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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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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조통감은 에도 막부 시대에 하야시 라잔과 하야시 가호 부자가 편찬한 일본 통사이다. 1644년 하야시 라잔이 편찬한 《본조편년록》이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된 후, 하야시 가호가 편찬을 이어받아 1670년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신대부터 고요제이 천황 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며,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고 사실 기록에 중점을 두었다. 《동국통감》 등 한국의 기록을 참고하여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일본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인 역사 이해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전통적인 일본 종교 신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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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통감
개요
제목본조통감
원어 제목本朝通鑑
저자하야시 라잔, 하야시 가호
국가일본
언어일본어
발표간분 9년(1669년)
상세 정보
종류역사서
내용일본사
구성397권
시대적 범위진무 천황부터 고마쓰 천황까지
특징유교적 관점에서 일본사를 기술

2. 편찬 과정

《본조통감》은 에도 막부의 수사(修史) 사업으로,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제요 30권, 부록 5권, 전편 3권(신대), 정편 40권(진무 천황에서 우다 천황까지), 속편 230권(다이고 천황에서 고요제이 천황까지), 국사관일록 18권 등 총 326권으로 구성된 일본 통사이다.[3] 신대(神代)부터 고요제이 천황 때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윤리적인 판단을 피하고 사실을 기록한다는 방침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3]

2. 1. 배경

에도 막부의 수사(修史) 사업으로써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원래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하야시 라잔이 편찬했던 《본조편년록》(本朝編年録)은 1644년에 막부에 바쳐졌으나,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되었다.[3] 166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명으로 하야시 가호가 편년록 완성을 지시받았고, 이듬해 막부 로주들의 허가를 받아 시노부가오카(忍岡)의 하야시 가문 저택에서 편찬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엔기(延喜) 연간 이후의 정사(正史)가 없어 사료 수집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1664년 하야시 가호는 로주 사카이 다다키요에게 옛 기록 수집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7월 나가이 나오쓰네가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여러 다이묘(大名)들과 조정, 지샤(寺社) 등에 소장된 기록들을 제출하도록 명했다. 8월에는 하야시 가문 저택에 막부의 비용으로 국사관(国史館, 홍문원弘文院)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3]

1662년 중국에서 명청교체기라 불리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수사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책의 이름은 원래 '''본조편년록'''이었으나, 중국 (宋)의 사서 자치통감을 본따 '''본조통감'''(本朝通鑑)으로 변경되었다.[3] 1670년 책이 완성되어 6월에 중서본(中書本)이 쇼군가에 제출되었고, 청서본(清書本)은 에도의 막부 도서관인 모미지야마 문고닛코 동조궁에 바쳐졌다.[3]

2. 2. 편찬 사업 진행

에도 막부의 수사(修史) 사업으로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슌사이春斎) 부자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하야시 라잔이 편찬했던 《본조편년록》(本朝編年録)은 1644년(쇼호 원년)에 막부에 바쳐졌으나, 1657년(메이레키 3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1663년(간분 2년) 10월, 쇼군 이에쓰나의 명으로 하야시 가호에게 편년록 완성을 명하였고, 이듬해 8월 막부 로주들의 연서봉서로 막부의 허가가 떨어져 시노부가오카(忍岡)의 하야시 가문 저택에서 편찬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엔기(延喜) 연간 이후의 정사(正史)가 없어 사료 수집 등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1664년(간분 4년) 하야시 가호는 로주 사카이 다다키요에게 옛 기록 수집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7월에는 나가이 나오쓰네가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여러 다이묘(大名)들이나 조정, 지샤(寺社) 등에 소장되어 있던 여러 기록들을 제출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는 하야시 가문 저택에 막부의 비용으로 편찬소인 국사관(国史館, 홍문원弘文院)이 세워져 본격적인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3]

편찬 기간 중인 1662년(간분 2년) 중국에서는 명청교체기라 불리는 큰 변혁이 일어났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수사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본서의 이름은 원래 '''본조편년록'''이었으나, 중국 (宋)의 사서 자치통감을 본따 '''본조통감'''(本朝通鑑)으로 변경되었다. 편찬에 착수한 지 7년 만인 1670년(간분 10년)에 책이 완성되었고, 6월에는 중서본(中書本)이 쇼군가에 제출되었다. 청서본(清書本)은 에도의 막부 도서관인 모미지야마 문고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에 바쳐졌다.

