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백장 칸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장 칸국은 13세기 몽골 제국 분열 이후 조치의 장남 오르다가 킵차크 칸국의 좌익을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부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포함한 이 칸국은 발하슈 호에서 시르다리야 강 유역의 시그나크로 수도를 옮겼다. 14세기에는 킵차크 칸국에 종속되었고, 15세기에는 토카 테무르 가문의 부상과 토크타미시의 킵차크 칸국 통일 시도를 겪었다. 이후 오르다 가문의 재흥과 쇠퇴를 거쳐 우즈베크 칸국과 카자흐 칸국으로 분열되면서 멸망했다.

2. 역사

오르다 칸과 그의 후손들은 금장 칸국의 좌익을 통치했기 때문에, "좌익의 공작" 또는 "좌수(左手)의 공작"이라고 불렸다.[3] 백장 칸국의 영토는 처음에는 조치의 지배를 받는 서쪽 지역을 포함했으며, 서부 중앙 아시아와 남서부 시베리아를 포함했다. 수도는 원래 발하슈 호에 있었지만, 나중에 카자흐스탄시르다리야강에 있는 시그나크로 옮겨졌다.[4]

바투 칸이 훌레구의 중동 원정에 대규모 조치 대표단을 보냈을 때, 오르다의 아들 쿨리가 이끄는 강력한 부대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1259년경 쿨리와 다른 조치 왕자들의 의심스러운 죽음은 금장 칸국 통치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1260년부터 1264년까지 쿠빌라이 칸과 아리크 보케 사이의 계승 전쟁 동안, 백장 칸국의 엘리트들은 아리크 보케를 지지했다. 그들은 또한 오고데이의 왕자 카이두를 지원했는데, 베르케와 몽케테무르와 같은 칸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1280년부터 오르다의 후계자인 쾨추는 원나라일 칸국과 동맹을 맺었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았다. 라시드 앗딘 하마디에 따르면, 쿤치는 차카타이 칸 또는 일 칸국의 종주권 하에 가즈니와 바미얀의 영토를 소유했다.[5] 쿤치는 1268년 바라크의 침략을 앞두고 일 칸 아바카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에서 카간 쿠빌라이를 대신해 활동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보르지긴 왕자들이 서로 싸웠을 때, 그들은 쿤치에게 호소했지만 그의 반응은 불분명했다.

마르코 폴로는 칸국을 극도로 추운 지역으로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왕(쾨추)은 도시나 성이 없다. 그와 그의 백성은 항상 광활한 평원이나 거대한 산과 계곡에서 산다. 그들은 가축의 우유와 살을 먹고 곡물이 없다. 왕은 엄청난 수의 백성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와도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그의 백성은 매우 평화롭게 산다. 그들은 엄청난 수의 가축, 낙타, 말, 소, 양 등을 가지고 있다.[6]

1299년, 백장 칸국의 칸 바얀은 카이두와 두와의 도움을 받은 그의 사촌 코벨렉에 의해 폐위되었다.[7] 1304년까지 바얀은 그의 조상들의 땅 대부분을 다시 점령했다. 그의 칸국은 시르다리야강 주변에서 유목 생활을 시작하여 샤이바니드를 대체했다. 바얀의 군대에는 러시아헝가리 군인이 포함되었다.

청장 칸국의 무정부 상태(1359-1380) 동안 칸 친타이는 그의 형제들을 금장 칸국의 왕위에 차지하도록 보냈으나, 모두 성공하기 전에 살해되었다. 백장 칸국(때로는 청장 칸국과 혼동됨)의 구성원인 히즈르와 그의 아들 또는 친척인 아랍 샤이크는 군대를 사용하여 금장 칸국의 왕위를 잠시 차지했다.[8]

1375년, 백장 칸국의 여덟 번째 칸인 우루스 칸은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 모두의 칸이 되었다.[9] 그는 히즈르 가문의 구성원을 추방했다.[10] 1377년 우루스가 사망했고, 1378년 그의 조카 토흐타미시가 우루스의 아들 티무르 말리크로부터 백장 칸국의 통제권을 빼앗았을 때,[11] 청장 칸국의 통제권도 되찾았다. 그리하여 토흐타미시는 두 칸국을 통합하여 금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1395-96년 토흐타미시가 패배한 후, 티무르는 쿠루이치크를 백장 칸국의 지도자로 임명했다.[12] 그 이후 조치의 아들들인 투카티무르, 시반 및 오르다의 가문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하여 우즈베크카자흐 칸국을 세웠다. 쿠루이치크의 후손인 보로그는 1421년에 잠시 금장 칸국의 왕위를 주장했다.

