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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우 칼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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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우 칼레츠키(1899-1970)는 폴란드 출신의 경제학자로, 케인스 경제학보다 먼저 유효수요 이론을 제시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그는 경기 순환 이론, 소득 분배 이론, 사회주의 경제 계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과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칼레츠키는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에서 활동하며 전시 경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유엔에서 개발도상국 경제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1970년 폴란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연구는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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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우 칼레츠키
기본 정보
미하우 칼레츠키
이름미하우 칼레츠키
출생일1899년 6월 22일
출생지우치, 폴란드 회의국
사망일1970년 4월 18일
사망지바르샤바, 폴란드 인민 공화국
학력
모교그단스크 공과대학교
연구 분야
분야거시경제학
학파신마르크스 경제학
포스트 케인스 경제학
영향 관계
영향을 준 인물프랑수아 케네
칼 마르크스
크누트 빅셀
미하일 투간-바라노프스키
로자 룩셈부르크
요제프 슘페터
영향을 받은 인물니콜라스 칼도어
조앤 로빈슨
리처드 칸
루이지 파시네티
알프레드 아이크너
존 이트웰
요제프 슈타인들
피에로 스라파
하이먼 민스키
마르크 라부아
아미트 바두리
말콤 소여
랜스 테일러
로렌스 클라인
얀 크레겔
조지 페이웰
피터 클라이슬러
존 메이너드 케인스
아타나시오스 아시마코풀로스
폴 스위지
폴 바란
리처드 굿윈
모리시마 미치오
업적
주요 업적경기 순환 이론
화폐 이론
이윤 방정식
마크업 및 유효 수요 이론
기여유효수요의 원리를 논증, 경제 계획에 기여
기타
서명
로마자 표기Michał Kalecki

2. 생애

미하우 칼레츠키는 1899년 폴란드 우치에서 태어나 폴리테크닉에서 수학과 건설공학을 전공했지만,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29년부터 폴란드의 '경기순환과 가격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33년 ≪경기순환 이론 에세이≫를 출간했다.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일반 이론 출간에 자극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 수요 개념을 발견했음에도 발표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아 조앤 로빈슨에게 학문적 귀감이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7]

제2차 세계 대전 후, 뉴욕의 유엔에서 근무하다 매카시즘 광풍으로 1955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폴란드에서 신경제 모델 수립에 참여하고, 1963년부터 '중앙 계획·통계 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성장 이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잉여가치 개념을 바탕으로 유효 수요를 발견한 칼레츠키는, 정부의 자의적 경제 개입이 자본주의 법칙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치적 경기 순환 가설'로 불리며, 사후 폴란드에서 현실화되었다. 1970년 바르샤바에서 사망했으며, 뉴 케인지안[8], 포스트 케인지안 등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6]

2. 1. 초기 생애 (1899-1933)

미하우 칼레츠키는 1899년 6월 22일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폴란드 우치에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2] 우치는 노동 운동이 활발한 주요 산업 중심지였으며, 이는 칼레츠키의 후대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1917년 칼레츠키는 바르샤바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토목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매우 능력 있는 학생이었으며, 2차 곡선 내부에 그려진 육각형에 관한 파스칼 정리를 일반화하여 2n 변의 다각형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규모 섬유 공장 실패로, 칼레츠키는 회계사로 일해야 했다. 바르샤바에서 첫해 동안 그는 산발적이고 불안정하게 일을 계속했으며, 1918년부터 1921년까지 군 복무를 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칼레츠키는 그단스크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까지 다녔지만, 가계의 재정 상황 때문에 졸업 직전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비공식적으로 경제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미하일 투간-바라놉스키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정통적인" 작품을 읽었다. 이는 훗날 자본주의 시스템의 잠재적 성장에 관한 그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도네츠크 상업대학교 근처에 있는 미하일 투간-바라놉스키 동상.