2. 3. 명칭 변경

에도 막부의 명으로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인 《본조편년록》은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명으로 다시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책의 이름이 중국 (宋)의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본떠 《'''본조통감'''》으로 변경되었다.[1] 1662년 중국에서 명나라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편찬 작업이 진행되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

2. 4. 완성 및 제출

1644년(쇼호 원년) 하야시 라잔이 편찬했던 《본조편년록》(本朝編年録)은 막부에 바쳐졌으나, 1657년(메이레키 3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되었다.[1] 1663년(간분 2년) 10월, 쇼군 이에쓰나의 명으로 하야시 가호(슌사이)에게 편년록 완성을 명하였다.[1] 이듬해 8월 막부 로주들의 연서봉서(連署奉書)로 막부의 허가가 떨어져서, 시노부가오카(忍岡)의 하야시 가문 저택에서 편찬이 개시되었다.[1]

일본에서는 엔기(延喜) 연간 이후의 정사(正史)가 없어 사료 수집 등에 난항을 겪었는데, 1664년(간분 4년) 하야시 가호는 로주 사카이 다다키요에게 옛 기록 수집 등에 필요한 원조를 요청하였다.[1] 7월에는 나가이 나오쓰네(永井尚庸)가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여러 다이묘(大名)들이나 조정, 지샤(寺社) 등에 소장되어 있던 여러 가지 기록들에 대한 제출이 명해졌다.[1] 8월에는 하야시 가문 저택에서 막부의 비용으로 편찬소로써 국사관(国史館, 홍문원弘文院)이 세워졌으며, 본격적으로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1]

편찬 기간 중인 1662년(간분 2년) 중국에서는 명청교체기라 불리는 대변혁이 일어났는데, 에도 막부의 수사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 본서의 이름은 원래 '''본조편년록'''이었으나, 중국 (宋)의 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본따서 '''본조통감'''('''本朝通鑑''')이라고 변경하게 되었다고 한다.[1] 편찬에 착수하고 7년, 1670년(간분 10년)에 책은 완성되었고, 6월에는 중서본(中書本)이 쇼군가에 제출되었다.[1] 청서본(清書本)은 에도의 막부 도서관인 모미지야마 문고(紅葉山文庫)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에 바쳐졌다.[1]

3. 구성 및 내용

에도 막부의 역사 편찬 사업으로 하야시 라잔과 그의 아들 하야시 가호(하야시 슌사이) 부자를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전체 326권으로 구성된 일본 통사(通史)이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권수내용
제요(提要)30권
부록(附録)5권
전편(前編)3권신대(神代)
정편(正編)40권진무 천황에서 우다 천황까지 (본조편년록에 토대를 둠)
속편(続編)230권다이고 천황에서 고요제이 천황까지
국사관일록(國史館日録)18권



신대(神代)부터 고요제이 천황(재위 1586년 ~ 1611년) 때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윤리적인 판단을 피하고 사실을 기록한다는 방침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3대 쇼군)의 수사 작업으로 하야시 라잔이 편찬했던 《본조편년록》(本朝編年録)은 1644년(쇼호 원년)에 막부에 바쳐졌으나, 1657년(메이레키 3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1663년(간분 2년) 10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명으로 하야시 가호에게 편년록 완성을 명하였고, 이듬해 8월 막부 로주들의 연서봉서(連署奉書)로 막부의 허가가 떨어져 시노부가오카(忍岡)의 하야시 가문 저택에서 편찬이 개시되었다. 일본에서는 엔기 연간 이후의 정사(正史)가 없어 사료 수집 등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1664년(간분 4년) 하야시 가호는 로주 사카이 다다키요에게 옛 기록 수집 등에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7월에는 나가이 나오쓰네가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여러 다이묘들이나 조정, 지샤(寺社) 등에 소장되어 있던 기록들에 대한 제출이 명해졌다. 8월에는 하야시 가문 저택에 막부의 비용으로 편찬소인 국사관(国史館, 홍문원(弘文院))이 세워져 본격적인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

편찬 기간 중인 1662년(간분 2년) 중국에서는 명청교체기라 불리는 대변혁이 일어났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수사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본서의 이름은 원래 《본조편년록》이었으나, 중국 (宋)의 사서 자치통감을 본떠 《'''본조통감'''》('''本朝通鑑''')으로 변경되었다. 편찬 착수 7년 후인 1670년(간분 10년)에 책이 완성되었고, 6월에는 중서본(中書本)이 쇼군가에 제출되었다. 청서본(清書本)은 에도 막부 도서관인 모미지야마 문고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닛코 동조궁에 바쳐졌다.

