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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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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람캄행은 수코타이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시 인타라딧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고, 쩌뜨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람캄행"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279년경 형 반므앙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람캄행은 국민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상업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온정주의적인 시정을 펼쳤다. 그는 파야오 왕국, 란나 왕조와 동맹을 맺고 원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도자기 기술을 수입하는 등 정치 및 외교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타이 문자를 창제하고 소승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람캄행 대왕 비문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람캄행은 수코타이 왕조의 건국자 시 인타라딧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람캄행 대왕 비문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고, 1250년대 말에 일어난 딱의 귀속을 둘러싼 쩌뜨국과의 전쟁에 왕자로 참전하여 쿤 삼촌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하여 라마와 같은 강자를 의미하는 '''람캄행'''의 칭호를 받았다. 형 반므앙의 재위 기간 동안 부왕의 지위에 올라 시 삿차날라이에 부임했다.[5] 1279년경 반므앙이 사망하자, 람캄행이 왕위에 올랐다.[5]

람캄행 대왕 비문에는 람캄행이 국민 전체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고, 국민은 민족에 관계없이 이익을 누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 수코타이 왕조에서는 상업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고인의 재산은 모두 자녀에게 상속되었다.[7] 또한, 범죄 피해를 입은 국민은 국왕에게 직접 소송을 제기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국민의 소송에 직접 판결을 내리는 국왕의 직무는 차크리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존속되었다.[8]

비문 속에서 람캄행은 "포쿤(아버지)"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온정주의에 기반한 시정은 라마 9세 (푸미폰)나 사릿 타나라트 등 후세의 태국 국왕과 정치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8]

2. 1. 출생과 성장

람캄행은 1237년에서 1247년 사이 수코타이의 왕 퍼쿤 씨 인트라팃과 쓰엉 부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람캄행 비문에 따르면 씨 인트라팃과 쓰엉 부인 사이에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중 큰형은 어릴 때 사망했으며 둘째 형인 반 므엉은 람캄행에 앞서 수코타이를 통치했다. 람캄행 대왕 비문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고, 1250년대 말에 일어난 딱의 귀속을 둘러싼 쩌뜨국과의 전쟁에 왕자였던 그도 종군했다. 이때, 전투 코끼리를 몰아 쩌뜨국의 왕 쿤 삼촌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했고, 인타라딧으로부터 전공을 칭찬받아 "라마와 같은 강자"를 의미하는 '''람캄행'''의 이름을 받았다.[2][5]

2. 2. 즉위

시 인타라딧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람캄행 대왕 비문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고, 1250년대 말 딱의 귀속을 둘러싼 쩌뜨국과의 전쟁에 왕자로 참전했다. 이때, 전투 코끼리를 몰아 쩌뜨국의 왕 쿤 삼촌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했고, 인타라딧으로부터 "라마와 같은 강자"를 의미하는 '''람캄행'''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5] 형 반므앙 재위 기간 동안 부왕의 지위에 올라 시 삿차날라이에 부임했다.[5] 1279년경 반므앙이 사망하자, 람캄행이 왕위에 올랐다.[5]

3. 업적

람캄행은 정치, 외교,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람캄행 비문에 따르면 람캄행은 자신에게 보호받기를 원하는 영주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 지역 통치를 맡겼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는 지방 통치를 지원했다.[2] 또한, 적군 포로를 자비롭게 대우하여 수코타이 왕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했다.

1283년에는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어 발음과 성조를 표기하는 데 적합한 타이 문자를 창제했다.[11] 이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도록 지시한 것보다 약 1-2세기 앞선 것이다.

스리랑카의 실론 왕국에 승려를 유학 보내고, 스리랑카인 승려를 모셔 와 왕실과 평민 모두 소승불교를 믿도록 장려하였다.[25] 실론 왕국은 수코타이 왕국에 왕가를 수호하는 황금 불상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3. 1. 정치 및 외교

람캄행 비문에 따르면 람캄행은 자신의 보호를 받고 싶어하는 영주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 지역 통치를 맡겼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는 지방 통치를 지원했다.[2] 또한, 적군 포로를 자비롭게 대우하여 수코타이 왕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했다.

주변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파야오 왕국의 응암 므엉 왕과 란나 왕조의 망라이 왕 등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1282년부터 1323년까지 원나라에 외교 사절단을 보내 국교를 맺고 도자기 기술을 수입했다. 이 도자기 기술은 태국 문화와 결합해 이후 쌍칼록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한다.