보라크가 살해된 후 칸국은 무함마드와 무스타파 두 칸으로 나뉘었다. 무스타파는 칸국을 재정복했지만, 아불 하이르 칸의 또 다른 위협이 시베리아에서 나타났다. 1446년에 아불 하이르 칸은 무스타파를 상대로 승리하여 오르다 울루스(금장 칸국의 좌익)의 존재를 종식시켰다.

2. 1. 초기 역사 (13세기)

1206년, 칭기즈 칸몽골 제국을 창건하면서 장남 조치에게 이르티시 강 유역의 영토와 4천인대를 주어 '조치 울루스'를 세우게 하였다.[14] 조치는 중앙아시아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고, 사후 장남 오르다에게 조치 울루스의 좌익(백장 칸국)이 주어졌다.[15] 초기 조치 울루스는 우익·중앙·좌익(=오르다 울루스)의 삼극 구조였다는 설도 있지만, 적어도 1300년대 이후의 조치 울루스는 '우익=백장=바투 울루스'와 '좌익=청장=오르다 울루스'의 좌우 양익 체제였다고 인식되었다.[17]

오르다는 몽골 제국의 내분 속에서 톨루이 가문의 몽케 칸을 지지하며 3명의 칸 즉위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48] 오르다의 활약은 몽케도 높이 평가하여, 『집사』 「조치 칸기」에 따르면 몽케 칸이 조치 가문에 보낸 자르리크(칙령)에는 「오르다의 이름이 맨 처음에 적혀 있었다」고 한다.[21][48]

2. 2. 코니치 칸의 통치 (13세기 후반)

오르다 칸의 손자인 코니치는 30년 가까이 백장 칸국을 통치했다.[55] 그는 일 칸국아르군 칸, 키하토 칸과 사절을 교환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56] 금장 칸국 본가가 아제르바이잔을 두고 일 칸국과 군사 충돌을 일으킬 때도, 코니치는 일관되게 일 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즉위 전 내전 시기에 아르군 칸은 코니치에게 망명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57]

한편, 동쪽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제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쿠빌라이에게 반감을 품은 왕족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고데이 가문의 카이두였다.[58] 《집사》에 따르면, 카이두가 처음으로 대원 울루스를 공격할 때 코니치도 협력하여 바아린 부의 노얀을 공격하고 약탈했다고 한다.[60]

1266년 쿠빌라이는 카이두를 토벌하기 위해 셋째 아들 노무간에게 원정군을 이끌게 했다.[61] 그러나 노무간 휘하의 몽케 가문, 아리크 부케 가문의 왕족들은 알마리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 등을 사로잡았다. (실레기의 난)[62] 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노무간은 금장 칸국으로 보내졌고, 주모자 중 한 명인 요브쿠르는 코니치에게 도망쳤다. 이를 통해 코니치가 반 쿠빌라이 세력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63]

하지만 카이두가 카라수 평원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혼란에 빠진 차가타이 울루스를 병합하면서, 킵차크 칸국의 중앙아시아 권익이 위협받게 되었다.[64] 1280년 킵차크 칸국의 몽케 테무르가 사망하자, 코니치와 노가이 등은 회담을 통해 토데 몽케를 칸으로 추대했다.[65] 이 회담에서 킵차크 칸국은 카이두에게 적대하고 대원 울루스와 우호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으며, 노무간을 대원 울루스로 돌려보냈다.[66]

코니치는 대원 울루스와 교류를 시작했고, 1288년/1289년 쿠빌라이에게서 '제왕 화니적'을 하사받았다.[67] 코니치는 1295년 가잔이 즉위할 때까지 생존했고, 1297년에는 아들 바얀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1295년에서 1296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8]

2. 3. 바얀 칸과 쿠페레크의 반란 (13세기 말 ~ 14세기 초)

