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미지야마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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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미지야마 문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설치한 후지미테이 어문고를 시작으로, 에도 막부 시대에 걸쳐 장서가 확충된 도서관이다. 에도 시대에는 쇼군 가문, 오와리 가문, 기슈 가문에 장서가 분배되었고,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에는 하야시가를 통해 서적 목록을 작성하고 중국 문학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막부 말기에는 서물봉행이 폐지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관서를 거쳐 국립 공문서관으로 이관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장서는 한적을 중심으로 11만 3천 950점에 달했으며, 서물봉행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쇼군의 정무, 고실, 교양에 참고할 도서를 마련하기 위해 에도 시대 초기부터 설치된 문고이다. 방대한 장서의 수집, 관리, 보수, 대출 및 감정 등은 와카요시도리(若年寄) 아래의 서물봉행(書物奉行)이 담당했다. 소장된 책은 기본적으로 쇼군이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했으나, 노중이나 와카요시도리를 비롯한 막부의 여러 부교, 학자, 하타모토 및 일부 번에도 서물봉행에게 신청하면 대출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에게는 대출되지 않았다.
모미지야마 문고의 장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수집하고 필사한 서적을 기초로 하였다. 여기에 막부가 어서물사(御書物師, 문고에 출입하던 서점)를 통해 구입한 도서, 헌상된 관찬서(본조통감, 간에이 제가계도전, 도쿠가와 실기 등), 여러 번의 다이묘나 하야시 가문에서 헌상한 책 등이 더해져 구성되었다. 특히 1828년(분세이 11년)에는 분고(豊後) 사이키 번(佐伯藩)의 번주 모리 다카스에(毛利高標)가 2만 권에 달하는 서적을 헌상하기도 했다.
역대의 서물봉행으로는 후카미 유사이(深見有隣일본어),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일본어), 곤도 주조(近藤重蔵일본어),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일본어) 등의 학자들이 이름을 올렸으며, 문고의 대여 및 관리뿐만 아니라 장서의 감정·수집·목록 편찬 등을 수행했다.
[1]
서적
増補改訂明治事物起原(復刻版)
春陽堂書店, 国書刊行会(発売)
2. 역사
'모미지야마 문고'라는 명칭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어문고'(御文庫, 고분코)라고 불렸다. 때로는 아칭(雅称)으로 '후잔 문고'(楓山文庫) 또는 '후잔 비각'(楓山秘閣)이라고도 했는데, '후잔'(楓山)은 '모미지야마'(紅葉山)의 다른 이름이다. 메이지 시대의 사학자 이시이 겐도(石井研堂)에 따르면 '산리 문고'(山里文庫)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는 이 문고가 원래 성내 산리(山里)에 있었으며, 메이지 17년 황거 조영 부지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 '지요다 문고'(千代田文庫)로 개칭되었다고 설명했다.[3] 반면, 후쿠이 다모스(福井保)는 '산리 문고'가 막부 말기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설치되었던 막부 기록 보관 서고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 1. 후지미테이 어문고
에도 막부가 성립되기 전인 게이초 7년(16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성 혼마루 남단에 있던 후지미(富士見) 정자에 문고를 설치하고 가나자와 문고 등의 장서를 보관하게 했다. 이후 게이초 12년(1607년)에 슨푸성으로 은거하면서 장서의 일부를 가져가 성 안에 별도의 문고를 마련하기도 했다.
학문을 좋아했던 이에야스는 고금의 한적(漢籍, 한문 고전)과 화서(和書, 일본 고전)를 수집하고 서적의 필사 및 출판(후시미 판·스루가 판 등)을 장려했다.[2] 게이초 19년(1614년)에는 슨푸의 장서 중 30부를 에도성의 쇼군 히데타다에게 증정했다. 이 책들은 에도로 옮겨진 후 다른 장서와 섞여 오랫동안 잊혔다가, 간세이 10년(1798년) 하야시 겐사이가 당시의 이관 목록을 재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다시 알려졌다. 조사 결과 22부가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분카 14년(1817년)에 '''슨푸 어양본'''(駿府御譲本)이라는 이름이 붙어 귀중하게 다루어졌다. 이 책들은 메이지 24년(1891년) 궁내성으로 이관되어 현재는 궁내청 서릉부의 소장품이 되었다.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에도와 슨푸의 장서는 도쿠가와 쇼군가, 오와리 도쿠가와 가, 기슈 도쿠가와 가(당시 슨푸 가문, 후의 기슈 가문)의 고산케에 분배되었다. 이때 "일본의 옛 기록 및 세상에 보기 드문 서책은 에도로 보내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유지에 따라 중요한 서적 50부가 선정되어, 기존 후지미 정자 문고의 장서와 함께 보관되었다. 이들을 특별히 '''스루가 어문고본'''(駿河御文庫本)이라고 부른다.
2. 2. 모미지야마 산으로의 이설 및 증설
간에이 10년(1633년), 후지미테이 어문고에 서물봉행을 두어 장서의 정리, 보관, 목록 편찬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같은 해 간에이 16년(1639년) 7월에는 구족장(具足蔵, 무기고)과 함께 역대 쇼군의 영묘가 있던 에도성 내 모미지야마 묘 옆으로 이전하였다. 이듬해에는 회소(會所)와 서고 각 동이 완성되었다.