람캄행은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대립하는 국가들을 중립화하는 정책을 펼쳤다.[1] 1287년[12] 북쪽의 란나 왕조의 맹라이 왕, 파야오 왕국의 감므앙 왕과 동맹을 맺어 북쪽의 안전을 다졌고, 크메르 왕조[13]와 원나라[14]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수코타이의 군인이었던 와레루(마가두)가 페구 왕조를 건국하자, 람캄행은 와레루를 지원했고,[15] 와레루 측도 수코타이에 신종을 맹세하여 수코타이 서쪽의 안전을 보장받았다.[13]

람캄행 재위 기간 동안 수코타이 왕국의 지배 범위는 크게 확장되었다.

방향지역
북쪽람빵, 프래, , 루앙프라방[4]
남쪽캄팽펫, 나콘사완, 수판부리, 펫차부리, 나콘시탐마랏[4]
동쪽피싸눌록, Lom Kao District|롬카오영어, 비엔티안[4]
서쪽매솟, 페구, 테나세림, 말타반[4][16]



그러나 이러한 수코타이의 지배력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다.[17] 난,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나콘시탐마랏 등은 비타이인 영주들이 통치하며 공납과 병력 제공을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다.[18]

수코타이와 주변 소규모 므앙(지방 정권) 사이에는 람캄행의 지도력과 인망 아래 상호 보호 관계가 성립되었다.[14][19] 므앙은 수코타이에 공물, 노동력, 군사력을 제공하고, 수코타이는 이들을 보호했다. 람캄행은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소므앙 지배자를 통한 간접 통치도 병행했다.[19] 그러나 므앙 영주들 중 일부만이 수코타이에 충성을 맹세했고,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왕의 권위는 약해졌다.[14][17] 이러한 형태의 국가는 "만다라 국가"라고 불리며, 동남아시아 여러 왕국에서 나타났다.[17]

만다라 국가는 국왕의 자질에 따라 지배 영역이 변동하는 특징을 보인다.[17] 람캄행 사후, 수코타이 종속 하의 므앙들은 잇따라 독립하며 수코타이의 세력은 축소되었다.[20][21]

람캄행 통치 시기, 수코타이와 원나라는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13] 1282년 원나라 사신 허자지가 수코타이를 방문했고, 1292년 수코타이 사절단이 답례로 원나라를 방문했다.[22] 1294년, 1297년, 1300년 세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사절이 파견되었다. 1297년 사절단에는 왕자 로타이가 단장으로 참가하여 원나라 황제 성종에게 의복을 하사받았다.[23] 1300년 사절단은 중국 도공들을 데려와 수코타이와 쌍칼록에서 상갈로(상갈록) 구이 제조를 시작했다.[11][23] 상갈로 구이는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수출되었고, 일본에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전해졌다.[24]

3. 2. 문화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어의 발음과 성조를 비롯 발리어, 산스크리트어크메르어, 중국어 등 외국어와 외래어 발음을 표기하는 데 적합한 아부기다 계통의 타이 문자를 독자적으로 창제하였다. 왕실에 의한 문자 창제로는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이 창제하도록 지시한 훈민정음보다 약 1-2세기 앞선 것이다. 람캄행 비문 또한 타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9]

"람캄행 대왕 비문"의 별칭(통칭)으로 알려진 "수코타이 제1각문"은 1292년에 제작된 태국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비문이다.[10] 비문은 1833년에 즉위 전의 라마 4세(몽쿳)에 의해 발견, 해독되었고, 유사한 비문이 람캄행 대왕 비문의 발견에 이어 발견되면서 수코타이 왕조 연구가 진전되었다.[3] 람캄행은 1283년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한 태국 문자를 고안했다고 여겨지며,[11] 비문에는 람캄행의 문자가 사용되었다.[3]

수코타이는 풍요로운 토지를 가진 목가적인 국가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태국 사회와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수코타이 왕조는[4] 종종 동시대에 캄보디아에 존재했던 크메르 왕조나[1] 후대에 성립된 아유타야 왕조[2]와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비문의 사료성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비문은 19세기에 제작된 후대의 위작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3]

3. 3. 종교

람캄행 비문에 따르면 람캄행 왕은 스리랑카의 실론 왕국에 승려를 유학 보내고, 스리랑카인 승려를 모셔 와 왕실과 평민 모두 소승불교를 믿도록 장려하였다.[25] 실론 왕국은 수코타이 왕국에 왕가를 수호하는 황금 불상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수코타이의 불교 문화는 훗날 아유타야와 현대 타이 왕국의 독특한 불교문화로 이어진다.

