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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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역사는 약 20만 년 전 인류의 거주 시작부터 시작되어, 선사 시대를 거쳐 바이킹 시대에 국가가 형성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칼마르 동맹을 통해 북유럽 국가들을 통합했으나, 종교 개혁과 스웨덴과의 갈등을 겪었다. 근세에는 절대주의 시대를 거쳐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식민지 개척에도 나섰다. 근대에는 나폴레옹 전쟁과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며 영토를 상실했으나, 20세기 초 덴마크는 중립을 유지하며 복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21세기에는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서 사회 발전을 추구하며 국제 사회의 도전에 대응하고 있으며, 2024년 프레데리크 10세가 즉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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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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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역사 | |
선사 시대 | 선사 시대 덴마크 (기원전 6000년경–서기 700년) |
바이킹 시대 | 바이킹 시대 (793년–1066년) |
중세 시대 | 중세 시대 (1047년–1536년) |
종교 개혁 | 종교 개혁 (1520년대–1536년) |
덴마크-노르웨이 | 덴마크-노르웨이 (1536년–1814년) |
19세기 | 덴마크 단일 국가 (1814년–1864년) |
덴마크 국가 | 덴마크 국가 (1864년–현재) |
정치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기타 | |
군사 | 군사사 |
국왕 목록 | 국왕 목록 (8세기–현재) |
총리 목록 | 총리 목록 (1849년–현재) |
관련 카테고리 | 메인 카테고리 |
포털 | 덴마크 포털 |
2. 선사 시대
덴마크의 선사 시대는 약 20만 년 전 인류의 최초 거주부터 시작되었다.[49] 약 5만 년 전경 빙하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툰드라 지대가 형성되었고, 순록을 사냥하는 유목민들이 정착했다. 이후 구석기, 신석기 시대(BC 9500년-BC 1500년), 청동기 시대(BC 1500년-BC 400년) 및 철기 시대(BC 400년 이후)를 거쳐, AD 500년경 앵글족과 유트족이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 부락을 형성했다.[49]
고대부터 윌란반도에는 데인족이 살고 있었다.[12]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북진 정책을 펴면서 데인족은 서유럽 세계에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데인족을 이끌던 구드프레드는 810년 카롤루스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독립을 유지했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6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바이킹이 윌란반도를 중심으로 원시 왕정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스웨덴 남부, 영국 동부, 심지어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했으며, 특히 9세기 경에는 영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덴마크인들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바이킹으로 알려진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바이킹 탐험가들은 9세기에 페로 제도를 거쳐 아이슬란드를 처음 발견하고 정착했다. 거기에서 그린란드와 빈란드(아마도 뉴펀들랜드)도 정착했다. 조선술과 항해술에 뛰어난 기술을 활용하여 프랑스와 영국 제도의 일부를 약탈하고 정복했다.
덴마크의 중세는 발데마르 대왕 시기부터 시작하여 칼마르 동맹을 거쳐 종교 개혁까지 이어지는 시기이다.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 경제는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의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덴마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 후, 베르사유 조약(1919년)에 따라 슐레스비히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북슐레스비히( 남윌란 )가 덴마크에 반환되었다. 국왕과 야당은 더 많은 영토를 요구했지만, 내각은 덴마크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만 요구했고, 1920년 부활절 위기를 거치며 국왕은 정치에 불개입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아이슬란드가 덴마크 국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주권 왕국이 되었다.
덴마크는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사회 발전을 추구하며,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도전에 대응하고 있다. 덴마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였다.
[1]
뉴스
Frederik X: Denmark has new King as Queen Margrethe II abdicates in historic moment for Europe’s oldest monarchy
https://news.sky.com[...]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약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이후 여러 선사 시대 문화와 사람들이 거주해 온 풍부한 선사 시대를 가지고 있다. 덴마크는 유물 보존을 위한 독특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어, 이 지역의 선사 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풍부하고 다양한 고고학적 기록을 제공한다.[49]
후빙기인 바이켈 빙하는 유틀란트 서해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덴마크를 덮고 있었다. 약 1만 3천 년 전에 끝나면서 인간들은 이전에 빙하로 덮여 있던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정착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 선사 시대 문화에는 마글레모세 문화(기원전 9,500~6,000년), 콩게모세 문화(기원전 6,000~5,200년), 에르테뵈르 문화(기원전 5,300~3,950년), 깔때기잔 문화(기원전 4,100~2,800년)가 포함된다.