칼레츠키는 정규직으로 취업해야 했기 때문에 정식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신용을 요청하는 회사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시작으로, 신문 창간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폴란드 경제"(Polska gospodarcza)와 "경제 검토"(Przegląd gospodarczy)라는 두 개의 기존 정기 간행물에 기사를 기고했다. 이 기사들을 쓰면서 그는 경험적 정보를 얻고 분석하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의 전문적인 작업에 활용되었다.

1929년, 칼레츠키는 바르샤바의 경제 순환 및 가격 연구소(Instytut Badania Koniunktur Gospodarczych i Cen)에 취업하여 통계 사용 능력을 인정받아 7년 동안 근무했다. 1930년 6월 18일에는 아다 슈테른펠트와 결혼했다. 연구소에서 그는 통계학자 루드비크 란다우를 만났는데, 그의 통계 지식은 칼레츠키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칼레츠키의 초기 발표물은 실용적인 성격을 띠었고 거시적 규모 간의 관계를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32년에는 헨리크 브라운이라는 필명으로 "사회주의 검토"(Przegląd socjalistyczny) 잡지에 경기 침체 중 임금 삭감의 영향에 대한 기사를 발표했다.

2. 2. 케인스와의 관계 (1933-1939)

칼레츠키는 1933년 "경기 순환 이론 시도"(Próba teorii koniunktury)라는 논문을 통해 포괄적인 경기 순환 이론을 제시했다. 이 논문의 거시경제적 유효 수요 이론은 3년 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에서 발표한 아이디어와 유사했다. 로렌스 클라인(1951)은 칼레츠키가 "케인스 체계의 모든 중요한 요소와 기타 기여를 포함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조앤 로빈슨은 이 논문의 1966년 영어 번역본 서문에서 "그것의 날카롭고 집중적인 진술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것보다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에 대한 더 나은 소개를 제공한다."라고 언급했다.

칼레츠키의 업적은 폴란드어로 쓰여 소수의 계량경제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1933년 10월 라이덴에서 열린 국제 계량경제학 협회에 논문을 발표하고, 1935년에는 "Revue d'Economie Politique"와 "계량경제학"에 발표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라그나르 프리슈와 얀 틴베르겐과 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들로부터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1936년, 칼레츠키는 동료들에 대한 연구소의 정치적 행동에 항의하며 사임하고, 록펠러 재단의 여행 장학금으로 해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스웨덴에서 크누트 위크셀의 추종자들이 자신의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같은 해 케인스의 "일반이론" 출판 소식을 접했다. 자신의 연구와 케인스의 책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을 확인한 칼레츠키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로 갔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에서 칼레츠키는 리처드 카한, 조앤 로빈슨, 피에로 스라파와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1937년에는 케인스를 만났지만, 서로 다른 성격으로 인해 만남은 냉랭했다. 칼레츠키는 자신의 발표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조앤 로빈슨은 이를 두고 "적절한 학문적 품위를 갖추고(그러나 불행히도 학자들 사이에서 다소 드물다) 그는 결코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칼레츠키는 케인스의 확고한 지위와 영향력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함을 인정하며 케인즈 혁명이라는 용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39년 칼레츠키는 "경제적 변동 이론 에세이"를 썼는데, 이후 그의 경제학 이론의 핵심 요소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칼레츠키는 케인즈 혁명에 대해 열정적이었지만, "고용의 정치적 측면"이라는 논문에서 완전 고용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완전 고용이 노동 계급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기업 지도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켜, 결국 엘리트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 침식에 반응하고, 이익이 ''자유방임주의'' 시스템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책을 몰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1]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39-1945)

