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는 1960년 장면 정부가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건축, 토목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국토 개발 사업에 투입했다.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국토건설단으로 개편되었으며, 병역 미필자를 대상으로 강제 동원 논란이 있었다. 국토건설본부는 장면, 장준하, 조성근 등이 본부장을 역임했으며, 댐, 도로 건설 등 국토 개발 사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어 민주주의 후퇴에 기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1년 설치 - 만포시
    만포시는 자강도 중북부 압록강 연안에 위치하여 중국 지안시와 마주보는 교통 요충지로, 제재업과 목재 가공업이 발달했으며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다.
  • 1961년 설치 - 태장동
    태장동은 강원도 원주시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태장동, 봉산동, 가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학교와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원주 태장동 왕녀복란태실비가 위치해 있다.
  • 1962년 폐지 -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지역에 설치했던 식민지 및 보호령을 포괄하는 용어이며,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를 포함하고, 튀니지와 모로코는 1956년에, 알제리는 1962년에 독립했다.
  • 1962년 폐지 - 대한민국 국토건설청
    대한민국 국토건설청은 1961년 경제기획원 외청으로 설치되어 국토 건설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 기관이었으나, 1962년 건설부 신설로 폐지되었다.
  • 장면 - 정원식
    정원식은 대한민국의 교육학자, 대학교수, 정무직공무원, 정치인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및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 논란과 대학생 계란 투척 사건을 겪었고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낙선하기도 했다.
  • 장면 - 5·16 군사정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은 제2공화국의 불안정과 혼란을 배경으로, 부패한 민정부 타도와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2. 설립 배경

2. 1. 사회적 배경

장면은 한국 전쟁 이후 고학력자들의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연구, 마련했고, 1960년 8월에는 국토건설사업을 직접 기획, 발의하였다. 일제강점기6.25 전쟁, 전쟁 종료 이후의 황폐화된 산업 시설과 도로, 철도, 파괴된 농림과 조경 등을 복구하면서 동시에 청년 일자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면은 1960년 8월 18일 국토건설 사업 계획을 발표, 고졸 혹은 대졸 이상의 당시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건축, 토목 등의 기술을 2주~4주간 교육한 뒤 국토건설요원으로 각지에 배치하여 국토개발 사업과 건축, 토목, 조경, 도로 공사 등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다.

2. 1. 1. 고학력 청년 실업 문제

장면은 한국 전쟁 이후 고학력자들의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연구, 마련했고, 1960년 8월에는 국토건설사업을 직접 기획, 발의하였다. 일제강점기6.25 전쟁, 전쟁 종료 이후의 황폐화된 산업 시설과 도로, 철도, 파괴된 농림과 조경 등을 복구하면서 동시에 청년 일자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면은 1960년 8월 18일 국토건설 사업 계획을 발표, 고졸 혹은 대졸 이상의 당시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건축, 토목 등의 기술을 2주~4주간 교육한 뒤 국토건설요원으로 각지에 배치하여 국토개발 사업과 건축, 토목, 조경, 도로 공사 등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다.

2. 2. 장면 정부의 구상

2. 2. 1. 국토건설사업 계획 발표 (1960년 8월)

1960년 8월, 장면 총리는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의 주요 목표는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인 인력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이들을 국가 발전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산지와 농촌 지역의 도로를 포장한다.
  • 낡은 가옥을 개량한다.


국토건설사업의 기획 및 집행은 국무총리가 직접 보좌하며, 사업 전반을 통괄하고 조정하는 사무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장면 총리가 직접 단장을 겸임하였고, 장준하가 기획부장, 신응균이 관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사회홍보부장 겸 조사연구부장으로는 서울대학교 토목과 이만갑 교수가, 기술지원부장에는 토목공학자 최형열이 영입되었다. 본부 간사에는 유익형, 박경수, 강사진으로는 장면, 정헌주, 장준하, 주요한, 함석헌 등이 활동하였다.

사업 참여자들은 입소, 기숙, 등하교 등 다양한 형태로 교육을 받았으며, 수료 후에는 '국토건설요원'이라는 칭호와 함께 준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와 급여를 받았다.

2. 2. 2. 장준하와 협력

1960년 8월 장면은 장준하와 그의 국제연구소 멤버들에게 국토건설사업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장준하장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2] 본부장은 장면총리가 겸임했고 장준하는 수석부장으로서 본부장 대리 구실을하는 기획부장을 맡았다.[3] 그밖에 질서와 규율을 담당하는 관리국장으로는 국방부 차관보 신응균을 임명했다. 이후 주요한, 정헌주, 함석헌 등을 강사진으로 초빙하여 기술 이론, 실습 교육 외에 정신교육도 병용하여 실시했다. 사실상의 국토건설단의 책임자는 장준하, 주요한, 신응균이었지만 장면은 이들에게 수시로 운영 결과와 강의 훈련 내용에 대한 보고와 결재를 직접 받았다.

