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코타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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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코타이 왕국은 13세기 중반에 타이족이 크메르 세력을 몰아내고 세운 태국 최초의 독립 왕국이다. 람캄행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태국 대부분을 영토로 확장했고, 수코타이 문자를 창제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번성했다.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14세기 중반 아유타야 왕국에 복속되어 멸망했다. 수코타이 왕국은 태국 문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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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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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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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태국어: |
로마자 표기 | Anachak Sukhothai |
일반 명칭 | 수코타이 왕국 |
시대 | 후기 고전 시대 |
건국 | 도시 국가로 설립 (1127년) |
왕국 설립 | 1238년 |
멸망 | 아유타야에 합병 (1438년) |
멸망 후 | 마하 탐마라차티랏 즉위 (1569년) |
존속 기간 | 1238년–1438년 |
수도 | 수코타이 (1238년–1347년) 송크왜 (1347년–1438년) |
공용어 | 고대 타이어 |
종교 | 상좌부 불교 |
통화 | 폿두앙 조개 화폐 |
정치 체제 | 만달라 왕국 |
현재 국가 | 태국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
역사 | |
건국 이전 | 라보 왕국에서 독립 |
영토 확장 | 람캄행 왕 재위 기간 (1279년 - 1299년) |
아유타야 속국 | 아유타야 왕국의 조공국 (1378년–1438년) |
아유타야 합병 | 아유타야 왕국과 동군연합 (1448년) |
타웅구 속국 | 타웅구 왕조의 속국 (1563년) |
아유타야 합병 완료 | 마하 탐마라차 왕의 즉위로 아유타야에 완전히 합병 (1569년) |
군주 | |
초대 군주 | 시 인트라팃 (1238년–1270년) |
주요 군주 | 람캄행 (1279년–1298년) |
주요 군주 | 리타이 (1347년–1368년) |
마지막 군주 | 보롬마판 (1419년–1438년) |
군주 칭호 | 왕 |
2. 역사
타이족은 원래 운남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왔으며, 13세기경까지는 앙코르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앙코르 왕조의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한 후, 타이족이 진출해 있던 지역에서 앙코르 왕조의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12세기경부터 태국 북부에 할거하던 태국인 토후국들이 점차 성장했고, 13세기 중반, 랏(현재의 펫차부리)의 소규모 타이족 영주 포쿤 파므앙과 반얀(현재의 나콘타이)의 소규모 타이족 영주 포쿤 방클랑하오가 힘을 합쳐 크메르인의 세력을 몰아내고,[31] 당시 앙코르 왕조의 주요 도시였던 수코타이에 소규모 타이족 왕조를 세웠다. 방클랑하오는 시 인트라티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수코타이 왕조의 성립).
시 인트라티트의 통치 아래 초기 수코타이 왕국은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성장했다. 주요 무앙(เมือง)으로는 수도 수코타이 외에도 시사차나라이, 쏜크웨(피싸누록), 나콘춤(캄팽펫), 프라반(나콘사완), 웃타라디트, 차이나트 등이 있었다. 또한 태국 중부의 스판부리, 라차부리, 펫차부리와 태국 남부의 나콘시탐마랏 등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수코타이 왕조의 통치는 아버지인 왕이 자식인 백성을 보호·지도하는 부권주의 형태였다.[32]
수코타이 왕조는 3대 왕 람캄행 대왕(재위 1279년경 - 1298년[30])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람캄행은 짜오프라야강 중·하류 지대와 말레이 반도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원나라와 교류하며 상칼록 도자기를 수출하는 등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또한 최초의 수코타이 문자를 정했고,[33] 상좌부 불교가 들어오는 등 주변의 문화가 풍부하게 유입되었다.
람캄행 대왕 사후 왕국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르며 소국이 되었다. 남쪽의 짜오프라야강 하류지역인 아유타야를 수도로 하는 아유타야 왕국이 번성해갔다. 1347년에 수코타이 왕국은 아유타야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1438년에 아유타야 왕국에 완전히 합병되면서 멸망했다.