보레알 기간의 최초 거주민들은 순록 등을 사냥하고 과일을 채집하여 생활했다. 기원전 8,300년경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숲이 울창해졌고, 순록은 북쪽으로 이동한 반면 투르와 엘크는 남쪽에서 도착했다. 쾰뷔르그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탄 시체이자 덴마크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 뼈이며,[3] 기원전 8,000년경 마글레모세 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4][5] 기온이 계속 상승함에 따라 참나무, 느릅나무, 개암나무가 기원전 7,000년경 덴마크에 도착했고, 멧돼지, 붉은사슴, 노루도 풍부해졌다.[6]
베드벡의 베게바켄 출토 매장지는 기원전 약 6,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추운 북쪽에서 수렵 채집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준다.[7] 학자들은 기원전 7,000년경 덴마크 인구가 3,300~8,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산한다.[8] 초기 수렵 채집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점차 반영구적인 기지 야영지 사용으로 전환한 것으로 여겨진다.[9]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해수면도 상승했고, 대서양 기간 동안 덴마크는 기원전 4,500년경 일련의 섬으로 변화했다. 주민들은 해산물 기반 식단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농업 정착민들이 기원전 4,000년경 진출했고, 많은 돌멘과 암석 무덤(특히 통로 무덤)이 이 시대에 해당한다. 깔때기잔 농부들은 중앙 유럽에 농업이 도착한 후 약 1,500년 동안 중석기 시대 생활 방식을 유지해 온 에르테뵈르 문화를 대체했다. 신석기 시대 깔때기잔 인구는 동유럽에서 스텝 기원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10] 단일 무덤 문화는 끈무늬토기 문화의 지역 변종이었으며, 폰토-카스피아 스텝에서 온 사람들의 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약 1,500년경 덴마크의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는 세상의 재물과 함께 죽은 자를 매장 둔덕 아래에 매장하는 문화가 나타났다. 이 시대의 금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에는 아름다운 종교 유물과 악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계급과 계층화에 대한 가장 초기의 증거를 제공한다.
로마 이전 철기 시대(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동안 기후가 더 서늘하고 습해져 농업이 제한되었고, 지역 집단들이 남쪽으로 게르마니아로 이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이탄 습지의 철광석에서 철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와 북서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강력한 켈트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는 이 시대부터이며, 일부 오래된 지명에 남아 있다.
로마 속주는 덴마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로마 주화 발견으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덴마크인 또는 원시 덴마크인들과 무역로와 관계를 유지했다. 가장 오래된 알려진 룬 문자 비문은 서기 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마지막 세기에 경작지 고갈은 북유럽의 이주 증가와 게르만 부족과 갈리아의 로마 정착지 사이의 갈등 증가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유물은 1세기 유적에서 특히 흔하다. 덴마크 전사 귀족의 일부가 로마 군대에서 복무했던 것으로 보인다.[11]
이 기간 동안 가축과 인신 공양이 종종 발생했고 시체는 늪에 던져졌다. 이러한 늪 시체 중 일부는 매우 잘 보존되어 당시 덴마크에 살았던 사람들과 종교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북유럽 철기 시대에서 가장 잘 보존된 늪 시체 중 일부는 톨룬드 인과 그라우발레 인이다.
5세기에서 7세기경까지 북유럽에서는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이 시대와 그 물질 문화는 게르만 철기 시대로 불린다.
3. 고대
6세기 작품인 《게티카/게티카la(Getica)》에서 고대 작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스칸자(Scandza)를 묘사하면서 '''다니(Dani)'''가 스웨덴인(Suetidi, Svitjod?)과 같은 혈통이며 헤룰리족(Heruli)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고 말한다.