바얀이 오르다 울루스(백장 칸국)의 당주가 되었을 무렵, 동쪽의 대원 울루스에서는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올제이투 카안(성종 테무르)가 즉위했다. 이를 계기로 중앙 아시아의 카이두 울루스와 대원 울루스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빠졌다.[69] 이러한 상황에서 오르다 울루스에서는 제3대 당주 테무르 부카의 아들 쿠페레크가 "이전에 나의 아버지가 울루스를 다스렸으니 상속권은 나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바얀에게 반기를 들었다. 쿠페레크는 카이두 울루스에 협력을 요청했다.[55][70]

카이두와 그의 부하 두와 (차가타이 칸국의 당주)에게서 군사를 빌린 쿠페레크는 바얀을 물리쳤고, 바얀은 조치 울루스 당주 토크타에게로 도망쳤다.[70] 그러나 토크타 역시 이 무렵 우익 울루스의 노가이와 내전을 벌이고 있어 바얀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여유가 없었다.[70] 대신, "[오르다] 울루스는 바얀이 다스려야 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카이두와 두아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쿠페레크를 바얀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70][71] 그러나 쿠페레크를 오르다 울루스 당주로 옹립하여 대원 울루스/훌레구 울루스와의 전쟁을 위해 아군을 늘리려는 카이두 등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72]

바얀은 독자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쿠페레크 및 카이두 군과 전쟁을 벌였다. 《집사》 "조치 칸기"에 따르면 "지금까지 바얀은 쿠페레크와 카이두, 바투의 군대와 18번 싸웠다. 그는 6번의 전투에 직접 출진했다"고 한다.[70] 한편, 카이두 울루스는 대원 울루스와도 군사적 대립을 심화시켰고, 바얀은 대원 울루스의 올제이투 카안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카이두 울루스를 공통의 적으로 하는 군사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병약한 올제이투 카안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하는 황태후 코코진은 "키타이(=화북, 구 금나라 영토)와 난갸스(=강남, 구 남송 영토)의 나라에 있는 우리 울루스(=대원 울루스)는 크고, 카이두와 두아의 지방은 멀다"는 이유로 "그 일(카이두 울루스 타도)이 해결되기까지 1, 2년의 기간이 필요할 것"을 이유로 협력 체제는 체결하지만, 곧바로 카이두 울루스 협공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변했다.[73] 한편, 이 움직임을 감지한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 얀기차르, 메리크 테무르 등이 이끄는 군단을 파견하여 바얀과 대원 울루스의 연계를 막았고, 얀기차르의 공격으로 오르다 울루스는 곤궁해졌다고 한다.[74][75]

바얀의 사신 파견 후 2, 3년 뒤, 마침내 대원 울루스 군과 카이두 울루스 군 사이에 대전투(테케리크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카이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76] 이 대전투에 바얀이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 이어진 대원 울루스 군의 카이두 울루스 영토 침공에는 바얀도 참여했다.[77] 《집사》 "조치 칸기"에는 1303년 1월-2월경에 바얀이 힐라 울루스의 가잔 칸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토크타가 파견한 2만 명의 원군과 함께 바얀은 대원 울루스 군과 합류하려 하고 있으며", "힐라 울루스 군도 또한 카이두 울루스 타도를 위해 출병해 주기를 바란다"고 기록되어 있다.[77] 이 바얀의 사신 파견 후 거의 7개월 후에 연합군에 의해 "카이두의 난"은 명실상부하게 진압되었고, 대원 울루스에서는 "제왕 백안(=오르다 울루스 당주 바얀)"에게 9만 냥이 하사되었다.[78]

그러나 쿠페레크의 반란으로 인해 오르다 울루스 내는 황폐해졌고, 바얀이 토크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인해 바투 울루스와 오르다 울루스의 세력 관계가 변화하여 오르다 울루스는 바투 울루스에 예속되게 되었다.[79][80]

2. 4. 킵차크 칸국에 대한 종속 (14세기)

바얀 사후, 백장 칸국은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에 종속되었다. 사시 부카는 "토그릴 칸과 우즈베크 칸에 대한 봉사의 길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80], 그의 아들 엘레젠은 "우즈베크 칸의 명에 의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사시 부카, 엘레젠 부자가 바투 울루스에 예속된 상태였음을 시사한다[80].

