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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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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달라 체제는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에서 유래한 용어로, 동남아시아 지역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 용어는 중심 권력으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권력 구조와 체제의 비물질성을 강조하며, 역사적으로 크메르 제국, 스리비자야, 마자파힛 왕국 등이 만달라 체제의 주요 사례로 꼽힌다. 만달라 체제는 종주국과 종속국 간의 관계, 조공, 사적 관계, 비독점성 등의 특징을 가지며, 각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활용된다. 1976년 스탠리 J. 탐비아의 '은하 정체론'과 클리퍼드 기어츠의 '극장 국가론' 등은 만달라 체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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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 체제

2. 용어

만달라라는 용어는 힌두교불교세계관만다라(mandala, 曼茶羅, 曼陀羅)와 비교하여 사용된다. 이 비교는 각 권력 중심지로부터 권력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며, 체제 자체가 물리적인 영토보다는 관계에 기반한 비물리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S. J. 탐비아(S. J. Tambiah)가 제시한 '은하 정치 구조(galactic polity)'라는 개념[24][5] 역시 만달라와 유사한 정치적 패턴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역사학자 빅터 리버만(Victor Lieberman)[25][6]은 태양이 행성들에 미치는 중력적 영향력에 빗대어 '태양계 정치 구조(solar polity)'라는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26][7]

고대부터 근세까지 동남아시아 사회는 유럽의 부계 중심 사회와 달리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양성적 특징을 보였다. 사회적 지위가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았고, 권력 중심부에서는 끊임없이 혈연 간의 경쟁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세습을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왕국이 형성되기 어려웠으며, 권력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단순히 실력만으로는 넓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권력 구조는 지역별 소규모 주권 단위, 이를 묶는 중규모 주권 단위, 그리고 다시 이를 아우르는 대규모 주권 단위가 중첩되는 형태로 나타났다.[16] 이러한 권력 구조의 기반은 여러 층위에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마치 만다라처럼 중앙 권력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중층적이고 다원적인 연합 국가의 형태를 띠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특정 왕권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도시가 독자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국가로 여겨지는 영역 내부에서 도시들끼리 주도권을 다투는 모습 등이 나타나는데, 이는 만달라 체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17]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자신의 카리스마를 힌두교의 신격에 비유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는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소위 '인도화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관찰되는 현상이다.

3. 역사

1360년경 교차하는 만달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란쌍, 란나, 수코타이 왕국, 아유타야 왕국, 크메르 제국, 참파.


고대부터 근세에 걸쳐 동남아시아 사회는 유럽의 부계제 사회와는 달리 부계와 모계제가 공존하는 양성 사회적 특징을 지녔다. 사회적 지위가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았기에 권력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혈연 간의 다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세습을 통한 거대 왕국의 성립이 어려웠다. 권력자는 자신의 실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했다.[16]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권력 구조는 특정 지역의 작은 주권, 이를 묶는 중간 규모의 주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아우르는 큰 규모의 주권이 중첩되는 형태로 나타났다.[16] 이는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 권력의 지배 영역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중층적이고 다원적인 권력 연합체의 모습이었다. 실력만으로는 광역 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웠기에 이러한 형태가 발전한 것이다. 역사 기록을 보면, 특정 왕권의 지배하에 있는 듯한 도시가 독자적으로 중국조공을 바치거나, 현대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국가로 보이는 내부에서 도시 간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등의 현상은 이러한 만달라 체제로 설명될 수 있다.[17]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은 자신의 카리스마힌두교 신격에 비유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인도화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관찰되었다.

역사적으로 주요 종주국 또는 지배 국가는 다음과 같다.

지역국가/제국
캄보디아크메르 제국
남수마트라스리비자야
자바마타람 왕국, 케디리 왕국, 싱하사리, 마자파힛 왕국 (스리비자야의 후계 왕국들)
태국아유타야 왕국
참파참파
베트남초기 다이비엣[8]



중국은 다른 국가들이 차례로 조공을 바쳤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실제 소국들에 부과된 의무는 최소한에 그쳤다. 가장 주목할 만한 조공국으로는 앙코르 시대 이후 캄보디아, 란상 왕국(이후 비엔티안 왕국루앙프라방으로 계승됨), 란나 등이 있었다. 18세기 캄보디아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자롱 황제에 의해 "두 개의 노예인 독립 국가"(an independent country that is slave of two)로 묘사되기도 했다(Chandler p. 119).

