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인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인모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한국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1952년 체포되어 34년간 복역하며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고,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북한에서 '통일의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김일성 훈장을 받았으며, 2007년 사망 후 인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말년에 대한 의혹과 논란도 존재한다.

리인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리인모 초상
본명리인모
출생일1917년 8월 24일
출생지김형권군, 일제강점기 조선
사망일2007년 6월 16일
사망지평양, 북한
국적북한
직업정치인
혁명가
활동 정보
활동 기간해당 없음 (정치적 수감 기간 포함)
알려진 이유대한민국의 정치적 수감자
주요 활동해당 없음
한국어 정보
한글리인모
한자
로마자 표기Ri Inmo
기타 정보
특이 사항비전향 장기수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인민유격대 관련자 - 류락진
    류락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남로당, 통일혁명당, 구국전위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서예가로 활동하다 2005년에 사망했다.
  • 조선인민유격대 관련자 - 이현상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활동한 이현상은 6·10 만세운동 참여, 노동 및 항일 운동, 남로당 활동, 남부군 사령관으로서의 게릴라전 지휘 등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북한에서 애국렬사로 추앙받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 김일성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치했으며,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개인 숭배를 조장한 정치인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 신광수 (192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 리두균
    한국 전쟁 당시 체포되어 31년간 수감 생활을 한 비전향 장기수 리두균은 출소 후 탕제원을 운영하다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고 《로동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조선로동당과 김정일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2. 생애

일제강점기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현 량강도 김형권군)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로동당원으로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전쟁 중인 1952년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이후 34년간 대한민국에서 복역하며 전향을 거부한 대표적인 비전향장기수가 되었다.

1988년 석방된 후 그의 송환 문제가 제기되었고, 1993년 3월 19일 김영삼 정부의 결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40여 년 만에 가족과 재회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 애국투사'로 불리며 영웅 대우를 받았으나,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1996년 미국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2007년 6월 16일 89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인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했다.

2.1. 출생과 성장

1917년 8월 24일 함경남도 풍산군(현 량강도 김형권군) 개마고원 지대의 가난한 화전민 가정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다 중퇴했을 정도로 지식인에 속했다. 학창 시절 선배 및 친구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스물한 살 무렵에는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5년 6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풍산과 흥남 지역에서 조선노동당 지역 선전국장으로 활동했다.

2.2. 한국 전쟁과 수감 생활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조선노동당 지역 간부로 활동하던 중, 조선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가 되어 낙동강 유역까지 남하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부대의 신문 발행을 담당했다.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활동하던 중 19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국군에 체포되어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한국 전쟁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 대한민국의 재판 기록은 의용군 강제 모집이나 빨치산 활동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그가 종군기자로서 전선 취재를 담당했다고 주장하여 서로 상충한다.

1952년 체포 후 7년간 복역하고 1959년 1월 출소했으나,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조직 자금 제공)로 다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7년(또는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총 34년간의 수감 생활 동안 전향을 거부하여 비전향장기수가 되었다. 수감 기간 중 정치적 신념 포기를 조건으로 석방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1976년 형기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1988년 10월까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추가로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

2.3. 석방과 송환

1988년 10월, 34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양아들 김상원의 집이 있는 경상남도 김해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당국은 석방 후에도 그의 활동을 계속 제약했다.

출소 후 리인모는 여러 글을 통해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를 국내외에 알렸고, 이는 결과적으로 안재구, 류낙진, 최호경 등 조직 사건 관련자와 손성모, 신광수 등 다른 비전향장기수들이 1999년 12월 31일까지 모두 석방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등, 남한 사회의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송환 논의는 1989년 월간 말지에 북한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수기 '내 청춘 통일에 묻어'를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글이 1991년 9월 21일자 로동신문에 실리자, 북한은 같은 해 9월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리인모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 취재차 방남한 북한 중앙방송 기자가 부인 김순임과 딸 리현옥 등 북한 가족의 편지와 사진을 남측 취재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북한은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그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송환 문제가 급물살을 탔다. 김영삼 대통령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리인모를 조건 없이 북한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 자신의 결단이었다고 밝혔다. 1993년 3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정부나 청와대 참모들과의 사전 협의 없이 "선물"이라며 리인모 북송 방침을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이는 이전 정부가 북한의 송환 요구에 대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상응 조치를 요구하며 거부해왔던 것과는 다른 결정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2일 만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조건 없는 송환을 결정한 것이다. 다만 정부는 리인모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장기방북' 형식을 취했고, 그의 주민등록증을 회수했다.

1993년 3월 19일, 리인모는 폐렴으로 입원 중이던 부산대학교병원에서 경찰 헬기를 타고 판문점으로 이송되었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부인 김순임, 딸 리현옥, 외손주 등 북한에 있던 가족들과 40여 년 만에 재회한 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판문점에서 평양 도착까지 리인모의 송환 과정을 여러 차례 실황 중계하며, 이를 '김일성·김정일의 은덕',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 등으로 포장하여 대대적인 체제 선전에 활용했다.

