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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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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이 다쓰오는 일본의 로마 가톨릭교회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일본인 최초의 추기경이었다. 센다이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도쿄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고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1960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는 1963년 교황 선거에 참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기여했으며, 1970년 도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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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추기경, 도쿄 대교구장
1938년의 베드로 도이 다쓰오 대주교
인물 정보
존칭각하
이름도이 다쓰오 (베드로)
원어 이름ペトロ 土井辰雄
로마자 표기Petrus Tatsuo Doi
출생일1892년 12월 22일
출생지일본 미야기현센다이시
사망일1970년 2월 21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국적일본
사제 서품 및 주교 임명
사제 서품1921년 5월 1일
주교 임명1938년 2월 13일
교구
착좌1937년 12월 2일
종료1970년 2월 21일
이전 교구장장-알렉시 샹본, 파리 외방전교회 MEP
이후 교구장시라야나기 세이이치
추기경
서임일1960년 3월 28일
서임자요한 23세
명의 본당산탄토니오 다 파도바 인 비아 메루아나 성당
기타 정보
소속 교회가톨릭 교회
문장

2. 생애

도이 다쓰오는 센다이에서 태어나, 1902년 9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1] 센다이의 신학교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1년 5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934년까지 센다이에서 본당 사목을 하다가 일본 주재 교황 대사비서가 되었다.

1937년 12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도쿄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38년 2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MEP)의 장-알렉시 샹봉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임을 받았으며, 야마구치 아이지로 바오로 주교와 마리-조제프 르미외 주교가 공동 서임자로 참여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이는 전국 가톨릭 중앙 위원회의 집행 이사로 활동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요코하마 로마 가톨릭 교구의 사도좌 관리자였다.

1960년 3월 28일,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 회의에서 그를 ''산탄토니오 다 파도바 인 비아 메룰라나''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다.[2] 성좌(바티칸)는 도이가 일본 가톨릭 교회를 활성화하기를 바랐고,[3] 그는 최초의 일본인 추기경단 회원이 되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963년 교황 선거에서 교황 바오로 6세를 선출한 추기경 선거인 중 한 명이었다. 1967년에는 일본 가톨릭 주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2월 21일 77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사망했다. 그는 가톨릭 세키구치 교회 성 마리아 대성당에 묻혔다. 도이는 스테판 비신스키와 함께 1965년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메시지 중 하나를 전달하는 데 폴 페터 메우시를 도왔다.[5]

2. 1. 초기 생애와 사제 서품

도이 다쓰오는 센다이시에서 태어났다.[1] 1902년 4월 21일, 9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1] 센다이 제1중학교(현 미야기현 센다이 제1고등학교)와 제2고등학교(구제)를 졸업한 후,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했다.

1921년 5월 1일사제 서품을 받았다.[1] 이후 미야기현이와테현의 교회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로마 교황 사절 비서를 역임했다.

2. 2. 도쿄 대교구장 임명과 주교 서품

1937년 12월 2일, 교황 비오 11세는 도이 다쓰오를 도쿄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1] 1938년 2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장-알렉시 샹봉 대주교가 도이 다쓰오의 주교 서품을 주례하였고, 야마구치 아이지로 바오로 주교와 마리-조제프 르미외 주교가 공동 서임자로 참여했다.[1]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이 다쓰오는 전국 가톨릭 중앙 위원회의 집행 이사로 활동했다.[1] 그는 일본 천주 공교단의 대표로서 가톨릭 교회를 통합하여 박해로부터 지키는 데 힘썼다.[7]

조치 대학 사건[6] 등으로 인해, 당시 가톨릭 교회는 "사교", "매국노", "스파이" 등의 비판을 받았으며, 외국인 선교사뿐만 아니라 일본인 성직자와 신도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체포, 구속, 감시를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7]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이 다쓰오는 "만약 우리가 순교한다면, 남겨진 신도의 무리를 지킬 자가 없어진다. [...] 그러나, 다음 세 가지를 부정하라고 요구받는다면, 가장 먼저 순교할 생각이다. [...] 하나, 하느님의 존재. 둘, 삼위일체. 셋,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7]

한편, 도이 다쓰오는 1940년 9월 일본 천주 공교단의 대표로서 나가사키 교구에서 대마 봉사의 철저 결의에 관여했다.[8]