칼레츠키는 1940년 초 옥스퍼드 통계 연구소(OIS)에 고용되었다. 그의 주요 업무는 전시 경제 운영에 대한 영국 정부를 위한 통계 및 경제 분석 보고서 작성이었다. 그는 가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칼레츠키가 정부를 위해 작성한 정교한 보고서는 주로 상품 배급에 관한 것이었고, 그가 개발한 계획은 나중에 배급이 도입되었을 때 채택된 정책과 매우 유사했다. 조지 파이웰에 따르면, "칼레츠키의 전시기 연구는 그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칼레츠키의 전시 기간 논문 중 상당수는 인플레이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경제적 근거를 들어 가격의 공식 규제와 정부 임금 안정화(임금 동결)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에 반대하며, 대신 경제적 배급(특히 임금 안정화 프로그램보다는 완전 배급 시스템)을 권고했다.

칼레츠키의 주요 저술 중 일부는 이 기간에 쓰여졌다. 1943년 그는 기존 경기 순환 이론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다룬 논문 하나와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경기 순환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한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후자는 1944년에 출판되었으며 완전 고용을 전제로 했다. 이는 칼레츠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OIS의 칼레츠키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를 종합한 것이었다.

1945년 칼레츠키는 자신의 재능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 OIS를 떠났다. 그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큰 겸손함을 보였고 높은 급여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민자 신분 때문에 차별받은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다. 그가 더 높은 직책에 임명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영국 국적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 4. 전후 활동 (1945-1970)

1945년, 칼레츠키는 자신의 업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느껴 옥스퍼드 대학교를 떠났다. 이민자라는 이유로 직위 확보에 있어 차별을 받았고, 영국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이었다.

전후 칼레츠키는 몬트리올의 국제노동사무국에서 15개월 동안 일했다. 1946년 7월, 폴란드 정부의 초청으로 경제부 중앙계획국장직을 맡았지만, 몇 달 후 사임했다. 1946년 말, 뉴욕 유엔 사무국(United Nations Secretariat) 경제부 부국장직을 맡아 1955년까지 주로 세계 경제 보고서를 작성했다. 매카시즘적 압력으로 인해 칼레츠키는 이 직책에서 사임했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처벌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의 마녀사냥으로 인해 많은 측근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자 낙담했다. 미국 상원에서 공산주의(communism) 지지자로 규탄된 칼레츠키는 미국에서 전문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스카르 랑게 동상 (브로츠와프 경제대학교). 폴란드에서 칼레츠키와 랑게는 경제 세미나에서 협력했다.


1955년, 칼레츠키는 폴란드로 돌아와 다시는 장기간 해외에서 일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개혁에 참여할 기회를 기대하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정책이 초래한 고통을 피할 것이라고 믿었다. 1957년에는 장관 회의실 경제 고문을 거쳐 중앙 장기 계획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장기 계획은 1961년부터 1975년까지의 기간을 다루었으며, 사회주의 경제에서 칼레츠키의 성장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칼레츠키가 개발한 최종 계획은 위원회 구성원들에 의해 패배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칼레츠키는 정부 직책을 일부 유지하면서도, 1956년부터 중앙 계획 및 통계학교 및 바르샤바 대학교 교수, 1957년부터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교육과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59년, 오스카르 랑게와 체스와프 보브로프스키와 함께 제3세계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는 바르샤바 대학교와 계획 및 통계학교가 공동 운영하는 개발도상국 경제 문제 부서의 설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8년 폴란드 정치 위기 당시, 칼레츠키는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친 반유대주의적인 해고와 파면에 항의하여 은퇴했다.

이 기간 동안 칼레츠키는 수학 연구에도 전념했으며, 정수론과 확률론에 집중했다.

그단스크 조선소, 1972년경. 1950년대부터 칼레츠키는 폴란드 정부의 경제 문제에 대해 자문했다.


칼레츠키는 계속해서 연구 논문을 썼다. 1969년 케임브리지 마지막 방문 중, 그의 70세 생일이 기념되었다. 칼레츠키는 다양한 사회 시스템 하에서 성장 이론에 관한 대학 강연을 했고,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삶의 전반적인 궤적에 대해 큰 박수를 받았다.