고대 영어 시가 《위드시스/위드시스영어(Widsith)》와 《베오울프/베오울프영어(Beowulf)》, 그리고 후대 스칸디나비아 작가들, 특히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 약 1200년)의 작품들이 덴마크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 중 일부를 제공한다.
게르만족 대이동 시대에 북쪽 게르만족(노르만족)의 일파인 덴마크인(デーン人)이 스웨덴 남부 스코네(スコーネ) 지방을 거쳐 현재의 덴마크 땅에 도착했다. 그 이전의 토착민이었던 서쪽 게르만족인 앵글족(アングル人), 색슨족(サクソン人), 유트족(ジュート人)을 압도하고, 최종적으로 동화시켰다. 덴마크인은 현재 덴마크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을 알 수 있는 문헌과 전승으로는 사가(サーガ)와 북유럽 신화(北欧神話) 등이 있으며, 북게르만족의 문화(文化)와 사상(思想) 등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
4. 바이킹 시대와 국가 형성
그들은 또한 유럽의 해안과 강을 따라 무역을 하며 뛰어났는데, 북쪽 그린란드에서 남쪽 콘스탄티노플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강을 통해, 특히 드네프르 강을 따라 키예프를 경유하는 무역로를 운영했다. 덴마크 바이킹들은 브리튼, 아일랜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동적이었으며, 그곳에서 약탈하고, 정복하고, 정착했다(그들의 초기 정착지는 데인로, 아일랜드, 노르망디의 지역을 포함한다). 데인로는 현재 잉글랜드를 구성하는 북동부 절반을 포함하며, 덴마크인들이 정착하고 덴마크 법과 통치가 시행되었다.
9세기 초 샤를마뉴의 기독교 제국은 덴마크의 남쪽 국경까지 확장되었고, 프랑크족 자료는 덴마크에 대한 가장 초기의 역사적 증거를 제공한다. 이 자료들은 804년 현재 홀슈타인에 해군을 이끌고 나타난 구드프레드 왕을 보여주며, 프랑크족과 외교가 이루어졌다. 808년 구드프레드 왕은 오보트리테족을 공격하여 레릭 도시를 정복했고, 그 주민들은 헤데뷔로 이주하거나 납치당했다. 809년 구드프레드 왕과 샤를마뉴의 사절들은 평화 협상에 실패했고, 그 이듬해 구드프레드 왕은 200척의 배를 이끌고 프리지아인들을 공격했다.
헤데뷔 근처 다네비르케의 방어 시설 중 가장 오래된 부분은 적어도 755년 여름부터 시작되었으며, 10세기에 대규모 공사로 확장되었다.
826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되어, 성 안스가르는 헤데뷔로 여행하여 가톨릭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를 시작했다. 이외링 지역에서 일어난 왕가는 970년께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왕 치하에서 덴마크를 완전히 기독교화하였고, 1014년경 그 아들인 스벤 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왕을 겸하였다. 고름 옛왕은 기원후 년부터 사망한 년까지 통치한 덴마크의 통치자로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옐링에서 통치했고, 그의 아내 티라를 기리기 위해 가장 오래된 옐링 룬석을 세웠다.