19세기 중반, 유럽 세력의 등장은 만달라 체제의 종식을 가져왔다. 유럽인들은 모든 영토가 단일 주권자에게 속해야 한다는 서구식 지리 관념을 도입하고 이를 강요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말라야, 버마 등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식민 열강은 자신들의 소유에 대한 고정된 경계를 설정하도록 압박했다. 기존의 조공국들은 식민지와 시암(태국)으로 분할되었다. 시암은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지만,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은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이슬람이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에 출현한 이후에도 만달라 체제의 영향은 지속되었다. 18세기 말레이시아 네게리 셈빌란 연합체의 형성이 그 예인데, 중심지인 세리 메난티를 네 개의 내부 지역('루악 세람비')과 네 개의 외부 지역이 둘러싸는 구조를 가졌다.[9] 자바의 마자파힛 이후 이슬람 왕국들 역시 유사한 구조를 보였다.

역사학자 마틴 스튜어트-폭스는 '만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18세기부터 태국에 정복된 후 해체된 라오스 란상 왕국의 역사를 느슨하게 결속된 므앙들의 구조로 설명했다.[10][11]

태국 역사학자 수나잇 추틴타라논드(Sunait Chutintaranond)는 아유타야 왕국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다는 기존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가정이 타당하지 않으며, 아유타야에서 지방 통치자들의 패권이 결코 성공적으로 제거된 적이 없었음을 보여줌으로써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만달라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12][13]

4. 특징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사회는 유럽의 부계 사회와 달리 부계와 모계적 성격이 공존하는 양성 사회였다. 사회적 지위가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권력 내부의 경쟁이 치열하여, 세습을 통한 안정적인 대규모 왕국 형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권력자는 지속적으로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달라 체제는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여러 권력이 중첩되는 중층적이고 다원적인 권력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16]。 이는 마치 만다라와 유사한 형태로, 특정 왕권 하의 도시가 독자적으로 중국조공하거나 도시 간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17]。 권력자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힌두교 신격에 비유하며 권위를 강화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특징은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인도화된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관찰된다.

4. 1. 의무

'금꽃'을 뜻하는 붕가 마스()는 말레이 반도 북부 말레이 국가(Malay states)가 시암(Siam)에 보낸 대표적인 조공품이었다.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 국립박물관.


만달라 체제에서 각 참여자의 의무는 관계의 강도와 주변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종속국은 붕가 마스(bunga masms)라고 불리는 정기적인 조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 조공에는 값비싼 물품, 노예, 그리고 으로 만든 작은 나무 모형인 붕가 마스 단 페락(bunga mas dan perakms) 등이 포함되었다. 종주국 군주는 이에 대한 답례로 종속국이 바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물을 제공했다.

그러나 종속국은 종주국의 요청이 있을 때, 특히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병력과 군량 등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종속국이 얻는 주요 이점은 다른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었지만,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쿨(Thongchai Winichakul)은 이를 종주국 자체가 가하는 위협으로부터의 '마피아 같은 보호(mafia-like protection)'[33][14]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부 경우에는 종주국 군주가 종속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통제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종속국의 국내 문제에 대한 간섭은 최소화되었다. 예를 들어, 종속국은 자체적인 군대와 징세 권한을 유지했다. 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할 경우, 종주국은 이러한 관계를 조공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었지만, 종속국 입장에서는 선물 교환을 순수한 상업적 행위나 호의의 표현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Thongchai p. 87).

4. 2. 사적 관계

만달라 체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종속국 군주와 종주국 군주 간의 사적 관계이다. 이는 종속국의 군주가 추상적인 국가 개념이 아닌, 특정 종주국의 군주 개인에게 복속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적 관계는 만달라 체제의 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강력한 군주는 개인적인 역량과 매력을 통해 새로운 종속국을 끌어들이고 기존 종속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지만, 약한 군주는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람캄행 대왕 치세에 수코타이 왕국이 급격히 성장했다가 그의 사후 빠르게 쇠퇴한 것은 이러한 사적 관계에 기반한 만달라 체제의 특성 때문으로 분석된다(Wyatt, 45 and 48).

