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발터 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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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받은 인물로, 나치 시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피와 토양' 이념을 주창하며 농민과 북유럽 인종의 연관성을 강조했고, 나치당에 가입하여 식품농업부 장관, 제국 농민 지도자 등을 역임했다. 다레는 나치 정권의 몰락 후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50년 석방 후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보급하다가 195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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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발터 다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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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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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카르도 발터 오스카르 다레 |
출생 | 1895년 7월 14일 |
출생지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사망 | 1953년 9월 5일 |
사망지 | 뮌헨, 서독 |
국적 | 독일-아르헨티나 |
직업 | 농업경제학자 |
학력 | 할레 대학교 |
배우자 | 알마 슈타트 샤를로테 폰 피팅호프-셸 남작 영애 |
경력 | |
소속 정당 | 나치당 |
군사 경력 | |
소속 군대 | 독일 제국군 친위대 |
복무 기간 | 1914년 - 1919년 1931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위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정치 경력 | |
직책 | 제국 식량농업부 장관 |
임기 시작 | 1933년 6월 29일 |
임기 종료 | 1944년 4월 6일 (1942년 5월 23일부터 휴직) |
총리 | 아돌프 히틀러 |
전임 |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
후임 | 헤르베르트 바케 |
직책 2 | 친위대 인종 및 정착 본부 장 |
임기 시작 2 | 1932년 1월 1일 |
임기 종료 2 | 1938년 9월 12일 |
전임 2 | '사무실 설립됨' |
후임 2 | 귄터 판케 |
직책 3 | 국가 지도자 (Reichsleiter) |
임기 시작 3 | 1933년 6월 3일 |
임기 종료 3 | 1942년 5월 23일 |
직책 4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농업 정책 본부장 |
임기 시작 4 | 1932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4 | 1943년 |
직책 5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전국 농민 지도자 |
임기 시작 5 | 1933년 5월 29일 |
임기 종료 5 | 1943년 |
직책 6 | 독일 국회 의원 |
선거구 6 | 6구 (포메른 지구) (1932년-1936년) 28구 (드레스덴 지구) (1936년-1945년) |
당선 횟수 6 | 6회 |
임기 시작 6 | 1932년 7월 31일 |
임기 종료 6 | 1945년 5월 8일 |
2. 초기 생애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벨그라노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리하르트 오스카 다레는 위그노의 후손인 독일인이었고,[1] 그의 어머니는 에밀리아 베르타 엘레오노레 라게르그렌으로 스웨덴 출생 아버지와 독일 출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1888년 독일 국제 수입/수출 도매업체인 엥겔베르트 하르트 & Co.의 파트너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1] 그의 부모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리하르트 발터는 그의 아버지를 "술을 많이 마시고 바람둥이"로 기억했다.[1] 그들은 부유하게 살았고 자녀들을 사립학교에서 교육시켰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몇 년 동안 악화된 국제 관계의 결과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1] 다레는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의 4개 국어에 능통했다.[1]
다레의 부모는 그를 9세에 독일로 보내 하이델베르크에서 학교에 다니게 했다.[1] 1911년, 그는 교환 학생으로 런던 윔블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 스쿨에 다녔다.[1] 나머지 가족은 1912년에 독일로 돌아왔다.[1] 리하르트(가족에게 알려진 이름)는 그 후 구머스바흐에 있는 ''오베르레알슐레''에서 2년을 보냈고, 1914년 초에는 독일 식민 제국의 정착을 위한 괴팅겐 남쪽의 비첸하우젠에 있는 ''콜로니알슐레''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보낸 후 그는 군대에 자원했다.[1]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1]
전쟁이 끝나자 그는 농업에 종사하며 아르헨티나로 돌아갈 것을 고려했지만, 인플레이션 시대에 가족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불가능해졌다.[1] 대신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비첸하우젠으로 돌아갔다.[1] 그 후 그는 포메라니아 (1815-1945) 주에서 무급 농장 조교로 일했다.[1] 그곳에서 돌아온 독일 군인들의 처우를 관찰한 것은 그의 후기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1]
1922년,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할레 대학교로 이주했다.[1] 그는 축산을 전공하는 농업 학위를 받았다.[1] 그는 34세였던 1929년에 박사 학위를 마쳤다.[1] 그 기간 동안 그는 동프로이센과 핀란드에서 잠시 일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1922년, 그는 여동생 일세의 학교 친구였던 알마 슈타트와 결혼했다.[2] 이 결혼으로 1923년에 딸 안넬리제가 태어났다. 그는 1927년에 알마와 이혼했고, 1931년에 그를 생존시킨 샤를로테 프라인 폰 비팅호프-셸과 결혼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도 1938년에 딸 엘린이 태어났다.
