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장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장군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된 군사 관련 관직명이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군 사령관의 관직으로, 무반의 품계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한나라 시기에는 상설 관직으로 자리 잡았으나, 후한 시대에는 외척 세력의 권력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특정 군대를 지휘하는 쇼군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칭호 - 관찰사
    관찰사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방 행정 감찰관직으로, 당나라 채방처치사에서 시작되어 관찰처치사로 개칭되며 명칭이 유래되었고, 한국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정착하여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문관직으로 지방 행정 전반에 걸쳐 권한을 행사했다.
  • 일본의 칭호 - 공경
    공경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하여 일본 궁중 관리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율령 체제에서 대신들을 포함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창설되면서 폐지되었다.
  • 고려의 관직과 칭호 - 현감
    현감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현을 다스리던 지방관을 지칭하며, 조선 시대에는 종6품의 외관직으로 사법, 행정,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 고려의 관직과 칭호 - 관찰사
    관찰사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방 행정 감찰관직으로, 당나라 채방처치사에서 시작되어 관찰처치사로 개칭되며 명칭이 유래되었고, 한국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정착하여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문관직으로 지방 행정 전반에 걸쳐 권한을 행사했다.
  • 중국의 관직과 칭호 - 관찰사
    관찰사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지방 행정 감찰관직으로, 당나라 채방처치사에서 시작되어 관찰처치사로 개칭되며 명칭이 유래되었고, 한국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정착하여 각 도에 파견된 종2품 문관직으로 지방 행정 전반에 걸쳐 권한을 행사했다.
  • 중국의 관직과 칭호 - 태위
    태위는 동아시아의 삼공 중 하나로, 주로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었으며 시대와 국가에 따라 역할과 권한에 차이가 있었다.
대장군
대장군 (大將軍)
개요
직책군사
역할군대의 최고 지휘관
특정 군사 작전의 총책임자
역사적 역할 및 의미
중국전국 시대부터 존재
전쟁 시 임명되는 최고 군사 지휘관
한국고구려 시대: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 관직
고려 시대: 도병마사의 최고 책임자
조선 시대: 종2품 무관의 품계, 오군영의 최고 지휘관
특징
지휘 범위전군 또는 특정 전역
임명왕명에 의해 임명
권한군사 작전의 모든 결정 권한
한국의 대장군
고구려을파소, 고연무
고려강감찬, 척준경, 최영
조선이성계, 신립, 권율
기타
관련 직책상장군, 원수, 도원수, 병마절도사

2. 한국의 대장군

고려 때 중앙군 사령관의 관직으로 무반의 두 번째 품계였으며 종3품이었다. 2군 6위에 1인씩 8명이 기본 편제였고, 각 군의 상장군과 함께 중방의 구성원이었다.[1]

2. 1. 고려 시대

고려 때 중앙군 사령관의 관직명으로 무반의 두 번째 품계였으며 종3품이었다.[1]

2군(二軍) 6위(六衛)에 1인씩 8명이 기본 편제였고, 각 군의 상장군과 함께 중방의 구성원이었다.[1] 대장군은 2군 6위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1]

군명배치
응양군1령
용호군2령
좌우위보승 10령, 정용 12령
신호위보승 5령, 정용 1령
흥위위보승 5령, 정용 7령
금오위정용 6령, 역령 1령
천우위상령 1령, 해령 1령
감문위1령


3. 중국의 대장군

전한의 대장군 한신.


고대 중국에서 대장군은 각 장군 가운데 최상위에 위치한 자를 의미하는 관직으로, 옛날에는 '''상장군'''으로 불렸다. 전국시대에 이미 그 명칭이 등장했으며, 진나라백기, 송의, 항우 등이 임시 통수권자를 맡았다. 진승 · 오광의 난 당시 진여가 이 직책에 임명되기도 했다.

전한 초기에는 비상설직이었으나, 초한전쟁 시기 한신이 대장군으로 임명된 이후 흉노 침공이나 반란 진압 등 비상시에 임시로 정부 요인이 군 통수권자를 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무제는 대장군 직을 상설 관직으로 만들었고, 위청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무제 사후 외척 세력이 이 직책을 맡아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한 시대에도 이어져 황제의 외척 집단과 환관 사이의 정권 다툼이 후한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삼국 시대 이후에도 대장군직은 존재했지만, 그 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오나라에서는 '''상대장군'''을 설치했는데, 이는 대장군보다 상위의 관직이었다. 북주수나라에서도 대장군직을 두었다.