3. 주요 이론 및 업적

칼레츠키는 케인즈보다 앞서거나 독자적으로 유효수요 이론, 경기 순환 이론, 소득분배 이론 등을 발전시킨 거시경제학의 선구자이다. 그의 이론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 및 고용 수준이 기업의 투자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는 투자와 자본가 소비의 합이 이윤을 결정하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점 정도와 마크업 등의 개념을 통해 국민소득에서 임금과 이윤의 분배를 설명했다.

칼레츠키는 수요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수요를 자극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민간 투자 여건 개선, 소득 재분배, 공공 투자를 제시했다. 특히, 정치적 경기 순환 가설을 통해 완전 고용이 지속되면 노동 계급의 힘이 강해져 엘리트들이 케인스주의 정책을 몰락시킬 것이라고 예측했다.[1]

칼레츠키는 사회주의 경제 개혁에도 참여하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오스카르 랑게와 함께 제3세계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칼레츠키의 경제학은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었으며,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개발도상국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산업화를 위한 토지 개혁과 중산층 과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3. 1. 유효수요 이론

칼레츠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 수요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에 발표한 "경기 순환 이론 시도"(Próba teorii koniunktury)라는 논문에서 그는 거시경제학적 유효 수요 이론의 기초를 제시했는데, 이는 케인스가 3년 후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에서 발표한 내용과 유사했다. 로렌스 클라인은 칼레츠키가 "케인스 체계의 모든 중요한 요소와 기타 기여를 포함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조앤 로빈슨은 칼레츠키의 논문이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대한 더 나은 소개를 제공한다고 언급했다.

영국 체류 중 칼레츠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사진)를 만나 공통된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했다


칼레츠키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이윤 방정식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의 규모와 분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간결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단순화된 가정(노동자는 임금만 받고 저축하지 않으며, 경제는 폐쇄적이고 공공 부문이 없음)에서 출발하여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유도했다.

: \textstyle P=C_P+I

여기서 P는 총이윤, C_P는 자본가의 소비, I는 총투자이다. 이 방정식은 이윤이 투자와 자본가의 소비의 합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레츠키는 자본가의 소비와 투자가 이윤을 결정하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후 가정을 완화하여 경제가 개방적이고, 정부 부문이 존재하며, 노동자가 저축하는 경우를 포함한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 \textstyle P_N=C_P+I+D_g+E_e-S_w

여기서 P_N은 순이윤, D_g는 공공 적자, E_e는 순 해외 흑자, S_w는 노동자의 저축이다. 이 방정식은 총이윤이 자본가의 소비, 투자, 공공 적자, 순 해외 흑자에서 노동자의 저축을 뺀 값의 합임을 보여준다.

칼레츠키는 케인즈와 독립적으로, 혹은 그보다 먼저 유효수요 이론을 발견했다는 논쟁이 있다.[4] [5] 야마모토 에이지(山本英司)는 칼레츠키가 케인즈와 독립적으로 또는 그보다 먼저 유효수요를 발견했다고 평가한다.[6] 조앤 로빈슨은 칼레츠키의 학문적 고결함을 칭찬하며,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진 두 사상가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케임브리지 학파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말했다.[7]

3. 2. 경기변동 이론

칼레츠키는 1933년 "경기 순환 이론 시도"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경기 순환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보다 3년 앞선 것으로, 유효 수요 이론의 기초를 담고 있다. 조앤 로빈슨은 이 논문이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대한 더 나은 소개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칼레츠키는 케인즈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 및 고용 수준은 기업의 투자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저축이 투자에 의해 결정되며, 리카르도 학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과는 달리 임금 인상이 완전 고용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칼레츠키는 정치적 경기 순환 가설을 제시했는데, 이는 완전 고용이 노동 계급의 힘을 강화하고 기업 지도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켜, 결국 엘리트들이 정치적 권력 침식에 반응하여 케인스주의 정책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예측이다.[1]

칼레츠키는 투자 결정 요인이 다양하고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 함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투자 결정 방정식을 제시했다.