《본조통감》은 전반적으로 중국 사서를 참고하여 관련 기사를 보충하였으며, 한국 기록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본조통감》 인용서목(引用書目)의 화한(華韓) 한서부(韓書部)에는 《자치통감》을 본떠 편찬된 조선 초기 역사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포은집》, 《양촌집》, 《무릉잡고》, 《목은집》, 《진산세고》, 《하서집》, 《모재집》, 《점필재문집》, 《도은선생집》, 《회재집》, 《노포당집》, 《고사촬요》, 《필원잡기》 등이 인용 도서로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한서(韓書)는 대부분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유입된 것으로, 《동국통감》은 1667년 미토번미쓰쿠니의 주도로 교토 송백당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에도 시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본조통감》 이후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 사서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조통감》 닌토쿠 천황 85년과 리추 천황 6년조에 중복되어 실린 백제 아신왕전지왕의 왕위 계승 기록의 경우, 《일본서기》의 표기인 아화(阿花), 직지(直支) 외에도 《동국통감》의 표기인 아화(阿華, 아신의 오기)와 전지(腆支)가 함께 실렸다. 리추 천황 바로 앞 닌토쿠 천황 85년조 본문에는 아신왕 태자 전지가 왜(일본)에 인질로 갔다는 것, 아신왕 사후 태자 전지가 귀국하지 않은 사이 전지왕의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훈해(訓解)를 죽이고 왕이 되려다 진압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으로 《동국통감》을 통해 보충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아신왕(아화왕)-전지왕(직지왕)의 왕위 계승 기사는 본문이 아닌 저서(低書)[14]로 한 단 낮추어 부기되었다(《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신왕과 태자 전지의 왕위 계승 기사는 닌토쿠 천황 조가 아니라 오진 천황 조에 기록되어야 한다). "전지왕의 이름에서 전(腆)을 또는 영(映)이라고도 한다"는 분주 역시 《동국통감》을 참조한 것이다.[15]

찬자 하야시 가호는 《본조통감》 리추 천황 말년의 분주에서 "'''무릇 《동국통감》에 기록된 본국과 삼한의 통교 혹 전쟁은 국사(國史, 《일본서기》)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16]는 의견을 적었다. 근초고왕 이후 구이신왕까지 《일본서기》의 백제 왕대 기록은 《동국통감》(및 《삼국사기》)과 비교해 2주갑의 차이가 나고,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교류 기록을 《동국통감》에 따라 기록하면 연대가 모두 하향 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국사'이자 '정사'인 《일본서기》의 체계를 흔들 수 있기에, 《본조통감》에서는 《일본서기》와 《동국통감》의 기록 차이를 리추 천황 말년조에 일괄 언급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17]

4. 오태백설 논란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본조통감》에 "천황의 선조는 의 태백이다"라는 기술(오태백설)이 있다고 분개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논란이 있었다.[8][9][10][11][12][13]

4. 1. 오태백설과 《대일본사》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이 책에서 "천황의 조상은 의 태백이다"라는 기술을 발견하고 분개하여, 미토 번 독자의 수사 사업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대일본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전설은 미토 번사였던 안도 다메아키의 《연산기문》에 처음으로 보이며[8] 후지타 유코쿠의 《수사시말》 등에 의해 널리 퍼졌으며, 미토 번에서는 사실로써 널리 믿어져왔다.[9] 1890년 2월, 구사타 히로시는 사학잡지에 논문 「본조통감고」를 발표했고,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점, 나아가 하야시 가호1669년에 《본조통감》 신대기 발문 속에 태백설을 채용하지 않았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10] 등을 들어서 이 설을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나이토 야스쥬 ・ 나이토 치소 ・ 구리타 히로시 ・ 기무라 마사코토 등으로부터 현행 《본조통감》에 해당하는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비판으로 그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한편 구리타 모토쓰구 ・ 하나미 사쿠미 ・ 미우라 히로유키 ・ 기요하라 사다오 등은 구사타 히로시의 설을 지지하였다.[11]