2. 4. 추기경 임명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요한 23세는 1960년 3월 28일 교황 회의에서 도이 다쓰오를 ''산탄토니오 다 파도바 인 비아 메룰라나''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다.[2] 성좌(바티칸)는 도이가 일본 가톨릭 교회를 활성화하기를 바랐고,[3] 그는 최초의 일본인 추기경단 회원이 되었다. 이 행사를 기념하는 행사가 1949년 도이가 봉헌한 도쿄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렸다.[4]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963년 교황 선거에서 추기경 선거인 중 한 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 선출에 기여했다. 1967년에는 일본 가톨릭 주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 5. 사망

1970년 2월 21일 도쿄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톨릭 세키구치 교회 성 마리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5]

3. 평가 및 영향

도이 다쓰오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본 가톨릭 교회를 이끌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본 천주교 공교단의 대표로서 가톨릭 교회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고, 1960년 일본인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어 일본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높였다.[7]

전쟁 중에는 조치 대학 사건[6] 등으로 가톨릭 교회가 '사교',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고, 신자들은 스파이 혐의로 감시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이 다쓰오는 신앙을 지키면서도 신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하라는 요구에는 순교할 각오를 밝히며 신앙의 핵심 가치를 굳건히 지켰다.[7] 1940년 나가사키 교구에서 대마 봉사의 철저 결의에 관여하기도 했다.[8]

1967년 일본 가톨릭 주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70년 77세로 사망하여 도쿄 대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1. 종교적 관용과 신앙의 자유 증진

도이 다쓰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천주교 공교단의 대표로서 가톨릭 교회를 박해로부터 지키는 데 힘썼다.[7] 전임 샹봉 대주교 시절 조치 대학 사건[6] 등으로 인해 교회는 '사교', '매국노' 등의 비판에 직면했고, 외국인 선교사뿐 아니라 일본인 성직자와 신도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체포, 구속, 감시를 받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이 다쓰오는 성직자들에게 "만약 우리가 순교한다면, 남겨진 신도의 무리를 지킬 자가 없어진다."라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는 동시에 신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이 세 가지를 부정하라는 요구에는 가장 먼저 순교할 각오를 밝히며 신앙의 핵심 가치를 굳건히 지켰다.[7]

3. 2. 사회적 영향

도이 다쓰오는 일본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혼란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일본 사회와 가톨릭 교회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전, 일본 사회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기독교를 "사교", "매국노", "스파이" 등으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조치 대학 사건[6] 등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뿐만 아니라 일본인 성직자와 신도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체포, 구속, 감시를 받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이 추기경은 "만약 우리가 순교한다면, 남겨진 신도의 무리를 지킬 자가 없어진다"며 신앙을 지키면서도 신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7]

도이 추기경은 일본 천주교단의 대표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국내 가톨릭 교회를 통합하고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1940년 9월 나가사키 교구에서 대마 봉사의 철저 결의에 관여하기도 했다.[8]

전후, 도이 추기경은 1960년 일본인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967년에는 일본 가톨릭 주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일본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일본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서적 Doi Tatsuo https://books.google[...] Nussbaum, Louis-Frédéric 2002
[2] 뉴스 Sketches of Six of the Cardinals-Designate; Japanese Named Has Been Archbishop Since 1937, https://timesmachine[...] New York Times 1960-03-04
[3] 간행물 Seven New Hats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1960-03-14
[4] 웹사이트 Kōjimachi Catholic Church https://tokyo.cathol[...] 2023-07-06
[5] 웹사이트 To the Poor, the Sick and the Suffering. http://www.christusr[...] Christus Rex
[6] 문서 학교의 군사교련 때문에 배속된 장교가 『과외 수업은 학장의 허가를 요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학생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게 한 것에서 발생. 가톨릭 신자의 학생이 배례 거부를 했기 때문에 장교는 분격하여 다음날 신문이 『참배 거부』 『군부 격노』 등과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문부성은 군에 비판적이고, 조치대・단바 간사와 육상과의 면담으로 사태 수습.
[7] 웹사이트 仙台一高同窓会…跳梁跋扈 http://www.sen1.org/[...]
[8] 논문 昭和戦中期の暦 ――暦と大麻の頒布強制と頒暦数の急伸 https://tcue.repo.ni[...]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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