: D=a \cdot S+b \cdot \frac {\Delta P}{\Delta t}-c \cdot\frac {\Delta K}{\Delta t}+d \,\

여기서 D \,\ 는 고정자본 투자 결정 규모, a \,\ , b \,\ , c \,\ 선형 관계 매개변수, d \,\ 는 장기적으로 변하는 상수, P \,\ 는 이윤, S \,\ 는 기업의 총저축, K \,\ 는 고정자본 재고를 나타낸다. 이 방정식은 투자 결정이 기업 저축, 이윤 변화율, 상수와 양의 상관관계를, 고정자본 증가와 음의 상관관계를 가짐을 보여준다.

칼레츠키는 "투자의 비극은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본주의 경제의 역설적인 속성을 지적했다.

3. 3. 소득분배 이론

칼레츠키는 국민소득에서 임금과 이윤의 분배를 결정하는 요인을 분석하고, 독점 정도, 마크업 등의 개념을 설명했다. 칼레츠키는 이윤의 규모와 분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칼레츠키는 단순화된 가정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윤 방정식을 유도했다. 초기 가정은 다음과 같다:

  • 전체 경제를 노동자와 자본가 두 그룹으로 나눈다. 노동자는 임금만 받고, 자본가는 이윤만 받는다.
  • 노동자는 저축하지 않는다.
  • 경제는 폐쇄적이며, 공공 부문이 없다.


이러한 가정을 통해 칼레츠키는 다음과 같은 회계 항등식을 유도했다.

:P + W = C_W + C_P + I

여기서 P는 총이윤(이윤 + 감가상각)의 규모, W는 총임금의 규모, C_P는 자본가의 소비, C_W는 노동자의 소비, I는 경제에서 이루어진 총투자이다. 노동자는 저축하지 않는다고 가정(W=C_W)하여 두 항을 간소화하면 다음과 같다.

:P = C_P + I

이 방정식은 이윤이 투자와 자본가의 소비의 합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레츠키는 자본가의 투자 및 소비 결정이 이윤을 결정하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한 자본가의 소비는 다른 자본가의 이윤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칼레츠키는 원래 방정식의 가정을 제거하여 경제가 개방적이고, 공공 부문이 존재하며, 노동자가 저축을 할 수 있는 경우를 고려했다. 결과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P_N = C_P + I + D_g + E_e - S_w

이 모델에서 총이윤(순세금)은 자본가의 소비, 투자, 공공 적자, 순 해외 흑자(수출 - 수입)에서 노동자의 저축을 뺀 값의 합이다.

칼레츠키는 소득 분배를 설명하기 위해 기업이 불완전경쟁시장, 특히 과점 시장에서 경쟁한다고 가정했다. 기업은 가변 평균 비용(원자재, 현장 직원 임금)에 마크업을 설정하여 고정비용을 충당하고 이윤을 얻는다. 마크업은 독점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칼레츠키는 경기 순환 중 임금의 비중은 거의 일정하다고 결론 내렸다. 불황 동안 독점 정도가 증가하고 마크업이 증가하지만,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상쇄된다. 호황 동안에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지만, 노동조합의 힘으로 독점 정도와 마크업 수준이 하락한다.

3. 4. 사회주의 경제 계획

칼레츠키는 1955년 폴란드로 귀국하여 사회주의 경제 개혁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장관 회의실의 경제 고문이 되었고, 1957년에는 중앙 장기 계획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 장기 계획(1961~1975년)은 칼레츠키의 사회주의 경제 성장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칼레츠키의 최종 계획은 위원회에 의해 기각되었다.