종속국의 군주는 상황에 따라 기존의 관계를 거부하고 다른 종주국을 선택하거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만달라 체제는 명확한 국경선을 가진 영토 기반의 체제가 아니었다. 종속국 또는 그 중심 도시는 종주국 군주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해당 지역의 모든 주민이 종주국에 직접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종속국의 군주는 자신의 영토나 백성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기 어려웠으며, 특히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대해서는 군주의 권한이 미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적 관계는 만달라 체제 내 권력 관계의 역학을 결정짓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리비자야의 마하라자였던 다르마세투와 자바의 사일렌드라 가문의 사마라퉁가 사이의 관계는 두 왕조의 후계 구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일렌드라 가문은 스리비자야 만달라 체제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사마라퉁가가 다르마세투의 딸인 타라 공주와 결혼하면서 다르마세투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사일렌드라 가문은 스리비자야의 왕위를 계승하는 왕가로 부상했고, 약 한 세기 동안 스리비자야의 중심지는 수마트라에서 자바로 이동하게 되었다.

4. 3. 비독점성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는 반드시 한쪽에만 속하는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국경 지역에 위치한 약소국은 때때로 두세 곳의 주변 강대국에게 동시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종속국의 군주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강대국들을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특정 강대국의 지나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다. 반대로 강대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종속국들이 자신들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대 말레이 반도에 있던 랑카수카탐브라링가 왕국은 초기에는 스리비자야 만달라에 속해 있었지만, 이후 북쪽의 아유타야 만달라와 남쪽의 마자파힛 만달라 사이에서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두 왕국은 말라카 술탄국 시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4. 4. 중층적 구조

고대부터 근세까지 동남아시아 사회는 유럽의 부계 사회와 달리 부계와 모계적 성격이 공존하는 양성 사회였다. 사회적 지위는 단순히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았으며, 권력 내부에서는 혈연 간의 경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세습을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왕국이 성립하기 어려웠고, 권력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실력만으로는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특한 권력 구조가 나타났다. 이는 지방의 작은 주권 단위들이 모여 중규모의 주권을 형성하고, 다시 이들이 모여 대규모 주권을 이루는 방식이었다.[16] 이러한 권력 구조는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여러 권력이 중첩되는 중층적이고 다원적인 형태를 띠었다. 즉, 중앙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불분명한 연합 국가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특정 왕권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도시가 독자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현대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국가로 여겨지는 영역 내에서 도시들끼리 주도권을 다투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만달라 체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17]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통치자가 자신의 카리스마를 힌두교의 신적인 존재에 비유하며 권위를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소위 "인도화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관찰된다.

5. 각 지역의 만달라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주요 만달라 체제 또는 종주국으로는 캄보디아크메르 제국, 남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자바의 마타람, 케디리, 싱가사리, 마자파힛 왕국, 태국아유타야 왕국, 참파, 그리고 초기 다이비엣 등이 있었다.[8] 이들 권력 중심은 주변의 작은 세력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망을 형성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조공을 바쳤으나, 이는 종종 형식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실제적인 의무는 제한적이었다. 앙코르 시대 이후의 캄보디아, 란쌍(이후 비엔티안 왕국루앙프라방으로 이어짐), 란나 등이 주요 조공국으로 꼽힌다. 18세기 캄보디아의 경우, 베트남 황제 자롱에 의해 "두 개의 노예인 독립 국가"(Chandler p. 119)로 묘사될 정도로 복잡한 위상을 가지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사회는 고대부터 근세까지 유럽의 부계 중심 사회와는 달리 부계모계가 공존하는 양성적 특징을 보였다. 사회적 지위가 단순히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았기에 권력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실력에 기반한 경쟁과 투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세습을 통한 안정적인 거대 왕국보다는, 권력자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방의 소규모 주권, 이를 아우르는 중규모 주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포괄하는 대규모 주권이 중첩되는 만다라 형태의 연합 국가 체제가 형성되었다.[16]