2. 1. 출생과 가족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벨그라노에서 독일인(위그노 계)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무역 회사 중역이었으며, 다레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국제 관계 악화로 가족이 독일로 귀국하기 전까지 사립 학교에서 교육받았다.[1] 다레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1]다레의 부모는 그가 9세 때 하이델베르크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독일로 이주시켰다.[1] 1911년 윔블던의 킹스 칼리지 스쿨에서 교환 학생으로 공부했고, 1912년 가족이 독일로 돌아왔다.[1] 이후 굼머스바흐의 실과 고등학교를 거쳐 1914년 비첸하우젠의 독일 식민지 농업 상업 공업 학교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1]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마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 종전 후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계속했다.[1] 포메라니아에서 농장 조수로 일하며 퇴역 군인들의 처우를 목격했고, 이는 훗날 그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1] 1922년 할레 대학교에서 가축 사육을 전공하여 농학 학위를 받았고, 192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
다레는 두 번 결혼했다. 1922년 알마 슈타트(Alma Staadt)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1927년 이혼했다.[2] 1931년 샬로테 폰 피팅호프-셸 남작 영애(Charlotte Freiin von Vittinghoff-Schell)와 재혼했다.
2. 2. 교육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벨그라노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독일 국제 수입/수출 도매업체의 파트너로 아르헨티나에서 일했다.[1] 다레의 가족은 유복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국제 관계 악화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1] 다레는 어린 시절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4개 국어에 능통했다.[1]9세 때 다레는 하이델베르크의 학교에 보내졌고, 1911년에는 런던 윔블던의 킹스 칼리지 스쿨에 교환 학생으로 갔다.[1] 1912년 가족이 독일로 돌아온 후, 다레는 구머스바흐의 학교를 거쳐 1914년 비첸하우젠의 독일 식민 제국의 정착을 위한 괴팅겐 남쪽의 비첸하우젠에 있는 ''콜로니알슐레''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마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 종전 후 그는 포메라니아 (1815-1945) 주에서 농장 조수로 일하면서 퇴역 군인들의 처우를 관찰했고, 이는 그의 후기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1] 1922년 할레 대학교에서 축산을 전공하여 농업 학위를 받았고, 1929년에 박사 학위를 마쳤다.[1]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독일 식민 제국 정착을 위한 괴팅겐 남쪽 비첸하우젠에 있는 ''콜로니알슐레''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보낸 후 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1] 전쟁 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1]2. 4. 농업 연구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1914년 초 괴팅겐 남부 비첸하우젠에 있는 독일 식민지 농업 상업 공업 학교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보낸 후 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농장 조수로 일하다 1922년 할레 대학교로 이주하여 축산을 전공하는 농업 학위를 받았다. 1929년에 34세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5. 결혼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두 번 결혼했다. 1922년, 그는 여동생 일세의 학교 친구였던 알마 슈타트와 결혼했다.[2] 이 결혼으로 1923년에 딸 안넬리제가 태어났다. 그는 1927년에 알마와 이혼했고, 1931년에 샤를로테 프라인 폰 비팅호프-셸과 결혼했다. 두 번째 결혼에서도 1938년에 딸 엘린이 태어났다.3. 정치 활동
독일에서 젊은 시절 다레는 귀농 운동에 헌신하는 귀족 운동(Völkisch movement)의 청년 단체인 아르타만 동맹(Artaman League)에 가입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북유럽 인종의 미래와 토양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Blut und Boden''" 또는 피와 토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피"는 인종과 조상을 나타내고, "토양"은 영토와 토지의 개념을 표현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한 민족과 그들이 점유하고 경작하는 토지 사이의 상호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포함했다.