2. 3. 설치 근거 및 소관 업무

1960년 11월 28일 '국토건설본부설치규정'(국무원령 제147호)이 제정되었다. 1960년 12월 28일에는 '국토건설본부규정'이 제정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18일에는 '국토건설단 설치법'(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 제779호)이 제정되었다.

2. 3. 1. 국토건설본부 설치 규정 (1960년 11월)

1960년 11월 28일 '국토건설본부설치규정'(국무원령 제147호)이 제정되었다. 1960년 12월 28일에는 '국토건설본부규정'이 제정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18일에는 '국토건설단 설치법'(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 제779호)이 제정되었다.

2. 3. 2. 국토건설단 설치법 (1961년 12월)

1961년 12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제779호)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60년 11월 28일 제정된 '국토건설본부설치규정'(국무원령 제147호)과 1960년 12월 28일 제정된 '국토건설본부규정'을 대체하여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의 설치 근거를 보다 명확히 하고 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설립 및 조직

1960년 11월 28일 대규모 공공사업인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 댐, 발전소, 도로건설 등을 목표로 하는 연 예산 400억 환 규모의 계획을 발표했다.[2] 장면은 바로 국토건설본부를 창단하여 초대 본부장에 취임하여 국토개발사업을 추진하였고, 대졸 미취업자를 국토건설본부 요원으로 채용하여 전국 시군에 파견하여 건설사업을 추진하였다.

1960년 12월 28일에는 국무원법으로 국토건설본부 규정을 제정하고 국토건설본부를 대한민국 국무원의 직할 교육기관으로 편성하였다.


  • 1960년 11월 28일 국토건설사업 발표, 중앙청 홀에서 국토건설본부 발대식(본부장 장면, 각 부장은 외부인사로 영입 충원)
  • 1960년 12월 28일 정부 국무원령 제147호로 '국토건설본부설치규정'공포.
  • 1960년 12월 28일 '국토건설본부규정'에 의해 국무원 소속으로 설치
  • 1961년 1월 27일 국토건설단 관계관 회의(국무총리 장면 주관)
  • 1961년 2월 10일 설치령을 국무원령 제149호로 개정, 협조기관을 지방과 중앙에 설치
  • 1961년 2월 27일 10시 중앙청 홀에서 국토건설사업 추진요원 연합 종강식(1차 채용요원 사무직과 기술직을 포함한 2061명)
  • 주요한, 정헌주, 함석헌 등을 강사진으로 초빙하여 기술교육 외에 정신교육도 병행하여 실시했다.
  • 1961년 4월 10일 국토건설사업특별회계법 제정
  • 1961년 4월 18일 장면은 매카나기의 후임으로 주한미국대사에 부임해온 마셜 그린을 면담했다. 면담에서 마셜 그린은 한국의 국토건설사업에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 지원해주기로 약속하였다.[5]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12호[6]로 설치규정을 변경하고, 5월 20일 국토건설사업계획을 계속 추진한다고 발표하였다. 1961년 11월 30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의 건'을 상신하였다.[7] 1961년 12월 18일, 장면에 의해 창립될 당시 국토건설본부였던 명칭은 박정희 등이 병역미필자를 구제하고 국토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779호)에 의해 국토건설단으로 변경되었다.[7] 이는 1961년 12월 1일 제100회 정부 내각회의에서 공포가 의결되어 법률 제807호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국토건설단 설치법'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국토건설단은 1961년 5월 28일에 2기생, 8월 28일에 3기생, 12월 18일에 4기생을 수료시켰다.

국토건설본부(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는 기획부, 관리부, 기술지원부, 사회홍보부, 훈련부, 지방지부로 구성되었다. 지방지부는 각 도 지부와 각 시,군,구 지부로 나뉘었다.

국토건설단(1961년 12월 18일 ~ 1962년 2월 9일)은 본부와 지단으로 구성되었다. 지단은 제1지단, 제2지단, 제3지단, 제4지단으로 나뉘었고, 각 지단 예하에 분단이 있었으며, 분단은 다시 건설대와 근무대로 구성되었다.