엘레젠의 사후, 그의 아들 무바라크 호자가 즉위했지만, 바투 울루스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고 기록된다[80]. 무바라크 호자가 발행한 동전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바라크 호자가 실존했고, 바투 울루스에서 독립을 꾀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80]. 그러나, 무바라크 호자의 독립 운동은 결국 실패한 듯하며, 무바라크 호자는 반란 후 6개월 만에 투르키스탄 지방에서 추방되어 2년 반 동안 방랑하다가 사망했고, 그의 동생 침바이가 "바투 울루스 군주 자니 베크의 명에 의해" 즉위했다고 전해진다[80].

침바이는 바투 울루스에서 독립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시 부카, 엘레젠 부자와 마찬가지로 바투 울루스에 예속되는 태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80][84].

2. 5. 토카 테무르 가문의 부상 (14세기 중반 ~ 15세기 초)

1359년 베르디 베크 칸이 사망하면서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조치 울루스의 동쪽(백장 칸국)에서는 토카 테무르 가문의 왕족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94]

키야트 씨족 출신의 유력자 텐기즈 부카는 실 강 하류로 이주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던 조치 가문의 방계 왕족(오글란)들을 가혹하게 대우했다.[87][88] 텐기즈 부카는 부하 중 용맹한 카라 노가이를 칸으로 옹립하려 했으나,[19][89] 또 다른 오글란인 호자 아흐마드는 카라 노가이와 함께 텐기즈 부카를 살해하고 카라 노가이를 칸으로 추대했다.[89][92] 카라 노가이는 1360년대 초 실 강에서 3년간 통치하고 동생 토그릴 테무르에게 지위를 물려주었다.[17]

토그릴 테무르의 뒤를 이은 우루스 칸은 백장 칸국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95] 우루스 칸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점령하기 위해 출병하여, 1374년/1375년에 체르케스 베크를 격파하고 사라이를 점령했다.[96] 그러나 이듬해 카간 베크에게 사라이를 빼앗겼다.[97] 1377년/1378년에 우루스 칸은 다시 사라이를 점령했으나, 토크타미시가 나타나 우루스 칸에게 도전했다.[97] 결국 우루스 칸의 킵차크 칸국 재통일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의 노력은 토크타미시에게 이어졌다.[97]

2. 6. 토크타미시의 킵차크 칸국 통일 (14세기 말)

토흐타미시는 오로스에게 처형된 토이 호자의 아들로, 오로스를 탈출하여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던 티무르에게 망명했다.[84] 티무르는 킵차크 초원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토흐타미시를 지원했고, 여러 차례의 전투 끝에 토흐타미시는 오로스를 격파했다. 오로스 사후, 아들 토크타키야가 지위를 계승했지만 재위 3개월 만에 요절했고, 먼 친척 템루 베크가 뒤를 이었다.[98] 템루 베크는 오로스 시대부터 활약한 일급 지휘관이었지만 술에 빠져 아침 늦게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자포자기적인 면이 있었고, 샤미의 《승리의 서》는 템루 베크가 싸우기 전부터 민심을 잃었고, 좌익 사람들은 토흐타미시의 승리를 바랐다고 전한다.[100] 여러 전투를 거쳐 토흐타미시는 마침내 템루 베크를 격파하고, 1378년/1379년에 시그나크에서 즉위하여 오르다 울루스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100]

1380년 크림 반도를 지배하는 마마이가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패배하자, 토흐타미시는 서쪽으로 출병하여 칼카 강 전투에서 마마이를 격파했다. 같은 해에 마마이의 세력(바투 울루스 = 청장)을 병합하여 베르디 베크 이후 20년 만에 조치 울루스의 재통일을 이루었다. 토흐타미시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승리한 모스크바 대공국을 모스크바 포위전에서 굴복시키고, 루스 제국의 예속 체제를 부활시켰다. 토흐타미시가 조치 울루스의 우익/좌익 통일을 달성한 것을, 《칭기즈 나마》는 "그는 오른손과 왼손의 관행을 폐지했다"고 표현한다.[101]