덴마크인들은 965년 고름의 아들 하랄드 블루투스에 의해 통합되고 공식적으로 기독교화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옐링 룬석에 기록되어 있다. 하랄드의 덴마크 왕국의 정확한 영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네비르케의 방어선, 헤데뷔를 포함한 유틀란트, 덴마크 제도, 스코네 및 아마도 할란드와 블레킹게까지 뻗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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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세
9세기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의 명령으로 북유럽 선교가 시작되어, 당시 무역항이었던 헤세뷔에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곧 철수하였다. 그러나 948년에는 슐레스비, 리베, 오르후스에 주교좌가 설치되었다.[54] 960년경 하랄 1세(하랄드 블루투스 왕)는 유틀란트 반도에서 스코네에 걸쳐 왕국을 건설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북유럽 신화 신앙을 버렸다.[15] 이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왕국 통치에 필요한 안정적인 행정 기구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교회는 왕권을 강화하는 중앙 집권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54]
11세기 크누트 2세(크누트 대왕)는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북해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북해 제국은 붕괴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계속되었다. 크누트 2세의 뒤를 이은 하르데크누트는 1042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이후 마그누스 1세가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스벤 2세가 1047년 마그누스 1세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스벤 2세는 함부르크-브레멘 대교구와 좋은 관계를 맺고 덴마크 국내를 8개 주교구로 나누었다.[55] 그러나 그의 사후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세력을 키우던 중, 1157년 발데마르 1세(발데마르 대왕)가 왕위에 올라 왕국 재건을 시작했다.[56][57]
발데마르 1세는 아브살론의 협력 아래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발트해 남안의 벤트인을 공격하며 발트해 진출을 시작했다.[58] 아브살론은 에러슨 해협 연안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코펜하겐의 기원이다.[59]
발데마르 2세(승리왕)는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며 발트해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1223년 신하의 계략으로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60] 그의 사후 덴마크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한자 동맹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332년 크리스토퍼 2세 사후 8년간 공위 시대가 이어졌다.
발데마르 4세(부흥왕)는 에스토니아 매각 이익과 페스트로 인한 귀족 약화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고트랜드 원정은 한자 동맹과 스웨덴의 반발을 불러 슈트랄순트에서 화의를 맺었다.
1375년 발데마르 4세 사후, 그의 딸 마르그레테 1세의 아들 올라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을 이루었다(후의 덴마크-노르웨이). 마르그레테는 섭정으로 실권을 잡았고, 1397년 칼마르에서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북유럽 국가들을 통합했다. 이는 한자 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5세기 중반, 덴마크와 스웨덴이 다른 왕을 선출하기도 했지만,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동맹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왕의 지배 강화 시도는 스웨덴의 반발을 불러왔다.
16세기 초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을 정복하고 스톡홀름 학살을 일으켜 스칸디나비아 연합에 대한 미련을 없앴다. 1521년 스웨덴이 칼마르 동맹에서 탈퇴한 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내전과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단일 군주 하의 인적 동군연합으로 운영되었으며, 노르웨이는 별도의 법률과 제도, 왕실 재상, 화폐, 군대를 유지했다.
6. 근세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을 일으켰으나, 스웨덴 해방 전쟁으로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 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다. 한스 타우센은 덴마크 최초의 루터교 설교자 중 한 명이자 후일 주교가 되었다.[16]
프레데리크 2세 때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북방 7년 전쟁’이 일어났고,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레데리크 3세는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의 사상으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덴마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6] 1524년 신약 성서가 덴마크어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6] 한스 타우센은 루터의 개혁을 선포하고 비보르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이 확산되었다.[16] 프레드리크 1세 국왕은 타우센을 개인 목사로 임명하여 보호했다.[16] 코펜하겐은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회들은 루터교도들에게 문을 열었다.[16]
성모 마리아 교회가 습격당하는 등 종교적 갈등이 있었지만, 교회 토지와 재산 몰수를 통해 왕실 수입이 증가했다.[16] 교회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과 왕실의 재정적 이익이 결합하여 루터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17] 많은 도시들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원 폐쇄를 왕에게 청원했고, 수도사들이 추방되었다.[17]
프레데리크 1세 사후, 슐레스비히 공 크리스티안을 크리스티안 3세 국왕으로 선포 했으나, 가톨릭 주교들은 크리스티안 3세의 선출을 거부했다. 백작의 싸움 ()이라고 불리는 3년간의 내전에서 크리스티안 3세는 승리하여 덴마크를 장악했다. 1536년 10월 30일 크리스티안 3세의 칙령에 따라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루터교 국가가 되었다. 덴마크 국교(덴마크어: Folkekirken)를 국교로 설립했다. 가톨릭 주교들은 투옥되었고, 교회 토지는 몰수되었다.
17세기는 덴마크에서 엄격한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였다. 16세기 동안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은 부유해졌는데, 에레순을 통과하는 교통량 증가 때문이었다. 80년 전쟁(1568~1648)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는데, 많은 숙련된 난민들이 덴마크로 왔기 때문이다. 1620년대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는 패배하고, 뤼벡 조약에서 평화를 맺었다.