  • 국토건설본부 조직 (1960.11.28 - 1961.12.18)
  • * 기획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관리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기술지원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사회홍보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훈련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지방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각 도 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각 시,군,구 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국토건설단 조직 (1961.12.18 - 1962.2.9)
  • * 본부 (1961.12.18 - 1962.2.9)
  • * 지단 (1961.12.18 - 1962.2.9)
  • ** 제1지단 (1961.12.18 - 1962.2.9)
  • ** 제2지단 (1961.12.18 - 1962.2.9)
  • ** 제3지단 (1961.12.18 - 1962.2.9)
  • ** 제4지단 (1961.12.18 - 1962.2.9)

분단 (1961.12.18 - 1962.2.9), 각 지단 예하
* 건설대 (1961.12.18 - 1962.2.9)
* 근무대 (1961.12.18 - 1962.2.9)

3. 1. 국토건설본부 설립 (1960년 11월)

1960년 11월 28일 대규모 공공사업인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 댐, 발전소, 도로건설 등을 목표로 하는 연 예산 400억 환 규모의 계획을 발표했다.[2] 장면은 바로 국토건설본부를 창단하여 초대 본부장에 취임하여 국토개발사업을 추진하였고, 대졸 미취업자를 국토건설본부 요원으로 채용하여 전국 시군에 파견하여 건설사업을 추진하였다.

1960년 12월 28일에는 국무원법으로 국토건설본부 규정을 제정하고 국토건설본부를 대한민국 국무원의 직할 교육기관으로 편성하였다.

  • 1960년 11월 28일 국토건설사업 발표, 중앙청 홀에서 국토건설본부 발대식(본부장 장면, 각 부장은 외부인사로 영입 충원)
  • 1960년 12월 28일 정부 국무원령 제147호로 '국토건설본부설치규정'공포.
  • 1960년 12월 28일 '국토건설본부규정'에 의해 국무원 소속으로 설치
  • 1961년 1월 27일 국토건설단 관계관 회의(국무총리 장면 주관)
  • 1961년 2월 10일 설치령을 국무원령 제149호로 개정, 협조기관을 지방과 중앙에 설치
  • 1961년 2월 27일 10시 중앙청 홀에서 국토건설사업 추진요원 연합 종강식(1차 채용요원 사무직과 기술직을 포함한 2061명)
  • 주요한, 정헌주, 함석헌 등을 강사진으로 초빙하여 기술교육 외에 정신교육도 병행하여 실시했다.
  • 1961년 4월 10일 국토건설사업특별회계법 제정
  • 1961년 4월 18일 장면은 매카나기의 후임으로 주한미국대사에 부임해온 마셜 그린을 면담했다. 면담에서 마셜 그린은 한국의 국토건설사업에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 지원해주기로 약속하였다.[5]

3. 1. 1. 주한미국대사의 지원 약속

1961년 4월 18일 장면은 매카나기의 후임으로 주한미국대사에 부임해온 마셜 그린을 면담했다. 면담에서 마셜 그린은 한국의 국토건설사업에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 지원해주기로 약속하였다.[5]

3. 2. 국토건설단으로 개편 (1961년 12월)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12호[6]로 설치규정을 변경하고, 5월 20일 국토건설사업계획을 계속 추진한다고 발표하였다. 1961년 11월 30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의 건'을 상신하였다.[7] 1961년 12월 18일, 장면에 의해 창립될 당시 국토건설본부였던 명칭은 박정희 등이 병역미필자를 구제하고 국토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779호)에 의해 국토건설단으로 변경되었다.[7] 이는 1961년 12월 1일 제100회 정부 내각회의에서 공포가 의결되어 법률 제807호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국토건설단 설치법'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국토건설단은 1961년 5월 28일에 2기생, 8월 28일에 3기생, 12월 18일에 4기생을 수료시켰다.

3. 3. 조직 구조

국토건설본부(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는 기획부, 관리부, 기술지원부, 사회홍보부, 훈련부, 지방지부로 구성되었다. 지방지부는 각 도 지부와 각 시,군,구 지부로 나뉘었다.

국토건설단(1961년 12월 18일 ~ 1962년 2월 9일)은 본부와 지단으로 구성되었다. 지단은 제1지단, 제2지단, 제3지단, 제4지단으로 나뉘었고, 각 지단 예하에 분단이 있었으며, 분단은 다시 건설대와 근무대로 구성되었다.