칼레츠키는 중앙 계획 및 통계학교와 바르샤바 대학교 교수 및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교육과 연구에 전념했다. 1959년에는 오스카르 랑게, 체스와프 보브로프스키와 함께 제3세계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열었고, 개발도상국 경제 문제 부서의 설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8년 폴란드 정치 위기 당시, 칼레츠키는 반유대주의적인 해고와 파면에 항의하여 은퇴했다.

3. 5. 기타 연구

칼레츠키는 경제학 외에도 수학, 개발도상국 경제 문제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의 경제학 연구는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공학, 언론, 신용 조사, 통계, 사업 운영 관찰 등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정규 학위가 없었던 칼레츠키는 경력 마지막 13년 동안에만 전임 대학교수직을 수행했다.

칼레츠키는 개발도상국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가 토지 개혁과 토지 소유주 및 중산층에 대한 과세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제 현대화를 촉진하는 데 있어 외국인 직접 투자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4. 평가 및 영향

칼레츠키의 연구는 1990년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그의 『전집』 7권을 출간하면서 "20세기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재조명받았다. 이 전집에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영어로 처음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특히, 칼레츠키는 거시경제학의 초기 개척자로서, 케인즈의 『일반이론』에 나오는 여러 개념들을 케인즈보다 먼저 독립적으로 고안해냈다. 그러나 그의 초기 논문(1933, 1935)은 폴란드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경제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경제학계의 주류 언어는 영어였기 때문이다. 칼레츠키는 케인즈의 『일반이론』(1936)을 읽고 자신의 연구와 일치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선행 연구를 알리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폴란드어로 작성되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3]

유효수요 개념의 발견자를 두고 칼레츠키와 케인즈 중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돈 파틴킨은 케인즈는 리처드 칸의 고용 승수를, 칼레츠키는 경기 순환의 투자 승수를 기반으로 했기에 칼레츠키의 선행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 케인즈가 『일반이론』에서 제시한 것은 칼레츠키와 같은 투자 승수였으며, 케인즈는 두 승수가 일치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논의를 전개했다.[4] 나베시마 나오키는 칼레츠키가 실업을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특성으로 보고, 투자 결정 및 경기 순환 이론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Feiwel(1989)은 파틴킨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다. 는 유효수요 이론에 대한 두 학자의 선행성 논쟁을 다룬 논문이다.[5] 야마모토 에이지(山本英司)는 칼레츠키가 케인즈와 "독립적으로 또는 선행하여... 발견했다"고 평가한다.[6]

칼레츠키와 친분이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칼레츠키가 케인즈보다 먼저 유효수요 원리를 발견했음에도 이를 주장하지 않은 고결한 태도를 칭찬했다. 그녀는 칼레츠키가 케임브리지 학파와 다른 정치적, 지적 출발점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 큰 격려가 되었다고 말했다. 칼레츠키는 1937년 케인즈와 처음 만났으나, 케인즈는 칼레츠키에게 냉담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7]

칼레츠키의 논문은 대부분 폴란드어로 작성되어 영어권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주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케인즈 서클), 옥스퍼드 대학교, 런던 정경대학 등 일부에서만 연구되었다.

일본에서는 미야자키 요시카즈(宮崎義一)와 이토 코세이(伊東光晴)의 번역을 통해 칼레츠키 이론의 핵심 논문인 「경제 변동의 이론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의 순환적 및 장기적 변동의 연구」를 일본어로 읽을 수 있다.

칼레츠키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출발하여 유효수요를 발견했다. 반면, 케인즈와 그의 케임브리지 그룹은 한계효용 개념을 출발점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유효수요 개념에 도달했다.