다레의 첫 번째 정치 기사(1926)는 ''내부 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이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1928년에 그는 첫 번째 책인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북유럽 인종의 생명원으로서의 농민')을 썼다. 이 책은 독일 농장이 이전에 가장 강한 아들에게 주어져 최고의 농부를 확보했지만, 분할 상속으로 인해 이것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다레는 고대 전통의 부활과 함께 우생학을 통해 북유럽 혈통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요구했다.
안나 브램웰은 다레의 전기를 통해 그의 글을 "녹색 정치(Green Politics)" 또는 보존주의적 사고의 초기 사례로 해석한다. 그는 더 자연적인 토지 관리 방법을 옹호하며 숲의 보존을 강조하고 농장 동물을 사육할 때 더 넓은 공간과 공기를 요구했다.
다레의 주장을 듣고 따른 사람들 중에는 하인리히 힘러도 있었는데, 그는 아르타만의 일원이었다. 다레의 작품은 또한 국가에 살았던 북유럽인들의 잔재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미덕"을 찬양하고 도시 생활을 폄하했다. 그의 두 주요 저서에서 그는 독일 농민을 독일 민족의 문화적, 인종적 핵심을 형성하는 북유럽 조상을 가진 동질적인 인종 집단으로 정의하고, 북유럽 출생률이 다른 인종보다 낮기 때문에 북유럽 인종이 장기적인 멸종 위협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다.
1930년 7월, 파울 슐츠-나움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를 소개한 후, 다레는 나치당(248,256)과 SS(6,882)에 가입했다.[5] 1932년 1월 1일, SS 대장(''Reichsführer-SS'') 히믈러는 SS 인종 및 정착 본부의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다레는 1932년에 SS-집단지도자(SS-''Gruppenführer'')의 계급을 받았고, 1934년 11월에는 SS-상급 집단지도자(SS-''Obergruppenführer'')로 진급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다레는 테오도르 듀스터베르크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괴롭힘 캠페인에 참여했다. 듀스터베르크는 다레의 공격에 상처를 받아 결투를 신청했고, 다레는 "유대인 피"를 가진 남자와 싸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다레는 1932년 7월 처음으로 ''Reichstag''에 선출되었고,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하원의원으로 계속 봉사했다. 1933년 6월 29일, 그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뒤를 이어 식품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동시에 프로이센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1933년 5월 제국 농민 지도자 (''Reichsbauernführer'')로 임명되었다. 1933년 6월 2일 히틀러는 다레를 당의 국가 지도자(''Reichsleiter'')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1933년 10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였다.
다레는 농민들을 당에 모집하기 위한 농업 정치 기구를 설립했다.[14] 독일 역사가 클라우스 힐데브란트는 다레를 히믈러,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함께 "농업" 분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다레는 나치 제국 식품 사회(''Reichsnährstand'')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다레는 Reichserbhofgesetz을 홍보했는데, 이 법은 국가의 대부분의 소규모 농장(7.5~125헥타르)을 세습 부동산으로 강제로 전환시켰다.
Burg Neuhaus에 있는 '농업 학교'에서 다레는 북유럽의 순수 혈통을 우생학과 "피와 토지의 새로운 귀족"을 통해 홍보했다.[7]
다레는 ''"Rasse und Raum"''("인종과 공간") 계획을 "동진 정책"(''"Drang nach Osten"''), "생존 공간"("''Lebensraum''") 및 "히틀러의 정복의 꿈"의 이데올로기적 노선에 따라 개발했다.
다레는 선택적 번식을 기반으로 한 독일 인종 귀족을 만들려는 히믈러의 목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동부 마스터 플랜"(''Generalplan Ost'')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믈러는 다레와 결별할 것이다.[8] 다레는 자신의 분야를 잘 아는 몇 안 되는 나치 장관 중 한 명으로 여겨졌지만,[9] 1930년대 중반 독일이 흉작을 겪으면서 히알마르 샤흐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레의 영향력은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가 그를 너무 이론적이고 무능한 행정가라고 여기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1938년 9월, 힘러는 다레에게 SS 인종 및 정착 본부의 지도자 자리에서 귄터 판케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다레는 1942년 5월 23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휴가를 받았고, 그의 임무는 국무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가 맡았다. 다레는 바케가 1944년 4월 6일 공식적으로 국가 장관으로 취임할 때까지 형식적으로 국가 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다레는 1942년 5월부터 사실상 영향력을 잃었고, 나치즘 정권이 끝날 때까지 베를린 외곽의 쇼르프하이데 숲에 있는 자신의 사냥 별장으로 은퇴했다.