만달라 체제 하에서는 권력의 중심과 그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으며, 여러 권력이 중층적이고 다중적으로 겹쳐 존재했다. 역사 기록에서 특정 왕국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가 독자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하나의 국가로 인식되는 내부에서 도시 간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현상 등은 이러한 만달라 시스템으로 설명될 수 있다.[17]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은 자신의 카리스마힌두교의 신격에 비유하며 권위를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소위 "인도화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관찰되는 특징이다. 자바 지역에서는 마자파힛 제국 이후 등장한 이슬람 왕국들에서도 만달라적인 통치 방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학자 마틴 스튜어트-폭스는 라오스 왕국 란쌍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느슨하게 결속된 므앙(도시 또는 지역 단위)들의 집합체로서 만다라 개념을 적용했다. 란쌍은 18세기 태국에 정복된 후 해체되었다.[10][11]

이러한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만달라 체제는 19세기 중반 유럽 열강의 진출과 함께 큰 변화를 맞이했다. 서구 열강은 모든 영토가 단일 주권자에게 귀속된다는 자신들의 지리적 관념을 강요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말라야, 버마 등 식민지를 건설하고 고정된 국경선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조공국들은 식민지와 사이암(현재의 태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사이암 역시 이전보다 축소된 영토 내에서 더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로써 수 세기 동안 동남아시아의 정치 질서를 이루었던 만달라 체제는 점차 해체되었다.

5. 1. 베트남 남부

참파는 중앙 집권적인 왕국이라기보다는 인드라푸라, 아마라바티, 비자야, 카우타라, 판두랑가 등 각 지방 왕권이 연합한 형태에 가까웠다. 비문에는 참파의 왕이 "왕 중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러 세력이 공존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만달라 체제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7세기에 참파의 영토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쇠퇴가 뚜렷해진 상황에서도 참파 상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중앙 권력의 흥망과 별개로 지역 단위의 활동이 유지될 수 있었던 만다라적 성격을 보여준다.[19]

킨족(오늘날 베트남의 주요 민족) 국가의 남진 과정에서도 만달라 체제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의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은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참파의 멸망 역시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모든 지역을 일시에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주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력을 확장해나가는 만달라 체제의 양상과 유사하다. 또한, 떠이선 왕조 시대나 응우옌 왕조 초기 베트남 남부에서는 명나라 유민, 참파 유민, 캄보디아 세력, 그리고 자라이족이나 바나르족과 같은 산악 민족 세력을 활용하며 이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유연한 통치 방식에서도 다양한 세력 중심지가 공존하는 만다라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19]

5. 2. 태국 (차오프라야 유역)



차오프라야강 유역에 위치했던 아유타야 왕국은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주요 만다라 체제 중 하나로 꼽힌다.[8] 아유타야 왕조는 수도가 위치한 중심 평야 지역 외에 주변 지역들을 1등급부터 4등급까지의 조공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이는 마치 중심 별 주위를 여러 행성이 도는 모습과 비슷하여 '은하계적 구조'라고도 불린다.

태국의 역사학자 수나잇 추틴타라논은 아유타야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다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아유타야 내 지방 총독들의 패권이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지방까지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음을 주장했다.[12][13] 즉, 아유타야는 강력한 단일 권력체라기보다는 여러 세력 중심지가 공존하는 만다라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유타야 역사 전체에서 중앙 집권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21대 왕인 나레수안 대왕 시대에는 각 므앙(지방 행정 구역)마다 왕을 임명하던 기존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관리가 해당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는 정책(중앙 집권 제도)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5. 3. 보르네오 섬

보르네오 섬에서는 다야크족이나 말레이인이 형성한 마을 단위의 부족 공동체가 존재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브루나이 술탄, 술루 술탄, 란팡 공사 총장 등 상위 권력의 통솔 아래 국권을 유지하는 형태를 보였다. 더 나아가, 이들 상위 권력의 상당수는 다시 중국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5. 4. 말레이 반도

말레이 반도에서도 만달라 체제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슬람이 전파된 이후에도 이러한 정치 체제는 유지되었다. 18세기 네게리 셈빌란 연합의 형성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 연합은 세리 메난티를 중심지로 삼고, 그 주변을 4개의 내부 지역('루악 세람비')과 4개의 외부 지역이 둘러싸는 구조를 가졌다.[9] 이는 중심 권력과 주변부 세력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만달라 체제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열강의 등장은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정치 질서를 크게 바꾸었다. 영국령 말라야와 같은 식민지 건설 과정에서 서구식 주권 개념과 고정된 국경선이 강요되면서, 유동적이었던 만달라 체제는 점차 해체되었다.