최근 칼레츠키는 뉴 케인지언[8], 포스트 케인지언, 신리카르도학파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연구는 영국의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조앤 로빈슨, 니콜라스 칼도르, 리처드 M. 구드윈)과 미국의 현대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5. 저서

칼레츠키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경기 순환 이론 시도』 (1933)
  • 『1929년 사회적 소득 추정』 (1934, 루드비크 란다우와 공저)
  • 『1933년 사회적 소득과 소득 변화에 대한 정기적 연구의 기초』 (1935, 루드비크 란다우와 공저)
  • 『경기 순환 주기 이론』 (1935)
  • 『명목 임금과 실질 임금』 (1939)
  • 『경제 역동성 이론』 (1958)
  • 『경제 발전 자금 조달 문제』 (1959, 이그나치 사흐스와 예르지 즈다노비치 편집 『저개발국의 경제 성장 문제』 수록)
  • 『투자 효율성 공식의 일반화』 (1959, 메치스와프 라코프스키와 공저)
  • 『완전 고용의 정치적 측면』 (1961)
  • 『장기 계획의 기본 원칙에 관하여』 (1963)
  • 『사회주의 경제 성장 이론 개요』 (1963)
  • 『경제 모델과 유물론적 역사관』 (1964)
  • 『전집』 (1979–1980, 2권)
  • "케인스의 예측(Mr Keynes's Predictions)", 1932, 『사회주의 평론』
  • "경기 순환 이론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he Theory of the Business Cycle)" (Próba teorii koniunktury|경기 순환 이론 시도pl), 1933.
  • "대외 무역과 국내 수출에 관하여(On foreign trade and domestic exports)", 1933, 『경제학자』
  • "경기 순환 운동 이론에 관한 에세이(Essai d'une theorie du mouvement cyclique des affaires)", 1935, 『정치 경제학 논문집』
  • "거시동태적 경기 순환 이론(A Macrodynamic Theory of Business Cycles)", 1935, 『계량 경제학』
  • "경기 상승의 메커니즘(The Mechanism of Business Upswing)" (El mecanismo del auge económico|경제 호황의 메커니즘es), 1935, 『폴란드 경제』
  • "경기 상승과 국제수지(Business upswing and the balance of payments)" (El auge económico y la balanza de pagos|경제 호황과 국제수지es), 1935, 『폴란드 경제』
  • "케인스 이론에 대한 몇 가지 논평(Some Remarks on Keynes's Theory)", 1936, 『경제학자』
  • "경기 순환 이론(A Theory of the Business Cycle)", 1937, 『경제 연구 검토』
  • "상품, 소득 및 자본 과세 이론(A Theory of Commodity, Income and Capital Taxation)", 1937, 『경제 저널』
  • "증가하는 위험의 원칙(The Principle of Increasing Risk)", 1937, 『경제학』
  • "국민소득 분배의 결정 요인(The Determinants of Distribution of the National Income)", 1938, 『계량 경제학』
  • 『경제적 변동 이론에 관한 에세이(Essays in the Theory of Economic Fluctuations)』, 1939.
  • "이윤 이론(A Theory of Profits)", 1942, 『경제 저널』
  • 『경제 역동성 연구(Studies in Economic Dynamics)』, 1943.
  • [http://www.cfeps.org/ss2006/readings/Courvisanos_c.pdf "완전 고용의 정치적 측면(Political Aspects of Full Employment)", 1943, 『정치 분기별』]
  • 『베버리지 계획의 경제적 의미(Economic Implications of the Beveridge Plan)』 (1943)
  • "고전적 정상 상태에 대한 피구 교수의 논의(Professor Pigou on the Classical Stationary State)", 1944, 『경제 저널』
  • "완전 고용을 위한 세 가지 방법(Three Ways to Full Employment)", 1944, 『완전 고용 경제학』
  • "장기 실업에 대한 주석(A Note on Long Run Unemployment)", 1950, 『경제 연구 검토』
  • 『경제 역동성 이론: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적 및 장기적 변화에 관한 에세이(Theory of Economic Dynamics: An essay on cyclical and long-run changes in capitalist economy)』, 1954.
  • "성장 이론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the Theory of Growth)", 1962, 『경제 저널』
  • 『경기 순환 이론 연구, 1933-1939(Studies in the Theory of Business Cycles, 1933-1939)』, 1966.