삼국지연의』나 『수호전』 등의 소설에서는 「오호대장군」이라는 가공의 칭호가 등장한다.

3. 1. 고대 ~ 한나라

고대 중국에서 대장군은 각 장군 가운데서 최상위에 위치한 자를 의미하는 관직이었다.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은데, 이미 전국시대에 그 명칭이 등장하고 있으며, 한나라 이전까지 최고 군사 지휘관의 칭호는 상장군(上將軍)이었다. 진나라백기(白起)나 송의(宋義), 항우(項羽)가 지휘한 주요 전투에서의 임시 통수권자였다. 진승 · 오광의 난 당시, 진승을 배신하고 장이(張耳)와 함께 반란군 진압에 나섰으며 진여(陳余)가 조왕(趙王) 무신(武臣)에 의해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전한 초기까지 비상설직이었던 것이 초한전쟁(楚漢戰爭) 시기 한중 땅에서 유방에 의해 대장군으로 임명된 한신(韓信) 이후로는 흉노의 침공이나 반란 진압 때와 같은 비상시에 임시로 정부 요인을 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군 통수권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무제는 이 대장군 직책을 아예 상설 관직으로 만들었고, 이 시기의 대장군으로서 흉노와의 전쟁에 큰 공을 세웠던 위청(衛靑)이 있다. 그러나 무제 사후 외척의 권력이 강해지고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 외척 세력의 수장이 이 직책을 맡게 되면서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후한이 성립된 뒤에도 광무제에서 명제, 장제 등 세 명의 황제가 통치했던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황제의 외척 집단과 환관 사이의 정권 싸움이 후한의 정치를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어 결과적으로는 후한이 멸망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3. 2. 삼국 시대 이후

삼국 시대 이후에도 대장군직은 존재했지만, 그 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보통 대사마보다 1계급 아래로 인정했으며 대사마가 되기 전에 거치는 관직이 대장군이었다. 삼국 모두 과거 동한의 체제를 이어받았지만, 위나라의 경우 청룡 원년(233년)에 사마의가 대장군직을 가지고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사마의는 대장군을 사임하면서 자신의 숙부 사마부(司馬孚)를 태위에 앉히고 대장군의 지위를 태위 아래에 두었다. 오나라에는 상대장군(上大將軍)과 대장군의 두 직책이 있었다. 정봉의 최종 계급도 대장군이었다. 그밖에 삼국 시대에는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남중대장군(南中大將軍),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등이 존재했으며, 명호 앞에 대(大) 자가 붙어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등이라 불리는 지위도 있었는데, 위계는 변하지 않았다.[1]

당나라에서 대장군은 16위(衛)의 장관 가운데 하나로서 위계는 상장군의 아래에 있었다. 당 초기의 부병제(府兵制)에서 상장군과 대장군이 각 위마다 한 사람, 장군은 두 사람이 설치되어 직사관(職事官)으로서 군대를 지휘하였다.[1]

4. 일본의 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세이이타이쇼군.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메이지 유신 이후, 구 일본군에서 최상위 관직은 육군 참모총장, 해군 군령부총장이었고, 법적으로 정식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일본 자위대에서는 통합막료장이 있어 대장군이라는 명칭은 남아있지 않다.

4. 1. 고대 ~ 중세

속일본기에는 시모쓰케노 고마로([1])나 오토모노 야스마로([2])를 대장군으로 지칭한 사례가 등장한다. 하야토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했다는 오토모노 타비토([3]), 진키 원년(724년)에 무쓰노다이죠노스케(陸奥大掾佐)가 살해되었을 때의 후지와라노 우마카이([4]),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을 평정했다는 오노노 아즈마히토([5])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요로율령에는 군을 셋으로 편성하고(삼군) 그 통솔을 위해 대장군 한 명을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6] 실제로는 3개 군이 한꺼번에 편성되었던 적은 없다.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태평양 방면으로 파병했던 세이토군(征東軍)과 세이이군(征夷軍), 동해 방면으로 파병했던 세이테키군(征狄軍) 즉 진테키군(鎮狄軍)의 2군 편성에서 세이이쇼군(征夷将軍)과 진테키쇼군(鎮狄将軍)이 함께 임명되었지만 이들을 통솔하기 위한 다이쇼군의 임명은 없었으며, 1개 군을 지휘하는 쇼군도 대규모 군을 통솔한다는 위대한 쇼군으로서의 의미로 다이쇼군을 칭했다.[7] 후에 대다수의 무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없이 사적으로 다이쇼군을 칭하는 경우도 발견된다.[8] 또한 조큐의 난 당시 교토로 진격했던 막부군의 여러 무장들도 각기 도산도다이쇼군(東山道大将軍), 호쿠리쿠도다이쇼군(北陸道大将軍) 등을 칭한 것이 보이며, 3위(位) 이상의 구교(公卿)나 황족이 막부의 수장인 쇼군으로 임명되었던 시기에도 군직의 이름을 다이쇼군이라 칭한 사례가 보인다.[9]