2. 1. 초기 역사 (독립)
12세기경부터 태국 북부에 할거하던 태국인 토후국들이 점차 성장했다. 13세기 중반, 포쿤 방클랑하오와 포쿤 파므앙이 크메르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8] 이들은 힘을 합쳐 크메르 세력을 몰아내고, 당시 앙코르 왕조의 주요 도시였던 수코타이에 소규모 타이족 왕조를 세웠다.[31] 방클랑하오는 시 인트라티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라 프라 루앙 왕조를 건립했다(1238년).[8]시 인트라티트의 통치 아래 초기 수코타이 왕국은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성장했다. 주요 무앙(เมือง)으로는 수도 수코타이 외에도 시사차나라이, 쏜크웨(피싸누록), 나콘춤(캄팽펫), 프라반(나콘사완), 웃타라디트, 차이나트 등이 있었다. 또한 태국 중부의 스판부리, 라차부리, 펫차부리와 태국 남부의 나콘시탐마랏 등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2. 2. 람캄행 대왕 시대 (전성기)
람캄행 대왕은 타이족이 세운 수코타이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람캄행 대왕은 정복 활동을 통해 짜오프라야강 중·하류 지대와 말레이 반도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남쪽으로는 수판부리로 추정되는 수반나부미와 나콘시탐마랏으로 추정되는 탐브랄링가를 정복하고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5] 북쪽으로는 프래와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추정되는 므앙 수아 등 여러 도시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서쪽으로는 한타와디 왕국의 전신인 마르타반(현재 미얀마 바고)을 복속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5]람캄행 대왕은 1283년에 수코타이 문자를 창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자는 람캄행 비문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현대 태국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원나라와 교류하며 상칼록 도자기를 수출하는 등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람캄행은 스리탐나콘에서 승려들을 초청하여 수코타이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다.
2. 3. 쇠퇴와 아유타야 왕국으로의 흡수 (쇠퇴와 멸망)
람캄행 대왕 사후, 수코타이 왕국은 내분과 주변 국가들의 독립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람캄행 사후 수코타이의 속국들은 빠르게 독립을 선언했다. 북쪽의 웃타라디트와 무앙 수아, 비엥짠 비엥캄 (현재의 비엔티안)의 라오스 왕국들이 수코타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17] 1319년에는 서쪽의 마르타반이 독립했고, 1321년에는 란나 왕국 (응웬양의 후계 국가)이 수코타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탁을 병합했다. 남쪽의 수판나품 왕국과 나콘시탐마랏 또한 뢰 타이 치세 초기에 독립했다. 따라서 수코타이 왕국은 빠르게 지역 세력으로 전락했다.[17]1347년 짜오프라야강 하류지역인 아유타야를 수도로 하는 아유타야 왕국이 번성해갔다. 1349년 아유타야 왕국은 수코타이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8] 속국 내 권력 중심지는 송크와이 (현재의 피사누룩)로 이동했다. 1378년 루에 타이 (마하 탐마라차 2세)는 아유타야에 종속국으로 복속해야 했다.[18]
1424년 사이 루에 타이 사후 그의 아들들인 파야 람과 파야 반 므엉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아유타야의 인타라차가 개입하여 반 므엉을 보롬마판 (마하 탐마라차 4세)으로 옹립했다. 1438년 보롬마판이 죽자 아유타야의 보롬마라차티랏 2세는 그의 아들 라메수안 (미래의 아유타야의 보롬마트라이로카낫)을 수코타이의 우파랏으로 임명했다. 이는 총독과 왕세자의 역할을 모두 맡는 것과 유사하여 일종의 동군연합을 수립하고, 샴의 전궁 시스템을 만들었다. 라메수안 왕자는 아유타야의 행정 직원과 군사 주둔군을 동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수코타이가 독립 왕국으로서의 종말을 의미한다.[19] 결국 1438년에 수코타이 왕국은 아유타야 왕국에 완전히 합병되면서 멸망했다.