  • "투간-바라놉스키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하는 실질적 수요의 문제(The Problem of Effective Demand with Tugan-Baranovski and Rosa Luxemburg)", 1967, 『경제학자』
  • "마르크스의 재생산 방정식과 현대 경제학(The Marxian Equations of Reproduction and Modern Economics)", 1968, 『사회과학 정보』
  • "추세와 경기 순환(Trend and the Business Cycle)", 1968, 『경제 저널』
  • "계급 투쟁과 국민소득 분배(Class Struggle and the Distribution of National Income)" (Lucha de clases y distribución del ingreso|계급 투쟁과 소득 분배es), 1971, 『키클로스』
  • 『자본주의 경제 역동성에 관한 선정된 에세이(Selected Essays on the Dynamics of the Capitalist Economy)』, 1933–1970, 1971.
  • 『사회주의 및 혼합 경제의 경제 성장에 관한 선정된 에세이(Selected Essays on the Economic Growth of the Socialist and the Mixed Economy)』, 1972.
  • 『자본주의 변혁의 마지막 단계(The Last Phase in the Transformation of Capitalism)』, 1972.
  • 『개발도상국 경제에 관한 에세이(Essays on Developing Economies)』, 1976.
  • 『미하우 칼레츠키 전집(Collected Works of Michał Kalecki)』 (7권),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990-1997.
  • Teoría de la dinámica económica: ensayo sobre los movimientos cíclicos y a largo plazo de la economía capitalista|경제 역동성 이론: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적 및 장기적 움직임에 관한 에세이es,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56
  • El Desarrollo de la Economía Socialista|사회주의 경제의 발전es,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68
  • Estudios sobre la Teoría de los Ciclos Económicos|경제 순환 이론에 관한 연구es, Ariel, 1970
  • Economía socialista y mixta: selección de ensayos sobre crecimiento económico|사회주의 및 혼합 경제: 경제 성장에 관한 에세이 선집es,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76
  • Ensayos escogidos sobre dinámica de la economía capitalista 1933–1970|자본주의 경제 역동성에 관한 선집 에세이 1933-1970es,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77
  • Ensayos sobre las economías en vías de desarrollo|개발 도상국 경제에 관한 에세이es, Crítica, 1980
  • 『경제역동론: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적 및 장기적 변동에 관한 에세이』(Theory of Economic Dynamics: An essay on cyclical and long- run changes in capitalist economy, 1954) (미야자키 요시카즈(宮崎義一)·이토 미쓰하루(伊東光晴) 역, 『경제변동의 이론 자본주의경제에 있어서의 순환적 및 장기적 변동의 연구』, 신평론, 1968년)
  • 『자본주의 경제 역동성에 관한 논문선집, 1933-1970』(Selected Essays on the Dynamics of the Capitalist Economy, 1933-1970, 1971) (아사다 츠이치로(浅田統一郎)·마미야 요스케(間宮陽介) 역, 『자본주의경제의 동태이론』(포스트 케인지안총서6), 일본경제평론사, 1984년)

참조

[1] 서적 Making and Breaking Universities Macleay Press
[2] 논문 The World of Michal Kalecki https://www.jstor.or[...] 2015
[3] 논문 Some Remarks on Keynes's Theory 1936
[4] 서적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Springer
[5] 논문 カレツキの貨幣経済論:ケインズとの対比において https://doi.org/10.1[...] 日本評論社 1990-12
[6] 논문 「根本的な改革」から「決定的な改革」へ -カレツキにおける史的唯物論- https://hdl.handle.n[...] 京都大學経済學會 2001-01
[7] 서적 Collected Economic Papers Vol.3
[8] 논문 再考:カレツキアン・モデルのミクロ的基礎 https://doi.org/10.1[...] 立教大学 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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