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시클그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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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는 1795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847년에 사망한 여성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할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농부의 딸로 태어나 1837년 미혼 상태에서 아들 알로이스 히틀러를 낳았으며, 알로이스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마리아는 1842년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했으며, 1847년 결핵으로 사망하여 뢸러샤임의 교구 교회 묘지에 묻혔다. 묘지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훈련장으로 사용되면서 훼손되었고, 현재 묘비는 남아있지 않다.

마리아 시클그루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birth_name: 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
출생일1795년 4월 15일
출생지오스트리아 대공국 발트피에르텔 슈트레스
사망일1847년 1월 6일
사망지오스트리아 제국 클라인모텐
국적오스트리아
직업해당 정보 없음
활동 기간해당 정보 없음
알려진 이유해당 정보 없음
대표 작품해당 정보 없음
배우자해당 정보 없음
자녀알로이스 히틀러
친척 (손자)
안겔라 히틀러 (손녀)
아돌프 히틀러 (손자)
파울라 히틀러 (손녀)
(증손자)
겔리 라우발 (증손녀)
하인츠 히틀러 (증손자)
윌리엄 스튜어트 휴스턴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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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족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발트피어텔 지역의 스트로네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 요하네스 시클그루버(1764년 5월 29일 ~ 1847년 11월 12일)이고, 어머니는 테레지아 파이징거(1769년 9월 7일 ~ 1821년 11월 11일)였다. 마리아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녀에 대한 정보는 주로 교회 및 기타 공적 기록에 기반한다.

마리아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한 명이었고, 그중 6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북서쪽에 위치한 니더외스터라이히 북서부의 숲이 우거진 시골 지역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보냈다.

1821년, 마리아가 26세 때 어머니 테레지아가 사망하여 74.25 굴덴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녀는 이 유산을 고아를 위한 기금(Orphans' Fund)에 1838년까지 투자하여 자산을 원래 금액의 두 배가 넘는 165굴덴으로 늘렸다.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암퇘지 한 마리가 4굴덴, 소 한 마리가 10~12굴덴, 여관 전체가 약 500굴덴 정도였다. 이는 마리아가 평생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베르너 마저는 마리아를 "검소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매우 현명한 농부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마리아가 40세가 되기 전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유산 관리 기록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3. 알로이스 히틀러 출생

1837년, 42세의 나이로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마리아 시클그루버는 외아들 알로이스를 낳았다. 그녀는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담당 사제는 아기에게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라는 세례명을 주고 세례 등록부의 아버지 이름 칸에 '사생아(illegitimate)'라고 기재했다. 베르너 마저는 마리아가 "검소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매우 현명한 농부 여성"이었다고 평가했다.

알로이스가 태어날 당시, 마리아는 스트로네스 마을의 트루멜슐라거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트루멜슐라거 부부는 알로이스의 대부모로 등록되었다. 이후 마리아는 아버지 요하네스 시클그루버와 함께 스트로네스 22번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이들 시클그루버 가족은 떠돌이 직인 제분업자였던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알로이스가 태어난 지 5년 후인 1842년 5월 10일, 마리아는 47세의 나이로 인근 마을인 될러스하임에서 50세의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했다.

알로이스 히틀러, 만년
알로이스 히틀러, 만년

역사가들은 알로이스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해 다음 세 명의 후보를 두고 논쟁해왔다.

*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 마리아 시클그루버와 결혼했으며, 나중에 알로이스의 출생 증명서에 아버지로 이름이 추가되었다. 나치 독일은 그를 공식적으로 알로이스의 아버지, 즉 아돌프 히틀러의 친할아버지로 인정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가 실제로 알로이스의 생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알로이스의 출생 당시 출생 증명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 요한 게오르크의 동생으로, 어린 시절의 알로이스를 양육했으며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겼다. 만약 그가 알로이스의 실제 아버지였다면,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 현명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레오폴트 프랑켄베르거: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전 나치 간부였던 한스 프랑크가 주장한 유대인 남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명한 역사가들은 이 가설을 근거 없는 것으로 본다. 마리아가 임신했을 당시 그라츠에는 유대인 가족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한스 프랑크의 추측 외에는 다른 증거가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이다.

당시 하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는 사생아 출생이 드물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생아 비율이 전체 출생의 40%에 달했으며, 1903년에도 24% 수준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나중에 부모의 결혼 등으로 법적인 자녀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알로이스의 출생 배경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었다. 나치즘은 순수한 "아리아인" 혈통을 강조하며 문서화된 혈통 증명서를 요구했는데, 히틀러의 반대자들은 그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공격했다. 1931년 히틀러는 친위대에 자신의 혈통에 대한 소문을 조사하도록 명령했으나 유대인 조상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는 족보학자에게 의뢰하여 1937년 자신의 가계도를 담은 책을 출판하게 했고, 이 책은 히틀러가 유대인 조상이 없는 순수한 오스트리아독일인 혈통임을 주장했다. 알로이스 본인이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를 아버지로 인정했고(세 명의 증인이 이를 확인함), 1876년 사제가 알로이스의 출생 증명서상 아버지 칸을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로 변경한 사실이 히틀러의 '아리아인' 혈통을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4. 히틀러 가문의 혈통 조작

히틀러의 혈통은 그의 반대자들이 그의 친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는 나치즘의 주요 원칙 중 하나가 순수한 "아리아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문서화된 혈통 증명서(Ahnenpass)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31년, 히틀러는 친위대(SS)에 자신의 혈통에 대한 소문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조사 결과, 유대인 조상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는 족보학자 루돌프 코펜슈타이너에게 자신의 혈통을 보여주는 큰 그림 형태의 족보를 출판하도록 지시했다. 이 족보는 1937년 지도자의 혈통표(Die Ahnentafel des Führers)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히틀러의 가족은 모두 유대인 조상이 없는 오스트리아독일인이며, 히틀러는 흠 없는 "아리아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알로이스 자신이 생전에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를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인정했고(3명의 증인이 이를 확인하고 지켜봄), 1876년에 사제가 알로이스의 출생 증명서상 아버지 기입란을 변경한 사실이 히틀러의 혈통에 대한 공식적인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히틀러는 나치 정권 하에서 공식적으로 "아리아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5. 죽음과 묘지

마리아는 결혼 6년째 되던 해인 1847년, 친척인 실립(Schilipp) 가족의 집이 있던 클라인-모텐(Klein-Motten)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흉수증으로 인한 결핵"이었다. 그녀는 될러스하임(Döllersheim)의 교구 교회 묘지에 묻혔다.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그녀의 묘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교회 벽 옆에 '명예 묘지'(Ehrengrab)가 마련되었다. 이 명예 묘지는 지역 히틀러 유겐트 단체에 의해 관리되었고, 이 시기 될러스하임과 주변 지역은 군사 훈련장으로 지정되었다. 1942년, 이 지역은 포병 훈련 구역의 일부가 되었고 지역 주민들은 이주해야 했다.

군사 훈련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 점령기 동안 계속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서도 1985년경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현재 될러스하임의 교회는 보존되어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이며 묘지는 관리되고 있지만, 마리아 시클그루버의 묘비는 남아 있지 않다.

6. 친족

1940년, 히틀러의 재종사촌인 알로이지아 파이트(Aloisia Veit)는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하르트하임 안락사 시설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49세였던 그녀는 나치 독일의 장애인 말살 정책인 T4 작전의 희생자였으며, 독가스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