그러나 휘하 쇼군이 없는 다이쇼군이라는 지위는 막부의 주재자를 가리킨다는 성격이 보다 강했으며, 세이이타이쇼군 이외에는 차츰 쓰이지도 않게 되었다. 에도 시대 말기에 세이토다이쇼군(征討大将軍)이 임명되기는 했지만,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4. 2. 근세 ~ 현대

속일본기에는 시모쓰케노 고마로[1]나 오토모노 야스마로[2]를 대장군으로 지칭한 사례가 등장하며, 하야토(隼人)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했다는 오토모노 다비토[3], 진키(神亀) 원년(724년)에 무쓰노다이죠노스케(陸奥大掾佐)가 살해되었을 때의 후지와라노 우마카이[4],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을 평정했다는 오노노 아즈마히토[5]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요로율령(養老律令)에는 군을 셋으로 편성하고(삼군) 그 통솔을 위해 대장군 한 명을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6] 실제로는 3개 군이 한꺼번에 편성되었던 적은 없다. 에미시(蝦夷)를 정벌하기 위해 태평양(太平洋) 방면으로 파병했던 세이토군(征東軍)과 세이이군(征夷軍), 동해 방면으로 파병했던 세이테키군(征狄軍) 즉 진테키군(鎮狄軍)의 2군 편성에서 세이이쇼군(征夷将軍)과 진테키쇼군(鎮狄将軍)이 함께 임명되었지만 이들을 통솔하기 위한 다이쇼군의 임명은 없었으며, 1개 군을 지휘하는 쇼군도 대규모 군을 통솔한다는 위대한 쇼군으로서의 의미로 다이쇼군을 칭했다.[7] 후에 대다수의 무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초기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없이 사적으로 다이쇼군을 칭하는 경우도 발견된다.[8] 또한 조큐의 난(承久の乱) 당시 교토(京都)로 진격했던 막부군의 여러 무장들도 각기 도산도다이쇼군(東山道大将軍), 호쿠리쿠도다이쇼군(北陸道大将軍) 등을 칭한 것이 보이며, 3위(位) 이상의 구교(公卿)나 황족이 막부의 수장인 쇼군으로 임명되었던 시기에도 군직의 이름을 다이쇼군이라 칭한 사례가 보인다.[9]

그러나 휘하 쇼군이 없는 다이쇼군이라는 지위는 막부의 주재자를 가리킨다는 성격이 보다 강했으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이외에는 차츰 쓰이지도 않게 되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말기에 세이토다이쇼군(征討大将軍)이 임명되기는 했지만,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구 일본군대에 있어 최상위 관직은 육군에 참모총장(参謀総長), 해군에는 군령부(軍令部)총장(軍令部総長)이 있었고, 법적으로 정식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일본의 자위대(自衛隊)에서는 통합막료장(統合幕僚長)이 있어 대장군이라는 명칭은 남아있지 않다.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715-01-26 #和銅2年12月20日, Assuming Japanese date system, converting to approximate Gregorian date
[2] 서적 続日本紀 719-05-22 #和銅7年5月1日, Assuming Japanese date system, converting to approximate Gregorian date
[3] 서적 続日本紀 720-04-12 #養老4年3月4日, Assuming Japanese date system, converting to approximate Gregorian date
[4] 서적 続日本紀 724-05-14 #神亀元年4月7日, Assuming Japanese date system, converting to approximate Gregorian date
[5] 서적 続日本紀 743-10-04 #天平12年9月3日, Assuming Japanese date system, converting to approximate Gregorian date
[6] 서적 軍防令 岩波書店 1994
[7] 문서
[8] 문서 平家物語
[9]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