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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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자혜는 1895년 출생하여 일제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궁중에서 생활하다가 숙명여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간호사가 되었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간우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신채호와 결혼하여 독립운동을 도왔다. 신채호가 옥사하고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1943년 병고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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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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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자혜 |
한자 표기 | 朴慈惠 |
출생일 | 1895년 12월 11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 |
사망일 | 1943년 10월 16일 |
사망지 |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 |
본관 | 밀양(密陽) |
종교 | 보천교(선포사) |
배우자 | 신채호 |
자녀 | 신수범(아들), 신두범(아들) |
부모 | 박원순(부) |
직업 | 항일 독립운동가 前 조선 궁녀 前 기예자 前 산파 前 조산부 前 간호원 |
경력 | 前 조선간우회 회장 前 한국독립당 보건과학행정특보위원 |
상훈 |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정당 | 무소속 |
학력 | 경성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학과 졸업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설 조산부양성소 산파학과 전문학사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 후이원 대학교 의예과 중퇴 |
2. 생애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서 출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 만세 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일제 산하 기관에서 산파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직접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다.
이후 북경으로 건너가 1919년 봄 회문(匯文)대학 의예과(1927년 연경대학으로 대학 개칭 후 연경대 의예과, 1949년 북경협화의원(北京協和醫院)에 전입)에 입학하였다.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대학을 중퇴, 이듬해 첫아들 신수범(신채호의 차남) 선생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남편과 헤어져 국내로 들어왔다.
한편 신채호는 1923년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고, 박자혜도 남편 신채호와의 연락을 계속하면서 국내에서 가능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선생이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여 주었다.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설립)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 당시에도,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한 것이 박자혜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운명을 달리하기까지, 옥바라지는 물론 자녀 교육, 생계를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둘째아들 신두범(신채호의 삼남) 마저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2. 1. 어린 시절과 궁중 생활 (1895-1910)
2. 2. 근대 교육과 간호사의 길 (1910-1919)
2. 3. 3.1 운동과 간우회 활동 (1919)
2. 4. 신채호와의 만남과 결혼, 독립운동 지원 (1920-1936)
1919년 봄 북경 회문(匯文)대학 의예과(1927년 연경대학으로 대학 개칭 후 연경대 의예과, 1949년 북경협화의원(北京協和醫院)에 전입)에 입학하였다. 1920년 봄, 신채호와 결혼하였고 대학을 중퇴, 이듬해 첫아들 신수범(신채호의 차남)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남편과 헤어져 국내로 귀국하였다.한편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고, 박자혜도 남편 신채호와의 연락을 계속하면서 국내에서 가능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가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여 주었다.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 당시에도,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한 것이 박자혜였다. 신채호가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사망하기까지, 옥바라지는 물론 자녀 교육, 생계를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2. 5. 신채호 사후와 죽음 (1936-1943)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사망한 뒤, 둘째 아들 신두범마저 14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1943년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자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 생애 요약
1895년에 태어나 어릴 적 궁에서 일을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에서 나와 근대교육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3·1 운동의 부상자들을 간호한 것을 계기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한다.
신채호와 결혼해 뒷바라지를 하며 독립운동을 돕던 도중 남편과 아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겨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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