1940년 다레가 연설했다고 추정되는 연설 기록이 1940년 12월 9일자 ''라이프''지에 게재되었다.
3. 1. 아르타만 동맹 가입
독일에서 젊은 시절 다레는 귀농 운동에 헌신한 귀족 운동(Völkisch movement)의 청년 단체인 아르타만 동맹(Artaman League)에 가입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북유럽 인종의 미래와 토양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Blut und Boden''" 또는 피와 토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피"는 인종과 조상을 나타내고, "토양"은 영토와 토지의 개념을 표현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한 민족과 그들이 점유하고 경작하는 토지 사이의 상호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포함했다.다레의 첫 번째 정치 기사(1926)는 내부 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이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글의 대부분은 동물 번식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그는 1928년에 첫 번째 책인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북유럽 인종의 생명원으로서의 농민')을 썼다. 그는 숲의 보호를 매우 강조하며 보다 자연스러운 토지 관리 방법을 주창했고, 가축을 사육할 때 더 개방적인 공간과 공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감명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 하인리히 힘러였다. 힘러 자신도 "아르타마넨"의 멤버였다.
다레의 작품은 또한 국가에 살았던 북유럽인들의 잔재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미덕"을 찬양하고 도시 생활을 폄하했다. 그의 두 주요 저서에서 그는 독일 농민을 독일 민족의 문화적, 인종적 핵심을 형성하는 북유럽 조상을 가진 동질적인 인종 집단으로 정의하고, 북유럽 출생률이 다른 인종보다 낮기 때문에 북유럽 인종이 장기적인 멸종 위협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다.
3. 2. 나치당 입당
독일에서 젊은 시절 다레는 아르타만 동맹(Artaman League)에 가입했는데, 이는 귀족 운동(Völkisch movement)의 청년 단체로 귀농 운동에 헌신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북유럽 인종의 미래와 토양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Blut und Boden''" 또는 피와 토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다레의 첫 번째 정치 기사(1926)는 ''내부 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이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그는 1928년에 첫 번째 책인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북유럽 인종의 생명원으로서의 농민')을 썼다. 이 책은 우생학을 통해 북유럽 혈통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요구했다. 그의 주장을 듣고 따른 사람들 중에는 하인리히 힘러도 있었다. 다레의 작품은 또한 국가에 살았던 북유럽인들의 잔재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미덕"을 찬양하고 도시 생활을 폄하했다.
1930년 7월, 파울 슐츠-나움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를 소개한 후, 다레는 나치당(# 248,256)과 SS(# 6,882)에 가입했다.[5] 다레는 1930년 6월 1일에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당원 번호 248,256)하여 활동적인 당원이 되었고, 농민을 나치에 가입시키기 위해 1930년 여름에 농업에 관한 정치 조직을 설립했다. 그는 이 조직에 대해 세 가지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즉, 도시 정부에 대한 무기로서 농촌 지역 농민들의 불안을 이용하는 것, 나치의 충실한 후원자로서 농민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 장래 동쪽의 정복지에서 슬라브족을 대체할 이민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선거구를 획득하는 것, 이상의 세 가지이다.
1932년 1월 1일, SS 대장(''Reichsführer-SS'') 하인리히 힘러는 인종 정책의 실행과 SS 구성원의 인종적 순수성 관리에 관련된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주의 조직인 새로 설립된 SS 인종 및 정착 본부의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1932년 다레는 SS-집단지도자(SS-''Gruppenführer'')의 계급을 받았고, 1934년 11월에는 SS-상급 집단지도자(SS-''Obergruppenführer'')로 진급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다레는 독일 국민당의 후보였던 테오도르 듀스터베르크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괴롭힘 캠페인에 참여했다. 듀스터베르크는 다레의 공격에 너무 상처를 받아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다레는 "유대인 피"를 가진 남자와 싸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도전을 거절했다.
