 후 3개월 동안 저항을 계속했지만, 10월 19일 대만을 떠났고, 10월 21일 일본군이 타이난, 안핑을 함락시켰다.
4. 대만민주국의 주요 관료
1895년 청일 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한 청나라 관리들과 현지 사신들이 중심이 되어 대만민주국이 세워졌다. 주요 관료들은 청나라 출신 관리들과 대만 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었다.[19]
대만민주국의 주요 관료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총통 | 탕징쑹 | 청나라 출신 관리, 일본어에서는 대통령 |
부총통 | 추펑자 | 객가 출신, 린웨이위안 사퇴 후 부총통으로 추정 |
군무대신 | 이병서 | |
내무대신 | 유명진 | |
외무대신 | 진계동 | |
대장군 | 유영복 | 객가 출신, 과거 흑기군을 이끌고 베트남에서 프랑스군을 격파[19] |
단련사 | 구봉갑 | |
의용군 대통령 | 오탕흥 | |
유세사 | 요문동 | |
의원 의장 | 린웨이위안 | 사퇴 |
의원 의원 | 진운림, 홍문광, 백기상 | |
타이베이 지부(台北知府) | 유홍, 여경숭 | |
단수이 현지사 | 릉여증 | |
신주 현지사 | 왕국서 | |
보리사청 통판 | 온배화 | |
타이완 현지사 | 사만도 | |
대리 안핑 현지사 겸 호부도인 | 충만 | |
윈린 현지사 | 라여택 | |
펑산 현지사 | 노자삭 | |
지룽청 동지 | 방조음 | |
난야청 통판 | 송유소 | |
먀오리 현지사 | {{lang|zh|이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