그러나 조치 울루스를 재통일하고 자신감을 얻은 토흐타미시는 자신을 지원해 온 티무르에게 의존하는 입장에 불만을 품고, 1386년에는 티무르의 세력권인 아제르바이잔 지방으로 진출했다. 토흐타미시가 티무르를 배신한 이유로, 《승리의 서》는 콩기라트부의 알리 베크, 실린부의 올루크-템루, 바아린부의 아크-부가 등 무장들이 티무르와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권고했지만, 우익 평정 후에 토흐타미시를 섬기게 된 맹구트부의 사람들이 티무르를 배신하도록 부추긴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02] 콩기라트 부족은 대대로 좌익 = 오르다 울루스에서 유력했던 부족이었고, 토흐타미시가 좌익/우익의 통일을 이루어 정권의 권력 구조가 크게 변화(기존 좌익계 세력이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잃고, 우익계 맹구트부가 대두)한 것이 토흐타미시-티무르 전쟁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보인다.[102] 1387년, 토흐타미시는 호라즘 지방의 수피 왕조 등을 끌어들여 티무르 왕조의 본거지 마 와라 알나흐르로 침공했다. 티무르의 치세 동안 본거지 마 와라 알나흐르가 공격을 받은 것은 이때뿐이었고, 정권 내부에서 다수의 이탈자가 발생한 점을 감안할 때, 토흐타미시의 중앙 아시아 침공은 티무르 왕조에게 최대의 위기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당시 무자파르 왕조에 원정 중이던 티무르는 급히 화해를 맺고 중앙 아시아로 "대반격"하여, 1391년 콘두르차 강 전투에서 토흐타미시 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 침공에는 실패했지만 토흐타미시의 세력은 아직 건재했고, 1394년 다시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아제르바이잔 지방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를 맞아 싸운 티무르 군은 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승세를 탄 킵차크 초원으로 진출한 티무르 군에 의해 사라이를 비롯한 조치 울루스의 여러 도시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103] 티무르에 의한 파괴와 약탈, 토흐타미시에 의한 재통일의 붕괴는 조치 울루스의 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103] 이처럼 토흐타미시에 의한 조치 울루스의 재통일 운동은 티무르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후 조치 울루스 전체를 지배하는 정권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2. 7. 오루스 가문의 재흥과 쇠퇴 (15세기)

티무르토흐타미시를 1395년-1396년에 패배시킨 후, 코일차크를 백장 칸국의 지도자로 임명했다.[12] 그러나 다른 사료에는 코일차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오히려 예디게가 옹립한 테무르 쿠트루크의 활동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 티무르의 코일차크 옹립은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104]

같은 시기, 조치 울루스 우익(원래 바투 울루스)에서는 테무르 쿠트루크(토흐타미시에게 패배한 테무르 베크의 아들) 등을 옹립하는 예디게와 토흐타미시의 자손들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106] 양측은 1419년 전투에서 모두 멸망했고, 토카 테무르 가문의 울루그 무함마드가 서쪽 바투 울루스의 주도권을 잡았다.[104] 한편, 동쪽에서는 코일차크의 아들 바라크가 한때 토흐타미시처럼 티무르 왕조 군주 울루그 베크의 지원을 요청했고, 1423년에는 모스크바 남쪽의 오도예프에 진출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107] 같은 해, 바라크는 울루그 무함마드를 격파하고 "부조(父祖)의 옥좌"에 즉위했다고 전해지지만, 울루그 무함마드의 세력은 여전히 서쪽에서 건재했다.[107] 1426년에는 시그나크 영유권을 두고 그전까지 우호 관계였던 울루그 베크와도 대립했지만, 바라크는 시그나크 근교 전투에서 격전 끝에 티무르 왕조 군대를 격파했다.[108]

1427년의 서한에는 조치 울루스의 정세가 기록되어 있는데, 데브레트 베르디가 크림 지역을, 울루그 무함마드가 사라이 일대를, 바라크가 "티무르의 땅에 인접한 땅"을 각각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티무르의 땅에 인접한 땅"이란 옛 오르다 울루스의 영역, 즉 실다리야 하류~카자흐 초원 일대를 말하며, 이때 바라크는 옛 오르다 울루스에 가까운 영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108] 그러나 바라크의 패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1428년에 마흐무드 오글란이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하며 그 세력은 와해되었다.[109]