2. 4. 아유타야 왕국 흡수 이후
아유타야 왕국에 흡수된 이후, '북부 도시들'이라고 불린 수코타이 옛 영토는 아유타야의 지배 아래 지역 귀족들에 의해 만달라 시스템에 따라 통치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 동안 만달라들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융합되었고, 수코타이의 전쟁, 행정, 건축, 종교 관습, 언어는 아유타야에 영향을 미쳤다. 수코타이 귀족들은 혼인 동맹을 통해 아유타야 엘리트와 연결되었고, 종종 아유타야 왕위 계승 분쟁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수코타이의 군사 전통이 더 강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수코타이 군 지휘관들은 아유타야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0]1456년부터 1474년까지 옛 수코타이 영토는 아유타야-란나 전쟁(1441년~1474년) 동안 전쟁터가 되었다. 1462년, 수코타이는 아유타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란나와 동맹을 맺었다. 1463년, 보롬마트라이로카낫 왕은 왕궁을 송크와이로 옮겼고, 이 도시는 피차이로 이름이 영구적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포르투갈 상인들은 아유타야와 피차이를 "쌍둥이 국가"로 묘사했다.[20]
1548년, 마하 짝크라팟은 수코타이 씨족 출신 귀족인 쿤 피렌토라텝을 피차이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피렌토라텝은 마하 탐마라차라는 이름을 받았고, 마하 짝크라팟의 딸과 결혼했다. 버마 톤우 제국과의 전쟁 후, 마하 탐마라차는 아유타야에 대항하여 버마와 동맹을 맺었다. 1569년, 아유타야는 버마에 함락되었고, 바인나웅은 마하 탐마라차를 아유타야의 봉신왕으로 임명했고, 그는 수코타이 왕조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20]
1584년, 나레수안 대왕은 1584년~1593년 버마-시암 전쟁에서 아유타야를 버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시타웅 강 전투 이후, 나레수안은 피차이, 수코타이, 피차이, 싸완칼록, 깐펭펫, 피칫, 프라방의 북부 도시들에서 사람들을 아유타야로 강제 이주시켰다.[21][22] 그 이후로 옛 수코타이 왕국의 수도 유적은 수코타이 역사공원으로 보존되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23]
3. 정치
수코타이 왕국의 초기 정치 체제는 '포쿤'이라 불리는 왕이 백성을 아버지처럼 돌보는 부권주의적 통치 형태였다. 람캄행 대왕 비문에는 람캄행이 백성들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고민을 들어주며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과 백성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수코타이의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반영한다. 람캄행은 각 지역을 통치할 때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으며, 북부의 깜므앙, 난나이와 맺은 동맹도 개인적인 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람캄행 사후에는 왕과 각 지역 국주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약화되면서 각지의 이탈이 발생하여 국력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람캄행은 영내의 4대 무앙(부도)에 부왕(우파라자) 및 친척 왕족을 두고, '대무앙'이라 불리는 지방 중요 도시에도 왕족을 파견하여 포쿤의 사상으로 통치하게 했다. 수코타이 근교에는 타이족에 동화되지 않은 몬족이 많이 거주했지만, 수코타이 왕들은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이들을 포용하는 온화한 통치를 시행했다.[33]
람캄행 이후 왕조가 쇠퇴하면서 포쿤의 의미는 희미해졌고, 리타이 왕은 불법왕(탐마라차) 사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탐마라차는 불법으로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을 의미하며, 종교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사상이었다. 리타이 이후 왕은 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고, 이는 태국의 불교 우위 확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포쿤의 사상이 남아있어 다른 종교를 믿는 신하들도 보호했기 때문에 종교 탄압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코타이의 역대 왕은 전설적인 프라 루앙을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프라 루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4. 사회
수코타이 사회는 왕족, 귀족, 평민, 노예 등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였다. 초기에는 왕들이 포쿤(백성을 보호하고 악을 제거하는 아버지 같은 군주)으로 불리며 백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람캄행 대왕은 백성들의 고민을 직접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했다.[33]
하지만 람캄행 사후, 왕과 각 지역 국주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소멸되면서 각지의 이탈이 발생하고 국력이 쇠퇴했다. 리타이 왕은 위기감을 느끼고 불법왕(탐마라차) 사상을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탐마라차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을 의미하며, 종교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리타이 이후, "따뜻한 군주"를 뜻하는 포쿤의 개념은 희미해지고, 왕은 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상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좌부 불교가 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영향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분제를 더욱 강화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 문화
13세기 후반 람캄행 대왕의 통치 아래 타이족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현재 태국 대부분을 영토로 하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람캄행 대왕은 짜오프라야강(메남강) 중·하류 지역을 통합하고 말레이 반도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왕은 직접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중국 도공들을 초빙하여 스완칼로크 자기로 알려진 태국 도자기가 발달했다. 미얀마에서 발달한 상좌부 불교가 유입되었고, 캄보디아로부터 예술 및 행정 조직에 영향을 받는 등 주변 문화가 풍부하게 유입되었다. 그러나 태국 고유의 민족 문화도 싹트기 시작하여 수코타이 문자(태국 문자)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5]
람캄행 대왕 사후 왕국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남쪽 짜오프라야강 하류 지역 아유타야를 수도로 하는 아유타야 왕국이 번성하였다. 1347년 아유타야 왕국은 수코타이 왕국을 속국화하고 태국 전역의 통일을 시도하였으며, 1438년에 수코타이 왕국을 완전히 합병하면서 수코타이 왕국은 멸망하였다.