1643년, 스웨덴 군대가 덴마크를 침공하여 토르스텐손 전쟁(Torstenson War)이 발발했다. 네덜란드는 덴마크-노르웨이(Denmark–Norway) 연합 왕국에 대한 스웨덴의 전쟁에 가담했다. 1644년 10월, 네덜란드-스웨덴 연합 함대는 덴마크 함대의 80%를 격파했다. 브뢰MSE브로 조약(Second treaty of Brömsebro (1645))에서 덴마크는 스웨덴에 영토를 할양했다.
1657년, 제2차 북방 전쟁(Second Northern War) 중 덴마크-노르웨이(Denmark–Norway)는 스웨덴에 대한 보복전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로스킬레 조약(Treaty of Roskilde)에서 덴마크-노르웨이는 항복하고 영토를 할양했다. 칼 10세 구스타브(Charles X Gustav of Sweden)는 덴마크를 지도상에서 완전히 없애기로 결정하고, 스웨덴 군대가 코펜하겐 외곽에 도착했다.
프레데리크 3세(재위 1648~1670)는 코펜하겐 시민들의 저항을 격려했다. 네덜란드 함대가 코펜하겐에 보급품과 증원군을 가지고 파견되어, 스웨덴의 공격(Assault on Copenhagen (1659)|스웨덴 공격) 중에 코펜하겐이 함락되는 것을 막았다. 칼 10세 구스타브(Charles X Gustav of Sweden)는 1660년 초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스웨덴은 코펜하겐 조약(Treaty of Copenhagen (1660)|코펜하겐 조약)에서 평화를 맺었다. 스웨덴은 이제 덴마크를 제치고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프레데리크 3세 국왕(재위 1648~1670)은 귀족들이 권력의 일부와 세금 면제를 포기하도록 설득하여 덴마크의 절대주의 시대를 열었다. 1670년대에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나, 전쟁은 쓰라린 교착 상태로 끝났다. 대북방전쟁(1700~1721) 중 재개된 공격은 불리한 트라벤달 조약(Peace of Travendal)으로 이어졌지만, 덴마크가 전쟁에 재참전하고 스웨덴이 최종적으로 패배한 후 스웨덴은 더 이상 덴마크에 대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18세기 대부분 동안 덴마크는 평화를 유지했다. 1762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Duke of Holstein-Gottorp)이 러시아의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가 되어 덴마크에 선전포고했을 때였다. 예카테리나 황후는 남편의 요구를 철회하고 덴마크 왕관에 공작령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을 넘기는 협상을 했고, 이 교환은 1773년 차르스코예 셀로 조약(Treaty of Tsarskoye Selo)으로 공식화되었다.
프레데릭의 정부는 행정의 중심점으로서 국왕을 중심으로 훨씬 더 계층적인 방식으로 재조직되었다. 덴마크의 절대주의 군주들은 스웨덴의 군주들에 비해 상당히 약했고, 비귀족 지주들이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1683년, "Danske lov 1683" (덴마크 법전(Danish Code))은 모든 오래된 지방 법률을 표준화하고 수집했다.
18세기 후반에는 광범위한 농업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기존의 공동 경작 제도가 폐지되고 많은 소규모 농장이 대규모 농장으로 통합되었다. 18세기 내내 덴마크 경제는 유럽 전역의 수요 증가를 충족하기 위한 농업 생산량 증가를 바탕으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새로운 예의범절과 계몽주의 사상이 덴마크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하며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770년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크리스티안 7세(1766~1808) 치세 동안, 슈트루엔제가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가 되었다. 계몽 사상으로 가득 찬 그는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1772년, 슈트루엔제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왕에 대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처형되었다.