1932년 6월에 나치당 전국 조직 지도부의 제5부(농업) 부장에 임명되었고, 9월 22일에는 나치당 전국 경제 평의회의 위원 중 한 명이 되었다. 12월 14일에 다레는 나치당의 에 임명되었다[14]。7월 31일에는 6구(포메라니아 지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이 되었다. 다레는 1932년 7월 처음으로 ''Reichstag''에 선출되었고,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하원의원으로 계속 봉사했다.
3. 3. 나치 정권 하의 활동
독일에서 젊은 시절 다레는 아르타만 동맹(Artaman League)에 가입했는데, 이는 귀족 운동(Völkisch movement)의 청년 단체로 귀농 운동에 헌신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북유럽 인종의 미래와 토양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Blut und Boden''" 또는 피와 토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다레의 첫 번째 정치 기사(1926)는 ''내부 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이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그는 1928년에 첫 번째 책인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북유럽 인종의 생명원으로서의 농민')을 썼다. 이 책은 우생학을 통해 북유럽 혈통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요구했다. 그의 글은 녹색 정치(Green Politics) 또는 보존주의적 사고의 초기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3] 그는 더 자연적인 토지 관리 방법을 옹호하며 숲의 보존을 강조하고 농장 동물을 사육할 때 더 넓은 공간과 공기를 요구했다.[1] 다레의 주장을 듣고 따른 사람들 중에는 하인리히 힘러도 있었다. 다레의 작품은 또한 국가에 살았던 북유럽인들의 잔재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미덕"을 찬양하고 도시 생활을 폄하했다. 그의 두 주요 저서에서 그는 독일 농민을 독일 민족의 문화적, 인종적 핵심을 형성하는 북유럽 조상을 가진 동질적인 인종 집단으로 정의하고, 북유럽 출생률이 다른 인종보다 낮기 때문에 북유럽 인종이 장기적인 멸종 위협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다.
1930년 7월, 파울 슐츠-나움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를 소개한 후, 다레는 나치당(248,256)과 SS(6,882)에 가입했다.[5] 1932년 1월 1일, SS 대장(''Reichsführer-SS'') 히믈러는 SS 인종 및 정착 본부의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다레는 1932년에 SS-집단지도자(SS-''Gruppenführer'')의 계급을 받았고, 1934년 11월에는 SS-상급 집단지도자(SS-''Obergruppenführer'')로 진급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다레는 테오도르 듀스터베르크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괴롭힘 캠페인에 참여했다. 듀스터베르크는 다레의 공격에 상처를 받아 결투를 신청했고, 다레는 "유대인 피"를 가진 남자와 싸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다레는 1932년 7월 처음으로 ''Reichstag''에 선출되었고,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하원의원으로 계속 봉사했다. 1933년 6월 29일, 그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뒤를 이어 식품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동시에 프로이센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1933년 5월 제국 농민 지도자 (''Reichsbauernführer'')로 임명되었다. 1933년 6월 2일 히틀러는 다레를 당의 국가 지도자(''Reichsleiter'')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1933년 10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였다.
다레는 농민들을 당에 모집하기 위한 농업 정치 기구를 설립했다.[14] 독일 역사가 클라우스 힐데브란트는 다레를 히믈러,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함께 "농업" 분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다레는 나치 제국 식품 사회(''Reichsnährstand'')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다레는 Reichserbhofgesetz을 홍보했는데, 이 법은 국가의 대부분의 소규모 농장(7.5~125헥타르)을 세습 부동산으로 강제로 전환시켰다.
Burg Neuhaus에 있는 '농업 학교'에서 다레는 북유럽의 순수 혈통을 우생학과 "피와 토지의 새로운 귀족"을 통해 홍보했다.[7]
다레는 ''"Rasse und Raum"''("인종과 공간") 계획을 "동진 정책"(''"Drang nach Osten"''), "생존 공간"("''Lebensraum''") 및 "히틀러의 정복의 꿈"의 이데올로기적 노선에 따라 개발했다.