1940년 마쓰모토 아야오는 선행 연구를 정리하는 가운데 하야시 가호의 일기인 《국사관일록》에 보이는 한 《본조통감》이 어느 시점에서든 개정된 흔적은 없으며, 삭제설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 안도 다메아키가 미토 번에 출사한 것은 1686년이고 연대기문 본문의 추정 성립 연대는 1700년부터 1715년까지의 사이로, 본조통감이 완성되었던 1670년보다도 30년이나 이후의 것이라 신빙성이 낮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전설은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11]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가 오태백설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였을 뿐이고, 막부의 공적인 수사 사업인 《본조통감》에서는 이 설을 채용할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2][13]

4. 2. 논란의 전개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이 책에서 "천황의 선조는 의 태백이다"라는 기술을 발견하고 분개하여, 미토 번 독자의 수사 사업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대일본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8]

이 전설은 미토 번사였던 안도 다메아키의 《연산기문》에 처음으로 보이며[9] 후지타 유코쿠의 《수사시말》 등에 의해 널리 퍼졌으며, 미토 번에서는 사실로써 널리 믿어져왔다.[9] 1890년 2월, 구사타 히로시는 《사학잡지》에 논문 「본조통감고」를 발표했고,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점, 나아가 하야시 가호1669년에 《본조통감》 신대기 발문 속에 태백설을 채용하지 않았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10] 등을 들어서 이 설을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나이토 야스쥬 ・ 나이토 치소 ・ 구리타 히로시 ・ 기무라 마사코토 등으로부터 현행 《본조통감》에 해당하는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비판으로 그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한편 구리타 모토쓰구 ・ 하나미 사쿠미 ・ 미우라 히로유키 ・ 기요하라 사다오 등은 구사타 히로시의 설을 지지하였다.[11]

1940년 마쓰모토 아야오는 선행 연구를 정리하는 가운데 하야시 가호의 일기인 《국사관일록》에 보이는 한 《본조통감》이 어느 시점에서든 개정된 흔적은 없으며, 삭제설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 안도 다메아키가 미토 번에 출사한 것은 1686년이고 《연산기문》 본문의 추정 성립 연대는 1700년부터 1715년까지의 사이로, 본조통감이 완성되었던 1670년보다도 30년이나 이후의 것이라 신빙성이 낮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전설은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11]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가 오태백설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였을 뿐이고, 막부의 공적인 수사 사업인 《본조통감》에서는 이 설을 채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2][13]

4. 3. 마쓰모토 스미오의 연구

1940년(쇼와 15년) 마쓰모토 스미오(松本純郎)는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면서, 하야시 가호의 일기인 《국사관일록》에 《본조통감》이 개정된 흔적이 없으므로 삭제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안도 다메아키가 미토 번에 출사한 것은 조쿄 3년(1686년)이고, 《연산기문》의 추정 성립 연대는 겐로쿠 13년(1700년)부터 쇼토쿠 5년(1715년)까지로, 《본조통감》이 완성된 간분 10년(1670년)보다 30년이나 이후이므로 신빙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마쓰모토 스미오는 이러한 점들을 들어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본조통감》의 내용을 문제 삼아 《대일본사》 편찬을 시작했다는 전설은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11]

하야시 라잔 · 하야시 가호 부자가 오태백설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개인적인 견해였을 뿐이며, 막부의 공식적인 수사 사업인 《본조통감》에서는 이 설을 채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12][13]

4. 4. 결론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이 책에서 "천황의 조상은 의 태백이다"라는 기술을 발견하고 분개하여, 미토 번 독자의 수사 사업을 일으켰고 그것이 곧 《대일본사》였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8]

이 전설은 미토 번사였던 안도 이위장의 《연산기문》에 처음으로 보이며[9] 후지타 유코쿠의 《수사시말》 등에 의해 널리 퍼졌으며, 미토 번에서는 사실로써 널리 믿어져 왔다.[9] 1890년 2월, 히노시타 히로시는 《사학잡지》에 논문 〈본조통감고〉를 발표했고, 현행 《본조통감》에는 그러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점, 나아가 하야시 가호1669년에 《본조통감》 신대기 발문 속에 태백설을 채용하지 않았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10] 등을 들어 이 설을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나이토 산슈 ・ 나이토 치소 ・ 구리타 히로시 ・ 기무라 마사지 등으로부터 현행 《본조통감》에 해당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비판으로 그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한편 구리타 모토쓰구 ・ 하나미 사쿠키 ・ 미우라 지카유키 ・ 기요하라 사다오 등은 히노시타 히로시의 설을 지지하였다.[11]