현대 말레이시아연방제 국가이며,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11개 주 중 9개 주에는 여전히 세습 군주인 술탄이 존재한다. 이는 과거 만달라 체제 하에서 각 지역 세력이 유지했던 독자성의 흔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6. 선행 연구

만달라 체제 개념에 앞서 유사한 논의들이 있었다. 1976년 미국의 인류학자 스탠리 탐비아(Stanley Jeyaraja Tambiah)는 "은하 정체론"(Galactic Polity)을 제시했다. 이는 아유타야 왕조를 모델로,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왕권 주위에 비슷한 형태의 소규모 왕조들이 위성처럼 분포하며 끊임없이 합쳐지고 분리되는 모습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모델에서 각 정치 단위는 서로 분업 관계에 있지 않아 자립이 가능하며, 정복은 완전한 소멸이 아닌 흡수의 형태를 띤다고 보았다.

또한 1980년에는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누가라: 19세기 발리의 극장 국가"(Negara: The Theatre State in Nineteenth-Century Bali)에서 "극장 국가론"(Theatre State)을 주장했다. 기어츠는 19세기 발리의 사례를 통해, 국가의 정치, 경제, 의례 등이 중앙의 강력한 통제 없이도 작동하며, 특히 중층적이고 다양한 사회에서는 고정된 건축물보다 의례와 같은 상징적이고 연극적인 행위가 국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더 중요했다고 분석했다.

참조

[1] 학술지 How Maps Made the World http://www.wilsonqua[...] 2011-Summer
[2] 학위논문 Mapping the Sovereign State: Cartographic Technology, Political Authority, and Systemic Change http://gradworks.umi[...]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3] 문서 O.W. Wolters, 1999, p. 27
[4] 뉴스 Mandala: from sacred origins to sovereign affairs in traditional Southeast Asia Bond University Australia 2003-01-01
[5] 서적 World Conqueror and World Renouncer : A Study of Buddhism and Polity in Thailand against a Historical Backgrou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Victor B. Lieberman http://www.umich-cse[...] University of Michigan 2005-02-04
[7] 문서 Lieberman, 2003, p. 33
[8] 문서 O.W. Wolters, 1999, pp. 27–40, 126-154
[9] 학술지 The galactic polity in Southeast Asia https://www.journal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0] 문서 Martin-Fox, 1998, pp. 14–15
[11] 학술지 Conflicting conceptions of the state: Siam, France and Vietnam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http://www.siamese-h[...] Siam Heritage Trust
[12] 문서 O.W. Wolters, pp. 142–143 citing Chutintaranond, 1990, pp. 97–98
[13] 학술지 Mandala, Segmentary State and Politics of Centralization in Medieval Ayudhya http://www.siamese-h[...] Siam Heritage Trust
[14] 서적 Siam Mapped
[15] 문서 桃木 (1996) p.62
[16] 문서 地方の主権は、たとえばマレー語ではヌガラ、タイ語では[[ムアン]]と呼ばれるものである。これらの単語は、現代ではともに「国」を意味する語となっているが、今でもあちらこちらにムアン〇〇、✕✕ヌガラといった地名が残っている。
[17] 문서 桃木 (1996) p.63
[18] 문서 桃木 (1996) p.65
[19] 문서 桃木 (1996) p.7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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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Martin-Fox, 1998, pp. 14–15
[30] 학술지 Conflicting conceptions of the state: Siam, France and Vietnam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http://www.siamese-h[...] Siam Heritage Trust
[31] 문서 O.W. Wolters, pp. 142–143 citing Chutintaranond, 1990, pp. 97–98
[32] 학술지 Mandala, Segmentary State and Politics of Centralization in Medieval Ayudhya http://www.siamese-h[...] Siam Heritage Trust
[33] 서적 Siam Map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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