다레는 선택적 번식을 기반으로 한 독일 인종 귀족을 만들려는 히믈러의 목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동부 마스터 플랜"(''Generalplan Ost'')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믈러는 다레와 결별할 것이다.[8] 다레는 자신의 분야를 잘 아는 몇 안 되는 나치 장관 중 한 명으로 여겨졌지만,[9] 1930년대 중반 독일이 흉작을 겪으면서 히알마르 샤흐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3. 4. '피와 흙' 이념
독일에서 젊은 시절 다레는 귀농 운동에 헌신하는 귀족 운동(Völkisch movement)의 청년 단체인 아르타만 동맹(Artaman League)에 가입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북유럽 인종의 미래와 토양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Blut und Boden''" 또는 피와 토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피"는 인종과 조상을 나타내고, "토양"은 영토와 토지의 개념을 표현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한 민족과 그들이 점유하고 경작하는 토지 사이의 상호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포함했다.다레의 첫 번째 정치 기사(1926)는 ''내부 식민지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독일이 아프리카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1928년에 그는 첫 번째 책인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북유럽 인종의 생명원으로서의 농민')을 썼다. 이 책은 독일 농장이 이전에 가장 강한 아들에게 주어져 최고의 농부를 확보했지만, 분할 상속으로 인해 이것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다레는 고대 전통의 부활과 함께 우생학을 통해 북유럽 혈통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요구했다.
안나 브램웰은 다레의 전기를 통해 그의 글을 "녹색 정치(Green Politics)" 또는 보존주의적 사고의 초기 사례로 해석한다. 그는 더 자연적인 토지 관리 방법을 옹호하며 숲의 보존을 강조하고 농장 동물을 사육할 때 더 넓은 공간과 공기를 요구했다.
다레의 주장을 듣고 따른 사람들 중에는 하인리히 힘러도 있었는데, 그는 아르타만의 일원이었다. 다레의 작품은 또한 국가에 살았던 북유럽인들의 잔재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미덕"을 찬양하고 도시 생활을 폄하했다. 그의 두 주요 저서에서 그는 독일 농민을 독일 민족의 문화적, 인종적 핵심을 형성하는 북유럽 조상을 가진 동질적인 인종 집단으로 정의하고, 북유럽 출생률이 다른 인종보다 낮기 때문에 북유럽 인종이 장기적인 멸종 위협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다.
3. 5. 몰락
다레의 영향력은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가 그를 너무 이론적이고 무능한 행정가라고 여기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1938년 9월, 힘러는 다레에게 SS 인종 및 정착 본부의 지도자 자리에서 귄터 판케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다레는 1942년 5월 23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휴가를 받았고, 그의 임무는 국무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가 맡았다. 다레는 바케가 1944년 4월 6일 공식적으로 국가 장관으로 취임할 때까지 형식적으로 국가 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다레는 1942년 5월부터 사실상 영향력을 잃었고, 나치즘 정권이 끝날 때까지 베를린 외곽의 쇼르프하이데 숲에 있는 자신의 사냥 별장으로 은퇴했다.1940년 다레가 연설했다고 추정되는 연설 기록이 1940년 12월 9일자 ''라이프''지에 게재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4월, 미국 당국은 다레를 체포하여 루드비히스부르크 방공 사령부 병영에 구금하고, 빌헬름 거리 재판이라고도 알려진 부속 뉘른베르크 재판의 각료 재판에서 21명의 피고 중 한 명으로 재판을 받았다.[12]
그는 다음 혐의로 기소되었다.[12]
- 1심: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과 침략의 계획, 준비, 개시 및 수행에 참여. 무죄 판결.
- 2심: 평화에 대한 죄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를 음모: 법정은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이 혐의를 기각했다.
- 4심: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 국민에게 저질러진 범죄와 관련된 반인륜적 범죄. 변호인의 주장에 따라 이 혐의는 기각되었다.
- 5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 및 범죄. 유죄 판결.
- 6심: 약탈 및 강탈. 유죄 판결.
- 7심: 강제 노동. 무죄 판결.
- 8심: 범죄 조직의 구성원. 유죄 판결.