1940년 마쓰모토 스미오는 선행 연구를 정리하는 가운데 하야시 가호의 일기인 《국사관일록》에는 《본조통감》이 개정된 흔적이 없으며, 삭제설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 안도 이위장이 미토 번에 출사한 것은 1686년이고 《연산기문》 본문의 추정 성립 연대는 1700년부터 1715년까지로, 《본조통감》이 완성되었던 1670년보다 30년이나 이후의 것으로 신빙성이 낮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전설은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11]

하야시 라잔하야시 가호 부자가 오태백설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였을 뿐이고, 막부의 공적인 수사 사업인 《본조통감》에서는 이 설을 채용할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2][13]

5. 《본조통감》과 《동국통감》

《본조통감》은 중국 사서를 참고하여 관련 기사를 보충하고, 한국 기록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본조통감》 인용서목(引用書目)의 화한(華韓) 한서부(韓書部)에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수》, 《포은집》, 《양촌문집》, 《무릉잡고》, 《목은집》, 《진산세고》, 《하서집》, 《모재집》, 《점필재문집》, 《도은집》, 《회재집》, 《노포당집》, 《고사촬요》, 《필원잡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서적 대부분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유입되었다. 특히 《동국통감》은 1667년 미토 번주 미쓰쿠니의 주도로 교토 송백당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에도 시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본조통감》 이후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 사서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조통감》 닌토쿠(仁德) 85년과 니추(履中) 6년조에는 백제 아신왕전지왕의 왕위 계승 기록이 중복되어 실려 있는데, 《일본서기》 표기(아화, 직지)와 《동국통감》 표기(아화, 전지)가 함께 실려 있다. "전지왕의 이름에서 전(腆)을 또는 영(映)이라고도 한다"는 주석 역시 《동국통감》을 참조한 것이다.[15]

찬자 하야시 가호는 《본조통감》 니추 말년 주석에서 "'''무릇 《동국통감》에 기록된 본국과 삼한의 통교 혹 전쟁은 국사(國史, 《일본서기》)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16]는 의견을 남겼다.

5. 1. 《동국통감》의 영향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에 《자치통감》을 본떠 편찬된 역사서이다. 《본조통감》은 이 책을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 《동문수》, 《포은집》, 《양촌문집》, 《무릉잡고》, 《목은집》, 《진산세고》, 《하서집》, 《모재집》, 《점필재문집》, 《도은집》, 《회재집》, 《노포당집》, 《고사촬요》, 《필원잡기》 등 한국의 기록들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14]

이러한 한국 서적 대부분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유입되었다. 특히 《동국통감》은 1667년 미토 번주 미쓰쿠니의 주도로 교토 송백당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면서 에도 시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본조통감》 이후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 역사서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였다.[15]

《본조통감》에는 백제 아신왕전지왕의 왕위 계승 기록이 중복되어 실려 있는데, 《일본서기》의 표기인 아화(阿花), 직지(直支) 외에도 《동국통감》에서의 표기인 아화(阿華, 아신의 오기)와 전지(腆支)가 함께 실려 있다. 또한, 아신왕 사후 태자 전지가 귀국하기 전에 설례(碟禮)가 훈해(訓解)를 죽이고 왕이 되려다 진압되었다는 기사도 《일본서기》에는 없지만 《동국통감》을 통해 본문에 보충되었다.[14]

찬자 하야시 가호는 《본조통감》의 니추 말년의 분주에서 "'''무릇 《동국통감》에 기록된 본국과 삼한의 통교 혹 전쟁은 국사(國史, 《일본서기》)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16]는 의견을 적었다. 실제로 근초고왕 이후 구이신왕까지 《일본서기》의 백제 왕대 기록은 《동국통감》 및 《삼국사기》와 비교해 2주갑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교류 기록을 《동국통감》에 따라 기록하면 연대가 모두 하향 조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의 체계를 해체할 수 있는 부담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본조통감》에서는 《일본서기》와 《동국통감》의 기록 차이를 니추 말년조에 일괄 언급한 것으로 이해된다.[17]