3. 3. 1. 국토건설본부 조직 (1960.11.28 - 1961.12.18)


  • 기획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관리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기술지원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사회홍보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훈련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지방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각 도 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 ** 각 시,군,구 지부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12월 18일)

3. 3. 2. 국토건설단 조직 (1961.12.18 - 1962.2.9)


  • 본부 (1961.12.18 - 1962.2.9)
  • 지단 (1961.12.18 - 1962.2.9)
  • * 제1지단 (1961.12.18 - 1962.2.9)
  • * 제2지단 (1961.12.18 - 1962.2.9)
  • * 제3지단 (1961.12.18 - 1962.2.9)
  • * 제4지단 (1961.12.18 - 1962.2.9)
  • ** 분단 (1961.12.18 - 1962.2.9), 각 지단 예하

건설대 (1961.12.18 - 1962.2.9)
근무대 (1961.12.18 - 1962.2.9)

4. 운영 및 활동

4. 1. 구성원 및 교육

4. 1. 1. 초기 구성원 (고학력 미취업자)

초기의 국토건설요원은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졸업 미취직 인력의 실직구제 및 활용을 위해 설립하였다. 이때의 국토건설본부는 기간요원과 건설요원(수료생), 관리요원(지역 지부)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61년 12월의 '국토건설단 설치법' 개정으로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 국방부장관이 현역병으로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자, 징병적령자로서 징집이 면제된 자, 근로동원에 관한 법령에 의해 동원되는 자 등으로 충원되었다.

4. 1. 2. 개편 이후 구성원 (병역 미필자)

1961년 12월의 '국토건설단 설치법' 개정으로 구성원은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 국방부장관이 현역병으로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자, 징병적령자로서 징집이 면제된 자, 근로동원에 관한 법령에 의해 동원되는 자 등으로 충원되었다. 이는 초기 국토건설요원이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졸업 미취직 인력의 실직 구제 및 활용을 위해 설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병역 의무 이행과 관련된 인력들을 활용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4. 1. 3. 교육 내용

창설 초기에는 연령의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사실상 40세 미만의 젊은 남녀가 입교하였고, 이들은 제도, 작도방법, 측량, 건축 또는 토목 시공 실무에 대한 기술과 체력 단련, 그리고 정신교육, 국가관, 이론 교육 등을 수업받았다. 건설 실무 교육은 이만갑, 최형열, 주요한 등이 맡았고, 서울대학교의 교수들이 출강하기도 했다. 체력 단련, 정신 교육, 이론 교육은 주요한, 함석헌, 정헌주, 장준하 등이 맡았으며 국무총리 장면이 종종 강의를 하기도 했다.

4. 2. 운영 방식

4. 2. 1. 국토건설본부 운영 (1960.11 - 1961.5)

본부장(단장)과 각 실, 부, 국장이 존재했고 각 지역에는 국토건설지방국과 국토건설단 지단이 있어 지방국장과 지단장이 존재하였다. 출범 초기의 기간요원은 국가공무원의 신분이었으나, 1961년 12월 이후의 기간요원은 병역대체복무요원이었다.

4. 2. 2. 국토건설단 운영 (1961.5 - 1962.2)

본부장(단장)과 각 실, 부, 국장이 존재했고 각 지역에는 국토건설지방국과 국토건설단 지단이 있어 지방국장과 지단장이 존재하였다. 출범 초기의 기간요원은 국가공무원의 신분이었으나, 1961년 12월 이후의 기간요원은 병역대체복무요원이었다.

장면에 의해 창립될 당시에는 국토건설본부였으나, 1961년 12월 박정희 등이 병역미필자를 대상으로 한 '국토의 유기적·효과적 개발을 도모함과 동시에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도모하기 위해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779호)으로 개정[7] 하면서 국토건설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1년 11월 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의 건'을 작성 1961년 12월 1일 정부로 상신되어, 12월 1일의 제100회 정부 내각회의에서 공포키로 의결, 법률 제807호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국토건설단 설치법'으로 발표되었다.

4. 3. 주요 활동

4. 3. 1. 국토 개발 사업

(소스 내용 없음)

4. 3. 2. 강제 동원 논란

1961년 박정희 등이 병역미필자를 대상으로 한 '국토의 유기적·효과적 개발을 도모함과 동시에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도모하기 위해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779호)으로 개정[7] 하면서 국토건설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1년 11월 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의 건'을 작성 1961년 12월 1일 정부로 상신되어, 12월 1일의 제100회 정부 내각회의에서 공포키로 의결, 법률 제807호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국토건설단 설치법'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사실상 강제 동원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여 비판 여론이 거셌다.