하지만 바라크가 한때 몰락했던 토카 테무르계 오로스 가문을 재흥시킨 것은 훗날 카자흐 칸국 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109]

2. 8. 우즈베크 칸국과 카자흐 칸국의 성립 (15세기 중반)

바라크 칸이 죽은 후, 킵차크 초원에서는 시반 가문의 후손인 아불-하이르 칸이 세력을 확장하여 우즈베크 칸국을 세웠다.[110] 그러나 아불-하이르 칸 사후 우즈베크 칸국은 분열되었고, 그 일부를 이끌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아불-하이르의 손자)은 남하하여 마와라안나흐르를 정복하고 티무르 왕조를 멸망시켰다. 샤이바니 칸의 세력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으로 분열되어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원형이 되었다.

한편, 오르다 울루스를 일시적으로 통일했던 바라크의 아들 자니베크 칸과 그의 친족 기레이는 아불-하이르 칸을 피해 모굴리스탄으로 망명했다.[110] 당시 모굴리스탄 군주 에센 부카는 그들을 후대하여 추 지방과 코지 바슈 지방을 주었고, 이 땅에서 자니베크 칸 등은 아불-하이르 칸으로부터 도망쳐 온 자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111] 아불-하이르 칸 사후의 혼란 속에서 자립한 자니베크 칸 등의 세력은 일반적으로 카자흐 칸국의 성립으로 인식되고 있다.[112] 카자흐 칸국은 이르티시강 상류역에서 시르다리야강 하류역에 이르는, 과거 오르다 울루스와 거의 비슷한 영역을 지배했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으로 계승되었다.

3. 역대 칸

백장 칸국의 역대 칸은 다음과 같다.[3]

이름재위 기간
오르다 칸1226년~1280년
코추1280년~1302년
부얀1302년~1309년
사시부카1309년~1315년
일바산1315년~1320년
무바락 크와자1320년~1344년
침타이1344년~1374년
우루스 칸1374년~1376년
테무르 말리크1377년
토흐타미시1377년~1378년



오르다 칸의 후손들은 금장 칸국의 좌익을 통치했으며, "좌익의 공작" 또는 "좌수(左手)의 공작"이라고 불렸다.

3. 1. 오르다 가문 출신

오르다 칸은 조치의 장남이자 백장 칸국의 창시자이다.[3] 그의 후손들은 금장 칸국의 좌익을 통치했으며, "좌익의 공작" 또는 "좌수(左手)의 공작"이라고 불렸다.[3] 백장 칸국의 수도는 원래 발하슈 호에 있었지만, 나중에 카자흐스탄시르다리야강에 있는 시그나크로 옮겨졌다.[4]

오르다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비고
오르다 칸1226년~1280년백장 칸국의 창시자
코추1280년~1302년원나라일 칸국과 동맹
바얀1302년~1309년사촌 코벨렉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
사시부카1309년~1315년
일바산1315년~1320년
무바락 크와자1320년~1344년
침타이1344년~1374년
우루스 칸1374년~1376년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칸
테무르 말리크1377년
토흐타미시1377년~1378년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 통합



1280년부터 오르다의 후계자인 콘치 또는 쾨추는 원나라일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5] 마르코 폴로는 쾨추의 통치 시기 백장 칸국을 극도로 추운 지역으로 묘사하며, 주민들이 가축의 우유와 살을 먹고 평화롭게 산다고 기록했다.

1299년, 바얀은 카이두와 두와의 도움을 받은 그의 사촌 코벨렉에 의해 폐위되었으나,[7] 1304년까지 조상들의 땅 대부분을 다시 점령했다.

1375년, 우루스 칸은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 모두의 칸이 되었으며,[9] 1378년 그의 조카 토흐타미시가 두 칸국을 통합하여 금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1395-96년 토흐타미시가 패배한 후, 티무르는 쿠루이치크를 백장 칸국의 지도자로 임명했다.[12] 이후 조치의 아들들인 투카티무르, 시반 및 오르다의 가문들이 서로 합쳐져 우즈베크카자흐 칸국을 세웠다.