5. 2. 기록 비교와 한계

《본조통감》은 중국 사서를 참고하여 관련 기사를 보충하고, 한국 기록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본조통감》에 인용된 한국측 도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도서명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수
《포은집》
양촌문집
《무릉잡고》
《목은집》
진산세고
《하서집》
《모재집》
《점필재문집》
도은집
《회재집》
《노포당집》
《고사촬요》
필원잡기



이러한 한국측 도서 대부분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유입되었으며, 특히 《동국통감》은 1667년 미토 번주 미쓰쿠니에 의해 교토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에도 시대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본조통감》은 《동국통감》을 일본에서 제1의 조선 사서로 활용하기 시작한 사례이다. 예를 들어, 《본조통감》에는 닌토쿠(仁德) 85년과 니추(履中) 6년조에 백제 아신왕전지왕의 왕위 계승 기록이 중복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의 표기(아화, 직지)와 《동국통감》의 표기(아화, 전지)가 함께 실려 있다. 또한, 아신왕 사후 태자 전지가 귀국하기 전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훈해(訓解)를 죽이고 왕이 되려다 진압되었다는 기사는 《일본서기》에는 없지만 《동국통감》을 통해 본문에 보충되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아신왕-전지왕의 왕위 계승 기사는 본문이 아닌 낮은 단에 부기되었는데,[14] 이는 《일본서기》를 따르면 해당 기사가 오진 조에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지왕의 이름에서 전(腆)을 또는 영(映)이라고도 한다"는 주석 역시 《동국통감》을 참조한 것이다.[15]

찬자 하야시 가호는 《본조통감》의 니추 말년 주석에서 "'''무릇 《동국통감》에 기록된 본국과 삼한의 통교 혹 전쟁은 국사(國史, 《일본서기》)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16]는 의견을 남겼다. 근초고왕 이후 구이신왕까지 《일본서기》의 백제 왕대 기록은 《동국통감》(및 《삼국사기》)과 비교해 2주갑(120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교류 기록을 《동국통감》에 따라 기록하면 연대가 하향 조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의 체계를 해체할 수 있는 부담이 있었다. 《본조통감》에서 《일본서기》와 《동국통감》의 기록 차이를 니추 말년조에 일괄 언급한 것은 이러한 점을 감안한 것으로 이해된다.[17]

6. 평가

이 저술, 특히 하야시 라잔은 일본 학자들로부터 비교적 객관적인 역사 이해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라잔을 일본에서 "현대 역사 연구"의 창시자이자 "현대 학문의 시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 저술은 아라이 하쿠세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는데, 하쿠세키의 사상은 더욱 객관적이라고 평가받는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술이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라잔은 전통적인 일본 종교 신화(예: 신대)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대적 압박 때문에 이를 숨겨야 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주제와 달리 신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다루지 못했고, 자신의 비정통적인 견해는 사적인 저술에 담아야 했다.[2][5]

참조

[1] 논문 Why Prewar Japanese Historians Did Not Tell the Truth https://www.jstor.or[...] 2000
[2] 논문 LA LITTÉRATURE HISTORIQUE DU JAPON: DES ORIGINES AUX ASHIKAGA https://www.jstor.or[...] 1903
[3] 논문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ism to The Tokugawa Bakufu as Revealed in The Kansei Educational Reform https://www.jstor.or[...] 1974
[4] 논문 The Jeweled Comb-Box. Motoori Norinaga's Tamakushige https://www.jstor.or[...] 1988
[5] 논문 Review of Japanese Historians and the National Myths, 1600-1945: The Age of the Gods and Emperor Jinmu. https://www.jstor.or[...] 1998
[6] 서적 本朝の始祖は呉太伯の胤なるよし書たるに驚き給ひて 1945
[7] 서적 本朝通鑑 国書刊行会 1918-08-25
[8] 서적 本朝の始祖は呉太伯の胤なるよし書たるに驚き給ひて 1945
[9] 서적 水戸市史 1968
[10] 서적 本朝通鑑 https://dl.ndl.go.jp[...] 国書刊行会 1918-08-25
[11] 서적 1945
[12] 서적 水戸市史 1968
[13] 서적 1975
[14] 간행물 『본조통감』의 상대(上代) 기년(紀年)과 외국 사서의 수용 2019-06
[15] 서적 일본서기
[16] 서적 本朝通鑑
[17] 간행물 『본조통감』의 상대(上代) 기년(紀年)과 외국 사서의 수용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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