5. 역대 단장 및 부단장

5. 1. 본부장

장면(張勉)은 1960년 11월 28일부터 1961년 5월 20일까지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본부장을 역임하였다. 장준하(張俊河)는 1961년 5월 20일부터 1961년 12월 18일까지 본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조성근(趙性瑾)은 1961년 12월 18일부터 1962년 2월 9일까지 국토건설청장을 겸임하며 본부장직을 수행하였다.

5. 2. 기획부장

장준하1960년 11월 28일부터 1961년 5월 20일까지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역임하였다.

6. 개정 이후

1961년 5월 29일부터는 국무원령이 폐지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규정대로 운영되었다. 창립 초기에는 미취업 대학생 등의 구제가 목적이었으나[1] 1961년 12월 병역의무 미이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7] 1961년 12월 이후의 건설단은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제1지단은 경상남도 남강댐 건설에 앞선 총연장 16km의 도로공사, 제2지단은 강원도 양구·화천 간 11km의 도로공사, 제3지단은 강원도 정선선 철도공사, 제4지단은 경상북도 영주 경북선 선로공사에, 또 제1분단은 전라북도 섬진강댐 건설에 앞선 도로공사, 제2분단은 경상남도 울산공업도시 간선도로공사 등에 각각 투입되었다. 개편 이후, 기존 수료생들은 기간요원에 편입되거나 해임 또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6. 0. 1.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규정

1961년 5월 29일부터는 국무원령이 폐지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규정대로 운영되었다. 창립 초기에는 미취업 대학생 등의 구제가 목적이었으나[1] 1961년 12월 병역의무 미이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7] 1961년 12월 이후의 건설단은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제1지단은 경상남도 남강댐 건설에 앞선 총연장 16km의 도로공사, 제2지단은 강원도 양구·화천 간 11km의 도로공사, 제3지단은 강원도 정선선 철도공사, 제4지단은 경상북도 영주 경북선 선로공사에, 또 제1분단은 전라북도 섬진강댐 건설에 앞선 도로공사, 제2분단은 경상남도 울산공업도시 간선도로공사 등에 각각 투입되었다. 개편 이후, 기존 수료생들은 기간요원에 편입되거나 해임 또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6. 0. 2. 병역 미필자 강제 동원

장면에 의해 창립될 당시에는 국토건설본부였으나 1961년 12월 박정희 등이 병역미필자를 대상으로 한 '국토의 유기적·효과적 개발을 도모함과 동시에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도모하기 위해 국토건설단 설치법'(법률 779호)으로 개정[7] 하면서 국토건설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1년 11월 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의 건'을 작성 1961년 12월 1일 정부로 상신되어, 12월 1일의 제100회 정부 내각회의에서 공포키로 의결, 법률 제807호에 의해 1961년 12월 2일 '국토건설단 설치법'으로 발표되었다.

1961년 5월 29일부터는 국무원령이 폐지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규정대로 운영되었다. 창립 초기에는 미취업 대학생 등의 구제가 목적이었으나[1] 1961년 12월 병역의무 미이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7] 1961년 12월 이후의 건설단은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제1지단은 경상남도 남강댐 건설에 앞선 총연장 16km의 도로공사, 제2지단은 강원도 양구·화천 간 11km의 도로공사, 제3지단은 강원도 정선선 철도공사, 제4지단은 경상북도 영주 경북선 선로공사에, 또 제1분단은 전라북도 섬진강댐 건설에 앞선 도로공사, 제2분단은 경상남도 울산공업도시 간선도로공사 등에 각각 투입되었다. 개편 이후, 기존 수료생들은 기간요원에 편입되거나 해임 또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7. 평가 및 영향

7. 1. 긍정적 평가

7. 2. 부정적 평가

7. 2. 1. 민주주의 후퇴에 기여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 세력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국토건설단은 군사 정권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민주주의적 가치보다는 효율성과 통제 중심의 운영 방식을 보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7. 3. 사회적 영향

8. 기타

건설부의 후신으로 운영된 행정기관인 국토건설청과는 별개의 기관이었다. 한편 국토건설단 또는 국토건설대는 국토건설본부의 별칭이었다.

9.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998년 KBS 드라마인 야망의 전설2009년 SBS 드라마인 태양을 삼켜라는 국토건설단을 소재로 하였다.

참조

[1] 방송 KBS 영상실록 http://www.kbs.co.kr[...]
[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 인물과사상사 2006
[3] 뉴스 http://www.seoul.co.[...]
[4] 서적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2007
[5] 서적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2007
[6] 웹인용 국토건설사업은어떤권력이나정치력지배금지(군사혁명위원회포고제12호) https://theme.archiv[...] 국가기록원 2023-12-19
[7] 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