2.4. 북한에서의 생활과 사망

1993년 3월 19일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한국전쟁 전 혼인했던 부인 김순임과 딸 리현옥, 외손주들과 40여 년 만에 재회했다. 북한은 그의 송환 과정을 실황 중계하며 '김일성·김정일의 은덕',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 등으로 포장하여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벌였다.

송환 후 리인모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고위층이 거주하는 평양 서장동에 가구가 완비된 단독주택을 제공받았고, 전담 주치의가 배정되었으며 건강 회복을 위한 특별 관리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송환 직후인 4월 15일 자신의 생일에 병원에 입원 중이던 리인모를 직접 찾아가 격려하고 조선로동당 당원증을 수여했다.

그러나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그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1996년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에는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2001년 8월 19일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 참석차 방북한 남측의 양아들 김상원과 8년 5개월 만에 만났고, 2002년 6월에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통일대회 행사에서 남측 딸과 재회했다.

북한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체제 선전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그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자 "친 통일 애국 투사"라고 묘사했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최고 영예인 '김일성훈장'과 '공화국영웅' 칭호,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으며, 문필 활동 공로로 북한 문인·언론인에게 주어지는 '3·1월간상'과 통일 운동 관련 공로로 '조국통일상'도 수여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93년 3월 19일'(한웅빈 저)이 발간되었고,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제11~13부가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또한 그를 기념하는 가요, 우편엽서, 우표가 발행되었으며, 2008년에는 평양 통일거리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량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그의 모교 파발인민학교는 '리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리인모는 건강 회복 후 여러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2007년 6월 16일, 리인모는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북한 당국은 그의 사인을 "남조선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과(후유증)"라고 공식 발표하며, 장례를 인민장으로 성대하게 치르고 유해를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했다. 장례위원회는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위원장을, 최태복 당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김영일 당시 내각총리를 포함한 55명의 고위 간부로 구성되었다. 그의 부인 김순임이 2015년 1월 12일 사망하자, 북한 당국은 그녀의 장례식 역시 대대적으로 치르고 유해를 애국렬사릉의 리인모 묘에 합장했다.

3. 논란

리인모의 말년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제기되며 논란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은 그가 2007년 사망 시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대한민국 내 일부 탈북자나 보수 언론 등에서는 그가 특정 발언으로 인해 당국에 밉보여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송환 이후 2003년 9월부터 사망까지 약 4년간의 행적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점과 소위 '교화소 발언' 등이 주요 쟁점으로 거론된다.

3.1. 북한 당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내 일부 탈북자의 주장에 따르면, 리인모의 말년에 대해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은 공식적으로 리인모가 2007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사후에도 '신념과 의지의 전형인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로 칭송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보수 언론 등에서는 리인모가 소위 '교화소 발언'으로 인해 북한 당국에 밉보여 말년에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송환 당시 이미 폐렴을 앓아 휠체어를 이용했던 리인모는 2003년 9월 이후부터 사망한 2007년 6월 16일까지 약 4년간의 행적이 언론 보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이 단순한 투병과 노쇠 때문인지, 아니면 당국과의 관계 문제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교화소 발언' 논란은 2008년에 출판된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는 리인모가 열악한 환경의 교화소(수형시설)를 보고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해당 서술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어렵고, 일방적인 주장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4. 작품

* 신념과 의지의 화신: 조선인민군 전 군사 기자의 기록 (1993년, 외국문출판사)
* 시들어가는 잎 푸르게 변하다 (1994년, 외국문출판사)
* 나의 삶과 신념: 회고록 (1997년, 외국문출판사)

5. 평가와 영향

조선중앙통신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자 "친 통일 애국 투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 종군 기자로 활동하다 1952년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대한민국에서 34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긴 수감 기간 동안 정치적 신념 포기(전향)를 조건으로 한 석방 제안을 거부하며 신념을 지켰고, 이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의 상징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1988년 석방된 이후에도 대한민국 당국의 제약을 받았으나, 1993년 3월 북한으로 송환되어 헤어졌던 아내, 딸과 재회했다. 그의 송환은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 문제의 아픔과 함께, 당시 남북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송환 후 리인모는 오랜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1996년 미국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건강 회복 후 북한에서는 그의 수감 생활을 다룬 영화를 제작했으며, 그는 여러 공개 활동을 통해 북한 내에서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2007년 6월 16일 사망 후 영웅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김영남이 장례위원장을, 최태복이 부위원장을 맡고 김영일 등 55명의 위원이 참여했다. 이듬해 평양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북한 사회에서 영웅으로 대우받았음을 보여준다.

6. 같이 보기

* 김일성
* 비전향 장기수
* 한국 전쟁
* 일제강점기
* 조선인민군
* 지리산
* 김형권군
* 김영남
* 최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