3. 2. 토카-테무르 가문 출신

에레젠은 백장 칸국의 칸으로 무바라크 호자의 아버지이자, 침바이의 할아버지이다.[8]

오로스 칸은 1375년 백장 칸국의 8번째 칸이 되었으며, 청장 칸국의 칸위에도 올랐다.[9] 그는 히즈르 가문의 구성원을 추방했다.[10]

토크타키야는 오로스 칸의 아들이다.

테무르 베크 칸은 백장 칸국의 칸이었다.

테무르 쿠틀루크 칸은 테무르 베크 칸의 아들이다.

토크타미쉬 칸은 오로스 칸의 조카로, 1378년에 티무르 말리크로부터 백장 칸국의 통제권을 빼앗았다.[11] 그는 청장 칸국의 통제권도 되찾아 두 칸국을 통합하여 금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잘랄 앗딘 칸은 토크타미쉬 칸의 아들이다.

볼라트 칸은 테무르 쿠틀루크 칸의 아들이다.

테무르 칸은 볼라트 칸의 아들이다.

샤디 베크 칸은 테무르 칸의 아들이다.

4. 참고: 백장 칸

다음은 일본어 위키백과의 "白帳ハン" 항목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사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무인사선』에 기록된 역대 백장 칸은 다음과 같다. 다만, 『무인사선』의 기술에는 혼란이 있으며, 계보에 대해서는 대부분 신뢰할 수 없고, '백장'도 실제로는 '청장'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이름비고
사시 부카노가이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바얀의 아들이거나 토카 테무르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엘레젠사시 부카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다른 계보 사료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무바라크 호자엘레젠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토카 테무르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친바이엘레젠의 아들이자 무바라크 호자의 동생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계보 사료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오로스친바이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토카 테무르 가문 출신(차남 울룬 테무르의 아들 아지키의 가계)으로 보인다.
토크타키야오로스의 아들.
테무르 베크오로스 칸의 아들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토카 테무르 가문 출신(넷째 아들 킨 테무르의 아들 노무칸의 가계)으로 보인다.
토크타미쉬토카 테무르 가문 출신(차남 울룬 테무르의 아들 살차의 가계).
테무르 쿠틀루크테무르 베크의 아들.
샤디 베크테무르 쿠틀루크의 사촌.
테무르테무르 쿠틀루크의 아들.
잘랄 앗딘토크타미쉬 칸의 아들.
울루 무함마드
체키레


참조

[1] 백과사전 Golden Horde 1966
[2] 서적 The Golden Horde and its Downfall
[3] 서적 Russia and the Mongol yoke
[4] 웹사이트 Kazakh Khanate http://www.ozturkler[...]
[5] 서적 The Mohammedan Dynasties
[6] 웹사이트 Marco Polo, Travels http://www.shsu.edu/[...]
[7]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8] 문서
[9] 간행물 History today
[10] 간행물 Asian and African studies
[11] 웹사이트 The struggle against the Khan Toqtamish http://www.geocities[...]
[12]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13] Harvnb
[14] Harvnb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Harvnb
[21] Harvnb
[22] Harvnb
[23] Harvnb
[24] Harvnb
[25] Harvnb
[26] Harvnb
[27] Harvnb
[28] Harvnb
[29] Harvnb
[30] Harvnb
[31] Harvnb
[32] Harvnb
[33] Harvnb
[34] Harvnb
[35] Harvnb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80] 서적
[81] 서적
[82] 서적
[83] 서적
[84] 서적
[85] 서적
[86] 서적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90] 서적
[91] 서적
[92] 서적
[93] 서적
[94] 서적
[95] 서적
[96] 서적
[97] 서적
[98] 서적
[99] 서적
[100] 서적
[101] 서적
[102] 서적
[103] 서적
[104] 서적
[105] 서적
[106] Harvnb
[107] Harvnb
[108] Harvnb
[109] Harvnb
[110] Harvnb
[111] Harvnb
[112] Harvnb
[113] Harvnb
[114] Harvnb
[115] Harvnb
[116] Harvnb
[117] Harvnb
[118] Harvnb
[119] Harvnb
[120] Harvnb
[121] Harvn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