호에이 7년(1710년) 6월, 장서가 늘어나면서 좁아진 서물장을 개축하였다. 이어 쇼토쿠 원년(1711년)에는 한 동을 더 추가하여 동서(東西)의 서물장이 갖추어졌다.
쇼토쿠 3년(1713년)에는 전년에 사망한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소장하고 있던 서적(사쿠라다 어본(桜田御本))이 추가되었다. 또한 한 동이 더 추가되어 '신고쿠라'(新御蔵)라고 불렸으며, 이로써 서물장은 총 3개 동이 되었다.
2. 3. 요시무네에 의한 서적 확충
8대 쇼군 요시무네는 쇼군으로 취임한 직후인 교호 원년(1716년) 6월, 유학자인 하야시가(林家)에게 모미지야마 어문고의 서적 목록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요시무네는 이 목록을 항상 곁에 두고 문고의 책을 자주 빌려 읽었다고 전해진다.[5]
요시무네 시대에는 서적 수집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찰 봉행 산하의 아오키 곤요는 도쿠가와 가문의 옛 영지에 보관되어 있던 가재(家蔵) 문서를 수집했으며, 여러 지역에 명령하여 각지의 고문서를 모았다. 또한 나가사키 부교를 통해 새로 간행된 한적(지방지, 의서, 수필, 시문집 등)을 수입했다. 나아가 명 말기와 청 초기에 유행했던 희곡이나 통속 소설 등도 폭넓게 수집하여 소장했다.[5]
이렇게 수집된 서적들, 특히 초판본들은 중국 문학사 연구, 그중에서도 《수호전》이나 《서유기》와 같은 소설의 성립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본 사료가 된다. 이 자료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오늘날까지도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5]
2. 4. 그 후
분세이 11년(1828년) 6월, 분고 사이키 번주였던 모리 다카스에毛利高標일본어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8만여 권의 장서 중 2만 권을 막부에 헌상하였다. 이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새로운 서고가 덴포 원년(1830년) 12월에 완공되었고, 이로써 서물장은 총 4동으로 늘어났다.
막부 말기인 게이오 2년(1866년), 서물봉행 직책이 폐지되었다. 서물봉행 아래에 있던 서물방 도신書物方同心일본어들은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모미지야마 문고에는 서고와 장서만이 남게 된 채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미지야마 문고의 관할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초기에는 대학, 대사국 등을 거쳐 태정관으로 소관이 넘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부서 명칭도 여러 번 바뀌었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고쿄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태정관이나 궁내성에 대출 중이던 장서 일부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이때 소실된 장서 중에는 이노 다다타카가 제작한 일본 전역의 실측 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원본과 에도 시대 후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편 아이즈 풍토기』, 『신편 사가미국 풍토기고』의 원본 등 귀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거쳐 1884년(메이지 17년), 모미지야마 문고는 태정관의 관할 아래 들어가 궁성 안의 서고에 보존되었으며, 이는 훗날 내각문고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쇼와 46년(1971년), 국립 공문서관이 설립되면서 모미지야마 문고의 장서는 다른 내각 문고 소장본들과 함께 이곳으로 이관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3. 장서
장서 수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으나, 막부 말기인 겐지(元治) 연간에 편찬된 《겐지 증보 어서적 목록》(元治増補御書籍目録)에 따르면 총 11만 3,950점에 달했으며, 이 중 65%가 한적(漢籍, 중국 서적)이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장서에 장서인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메이지 시대 이후 일부 장서에 '비각도서지장(秘閣図書之章)', '모미지야마 문고인(紅葉山文庫印)', '후잔 장서(楓山蔵書)' 등의 장서인이 날인된 경우가 있다.
4. 서물봉행에 의한 철저한 관리
장서 보존을 위한 노력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매년 늦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수개월 동안 날씨와 습도에 주의하며 장서나 자료를 햇빛과 바람에 노출시키는 대규모 포서(曝書일본어)를 실시했다. 이는 책의 습기를 제거하고 해충 피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장서는 책장에 넣어 보관되었고, 손상된 서적의 수리도 자주 수행되었다. 이러한 철저한 관리 덕분에 장서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발간 당시 책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서물봉행들의 실무 기록은 『어서물방 일기』(御書物方日記일본어)로 남아 있다. 이 일기는 호에이 3년(1706년)부터 안세이 4년(1857년)까지 152년간의 기록 225권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는 『대일본 근세사료 막부 서물방 일기』로 간행되었다. 또한 문고 내 장서들의 변천 과정과 그 유래는 『어서적 래력지』(御書籍来歴志일본어)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
[2]
웹사이트
『日本書紀の誕生: 編纂と受容の歴史』(八木書店) - 編集:遠藤 慶太,河内 春人,関根 淳,細井 浩志 - 河内 春人による本文抜粋
https://allreviews.j[...]
ALL REVIEWS
2020-11-18
[3]
서적
増補改訂明治事物起原(復刻版)
春陽堂書店, 国書刊行会(発売)
[4]
웹인용
『日本書紀の誕生: 編纂と受容の歴史』(八木書店) - 編集:遠藤 慶太,河内 春人,関根 淳,細井 浩志 - 河内 春人による本文抜粋
https://allreviews.j[...]
ALL REVIEWS
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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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외국어 전파담(개정판): 외국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졌는가
https://books.google[...]
혜화11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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