5. 1. 종교
람캄행 대왕이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상좌부 불교는 수코타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5] 람캄행 대왕은 스리탐나콘에서 승려들을 초청하여 수코타이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도록 했다. 리타이 왕은 실론에서 불교를 들여와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불교 경전인 '삼계경'을 저술하여 불교 교리를 백성들에게 전파했다. 삼계경은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업보응의 개념을 설명하고, 지옥의 모습을 과장되게 그려내어 일반 백성들이 쉽게 불교를 이해하도록 도왔다.업보응보 사상은 19세기 라마 4세에 의해 부정될 때까지 불교의 공식적인 견해처럼 여겨졌으며, 현재에도 민간에서는 널리 믿어지고 있다. 또한 "귀천의 차이는 전생의 행위에 따른다"는 개념을 보급시켜 빈부의 차이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나는 나쁜 전생이 있다"고 생각한 노예와 농민의 생산 의욕은 저하되었고, 왕족과 관료는 이익 추구를 "나는 좋은 전생이 있다"고 정당화하여 제어가 되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아유타야 왕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야마다 나가마사를 대표로 하는 일본인 용병의 등장, 서양 기업의 난립, 화교 및 이슬람권 상인의 대규모 유입 등 외국인이 왕족·관료와 결탁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5. 2. 문자
람캄행 대왕은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수코타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283년에 람캄행이 수코타이 문자를 발명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문자는 이후 현재 태국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이 고대 태국 문자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6세기 후 몽꿋에 의해 발견된 람캄행 비문에서 볼 수 있다.[5]람캄행 대왕 비문에서는 주변 국가들과 달리 모음의 상하 배치가 좌우 배치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람캄행이 크메르 문자를 본떠 태국 문자를 만들 때 독자성을 내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5. 3. 예술
타이족이 13세기 후반 람캄행 대왕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중국의 도공을 데려와 스완칼로크 자기로 알려진 태국 도자기가 발달했다. 미얀마에서 발달한 상좌부 불교가 유입되고, 캄보디아로부터 예술 등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다.스코타이 왕조는 수코타이 역사공원, 시사차날라이 역사공원, 캄팽펫 역사공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앙코르 와트로 대표되는 Khmer architecture|크메르 건축영어을 기반으로 스리랑카 양식을 가미한 태국 고유의 건축 양식을 확립했다.
불상 미술에서는 수코타이 불상이라 불리는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는 부드러운 여성적인 곡선이 특징으로, 아유타야 왕국에서도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현재도 대승 불교 사원 이외에서는 거의 항상 배치될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람캄행 대왕이 초빙한 장인들에 의해 개발된 사완칼록 도자기는 쌀과 함께 중국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었다.
6. 역대 국왕
불력과 서력의 오차를 수정하지 않았고, 왕의 즉위·퇴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제시된 연도는 어디까지나 기준일 뿐이다.[4] 푸 프라야 씨 쏭클람은 람캄행 대왕 이후, 르타이 이전에 대리 통치했다고 전해진다.[5]
7. 유산
수코타이 왕국은 태국 역사상 최초의 독립 왕국으로, 태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중요한 왕국으로 평가받는다.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코타이 왕국의 건축, 예술,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24][25]
수코타이의 실라주르크(Silajaruek)는 수백 개의 돌에 새겨진 비문으로, 당시의 역사 기록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비문으로는 람캄행 비석(Ram Khamhaeng Inscription, 비문 1번), 실라주르크 왓 스리춤(Silajaruek Wat Srichum, 이 지역과 스리랑카(Sri Lanka)의 역사 기록), 실라주르크 왓 파마무앙(Silajaruek Wat Pamamuang, 로에 타이의 정치 종교적 기록)이 있다.
몽꿋(Mongkut)(라마 4세)은 수코타이 역사의 "최초의 증거"인 비문 1번을 발견하여 수코타이 서사 역사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몽꿋이 발견한 비문에는 람캄행과 같은 영웅적인 왕들, 행정 체제, 왕국의 "번영기" 시대의 발전 상황이 담겨 있었다. 수코타이 이야기는 19세기 후반 몽꿋에 의해 태국의 "국가 역사"에 통합되었고, 영국 외교 사절단에 제시된 역사적 저술로 자리 잡았다.[24]
이후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수코타이 왕국 역사는 근대 시암(Siam) 역사에 포함되었다. 수코타이는 "최초의 수도"[25]로 여겨졌으며, 아유타야, 톤부리를 거쳐 랏타나코신(오늘날의 방콕(Bangkok))으로 이어졌다.[26] 비문의 내용은 연구와 이론화의 대상이 되었다.[27]
가장 잘 알려진 주제 중 하나는 수코타이의 "민주주의" 통치였다. 왕과 백성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부자" 관계로 묘사되었고,[28] 고대 태국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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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am Heritage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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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The Oldest Known Writing in Siamese; the inscription of Phra Ram Khamhaeng of Sukhothai, 1293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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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pigraphical and historical studies, nos. 1–24 published in the Journal of the Siam Society from 196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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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Law in traditional Siam and China: A comparative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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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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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タイ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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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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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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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タイ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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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タイ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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