13세기 말, 람캄행이 왕위에 있었을 때, 태국, 버마, 캄보디아의 승려들 중에는 상좌부 불교의 중심지인 실론섬으로 건너가 교리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25] 람캄행은 말레이 반도를 행차했을 때, 나콘시탐마랏에서 실론섬에서 귀국한 승려의 설법을 통해 상좌부 불교의 교리에 접하게 되었고, 이를 신앙하게 되었다.[25] 국가의 보호를 받은 나콘시탐마랏의 승려들은 각지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으며, 실론섬과의 사절단 교류도 이루어졌다.[25] 이때 실론의 사절단으로부터 스코타이에 시힝불상이 증정되었다.[25]

람캄행은 백성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과 함께, 자신도 기부를 하고, 승려들의 설법에도 귀를 기울였다.[6] 이러한 불교 보호 사업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며,[26][27] 람캄행이 실시한 국왕에 의한 불교 보호 사업은 스코타이 이후의 태국 여러 왕조에도 계승되었다.[8]

4. 평가

"람캄행 대왕 비문"(통칭 "수코타이 제1각문")은[9] 1292년에 제작된, 태국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비문이다.[10] 1833년 즉위 전 라마 4세(몽쿳)가 발견하여 해독했으며, 이후 유사한 비문들이 발견되면서 수코타이 왕조 연구가 진전되었다.[3] 람캄행은 1283년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 문자를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으며,[11] 비문에는 람캄행의 문자가 사용되었다.[3]

수코타이는 풍요로운 토지를 가진 목가적인 국가로 묘사되며, 현재 태국 사회와 문화의 뿌리로 여겨지는 수코타이 왕조는[4] 동시대 캄보디아의 크메르 왕조나[1] 후대 아유타야 왕조[2]와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비문의 사료적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만, 19세기에 제작된 위작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

5. 람캄행 대왕 비문

1833년 즉위 전의 라마 4세(몽쿳)에 의해 발견, 해독된 "람캄행 대왕 비문"은 "수코타이 제1각문"으로도 불리며, 1292년에 제작된 태국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비문이다.[9][10] 람캄행은 1283년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 문자를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으며,[11] 비문에는 람캄행의 문자가 사용되었다.[3] 비문의 발견 이후 유사한 비문들이 발견되면서 수코타이 왕조 연구가 진전되었다.[3]

1835 BE(1292년/1293년)에 창간된 것으로 알려진 람캄행 구독(가입 번호 1번)에는 람캄행의 자서전이 수록되어 있다.[28][29]

람캄행의 자서전 내용[29]:

나의 아버지는 시 인터라티라고 불렸다. 나의 어머니는 수앙(Sueang)부인이라고 이름지어졌다. 형은 반 무앙이라고 한다. 우리 다섯 사람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났다. 세 명의 남자아이와 두 명의 여자아이였다. 큰오빠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겼다. 사냥감을 찾거나 생선을 잡으면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맛있고 먹기 좋은 달콤한 과일을 산에서 고를 때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다. 코끼리를 사냥하러 갔을 때, 그것들을 올가미이나 울타리로 몰아서 몇 마리를 잡았을 때, 나는 코끼리들을 아버지에게 데려왔다. 마을이나 마을을 급습해 코끼리나 남녀, 은이나 금을 잡아오면 아버지에게 넘겨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형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섬겼듯이 그를 변함없이 섬겼다.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온 나라를 나 혼자 얻었다.


반 므앙은 프라루앙 가의 혈통을 설명하는 푸쿤 치트 쵸트 구독(Pu Khun Chit Khun Chot Inscription)에도 언급되어 있다.[30]

수코타이는 풍요로운 토지를 가진 목가적인 국가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태국 사회와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수코타이 왕조는[4], 종종 동시대에 캄보디아에 존재했던 크메르 왕조나[1], 후대에 성립된 아유타야 왕조[2]와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비문의 사료성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비문은 19세기에 제작된 후대의 위작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3]

참조

[1] 서적 ラーマ・カムヘン
[2] 서적 ラームカムヘーン
[3]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4]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5] 서적 タイの歴史
[6] 서적 タイの歴史
[7] 서적 東南アジアの伝統と発展
[8]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9] 서적 ラームカムヘーン 明石書店 2003
[10] 서적 タイの歴史
[11] 서적 ラーマ・カムヘン
[12] 서적 東南アジアの伝統と発展
[13] 서적 タイの歴史
[14] 서적 上座仏教世界
[15] 서적 上座仏教世界
[16] 서적 タイの歴史
[17]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18] 서적 タイの歴史
[19]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20]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21] 서적 上座仏教世界
[22] 서적 タイの歴史
[23] 서적 タイの歴史
[24] 서적 東南アジアの伝統と発展
[25] 서적 タイの歴史
[26] 서적 物語タイの歴史 微笑みの国の真実
[27] 서적 東南アジアの伝統と発展
[28] 웹사이트 Charuek Phokhun Ram Khamhaeng 2006
[29] 웹사이트 Chulalongkorn University 1984
[30] 웹사이트 Charuek Pu Khun Chit Khun Cho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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