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뤼크 위앵
1. 개요
마르탱 뤼크 위앵은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1864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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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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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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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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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2. 생애
1836년 프랑스 오트마른주 랑그르 교구 기용벨 마을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부모 아래 아홉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뤼크라고 불렸다. 그의 부모는 포도 농사를 지었으며, 아버지는 가문이 대대로 사제를 배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위앵의 본당 신부는 그의 사제로서의 소질을 발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라틴어를 가르쳤다. 1851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삶의 수행 또한 철저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이었다.
위앵은 사제 수업을 받으며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고향 근처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선교 주교들로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선교사의 열망이 더 커졌다.
1861년 6월 29일, 위앵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 신부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주교는 이를 허락했다. 다만, 주교는 위앵에게 후임자가 도착하는 1863년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1863년 6월, 위앵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8월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 아홉 명의 선교 사제들과 파리를 떠나,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내포에 머물다 합덕 세거리로 이동하였다. 위앵 신부는 조선 생활 방식과 조선말을 빠르게 익혀, 1866년 2월부터 고해성사, 교리 교육, 병자성사, 혼인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조선 천주교인들은 그의 활동에 크게 기뻐했다. 위앵 신부는 500회 이상의 고해성사, 약 20명의 병자성사, 몇몇 부부의 혼인성사를 집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여 3월 12일 체포되었다. 3월 19일 세 선교사는 모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위앵 신부는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위앵 신부는 "제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슬픕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2.1. 출생과 성장
1836년 프랑스 오트마른주 랑그르 교구 기용벨 마을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부모 아래 아홉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뤼크라고 불렸다. 그의 부모는 포도 농사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이 대대로 사제를 배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위앵의 본당 신부는 그의 사제로서의 소질을 발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라틴어를 가르쳤다. 1851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삶의 수행 또한 철저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이었다.
2.2. 선교의 열망
위앵은 사제 수업을 받으며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는 고향 근처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선교 주교들로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선교사의 열망이 더 커졌다.
1861년 6월 29일, 위앵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 신부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주교는 이를 허락했다. 다만, 주교는 위앵에게 후임자가 도착하는 1863년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2.3. 조선 선교
1863년 6월, 위앵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8월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 아홉 명의 선교 사제들과 파리를 떠나,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내포에 머물다 합덕 세거리로 이동하였다. 위앵 신부는 조선 생활 방식과 조선말을 빠르게 익혀, 1866년 2월부터 고해성사, 교리 교육, 병자성사, 혼인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조선 천주교인들은 그의 활동에 크게 기뻐했다. 위앵 신부는 500회 이상의 고해성사, 약 20명의 병자성사, 몇몇 부부의 혼인성사를 집전하였다.
2.4.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여 3월 12일 체포되었다. 3월 19일 세 선교사는 모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위앵 신부는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위앵 신부는 "제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슬픕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