다레는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50년에 석방되어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1953년 9월 5일 뮌헨 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고슬라에 묻혔다.
다레는 1945년에 체포되어, 1948년부터 열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장관 재판에 회부되었다. 더 심각한(특히 대량 학살과 관련된) 혐의의 대부분에 관해서는 무죄가 되었지만, 징역 7년형에 처해졌다.[18] 그러나 구금 기간은 거의 지나갔고, 1950년에 석방되었다.[18] 출소 후 죽을 때까지 3년 동안,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의 보급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전후 복구에서 화학 비료가 불가결했던 서독의 추세에,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의 "촉감", "살아있는 토양", "관습의 중시"라는 신비적인 말로 대항했다.[18] 유기 농업 운동가 카를 칼슨의 필명으로도 활동했다.[18] 1953년 9월 5일, 알코올 의존증으로 유발된 간암 때문에 뮌헨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4. 1. 체포와 재판
1945년 4월, 미국 당국은 다레를 체포하여 루드비히스부르크 방공 사령부 병영에 구금하고, 빌헬름 거리 재판이라고도 알려진 부속 뉘른베르크 재판의 각료 재판에서 21명의 피고 중 한 명으로 재판을 받았다.[12]그는 다음 혐의로 기소되었다.[12]
- 1심: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과 침략의 계획, 준비, 개시 및 수행에 참여. 무죄 판결.
- 2심: 평화에 대한 죄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를 음모: 법정은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이 혐의를 기각했다.
- 4심: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 국민에게 저질러진 범죄와 관련된 반인륜적 범죄. 변호인의 주장에 따라 이 혐의는 기각되었다.
- 5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 및 범죄. 유죄 판결.
- 6심: 약탈 및 강탈. 유죄 판결.
- 7심: 강제 노동. 무죄 판결.
- 8심: 범죄 조직의 구성원. 유죄 판결.
다레는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50년에 석방되어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1953년 9월 5일 뮌헨 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고슬라에 묻혔다.
다레는 1945년에 체포되어, 1948년부터 열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장관 재판에 회부되었다. 더 심각한(특히 대량 학살과 관련된) 혐의의 대부분에 관해서는 무죄가 되었지만, 징역 7년형에 처해졌다.[18] 그러나 구금 기간은 거의 지나갔고, 1950년에 석방되었다.[18] 출소 후 죽을 때까지 3년 동안,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의 보급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전후 복구에서 화학 비료가 불가결했던 서독의 추세에,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의 "촉감", "살아있는 토양", "관습의 중시"라는 신비적인 말로 대항했다.[18] 유기 농업 운동가 카를 칼슨의 필명으로도 활동했다.[18] 1953년 9월 5일, 알코올 의존증으로 유발된 간암 때문에 뮌헨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4. 2. 죽음
다레는 1945년 4월 미군 당국에 체포되어 루드비히스부르크 방공 사령부 병영에 구금되었고, 빌헬름 거리 재판이라고도 알려진 부속 뉘른베르크 재판의 각료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12] 그는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 및 침략 계획, 준비, 개시, 수행에 참여,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 및 범죄, 약탈 및 강탈, 범죄 조직 구성원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평화에 대한 죄와 반인륜적 범죄 공모,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 국민에게 저질러진 범죄 관련 혐의는 기각되었다.[12]다레는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0년에 석방되어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12] 그는 1953년 9월 5일 뮌헨의 한 병원에서 알코올 의존증으로 유발된 간암으로 사망하여 고슬라에 묻혔다.[18] 석방 후, 다레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보급 활동에 힘썼으며, 유기 농업 운동가 카를 칼슨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했다.[18]
5. 저서
리하르트 발터 다레의 저작은 주로 고대 및 현대 북유럽 농민과 혈통과 토지 이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신 앞에서의 인간 평등"을 가르치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게르만 귀족에게 유목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앗아갔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Das Bauerntum als Lebensquell der nordischen Rassede'' (북유럽 민족의 생명 원천으로서의 농민), 1928년
- ''Neuadel aus Blut und Bodende'' (혈통과 토지에서 나온 새로운 귀족), 1930년
- ''Pig as Criterion for Nordic Peoples and Semites'' (1933년)
6.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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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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