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근
1. 개요
배달근은 대한제국 시기 문관 관료였으며,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한국독립당 대표상임위원과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44년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포상했다.
| 이름 | 배달근 |
|---|---|
| 원래 이름 | 裵達根 |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의성 |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성주 |
| 출생일 | 1865년 9월 3일 |
| 사망일 | 1944년 6월 24일 |
|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 경상북도 의성 경상북도 대구 경성부 평안남도 평양 장쑤성 상하이 둥베이 지방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 베이젠다오 촌 후베이성 우창 산둥성 지난 평안북도 의주 평안북도 신의주 평안북도 철산 충청북도 청원 충청북도 청주 경상북도 청송 경상북도 성주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 |
| 배우자 | 청송 심씨 부인 |
| 자녀 | 슬하 5남 3녀 |
| 본관 | 성주(星州) |
| 정당 | 무소속 |
| 직책 | 대한제국 충청북도 단양군 군서기관 |
|---|---|
| 임기 | 1903년 5월 ~ 1906년 11월 |
| 군주 | 고종 이형 |
| 주요 경력 |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지부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 젠다오 주재 독판부 특무특보연통위원 前 한국독립당 대표상임위원 前 한국독립당 대표최고위원 |
| 서훈 내역 | 198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 1990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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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배씨 -
배우희
배우희는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가수로, 걸그룹 달샤벳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 코리아드라마어워즈 여자 신인상과 신스틸러 페스티벌 in 문경 본상을 수상했다. -
성주 배씨 -
배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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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 -
박성빈 (조선)
박성빈은 1871년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으며, 아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
음서 -
신기질
신기질은 남송의 장군이자 시인으로, 금나라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 후 남송에 귀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북벌 정책으로 인해 주류 세력과 갈등하며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만년에는 은거하며 호방하고 비장미 넘치는 가사풍의 시를 썼으며 소식과 함께 "소신"으로 불린다.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도 -
김형직
김형직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아버지로, 조선국민회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로 추앙받지만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도 -
심우섭 (1890년)
심우섭은 청송 심씨로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일신보》 기자와 소설가로 활동하며 이광수 소설 등장인물의 모델이기도 했으나, 친일 활동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2. 생애
2.1.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 문관 관료
배달근은 1892년 음서로써 관직에 천거되었다. 1892년부터 1893년까지 1년간 조선국 경상도 안동군 군서기관 직을 지냈으며, 1893년부터 1896년까지 3년간 조선국 전라도 신안군 군서기관 직을 지냈다. 1896년부터 1897년까지는 조선국 전라남도 신안군 군서기관 직을, 1897년부터 1898년까지는 대한제국 전라남도 신안군 군서기관 직을 역임하였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2년간 대한제국 전라북도 옥구군 군서기관 직을 지냈고, 1900년부터 1901년까지는 대한제국 경상북도 봉화군 군서기관 직을, 1901년부터 1902년까지는 대한제국 전라북도 남원군 군서기관 직을, 1902년부터 1903년까지는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주군 군서기관 직을 지냈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는 대한제국 충청북도 단양군 군서기관으로 3년간 근무하였다. 1906년 대한제국 관직에서 퇴임하였다.
2.2. 3·1 만세 운동 참여
1919년 3월, 배달근은 평양과 경성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자 귀향한 김원휘(金原輝)가 박영달(朴永達)·박영화(朴永和)와 만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휘, 배중엽(裵重曄), 박영신(朴永新) 등과 사전 준비를 함께 했다.
한편,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대구 학생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개신교 목사 박영화의 아들 박상동(朴尙東)이 의성의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919년 3월 12일, 배달근은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화, 박영달, 배중엽 등과 함께 2백여 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같은 날 정오경, 박영신의 자택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동네 뒷산까지 올라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 4시, 일제의 경상북도 의성경찰서는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고, 배달근도 이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1920년 3월 만기 출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