덴마크는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외부에 여러 개의 식민지를 유지했다. 크리스티안 4세(재위 1588~1648)는 중상주의 경향의 일환으로 덴마크의 해외 무역 확장 정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덴마크는 1620년 인도 남부 해안에 트랑케바(Tranquebar 또는 Trankebar)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카리브해에서 덴마크는 1671년 세인트 토마스에, 1718년 세인트 존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173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세인트 크로이를 매입했다. 덴마크 동인도 회사는 트랑케바에서 운영되었다. 전성기 동안 덴마크 동인도 회사와 스웨덴 동인도 회사는 영국 동인도 회사보다 더 많은 차를 수입했고, 그중 90%를 영국으로 밀수입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7. 근대
장기간의 평화는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 기간 갑작스럽게 끝났다. 덴마크-노르웨이는 프랑스와 영국 모두와의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영국은 덴마크-노르웨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것이라는 우려를 했고, 이는 1801년 코펜하겐 해전으로 이어졌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 함대는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에 압도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노르웨이는 1807년까지 중립을 유지했는데, 이때 영국 함대가 코펜하겐을 폭격하고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의 대부분을 나포하여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항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총선전으로 이어졌고, 덴마크의 총선이 1814년까지 영국 해군과 싸웠지만, 주요 교전은 1812년 영국 해군이 마지막 덴마크 프리깃을 링외르에서 나포한 후 종식되었다.
1809년 프랑스 편에서 싸운 덴마크군은 페르디난트 폰 쉴이 이끄는 반 보나파르트 독일 반란을 슈트랄준트 전투에서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1813년까지 덴마크는 더 이상 전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국가는 파산했다. 같은 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북부 독일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면서 덴마크를 고립시키자, 프레데리크 6세는 평화를 맺어야 했다. 따라서 1814년 1월 스웨덴과 영국과 킬 조약이 체결되었고, 2월에는 러시아와 또 다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빈 회의는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의 해체를 요구했고, 이는 1814년 킬 조약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조약은 헬리골란트를 영국에, 노르웨이를 덴마크에서 스웨덴 왕관으로 이전했으며, 덴마크는 스웨덴 포메라니아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은 봉기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왕세자 크리스티안 프레드리크(미래의 크리스티안 8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독립 운동은 유럽 열강으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했다. 스웨덴과의 단기간의 전쟁 후, 크리스티안은 노르웨이의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 퇴위해야 했고,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이 수립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을 위해 덴마크는 빈 회의(1815년)에서 스웨덴 포메라니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대신 라우엔부르크 공국과 프로이센으로부터 350만 달러를 받았다. 프로이센은 또한 스웨덴에 대한 덴마크의 60만 달러 빚을 인수했다.
1848년 프레데리크 7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1849년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해 헌법을 반포, 덴마크의 정체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꿨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리크 7세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 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1860년부터 1864년까지 콘스탄틴 한센이 그린 그림. 헌법 제정 의회는 덴마크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덴마크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운동은 1830년대에 탄력을 받았고,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덴마크는 1849년 6월 5일 입헌 군주제가 되었습니다. 성장하는 자본가 계급은 정부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유럽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격렬한 혁명을 피하기 위해 프레데리크 7세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헌법이 등장하여 권력을 분립하고 모든 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언론, 종교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국왕은 행정부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입법부는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되었는데, 일반 국민이 선출한 포크팅과 지주가 선출한 랜드스팅이었습니다. 덴마크는 또한 독립적인 사법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8. 현대
1924년 포크팅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토르발드 스타우닝의 지휘아래 최대 의회 정당이 되었고, 1930년대 대공황을 종식시키고 복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1939년, 덴마크는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4월 9일 독일에 점령되었다. 초기에는 덴마크 정부가 유지되었지만, 1943년 독일이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덴마크 유대인 구출에서 보듯, 덴마크인들은 나치에 저항했고, 1945년 5월 4일 독일군 항복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전후 덴마크는 국제 연합(UN)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페로 제도에 자치권을 부여했고, 1953년에는 랜드스팅(상원) 폐지, 그린란드 식민지 지위 종식, 여성 왕위 계승권 허용 등의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1973년 1월 1일, 유럽 공동체(EC)에 가입했지만, 유로 도입은 2000년 국민투표에서 거부되었다.
9. 21세기
21세기 초, 덴마크는 2003년 SARS 폭발,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12월),[35][36][37] 예틀란 포스텐 무함마드 풍자 만화 논쟁(2005년), 2008년 이슬라마바드 덴마크 대사관 폭탄 테러(이슬라마바드)(2008년), 2015년 코펜하겐 테러(2015년), 그리고 2020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의 코로나19 범유행 (델타와 오미크론 하이브리드 변이 포함) 등 전후 최악의 위기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경제가 더욱 타격을 입었다.
2001년, 덴마크 의회(포크팅)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기로 합의했다.[38] 2002년 첫 배치 이후 총 43명의 덴마크 군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했다.
안데르스 포그 라스무센은 2001년, 2005년, 2007년 포크팅 선거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사회민주당 총리 폴 뉴룹 라스무센이 패배를 인정한 후 몇 달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8년 후인 2009년 4월, 그는 NATO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임했고, 라스 뢰케 라스무센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첫 번째 임기 동안 총리로 취임했다.[39]
2011년 포크팅 선거에서 벤스트레가 이끄는 현직 중도우파 연정은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중도좌파 연정에 패배하여 헬레 토르닝-슈미트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사회자유당과 사회인민당이 3당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새로운 의회는 2011년 10월 4일에 개원했다.[40]
2015년, 라스 뢰케 라스무센은 포크팅 선거에서 승리하여 두 번째 정부를 구성했다. 집권 사회민주당이 포크팅에서 가장 큰 당이 되고 의석 수를 늘렸지만, 야당인 벤스트레는 덴마크 인민당, 자유동맹, 보수인민당의 지지로 라스 뢰케 라스무센이 이끄는 소수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41] 라스 뢰케 라스무센 총리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그리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덴마크 인민당(DF)의 지지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2019년 포크팅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당수 메테 프레데릭센을 총리 후보로 지지하는 정당들이 참여했다. 사회민주당, 사회자유당, 사회인민당, 적녹연합, 페로 제도 사회민주당, 그리고 그린란드의 슘웃으로 구성된 "적색 연합"은 179석 중 93석을 확보하여 의회 과반수를 확보했다. 한편, 벤스트레, 자유동맹, 보수인민당으로 구성된 현 집권 연정은 덴마크 인민당과 누나타 키토르나이의 의회 외 지지에도 불구하고 76석으로 감소했다(벤스트레 계열인 페로 제도 연합당 포함). 2019년 총선 이후 메테 프레데릭센이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좌파 연합의 지지로 단독 정부를 구성했다.[42] 프레데릭센은 2019년 6월 27일 총리가 되었다.[43]
2022년 11월 조기 총선인 총선에서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2석을 더 얻어 20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44] 두 번째로 큰 당은 야콥 엘레만-옌센이 이끄는 자유당(벤스트레)이었다. 두 번의 총리직을 역임한 라스 뢰케 라스무센이 이끄는 새로 결성된 중도당이 덴마크에서 세 번째로 큰 당이 되었다.[45] 2022년 12월,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사회민주당과 자유당, 중도당과 새로운 연정을 구성했다. 야콥 엘레만-옌센은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고, 라스 뢰케 라스무센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46]
2023년 마지막 날 52번째 신년사에서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퇴위하여 왕위를 아들 프레데리크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1146년 에리크 3세 이후 처음 있는 덴마크 군주가 자발적으로 퇴위하는 사례였다.[47] 1월 14일, 마르그레테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52년 만에 프레데리크 10세가 덴마크 국왕으로 선포되었다.[48]
전후 덴마크는 유럽 공동체(EC) 내의 농업 국가로서 비교적 풍요로운 경제를 유지했고, 복지 국가로서도 알려졌지만, 냉전 하의 외교에서는 불안정을 강요받았다(북유럽 균형). 그러나 냉전 종식 후에는 유럽 연합(EU)의 일원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선진국 중 하나가 되었다. 페로 제도는 1948년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고, EU에는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통화를 사용하는 등 독자성을 강화하고 있다. 그린란드도 1979년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EC에서도 탈퇴했다. 페로 제도에서는 장래적으로 독립 국가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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